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udy

레디메이드에서 아바타까지: 데이비드 조슬릿의 범주들에 관하여

by 정강산 2019. 12. 15.

󰡔레디메이드에서 아바타까지: 데이비드 조슬릿의 범주들에 관하여󰡕

 

 

 데이비드 조슬릿은 1900년도 이후의 미술사2010b에서 아바타라는 모델을 제시하며, 그것을 역사적 레디메이드의 내적 귀결로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레디메이드를 지탱해 온 근거를 분류하며 논의를 전개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레디메이드의 범주는 대략 3가지 측면에서 정당화되어왔는데, 그 첫 번째 측면은 미술가의 호명으로서, 뒤샹 이후에 열린 공간이 여기에 해당된다. 자전거 바퀴든 물감이든, 그들은 하나의 텍스트 혹은 질료라는 점에서 동일하며, 따라서 본질적인 것은 작가의 호명 행위 자체가 된다. 두 번째 측면은 상징언어로서의 상품을 이미 풍부한 의미를 내재하고 있는 기호로 간주하는 것이다. 라우센버그와 워홀의 작업에서 드러나듯, 코카콜라 상표와 같은 상품의 기표는 전후 호경기에 맞춰 발달한 광고기법과 소비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이미 그 자체로 변화된 미국의 시지각적 장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측면은 이미 만들어진(ready made)’이라는 그 문자그대로의 맥락에서 인간 레디메이드를 전제할 수 있다는 데에 착안하는데, 코드화된 젠더의 질서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즉 특정한 재현·기호의 체계로서 레디메이드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측면으로 연장된 레디메이드의 범주는 신디 셔먼(Cindy Sherman)과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 등의 작업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명명의 권한을 둘러싼 작업들

 

 예컨대 셔먼의 작업 Untitled Film Stills(1977-1980) 등에서는, 50-60년대의 헐리우드, 필름 누아르, B급 영화, 유럽 예술영화 등에서 제시되었던 코드화된 여성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아이라인과 마스카라를 바르거나 당대 유행하던 머리두건을 맨 채 방 혹은 도회적 풍경 속에서 어딘가를 응시하는 여성은 셔먼 자신이지만 익명적인데, 왜냐하면 여기서 전면화 되는 것은 셔먼 자신의 초상이라기보다 여성을 둘러싼 이런 저런 사회적 약호들이기 때문이다. 그로서 가시화되는 여성성은 당대의 관객들로 하여금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게 할 것이며, 대중매체를 통해 재생산되는 여성의 상에 대한 질문으로 읽힐 것이었다. 한편 바바라 크루거는 잡지, 광고판, 스틸 컷 등에서 차용한 이미지 위에, 소비사회와 재현된 여성성 등에 관한 짧은 잠언 식의 표어를 병치한 콜라주 작업이 특징적이다. 크루거의 작업은 그 자체 눈에 잘 들어오는 전형적인 광고 포스터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불편할 만큼 클로즈업된 이미지와 표어를 충돌시킴으로써 마냥 광고이미지로는 독해되지 않는 어떤 긴장을 발생시킨다. 그것은 매개된 여성의 모습들과 경험들을 프로파간다로서 조명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고, 혹은 전유(appropriation)의 전략으로서 기존의 이미지들을 탈코드화 하는 수행적 작업으로도 읽힐 수도 있다.

 조슬릿이 잠시 언급하듯, 위와 같은 정체성과 명명의 권한을 둘러싼 개입은 에이드리언 파이퍼와 로나 심슨의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에이드리언 파이퍼(Adrian Piper)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할렘가에서 자랐고, 이내 인종과 젠더를 중심으로 작업하기 시작했는데, Catalysis(1970)에서 그는 달걀, 식초, 생선기름 등을 적신 옷을 뒤집어쓰고 뉴욕 시가지를 활보하고 다니는 퍼포먼스 작업을 했다. 그것은 유색인종 여성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것에 대한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설명이었다. 로나 심슨(Lorna Simpson)무엇이 흑인 여성을 흑인 여성이게끔 하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흑인여성에 덧입혀진 기호들을 가시화시키는 작업을 해왔다. 이는 Stereo Styles(1988), Wigs II(1994) 등과 같은 작업에서 두드러지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흑인여성을 둘러싼 코드의 파편들 자체이다. 한편 그의 작업에서 등장하는 흑인여성들은 어딘가를 보며 관객의 눈을 피하고 있기에,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뒷모습일 뿐이다. 이는 성적이고 인종적인 응시의 폭력에 대한 암시인 동시에 코드화된 여성성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그러한 여성성이 익명적이고 추상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이들 작업 경향은 당대에 일단의 포스트구조주의 비평가들에 의해 잘 연구되었는데, 그들은 신사회운동과 결합한 포스트구조주의 담론 특유의 급진성(소서사, 미시권력, 개인적인 것의 정치성, 메타담론 공격, 기표와 기의의 간극에 착안한 기호학적 분석)을 비평언어로 소화하며 미술사의 전환을 가져왔다.[각주:1] 상기한 작업들을 일별하며, 조슬릿은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젠더의 문제에 천착했던 작업들은 정체성과 명명의 권한에 대한 질문을 가져왔고, 오늘날 이 질문에서 연장되어 나타난 작업적 방법론은 아바타라는 범주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아바타란 현존하는 인물이나 정체성과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미술가를 정체성에서 자유롭게함으로써, 집단적이고 상상적이며 유토피아적인 형태의 자아 혹은 주체를 제시할 수 있게하는 어떤 모델을 일컫는다.[각주:2]

 

 

기업적인 것으로서의 아바타

 

 조슬릿이 언급하는 아바타의 첫 번째 모델은 코퍼레이션(corporation)의 형태이며, 이는 버나데트 코퍼레이션(Bernadette Corporation; 1994-)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문자 그대로 기업적이기도 하고, 법인적이기도 하며, 집단적이기도 한데, 행동주의, 패션, 미술거래중개 등을 아우르는 회사의 형태를 띤 채 작업을 해왔다. 버나데트 반 휴이(Bernadette van Huy), 존 켈시(John Kelsey), 안테크 발자크(Antek Walzcak) 등이 그 맴버이지만, 이들 개개인은 버나데트 코퍼레이션과 그들이 내세우는 아바타에 익명화 되어 있다. 조슬릿은 이들이 액트업(ACT UP)[각주:3]과 게릴라 걸즈[각주:4]처럼 미술과 정치 사이를 오가는 작업을 수행했다고 정리한다. 즉 버나데트 코퍼레이션은 미술 내부의 분과화 된 역할들을 넘나드는 통합적인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들은 리나 스폴링스(2004)라는 제목의 소설을 발간했고, 작중에 동명의 주인공을 등장시켰는데, 리나 스폴링스는 차후 그들의 대리인이자 아바타가 된다. 그리하여 스폴링스는 현실 세계에서 리나 갤러리 운영자이자 작가이며, 심지어 뉴욕 현대미술관의 소장작가가 되었다. 이렇듯 기업적인 측면의 아바타의 효과는- 크레딧을 단일화하고, 작가 개인 정체성을 지우며, 동시에 그 아바타를 미술 생태 전 과정에 유기적으로 참여시키고, 결국 사실상 분업에 대항하는 통합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슬릿은 다음과 같이 쓴다. “리나 스폴링스는 미술계 안으로 진입하는 대신, 미술계 자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각주:5]

 미국 뉴욕의 경우 버나데트 코퍼레이션이 있었다면, 프랑스 파리엔 클레어 퐁텐(Claire Fontaine)이 있다. 클레어 퐁텐은 프랑스의 문구회사에서 이름을 차용하여 2004년에 설립되었는데, 자신들을 페미니즘 예술가, 개념 예술가로 소개하고 있으나 버나데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코퍼레이션의 형식을 가지고 운영된다. 이들은 그 결성에서부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업을 거부하고자 한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에 조슬릿은 클레어 퐁텐이 보다 노동분업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며, 그것을 작업의 한 줄기로 가져가고자 한다고 본다. 그 연장에서 그들은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적 접근을 시도하는데, 여기에는 <Economies>(2010)라는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 Trust(2010)를 들 수 있다. 이 작업은 퐁텐 갤러리 이름으로 세계 각국의 은행에서 청구할 수 있는 백지 수표를 발행하여 액자에 넣어 놓은 것으로, 관람객으로 하여금 액자를 깨고 가져갈지 말지를 고민하게 하는 (개념적인) 딜레마를 제안한다. 여기서 관객이 이것을 예술작품으로 간주하고 수표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미술제도 속에서 작가와 관객 사이에 맺어진 관례적인 신용관계 안에서 이뤄진다. 그런데 그 신용은 동시에 수표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즉 오브제를 작품으로 호명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로서의 미술관과, 화폐 지급을 약속하는 어음을 발행하는 은행에서 전유하는 두 가지의 신용이 함께 유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클레어 퐁텐은 미술관과 전지구적 자본주의라는 양자의 연관을 은유를 통해 제시해낸 바 있다.[각주:6]

 

 

증강현실로서의 아바타

 

 앞서 살펴본 버나데트 코퍼레이션과 클레어 퐁텐이 기업적인 것으로서의 아바타의 모델을 제시했다면, 차오페이(Cao Fei)The Birth of RMB City(2009)는 가상현실과 관련된 아바타의 모델을 보여준다. 이 작업은 현대중국의 여러 도상들을 사용해서 만든 가상현실 공간으로서, 린든 랩(Linden Lab)이 제작한 게임 플랫폼 위에 구축되었다. 비교적 자유도가 높아 경제활동도 가능한 이 공간을 두고 조슬릿은 전 세계에서 온 주민들이 동일한 공간에서 어떻게 공존할지를 고민하는 실험으로 간주한다. 그는 여기서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재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 두드러진다고 하는데, 첫 번째는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건너뛰듯 이동하는 것이다. 이는 게임 특유의 모셔닝 이미지가 지니는 부드러움과 캐릭터의 순간적인 공간이동을 가리키며, 이들은 각각 몰입과 고도의 자유(중력제거)라는, 증강현실로서의 아바타가 지니는 조건에 대한 암시이다. 조슬릿은 이들이 결국 가상공간이 주권을 갖는 하나의 세계임을 드러낸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각주:7]

 그러나 이때 주어진 회로 내부에서의 생산적 파열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조슬릿의 기조에 따라 가상환경의 부정성은 거의 주목되지 않는데, 우리는 강정석의 GAME I: Speedrun Any % PB(2016)을 통해 위와 같은 아바타의 움직임을 다른 방식으로 서술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GAME I: Speedrun Any % PB은 아프리카 TV와 같은 개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송출되는 기존 FPS 게임방송과 작가 본인이 제작한 게임 화면이 조합된 모종의 플레이 영상이다. 영상 속에서 몇몇 게임들에 대한 유저로서의 체험기와 소감을 전달하는 내레이션은, 이내 개인 스트리밍 방송의 형식을 빌어 관람자를 향해 직접 말을 건넨다. 여기서 나타나는 것은 익명의 관객들과의 영속적인 피드백 과정의 전면화이다. 더불어 강정석이 직접 제작한 게임 상에서 이루어지는 스피드 런은 어렴풋이나마 오늘날의 지배적인 경험이 근본적으로 어떤 순환의 속도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 여기서 캐릭터는 모든 경험 가능한 서사들을 건너뛴 채, 최단 시간 내에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달린다. 달리말해 스피드 런이라는 형식 속에서, 목적지는 캐릭터의 임의적 도달 지점으로 설정되어 있을 뿐- 여타의 서사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에서는 계속해서 달리는 현재만이 유효하며, 그 결과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부유감(sense of floating)에 대한 예찬이자 무의미의 축제이다. 강정석에게서는 미끄러지는 듯한 이동건너뛰는 것 같은 이동은 모두 현재주의로 수렴하며, 세계에 대한 어떤 판별이 시도된다기보다는 그저 현재의 속도; 강렬도만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각주:8]

 

 

개입주의적인 것으로서의 아바타

 

 한편 위와 같은 증강현실로서의 아바타의 사례를 가능케 한 디지털 재현장치와 여타 광학장치의 발전에 힘입어 점차 삶의 많은 부분이 편재하는 이미지에 매개되게 되었고, 이러한 조건에서 유사[의사(擬似)]픽션(parafiction)이라는 새로운 작업경향이 대두되었다. 이는 판타지와 다큐 사이의 경계에 있는 작업 경향으로서,[각주:9] 동시대 미술의 여러 작가들이 전용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 유사픽션은 허구와 실재, 주관성과 객관성이 갈피없이 뒤섞이는 듯한 상황을 반영한 형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대안적 사실’ ‘가짜뉴스’, ‘탈 진실(post-truth)’ 등의 개념이 대두되는 상황은 파라픽션의 필요조건이 된다. 유사픽션은 노골적으로 현실에 개입하여 사실과 사실 아닌 것 사이의 틈을 벌리고자하거나 사실과 사실 아닌 것을 뒤섞으며, 개입주의적인 아바타의 모델이 된다. 유사픽션에서 문제가 되는 쟁점은 바로 사실(이미지)의 인증의 문제이다.

 레바논의 왈리드 라드(Walid Raad)아틀라스 그룹이라는 가상의 팀을 조직하여 이들로 하여금 근현대사를 재구성하게 했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왈리드 라드의 작업은 허구적인 아카이브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허구라기보다 사실에 걸쳐있는 허구인데, 왜냐하면 실제 레바논 상황을 반영하는 지표와 사료들이 계속 사용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왈리드 라드는 실제 차량 폭탄으로 사용된 차량에 대한 정보를 채집하고 이용하지만, 폭발 경과와 사상자에 대해서는 없는 서사를 지어낸다. 그런 점에서 와드의 작업은 객관성에 이미 스며든 주관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대안적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거나, 진실의 부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보다 뚜렷이 개입주의적 아바타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은 예스맨(The Yes Men)이 진행한 일련의 프로젝트들이다. 여기서 두 작가는 1984년 유니온 카바이드 사(Union Carbide Corporation)에 의해 인도 보팔에서 일어난 가스사고에 개입하여, 다우(Dow)사의 임원인 체 하며 BBC에 등장하여 생존자들에 대한 보상을 약속했고,[각주:10] 이를 통해 현실에 파란을 몰고 왔다. 다우가 움직이고, 관련기사들이 쏟아지고, 다우 주가가 내려앉고, 피해자들이 축제를 벌이는 등의 일이 벌어졌으며, 그것이 거짓으로 밝혀진 뒤에도 마찬가지로 현실은 출렁거렸다. 이들은 모두 개입주의적 아바타의 이미지가 가진 파급에 관한 얘기가 될 것이다.

결국 아바타는 이렇게, 노동분업과 관계된(통합적인) 기업적인 것, 가상현실과 관련된 비현실적인 것, 물질화된 이미지로서 응축되어 실재에 개입하는 개입주의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다는 것이 조슬릿의 결론이다. 이에 나는 아래와 같은 이견들을 제안하고자 한다.

 

 

피드백

 

 1. 조슬릿의 전반적인 주장에 비하면 지엽적인 쟁점이지만, ‘셔먼과 크루거의 작업이 정체성의 정치를 둘러싼 투쟁과 논쟁에 [선제적으로] 영향을 주기도 했다는 식의 평가는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예술은 전체 사회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하지, 결코 그들을 앞질러 존재할 수 있는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다. 위와 같은 조슬릿의 주장은 사회로 가닿고자(혹은 사회에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예술의 충동에서 기인한 것으로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지만, 셔먼과 크루거의 작업은 제 2물결의 전체 흐름 속에서 하나의 계기를 형성할 뿐, 결코 그들을 앞지른 것이 아니었다. 이 인과관계와 포함관계를 오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2. 이 글 자체는 기본적으로 여러 갈래의 작업들을 느슨하게 범주화하는 작업에 가깝기에 딱히 각론에서 이의를 가질 것이 많지 않다. 다만 레디메이드 젠더의 문제를 다룬 미술작품의 내적 논리와 아바타라는 범주를 곧바로 연결하는 식의 주장은, 예술을 그 자체 자율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자족적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조슬릿의 주장이 확실한 근거를 가진 채 깊이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레디메이드 젠더에 대한 주목할 수 있었던 실재의 조건에 대한 서술이 규명되어야 한다. 즉 그것은 전후 소비사회의 형성에서부터, 매개된 이미지들의 범람, 60년대의 성해방 운동과, 60-80년대 사이의 제2물결 페미니즘, 여성 고등교육 수학률의 증가 등등의 작인을 그 조건으로 갖지만, 조슬릿은 이들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더불어 동시대의 작가들이 아바타라는 범주 자체에 주목할 수 있었던 실재의 조건에 대한 서술 또한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논의가 없다면 그의 아바타론은 공허하고 작위적인 범주가 될 것이다.

 

 3. 2번의 연장에서, 조슬릿이 주장하는 아바타의 정의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글을 쓰다 보니 2010년대를 묶긴 해야겠고,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뾰족한 정리가 어려웠다는 인상이 들 정도이다. 예컨대 이 글의 주제처럼 제시되는- 노동분업과 관련하여 통합적인 일을 수행하는 예술가 기업의 경우, 페르소나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는 감도 있고, 최근 디지털 공간의 가상성과 관련되어 나오는 모셔닝 캐릭터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감도 있고, 현실에서 수행적 실천을 하는 액티비즘적 아바타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 감도 있는데, 서로 다른 실재의 층위를 상대하고 있는 이들을 동일하게 아바타로서 범주화 하는 것이 지니는 실천적인 효과와 함의를 짐작하기 어렵다.

 

 4. 그의 아바타론을 인정한다는 전제하에 말하더라도, 조슬릿의 주장대로 기업주의적인 것으로서의 아바타가 물화의 거부일지, 혹은 물화의 반영일지는 좀 더 따져 봐야할 것이다. 과연 기업체의 모습을 통해 전방위한 업종과 직군을 소화하는 미술가 그룹들이 하고 있는 작업이 전 산업분과에서부터 유통까지도 수행하는 초국적 기업에 대한 미메시스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것은 오히려 작가가 급변하는 후기자본주의의 문화 속에서 점차 다재다능함을 요구받고 있는 것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그렇다면 기업적인 아바타의 모델에서 실질적인 분업은 지양되지 않은 채, 분업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는 분업의 승인하에서의 워커홀릭의 미메시스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1. 70-80년대부터 대두된 이들 작업은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가 제기했던 문화적 재현, 정치적 대표, 재분배의 3항 중에 문화적 재현에 초점을 두고 있다. 물론 이들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으며, 내적 연관을 갖는데, 예컨대 추후 살펴볼 게릴라 걸즈(Guerilla Girls)의 경우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에서부터 문제제기를 하며 나온 집단이다. 우리는 이러한 3중 도식을 토대로하여 페미니즘 미술의 제경향들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데이비드 조슬릿, “2010b,” in 󰡔Art Since 1900󰡕, 할 포스터, 로잘린드 크라우스, 이브-알랭 부아, 벤자민 H.D. 부클로, 데이비드 조슬릿. 배수희, 신정훈 외 옮김, 김영나 감수. 세미콜론, 2012: 764. [본문으로]
  3. 87년 뉴욕에서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커뮤니티 기반으로 창립된 에이즈 운동의 국제 직접행동 조직이다. 이들은 80년대 에이즈 위기를 의학적 위기가 아니라 정치적 위기라 여기며,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고 에이즈를 수수방관하는 레이건을 비판하며 출범했다. 주로 제약회사와 정부 등을 상대로 시위하는데, 가짜 돈, 가짜 피 등을 쓰거나 화려한 분장으로 퍼포머티브한 시위들을 해왔다. [본문으로]
  4. 1985년 뉴욕 모마에서 <회화와 조각 국제 총람>이라는 전시를 했는데, 참여작가 169명 중 13명이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큐레이터가 여기 초대되지 않은 이는 그의(his) 경력을 의심해야한다고 발언한 데에 문제제기를 하며 결성되었다. 주로 공적장소에 설치될 수 있는 액티비즘적인 작업을 했다. 잘 알려진 작업으로 Do Women Have To Be Naked To Get Into the Met. Museum?(1989) 등이 있다. [본문으로]
  5. 데이비드 조슬릿, 앞의 책, 766. [본문으로]
  6. 이들은 개념적 딜레마를 제기하는 작업들을 곧잘 선보인다. 예컨대 2228 W. 7th Street, 2nd Floor (entrance on S. Grand View St.), Los Angeles, CA 90057 (29.08.18)(2018)은 작업의 제목인 동시에 작업이 전시된 갤러리 주소이다. 이 작업은 FBI에서 개발한 순간 몰딩 기법으로 1회 사용가능한 갤러리 열쇠를 만든 것인데, 이 열쇠를 통해 별도의 승인 없이 갤러리에 출입할 수 있기에 이것은 사용가치를 지니지만, 동시에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그 사용가치를 발휘하는 순간 파괴되어 사용할 수 없어짐과 동시에 형태도 변형되기에, 작품도 될 수 없다. 즉 이것은 유용성과 작품 사이에서 논리적으로 동요하는 오브제인 것이다. [본문으로]
  7. 데이비드 조슬릿, 앞의 책, 768. [본문으로]
  8. 이 단락은 나의 최근 작업을 발췌하여 재작성한 것이다. 정강산. “사라지지 않는 지표로서의 생산양식: 동시대예술의 작업경향의 조건에 관하여,” 크리틱-, 2019. [본문으로]
  9. 혹자는 ‘parafiction’의 경향 하에서 만들어진 작업을 ‘fictive art’로 부르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Allan Struthers, "Rearranging Authority through Acts of Deception: Trolling and Parafiction in Participatory Art," MA Contemporary Art Practice_Public Sphere, 2018: 6. [본문으로]
  10. 이는 다우가 유니온 카바이드사를 인수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