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udy

Fredric Jameson_In the destructive element immerse(국역: 파괴적 요소에 빠져라: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와 문화혁명_보이는 것의 날인)

by 정강산 2019. 11. 15.

(발제문의 번역은 본문의 번역과 많이 다릅니다.)

제임슨은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가 신화적인 독일 영웅들의 마지막 앞잡이가 될 수 있도록”(135) 아마 발명되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러한 발명은 지버베르크 스스로가 󰡔히틀러: 독일로부터의 영화[각주:1]󰡕(이하 히틀러’)에서 성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동기는 다음과 같다: 나치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여러 이데올로기 형식들을 독일적인 것(“독일 민족이 지닌 특징의 증거로서의 스테레오타입”(Ibid))’으로서 소화해냈으며, 그 결과 음악, 영화, 철학 등 나치에 의해 오염되고 전유된 문화형식들을 만들어 냈다. 이런 상황에서 전후의 독일 역사에 대한 반성은 단순히 히틀러와 나치 잔당들에 대한 지엽적인 비판이 아니라, 독일의 문화, 심성, 예술, 철학 등 전 영역에 걸쳐 발본적으로 이뤄져야 했다.

따라서 나치독일의 몰락 이후, 명백해진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1. 고급 문화의 역사는 전반적으로 독일 사회사에 대해 대단히 신뢰할 만한 가이드가 아니었다. 2. 이러한 스테레오타립의 정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더 의미가 있을 수 있는 많은 것들(표현주의, 바이마르, 브레히트)을 배제하고 있다. 3. 독일의 경제기적과 나토, 사회민주주의는 아돌프 히틀러 이전 시대의 중앙 유럽의 농촌이나 도시와는 매우 다른 장소를 구성했다.”(135-136) 여기서 각각은 독일 고급문화가 가진 자정능력의 부재에 대한 인식, 독일적 정전 외부에서 가능했던 여러 비판적 형식들에 대한 주목, 패전 이후의 사회구조적 변동에 대한 감지 등을 의미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독일인들은 집단적인 자기 분석”(136)을 시작했으며, 이는 예루살렘에서 1961년 이뤄졌던 나치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 과거의 영화로부터의 단절을 선언한 영화인들의 1962년 오버하우젠 결의, 196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있었던 아우슈비츠에 대한 재판 등의 사회정치적 사건들과 맞물려 반권위주의적 운동문화생산의 혁신”(Ibid)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이 영화에서 뚜렷한 결실을 맺었다는 제임슨의 지적대로, 나치에 의해 적극적으로 전유되었던 영화는 나치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한 1930-1940년대생 감독들에게 보다 근본적인 과제를 던져주었고, 결국 뉴 저먼 시네마라는 일련의 흐름으로 나타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대략적으로 정리되었던 입장은, 1. 바그너를 비롯한 여타 독일의 문화적 정전들은 이러저러한 주의(바그너주의, 니체주의 등등)로서 ()독일의 대표자이기에, 이것을 비판해야한다는 주장. 2. 나치가 합리적이지 않았다며 그들을 예외적인 악으로 치부할 경우, 이는 그들을 발본적으로 비판하는 게 될 수 없고, 외려 나치적 충동을 강화한다는 주장 등이다. 제임슨에 따르면, 지버베르크의 󰡔히틀러󰡕는 이러한 구도와 공명하거나 경합하는 하나의 응답이다. “[지버베르크가]좌파에 대한(...)적들의 가치들과 목표들을 일부 공유하게 되며, “지버베르크의 미학은 브레히트와 바그너의 종합인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소격효과로 대표되는 계몽적 입장과 종합예술로 대표되는 고전적(비합리적)입장의 종합이고, 나아가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여타 정전들의 비합리성을 지적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학적으로는 바그너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지버베르크의 편력을 감안할 때, 그로부터 짙은 바그너적 성향을 읽어내는 제임슨의 주장은 과도하지 않다. 또한 그의 작업은 언뜻 통속적인 문화 생산물 혹은 B급 영화의 외연을 띠는데, 제임슨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지버베르크는]가장 선진적인 테크닉들을(...) 거장답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홈무비로 귀환하는 듯함으로써 미래의 영화 예술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조직하며, “(...)비전문 배우들, 연극적인 타블로, 보드빌 유형의 음악 등 기본적으로 정적이고 단순히 함께 묶어놓은 듯한 저예산의 볼거리”(137)를 만들어 낸다고 말이다. 그에 따르면 지버베르크의 전략은 (예컨대 고다르와 같은)여타의 전략들에 비해 조악하지만 그 나름의 근거가 있는 것인데, 요컨대 과거 독일 문화에 호소하는 식의 시대착오로 나타나지 않는 한, 수공예적 성격이 짙은 지버베르크의 방법론은 관료주의적 깔끔함에 저항하는 탈물화의 형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버베르크는 체계적인 사회학적 비평을 통해, 합리주의적으로 히틀러를 청산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그것은 비판되어야할 비합리주의의 거울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는 독일의 역사를 정치하게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블로흐로부터 유토피아적 충동의 개념을 빌려와 이를 자신의 미학으로 다듬어 내고자 했다.

이러한 단서들을 인식한 상황에서, 제임슨은 우리가 지버베르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할 수 있을지 질문하고, 󰡔히틀러󰡕의 미학적 특징은 그 나름의 독특한 시네마 베리테의 인터뷰 방법론에서 나오는 즉흥효과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시네마 베리테는 일상 경험의 신선함과 직접성(immediacy)으로 향하는 돌파구로서 주체의 자발성을 실체화했지만, 지버베르크에게 자발성의 환영이란 기존의 형식들의 구성체로서 드러난다”(140)는 것이다. 예컨대 고다르의 작업들이 인터뷰의 외부, 즉 인터뷰에서 말해지지 않는 것(제작자의 시점에서부터 인터뷰어의 시점과, 그들이 행사하는 헤게모니적 조작)들을 드러낸다면, 지버베르크의 작업들은 인터뷰어의 시점을 철저하게 사건의 배경에 자리하도록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종의 강한 조작을 드러낸다.[각주:2]  한편 지버베르크의 인터뷰에서 선택되는 배경은, 도회적인 맥락에서 장소 없음을 암시하는 단색조의 벽”(141)을 택하는 고다르와는 달리, “주택이나 대저택”(Ibid)이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항상 인터뷰의 배경이 갖는 역사적 지표성이라는 것이 있기에, 인터뷰의 전개는 그런 과거의 유물; 유산속에서 이뤄지다가 가이드 관광과 같은 식으로 넘어가는데, 제임슨에 따르면 이는 대상 공간들을 고다르와는 다른 방식으로 탈신비화하는 시도이다. 이렇게 과거의 무게를 체화한 물질적 지표로서의 배경이 관광지와 같은 대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역사의 무게를 지닌 건물들은 궁극적으로 파괴되고”, “신비한 장소없음이 출현하는 것이다.”(142-143) 다시 말해 이는 일종의 “‘소격 효과의 형식이다.”(143)

제임슨에 따르면, 지버베르크가 강조하는 영화제작자의 투명성’, 즉 객관성을 위해 인터뷰어의 존재를 지우는 식의 제스쳐는 외려 지극히 미학적인 기획이자 조작이다. 이 효과는 비니프레드 바그너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부터 󰡔히틀러󰡕에까지 이어지는 것인데, “󰡔히틀러󰡕의 자기만족과, 그것이 스스로 허용하는 긴 탐닉을 분명히 하는 것은 아마도 다름 아닌(very) 다큐멘터리 작가의 자기 소멸의 임무에 대한 이러한 개념일 것”(144)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만족은 작가의 자족적인(self serving) 신성화의 결과이고, 전반적인 사회적 삶에서의 예술의 기능에 대한 과잉강조의 결과이다”(Ibid). 다시 말해 이것은 예술의 자족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어떤 종류의 편향이다. 작가의 주관이 반영되느냐, 혹은 그렇지 않느냐에 골몰하는 것은 전적으로 근대(혹은 자본주의)에 특정적인 기획이기 때문이다. 예술이 특정한 사회적 기능속에 유기적으로 참여하던 전근대에서는 (주관적)반영의 문제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반영이라는 미학적 범주의 성립 조건은 예술과 사회의 분리인 것이다(이를 달리 표현하면 재현과 실재의 분리에 대한 인식이며, ‘물화이다). 제임슨은 이것이 철학에서도 발생하는 문제라고 간주한다. 이에 따르면 직업 철학 등의 담론에서 일어난 위기로 인해 취해진 형식들의 하나는 바로 직업 철학자 자신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판타지 이미지를 중층 생산하는 것”(145)이다. 이 연장에서 노동 계급의 정당을 지원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 참여는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좀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반응”(Ibid)인데, 이는 결국 어떻게 철학의 사회적 기능; 역할을 회복할 것인가(물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충동은, 결국 시장체제의 역동성과 우선성”(Ibid)에 의한 효과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요지다. 대중음악에서도 이러한 충동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음악인의 역할이 과잉 표상되며 어떤 신화적인 수준으로까지 격상되는 것은 곧 사회적 기능역할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은 음악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현상이 그 나름의 필연적인 역사적 조건들의 표지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직접적으로 우상을 만들고자 하는 시대착오적인 전제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지적 미학적 파산의 신호로 간주한다.

그리고 지버베르크의 󰡔히틀러󰡕 또한 이러한 딜레마를 그대로 답습한다. ‘영화를 통해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히틀러를 비판할 수 있다는 지버베르크의 테제는 영화를 다시금 신화로 만드는데까지 나아간다. 그가 신화적 이미지를 펼쳐놓음으로써 향하는 곳은 결국 (시대착오적으로)영화를 전일적인 매체로 격상시키는 작업이다. 이 과정에서 원형적인 영화 스튜디오 블랙 마리아는 성배”(147)가 되며, 이는 결국 헤겔식의 절대 정신을 향한 충동, 즉 그러한 장소가 있다면 예술적 재현의 매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파악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장소와 역사 세계에 대한 자의식을 갈망하는 것이다.”(Ibid) 그러나 그러한 귀결은 한편으로 이해할만한 것인데, 왜냐하면 나치에 동원되었던 과거의 영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형이상학적인 지점까지도 간취할 수 있는, ‘전체로서의 영화를 상정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제임슨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전 지구적 체계로서 자본주의라는 통일체(the unity)에 대한 이해가 (...)구조적으로 막혀 있는 세계에서는 총체화의 문제가 분명히 결정적인 것(a crucial one)이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중요한 관심을 넘어 대담한 제안을 한다. 영화 제작자뿐만 아니라 히틀러도 탁월한 예언자이자 성배의 수호자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이다.”(Ibid) 다시 말해, 이미 영화는 전체였고, 히틀러도 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히틀러 자신이 2차 세계 대전의 감독이고, 전쟁은 각국의 병사들이 배우로서 만들어내는 하나의 광경[각주:3]이라는 지버베르크의 제안에서 특징적인 것은, 여기엔 실재와 재현 사이의 어떤 간극도 없다는 것인데, 이는 영화를 모종의 전체로서 상정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주장이다. 제임슨은 이때 지버베르크의 의도는 블로흐의 유토피아론을 경유하여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블로흐 유토피아론의 핵심을 간단히 말하자면, 집단성에 대한 희구 자체에 어떤 자본주의의 분리경향을 극복하려는 내적 동기가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블로흐에게는 허무주의적이든 건설적이든 모든 열정들은 변형된 미래를 향한 기본적인 충동을 구현한다.”(149) 그리고 그것은 항상적인 폭력 속에 둘러 싸여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이 충동을 잘 벼려내는 것이다. “파괴적 요소에 빠져라는 표현으로 연장될 수 있는 그의 테제는 결국 물화를 전면으로 거부하는, 집단적 삶과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호소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루드비히: 총각왕을 위한 장송곡󰡕(1972)󰡔칼 마이󰡕(1974)의 관계 속에서 관철되는 원칙이기도 하다. 바그너를 지원한, 고전문화의 후원자로서의 귀족적 군상(루드비히)과 대중문화 출현의 기점으로서 19세기 후반 독일식 서부극을 완성한 칼 마이 양자에 대한 시차적 주목은, “문화와 신생 대중 문화가 서로 분리되어 겉보기에는 자율적인 구조와 언어인 듯한 것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던 순간에 대한 전략적 고립”(152)인데, “문화의 전개에서 이러한 극적인 순간은 단절, 변증법적 비약과 자본의 변화를 표시하며, 하부구조와 제도의 수준에서는 분명히 독점형태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표시한다.”(152) 말하자면 루드비히 2세에서 칼 마이로의 전환은, 대형화된 출판업에서부터, 부르주아 계급의 헤게모니, 대중의 등장 등의 변화를 표지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순간은 침투 당하거나 폐지 당하는 순간에 갑자기 느껴지는 지구상의 마지막 암흑의 장소들””에 대한 환유이다.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분명해진다: “(...)칼 마이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판타지들의 실제 장소를 많이 여행하면서 자신의 낙원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럼으로써 마이 자신이 좌절하면서 그랬던 것처럼 궁극적인 실패를 알게 된다. (...) 칼 마이는 자신의 모든 문제와 적들을 서부의 황무지와 중국까지 뻗치는 동양의 모험 형상으로 바꾸어 내었다. (...)전형적인 독일 방식으로 그릇된 방향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찾는 사람은 스스로 만든 연옥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고자 쉬지 않고 추구한다. (...) 여기서 우리는 불행이 스스로와 다른 이들의 해방을 여과하고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153; 지버베르크) , 지버베르크는, “신생 대중 문화의 판타지들을 전적인 집단성에 대한 무의식적 추구의 진정한 형식으로 다시 쓰”(Ibid)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버베르크의 이미지들의 독창성은, 그의 정치적 기획, 독일인의 무의식에 대한 정신분석 및 퇴마시도와 관련하여, 역사적 참조점 너머로 나아간다. 초현실주의 미학은 지루하고 합리화된 일상 생활로부터 즉각적이고 묵시록적인 해방을 목표로 삼았고, 벤야민 식의 형상은 애도와 우울증의 잔재와 흔적들을 보여주는 반면 그러한 재료를 통한 활발한 작용은 아니었기 때문에, 초현실주의적 이미지, 가능한 멀리 떨어져 있고 관련되지 않은 두 현실들을 강제로 결합시키는 것과 죽은 유적들의 불연속적인 몽타주로서 벤야민적인 알레고리는 각각 나름대로 지버베르크의 극적 정경(tableau)의 치료적인 기능을 밝히지 않고도 그것이 지닌 이중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155) “그러한 방법은 정치적 무의식의 모든 전선(wires)들을 강제로 단락(short circuiting)시키는 것, 다시 말해 침전된 집단적 판타지와 이데올로기적 재현의 내용들을 제거하려는 시도이다.”(155-156)[각주:4]

 

(이하 집중력 상실. 자야하는데; 중언부언 발췌만 하겠습니다)

 

지버베르크의 치료의 힘은 그의 전제의 진실성에 기대고 있는데, 이는 고급문화(바그너, 루드비히의 성들), 대중적인, 젊은이들의 독서(popular and adolescent reading)(칼 마이), 프티부르주아적인 정치적 가치들과 충동들(히틀러, 나치즘)의 영역들이 집단적 정신 속에서는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분리되어, 이것들의 개념적 충돌과 콜라주의 이종성 속에서 다시 엮는 작업은 시스템 전체를 하늘 높이 날릴 것이기 때문이다.”(156)

 

이 시점에서 지버베르크와 고다르의 각기 다른 문화혁명들을 다시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보았듯이 두 사람은 문화적 재현들을 탈물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의 근본적인 차이는 예술의 진실내용이라고 불리는 것, 즉 진실 혹은 인식론적 가치를 갖는 예술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포스트모더니즘과 고전적인 모더니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고전 모더니즘은 여전히 종교가 비워낸 장소와 기능을 요구하고 있고 예술 작품을 통해 작품의 진정한 비전이 내재적으로 표현된다는 신념이 울리고 있다.”(157-158)

 

고전 모더니즘을 세속적인 종교의 대체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재현의 문제에 대한 모더니즘의 정식화가 재현을 형상화로서 정의하는 종교적 용법에서 빌려질 수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다. 이때 형상화란 문자와 정신의 변증법으로서, 그게 아니라면 표현할 수 없는 진실들을 육화하고 표현하고 전달하는 그림-언어Vorstellung’[각주:5]이다.”(158)

 

“(다른 생산양식 속에서 일어난)우상 파괴주의는 재현에 대한 오늘날의 비판의 초기 버전이다.”(159)

 

“(...)모더니즘의 위기는 따라서 로렌스가 결국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즉 세상의 진실의 최종적인 형상화의 성취가 단지 예술 언어들 가운데 하나, 현란한 도서관 전체에서 선반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작업에 불과할 뿐이라는 점이 갑자기 분명해지는 때이다. 따라서 문화 지식인들의 수치와 죄책감, ‘예술의 종말이라는 헤겔식의 목표에 대한 갱신된 소구, 즉각적인 정치적 활동을 위해 문화를 모두 폐기하는 것이 일어났다.”(160)

 

모더니즘 미학은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고 단지 표현을 할 수 있을 뿐인 유기적 공동체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루드비히 2세는 달아나는 신기루, 즉 구체적인 역사적 가능성에 대한 시각적 환영의 이름이다. 그는 철학자-왕으로서, 독특하고 불안정한 사회적, 정치적 상황에서 비롯된 정치 권력 덕분에 잠시동안 유기적 공동체라는 약속을 제공한다. 나중에는 나치즘이 똑같은 약속을 하게 된다.”(161-162)

 

가장 위대한 모더니즘 작품들은 일종의 기적적인 정체 상태에, 문학이라는 것 자체의 문턱;입구;시작점(threshold), 작품들을 [제도화된: 제임슨]기호 체계로서 신성화하는 것에 의해 삶의 밀도가 파괴되는 일 없이 삶의 밀도가 삶의 밀도가 주어지고 발전되는 선구적인 상태에 가능한 만큼 남아있다.”(162; 바르트)

 

형상화와 우상 파괴주의의 변증법에 대한 이 현대적인 통찰에서는 형상 체계의 궁극적인 물화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불가피성이야말로 적어도 형상화의 구체계들(...)의 파괴와 새로운 체계를 고정시키고 제도화하는 것 사이의 이행의 순간에 관한 약속을 제공한다. 오히려 다른 바그너식 해법은 임시적인 미학적 진정성의 이러한 가능성에 대한 프로토타입이자 동시에 구체적 실례로서 간주될 수 있다. 바이러이트는 모더니즘의 딜레마에 대한 사회적 해결을 상상적으로 투사한 것이었다.”(162-163)

 

그것들 자체만이 아니라 다른 이미지들로 대체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비영속적인 것으로서 재현된 이러한 예들은 따라서 그들 자신에 대한 관성(inertia)을 발전시키고 재현에 대한 비판의 운반체가 되며 고다르 영화들에 특징적인많은 재현들로 변한다.”(164)

 

지버베르크의 생각은 독일의 불행이 어느정도 분명하고 역사적으로 독특하며, 최근 독일사를 특징짓는 정치적 저개발과 급격한 현대화의 특수한 조합을 설명함으로써 방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서독을 지배하는 민병대라는 상대적으로 여전히 보수적인 계급의 결집력 속에서도, 심지어 과거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없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바그너와 칼 마이, 심지어 히틀러에 대한 집단적 재현들이 단지 (한스 위르겐 지버베르크와 다른 이들에 의해 영속되고 재발명된) 미디어의 구성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누그러지지 않는 의심이 존재한다.”(166)

 

그의 방법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들이 어느 정도 계속해서 현실 세계를 취해야하고 지버베르크 영화에 등장하는 히틀러의 괴뢰들과 다른 나치 주제들이 참조적으로 남아있어야 하며, 역사적인 현실에 대한 암시와 지시로서 관련을 보존하고 있어야 한다. 이는 이와 같은 영화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진리내용의 궁극적인 보증이다. 사이코드라마가 느슨해져서 순전한 연극과 절대적인 허구가 된다면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재료들로 행하는, 즉 실재의 이러저러한 형식들에 저항하는 치료적 놀이(play)로 이해되어야만 한다.”(166)

 

명백히, 그 주제의 비허구적 성격은 이러한 측면에서 보장되지 않으며, 단지 그 사실이 실제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기술, 성문화된 문서 보관소 속에서 구성되는 역사의 텍스트적인성격에 대한 성찰도 아니다.”(166-167)

 

이러한 관점에서 문제는 지버베르크를 특정한 모더니즘 언어에 대한 지시(designation), 즉 독특한 모더니즘적 기호 체계로 이해하는데 있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이들 영화들을 적절하게 독해하는 것은, 전환의 문제를, 지버베르크의 세계를, 그것을 특징짓는 주제와 강박을, 그것을 형상언어로 구성하는- 되풀이되는 상징들과 모티프들을 학습하는 문제인 것이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지버베르크가 맞붙고자 하는 현실들, 바그너, 힘믈러(Himmler), 히틀러, 비스마르크와 같은 실제 역사적 배우들의 이름에 의해 표시되는 현실들은, 예술가가 성공한다면 단지 제도화된 기호 체계로서 공적인 것이 되는- 사적언어로 쓰여진 많은 개인적 기호들로 변형된다는 것이다.”(168)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에릭 에릭슨이 의미한대로 그의 영화들이 갑자기 그것을 의미하기시작하면, 즉 뭔가 근본적인 일이 우리의 집단적인 재현에, 역사 자체에 대한 우리의 거대서사와 환상들에 일어나기 시작하면, 어떤 것이 그 과정에서 더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가, 주체인가 대상인가 관객인가 영화인가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러한 작품들을 정치적 예술 혹은 그냥 예술로 받아들이는 자유를 누리는 관람 주체인 듯하다.”(168)

 

모든 정치적 예술에 대해서도, 브레히트에 대해서도 우리가 똑같이 말할 수 있음이 보여질 것이다. (...)그러나 브레히트의 이상적인 연극대중은 집단적이고 협력적인 반응을 약속하는데, 그러한 반응은 영화관의 사유화된 관람에서는 가능성이 적고, 심지어 지버베르크가 상상했던 아방가르드 영화를 위한 지역적 바이러이트에서도 그러하다.”(169)

 

이 모든 주제들을 정확하게 요약한 지버베르크의 󰡔히틀러󰡕가 너무 길고 너무 말이 많지 않았다면, 그러한 광신자들에게 컬트 영화가 되어서, ‘구세의 비판에게는 슬프고 모호한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실로, 아마도 이것은 지시적인 것(the referential)을 살아 있게 하는 절박한 시도를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는 어떤 상상(an Imaginary)인지도 모른다.”(169)

 

 

  1. 이는 독일어 제목을 직역한 것이고, 미국에는 우리들의 히틀러(Our Hitler)”라는 제목에 동일한 부제로 소개 되었다. 제임슨 역시 본문에서 미국식 제목을 따라 “Our Hitler”로 적시하고 있지만, 번역본에는 <히틀러>로 통일되어 있다. [본문으로]
  2. 또한 제임슨은 도래할 주체들에게 상이하게 투사되는 과제의 측면에서도 고다르와 지버베르크의 비교점을 찾는다. 󰡔히틀러󰡕에서 구 독일의 장난감을 들고 다니는 지버베르크의 딸은 “신화적인 후세”이자 “독일의 미래” 혹은 새로운 인간이며, 󰡔프랑스/여행/우회/둘/아이들󰡕(1978)에서 질문을 받는 학생들은 대답 없는 미지의 “공중”이다. [본문으로]
  3. 이를 뒷받침할 역사적 증거는 적지 않다. 종전 직전에 괴벨스가 병사들을 불러 그들의 상황을 영화에 비유하며 장병들을 고무시켰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본문으로]
  4. 이어 나오는 156페이지 본문에 등장하는 악의 불성실은 오역으로, “자기기만(mauvaise foi)”이 옳다. 사르트르적 맥락에서 자기기만은, 자기 자신을 즉자존재와 동일시하려는 유혹을 의미한다. mauvaise는 나쁜; 불완전한; 악의있는 등을, foi는 믿음, 신뢰, 신앙 등을 의미하는 불어이다. 이데올로기는 분할을 만들며, 이러한 분할에 그대로 머무는 것은 자기기만이라는 본문의 구절은 실존주의적 문제의식에서도 인간존재의 앙가주망적 계기를 위해, 기존의 재현 내용을 단락시키는 것이 유효함을 얘기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5. Vorstellung: “a mental image or idea produced by prior perception of an object, as in memory or imagination, rather than by actual perception.” 이는 여기선 표상과 가까운 의미로 쓰였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