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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역사와 실천

by 정강산 2019. 4. 14.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역사와 실천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전신은 문자주의 인터내셔널과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이다. 이들은 각각 문자주의 그룹(1946-), 코브라(Cobra; 1948-1951)에서 연원한 그룹들로서, 56년에 대표 모임을 갖고 57년에 SI를 결성하기 전까지는 독자적인 그룹들이었다. 이들은 초현실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서 수렴했는데, 이는 정치적으로는 각국의 공산당이 기꺼이 따랐던 소련 지도체제의 한계 때문이었고, 미학적으로는 반미학에서 출발했던 초현실주의의 전략이 말끔한 작업으로 정형화되는 경향의 한계 때문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전후 브르통에 의해 재통합되면서 보수적인 운동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때문에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할 포스터, 2012: 429; 이하로 본문의 기본적인 흐름은 󰡔1900년 이후의 미술사󰡕를 주로 참조했음을 밝힌다.)됐던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SI의 구성원들이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동시에 지적해야 할 것이다. 드보르만 하더라도 초현실주의자들의 잡지에 글을 투고하며 그들과 깊이 교류했고, 무의식에 대한 침잠과 기법의 고착화 이전까지의 초현실주의가 부르주아적 질서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한 바가 있음을 인정한다(오창룡, 2017: 104 참조).

 

SI50년대부터 시작된 전후 호황경제에 조응하는 소비사회로의 전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텔레비전과 극장, 각종 잡지, 광고 등의 편재를 통해 양적, 질적 측면에서 도약을 시작한 볼거리들은 점차 완성되어가는 부르주아 사회의 체계를 암시하는 듯했으며, 이제 아방가르드는 문화산업이 심화되고 난 뒤의 세계의 시각성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된 시각적 장에 대한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그것은 영국의 인디펜던트 그룹의 활동에서처럼 다소 관조적으로 이뤄지기도 했고, 리히텐슈타인과 워홀 등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팝아트에서처럼 낙관적이고도 도발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으나, 그들 모두 상황주의에서만큼 대자적 수준에서 구체적으로 상대되지는 않았다. 상황주의자들은 소비사회로의 진입이 인간 경험의 양태를 완전히 매개하는 결과를 야기했음을 알아차렸으며, 매개된 경험을 상대하기 위한 특유의 제안-전용, 표류, 일원적 도시주의, 심리지리학 등-을 내놓은 바 있다. 특히 기 드보르는 이러한 매개된 경험의 청사진을 스펙터클이라는 개념으로 명명하여, 새롭게 감각을 조직화 하는 자본주의의 변화를 독해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다소 추상수준이 높은 개념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혹은 부르주아)-자본주의 생산양식등의 도식을 매개로해서 설정되어온 마르크스주의의 주객 구분은 상황주의에 이르러 구경꾼-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모델에 근거한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었고, 이에 저항하는 방식 또한 집단적 계기보다는 개별 주체의 내부에서 가능한 감각적 계기로서 재서술 되었다(Ibid: 99 참조). 바로 이 때문에 드보르는 적잖은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도 높이 평가되는 편이며, 이후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만용에 가까운 시도를 했던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황주의 내부에는 정치적 집단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모순적인 계기 또한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하는데, 이는 그들이 표류와 전용 등의 반-도시주의적 실천의 한편으로 노동자 평의회의 전통을 고수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한편 코브라는 코펜하겐, 브뤼셀,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화가, 시인, 비평가들로 이루어진 그룹으로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추상표현주의 양자에 거리를 두고자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모임이었기에, 이들의 형식 또한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걸쳐있는 낙서와 같은 방식으로 외화 되었다. 이들은 잠깐 초현실주의와 공명했으나, 이내 초현실주의에 부재하는 집단성과 객관성을 이유로 그들과 결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집단적인 원리를 추구하면서 토템 형상과 신화적 주제, 그리고 기관지나 전시, 벽화 같은 공동 프로젝트를 강조”(할 포스터, 2012: 429)했던 것이다. 코브라는 51년에 해체되지만, 코브라에 몸담았던 아스게스 요른은 바우하우스의 인사들 몇몇과 교류한 바 있었고 그에 의해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가 54년 말에 설립된다. 이미지주의 바우하우스는 미술과 공학의 통합을 추구했던 바우하우스의 본래 모토와 조응하면서도 더욱 급진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산업적 재료에 대한 파악을 중시하면서도 이를 전적으로 비 기능주의적인 예술적 사용과 결부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들은 57년 문자주의 인터내셔널과 통합되기 전까지 약 2년간 활동을 유지했다.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의 전신이자 별도의 조직이었던 문자주의 그룹은 충격과 일탈을 주요 모티브로 삼았던 다다식의 제스쳐에 깊이 공명했으나, 그들보다 더 극단적으로 언어와 이미지를 해체시키고자 했다. 이들은 언어를 온전한 의미작용이 불가능하도록 배치한 실험적 시를 썼으며, 일관된 이미지로 독해 불가능한 콜라주 작업을 했다. 기호학적 파편화를 가속화시키고 있었던 그들의 기획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언급한 바 있는 지표로의 전환’, 혹은 부클로가 말한 알레고리적 실천을 이미 체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할 포스터, 1993: 243, 246-253), 여기서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지시 관계를 벗어나 그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듯 순수한 문자로서 정립되고, 또한 상징적 코드화의 작용으로부터 이탈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문자주의 그룹의 작업들은 징후적인데, 어쩌면 드보르가 이에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단순히 기호의 파편화를 재생산하는 행위가 효과적으로 체제의 논리를 따른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자주의 그룹에 가담했던 기 드보르는 그들의 기획을 보다 급진적으로 다듬어 내고 싶었고, 52년 질 울만(Gil Wolman)과 함께 독자적으로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을 설립하여 상황의 구축과 일상생활 비판이라는 개념으로 목표를 명확히 했다. ‘여가에 대한 전투라는 그들의 모티프는 소비사회의 일상적 경험들이 점차 그 자체 전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투쟁을 새로운 국면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SI의 기본적인 이념들이 문자주의 인터내셔널에서부터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이라는 저널로 시작된 SI는 설립된 57년부터 62년까지는 예술적 실천에, 62년부터 72년까지는 정치적 실천에 집중했는데, 이 각각의 시기는 SI 내부의 헤게모니 투쟁에 의해 규정되었다. 드보르를 위시한 SI 파리 지부는 상황주의 미술이 정치와 분리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스칸디나비아와 독일, 네덜란드 지부의 미술가 몇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할 포스터, 2012: 431)으며 요르겐 나슈는 이에 대항하여 새로운 분파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분리된 시기는 SI의 전기, 후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략 전기가 표류, 일원적 도시주의, 전용, 심리지리학 등 자본주의에 대한 미학적 비판을 정교화하는 과정이었다면, 후기는 일종의 소비에트 모델로서의 노동자 평의회에 대한 실천적 강조가 대두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오창룡, 2017: 101 참조). 이렇듯, 예술과 정치의 경계에 관한 구성원 간의 동요와 대립을 통해 이뤄졌던 설립 직후부터의 제명과 숙청, 탈당과 분파형성은 SI의 원동력이었다.

 

62년 이후 보다 정치적으로 선회하게 된 SI가 프랑스 사회에 미친 효과는 지대했다. 66년에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학생 시위에서 배포한 󰡔학생 생활의 비참함에 대하여; 비참한 학생생활󰡕67년 드보르가 발표한 󰡔스펙터클의 사회󰡕685월의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이 봉기에 열렬히 개입했다. 물론 SI68이후 급격히 쇠퇴한 프랑스 사회운동(사실 68의 분출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적 변혁운동은 크게 개입하지 못하고 있었다)과 함께 72년 해체되지만, 󰡔스펙터클의 사회󰡕로 대표되는 SI의 잔향은 자본주의 문화 분석 및 비판과 특정한 예술적 실천에 지속적인 영감이 되어주었다.

 

일원적 도시주의, 표류, 심리지리학, 우회 등의 주요개념들은 57년 이전에 발간된 <포틀래치><벌거벗은 입술>등의 저널에서 이미 소개”(오창룡, 2017: 102)된 바 있지만, SI의 설립 이후로 이들은 보다 정교한 수준에서 실험되었다. 이들 기획의 전반적인 구상은 자본주의적 공간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에 대한 미학적 비판, 부르주아 사회의 경험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으로, 이는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설계하는 도시주의를 상대하기 위한 실천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일원적 도시주의(urbanisme unitaire)에서 ‘unitaire’단일한, 통일적인정도의 의미를 가진 불어로서, 분할되고 절단된 도시공간의 파편화에 대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는 파편화된 도시적 경험의 통일적인 재구성을 지향하는 SI의 총론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핵심은 분리된 경험을 유지시키는 도시의 합리성을 파열시키고 총체적인 경험이 가능해지는 공간에 대한 추구를 가리킨다. 요컨대 일원적 도시주의란 실험적 행위와 역동적 관계 속에서 환경을 통합적으로 구성하기 위한 예술과 기술의 결합”(할포스터, 2012: 432)에의 추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파편화와 총체화 즉 비유기적 예술작품과 유기적 예술작품 간의 미학적 대립을 둘러싼 아도르노-루카치의 상이한 노선에 대한 일종의 응답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말하자면 일원적 도시주의는 총체성을 강조하되, 그것을 루카치의 도식에서처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다루기보다 하나의 가능성이자 목표로서 설정한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상황주의자들은 현대의 도시를 분리된 공간들의 집합으로 간주했는데, 이에 따르면 이 분리된 구역들은 이동 구간을 연결하는 도로, 무빙워크,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등에 의해 단편적으로 매개되어 있을 뿐이다. 이곳은 추상화된 공간, 즉 비장소로서, 이처럼 모든 곳은 이제 점차 합리적 목적에 따라 재편되었기에, 공간을 그대로 경험하기란 불가능해졌다는 것이다(오창룡, 2017: 103 참조). 표류는 이러한 공간의 합리성에 반하여 신체를 비의도적인 흐름에 내맡기는 방법론으로서, 우발적인 경로를 통해 말 그대로 도시의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이 차원에서 주체의 경험적 계기가 강조되는데, 실제로 SI의 구성원들은 이를 직접 수행하며 표류의 사례들을 축적하였다. 표류의 과정에서 식별되는 우연성에 대한 탐구는 얼마간 초현실주의로부터 기인한 것으로, 자동기술법, 콜라주, 프로타주, 데칼코마니, 데페이즈망 등의 초현실주의의 기법을 떠올려 볼 때, 표류라는 실천은 초현실주의로부터 거리를 두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그다지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측면이 있다. 이와 비슷하게, 심리지리학은 소여의 도시지리에 대한 체험과 심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심리지리학의 대표적인 사례로 셈해지곤 하는 57년 제작된 드보르의 <벌거벗은 도시>파리의 열아홉 개 구역을 가상의 여정을 따라 재배열한”(할 포스터, 2012: 432) 것인데, 여기서 지리적 도표로 제시된 파리의 각 구역은 주체의 심상에 따라 임의로 배치되며, 소여의 지리적 배열은 새로운 방식으로 탐구된다. 전용은 기존의 공간, 이미지, 텍스트 등이 향하는 방향을 전환시키는 행위로서, 대상이 처한 기존의 맥락으로부터 그것을 떼어내어 재맥락화 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주의의 전용이 독특한 것은, 전용을 둘러싼 반-예술과 예술 혹은 초현실주의 및 다다 대 팝아트 간의 대립에서 제 3의 공간을 열어젖혔다는 점이다. 일원적 도시주의라는 모토 하에서, 그들의 전용적 실천은 예술이지만 정치이기도 하며, 또한 둘 다 아니기도 하다. ‘오직 매체에 대한 상황주의적 사용이 존재할 뿐’(Ibid: 433 참조)이라는 상황주의의 선언에서 보이듯, 그들은 초현실주의 및 다다와 같이 반 예술을 지향함으로써 전용을 통해 예술적 약호를 해체하는 것과, 팝아트와 같이 (유사)예술을 지향함으로써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예술로서 재약호화하는 작업의 경계에서 탈코드화를 수행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로는 우선 피노 갈리지오의 산업회화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르네 드루앵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색칠한 캔버스 두루마리로 갤러리 전체를 덮어 버렸다. 그리고 여기에 전구와 거울, 소리와 냄새를 추가해 전체적인 환경 작업을 만들어 냈다.”(Ibid) 여기서 캔버스는 도색 장치와 스프레이 총으로 된 가짜 조립라인에서 제작되었으며, “미터 단위로 잘라 판매할 수도 있었”(Ibid)는데, 이는 포드주의적 산업생산에 대한 전용을 통해 컨베이어벨트를 캔버스 롤과 유비함으로써 예술과 산업생산 양자를 상징적으로 흩뜨리는 제스쳐였다. 요른의 개작시리즈 또한 마찬가지다. 요른은 키치로 생산된 그림들(초기에는 주로 도시풍경을 그린 그림들, 이후에는 주로 초상화)을 구매하여 그 위에 원시주의적 형상과 추상적인 붓터치”(할 포스터, 2012: 435)를 가미하여 말 그대로 개작했다. 이는 그것이 생산된 맥락을 탈구시킴으로써 그들을 아방가르드적인 배치 속에 집어넣는 한편, 키치로 전락한 아방가르드를 조소하는 양가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할 포스터 외 저, 󰡔1900년 이후의 미술사󰡕, 배수희 외 역, 세미콜론, 2012.

 

오창룡,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도시비판과 그 대안: ‘일원적 도시론일반화된 자주관리를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 연구143, 2017.

 

할 포스터, “거친기호: 70년대 미술에서 나타난 기호의 분열”, 조정훈 역, 앤드류 로스 외 저, 󰡔포스트모던의 문화. 정치󰡕, 배병인 외 역, 민글,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