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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의 제3세계 문학

by 정강산 2020. 2. 15.

 이 글(Third-World Literature in the Era of Multinational Capitalism)은 제임슨식 마르크스주의 비평의 주된 방법론을 제 3세계적 맥락에 적용할 때 얻을 수 있는 단상들로서, Allegory and Ideology(2019)에 한 파트로 실렸다. 본래는 1986Social Text에 실린 에세이인데, 80년대 후반 탈식민주의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큰 지적 논쟁을 촉발하기도 하였다.[각주:1] 제임슨의 글이 으레 그렇지만 형식적 틀이 잡힌 논문이라기보다 강의록을 쭉 늘어놓은 것 같은 비평문에 가깝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사회, 정치, 경제적 모순들을 반영하거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라캉적 의미에서의)상징적 시도들이 제 3세계에서는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가에 대한 에세이 정도로 읽어볼 수 있다. 주로 등장하는 논점은 민족적 알레고리라는 테제에 대한 묘사, 이를 통한 작품분석이다. 그의 작업들을 훑다보면 왕왕 마주치게 되는 마르크스주의 일반론의 전제들과 산발적인 강조점들은 이 글에서도 여과 없이 등장하는데, 이들을 적절히 걷어내고 추상하여 그의 이야기 줄기를 따라가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이 그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기에는 더 좋을 것이다.


 제임슨은 3세계 문화 중에서 그 어떤 문화도 인류학적으로 독립적이거나 자율적인 것으로 상상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은 모두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제1세계의 문화제국주의와 생사를 건 투쟁을 벌이고 있다”(84)고 단언한다. 이 문화투쟁은 각 지역이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에 어떻게 침투되어가고 있는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며, 그런 점에서 제 3세계에 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제1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1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제임슨의 요지는 제3세계에는 민족적 알레고리라 할법한 것이 있으며, 이는 제1세계의 그것과 여러 차원에서 상당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명백한 구분과 분할은 서구의 맥락에 보다 특징적으로 대입할 수 있으며, 이는 예술적 실천들이 근거하는 지표가 된다. 이때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분리의 정도는 이 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것은 곧 물화의 총체적인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개인과 사회의 분리, 나아가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그에 따른 사적인 경제활동의 주체와 공적인 정치활동의 주체의 분화, 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 등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소설의 분화가 발생한 결정적인 토양이 되는 것이다. 제임슨은 이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간의 급진적 분열”(86)이라고까지 표현하는데, 이는 프로이트의 작업을 가능케 할 만큼의 리비도적인 것, 심리적인 것의 분화, 마르크의 작업을 가능케 할 만큼의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의 분화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서 각 부문들은 소설에서 정치가 등장하는 것이 연주회 도중에 울리는 권총 발사 소리에 가깝게 들릴 만치 자율적이고 자족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제임슨은 그러나 제 3세계에서 이와 같은 물화된 사회 부문들과 예술이 맺는 관계는 보다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알레고리적이라고 말한다.[각주:2]겉으로 볼 때 사적이고 리비도적인 역학이 투여되는 텍스트들조차 필연적으로 민족적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정치적 차원을 투사하며, “(...)개인 운명의 이야기가 항상 공적인 제 3세계 문화와 사회의 전투적 상황의 알레고리”(86)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관계와 그 배치가 제3세계에선 달리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민족적 알레고리는 어떻게 나타날까? 제임슨은 루쉰의 <광인일기>(1918)에서 드러난 알레고리를 예의 민족적 알레고리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거기에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이 식인 풍습을 즐긴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내면적 관찰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명백히 식민화를 통한 근대화와 몰락 직전의 구체제 사이에서 위태롭게 동요하는 중국 사회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난 무자비함과 끔찍함에 대한 우화이다.[각주:3] 그런 점에서 루쉰의 시선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악몽이라는 점, [근대화/식민화/자본주의의 도입/ 전통과 새로운 삶의 방식의 긴장 등과 관계하는인용자 주]대문자 역사 그 자체를 통해서만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삶의 공포에 대한 하나의 시각”(89)을 보여준다. 실로 여기서 <광인일기>의 주인공의 심상과 그 작품 자체는 실존적 고독함이나 리비도의 역동등으로, 즉 실존주의적이고 표현주의적인 수준의 분리된 차원으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제임슨이 후술하듯, 이는 “(...)자본주의적 혹은 시장주의적 경쟁에 대한 서구의 리얼리즘적인 혹은 자연주의적인 국부적 재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으며,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이라는 악몽과 유사한 자연적이거나 신화적인 서구적 등가 형태들이 존재하지 않는 구체적인 정치적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89)는 것이다.


 앞서 얘기했듯 제임슨이 보기에 제3세계에서 “(...)리비도적 요소들과 정치적 요소들 간의 관계가 서구에서 획득할 수 있거나 우리 자신의 문화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90)이다. 서구에서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다시 심리화되고 개인화된다면(“60년대의 정치운동을 오이디푸스적 반항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90)처럼), 3세계 문화에서 그것은 반대로 나타나는데, 따라서 제3세계의 텍스트들에서는 심리학(...) 리비도적 투여가 주로 정치적*사회적 관점에서 읽혀져야 한다”(90)는 것이다.[각주:4] 제임슨은 그 근거로 루쉰이 중국에서 먹다라는 동사가 지닌 풍부함을 감안하여 인육을 먹는’ <광인일기>의 설정을 조직함으로써 리비도적인 것(개인적인 것, 내밀한 것)을 통해 중국의 대문자 역사에 내재된 사회적 공포를 논하고자 했음을 내세운다. 이는 루쉰의 단편 소설 <>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약은 먹는 것이지(eat), 서구의 용법에서처럼 복용하는 것은 아니라는(take)- 중국 문화에 대한 섬세한 고려가 내재되어 있다. <>에서 한 부모는 자신의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처형된 범죄자의 신선한 피가 베여있는 찐빵을 구한다. 그러나 그 피는 당대 중국의 정치적 투사의 것인데, 이는 잔존하던 중국의 전근대적 문화와 풍습, 나아가 정치적 상황에 대한 루쉰의 자조와 번민, 즉 제 3세계 지식인이 필연적으로 느끼게 되는 민족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의 설정은, 자식을 살리기 위해 전근대적 풍습에 의존하는- 계몽되지 못한 참혹하고 비합리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동시에 정치적 억압의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다.(93)


 제임슨은 전통적인 서구의 알레고리 개념이 일대일의 등가적 관계에 비춰 읽을 수 있는 일련의 비유와 의인화로서, “의미화 과정에 대한 일차원적인 관점에 불과했다”(93), 3세계의 민족적 알레고리는 이러한 의미작용의 등가성을 보다 유동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는 루쉰의 아큐에 대한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방문한다. 아큐는 주변으로부터 객관적으로 모진 폭력에 시달리지만, 주관적인 합리화를 통해 매번 정신적으로 승리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제임슨은 이를 몰락의 처지에 내몰린 청조의 유별난 자만심근대과학, 함선, 군대, 기술과 권력만 소유한 외국 악귀들에 대한 은밀한 경멸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읽어낸다. 그에 따르면 여기서 아큐는 중국에 대한 알레고리이지만, 동시에 아큐의 박해자들 또한 명백히 중국에 대한 알레고리로 기능하며 이는 알레고리가 담지할 수 있는 의미의 다층성과 유동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편 제임슨은 위의 전반적인 논의들이 3세계 특유의 복합적 모순의 상황에서 지식인은 언제나 정치적 지식인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하며, 이는 분과학문을(집단, 당파에 대한 고려 없이) 전문적으로 다루는 테크노크라트가 보편적으로 자리 잡게 됨으로써 이제 서구에는 사라진 지식인의 위상을 고민하게 한다고 말한다. 3세계에서 지식인의 근본적인 역할은 무엇인가? 그는 제3세계의 지식인(그리고 예술가들)의 실천들을 문화혁명으로 읽어야 한다고 제안한다.[각주:5] 여기서 제임슨이 말하는 문화혁명이란 <정치적 무의식>에서 제안된 예술의 본령, 즉 사회적으로 상징적인 서사화; 맥락화; 반응이자 알레고리적 행위로서의 예술의 생산적인 정치적 기능을 가리킨다. 이는 실재(역사)의 환원불가능한 선차성이 유지되면서도 예술 고유의 자리가 확보되는 지점이다. 예술은 사회적 실재와 그 모순에 대한 (사후적인) 알레고리적 행위이지만, 동시에 그러한 모순을 특정한 방향으로 맥락화함으로써 다양하게 변주되는 사태 자체를 생산해낸다. 이렇게 볼 때, 3세계의 문화혁명은 그람시가 말했던 하위 종속성이라는 현상, 즉 지배라는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상황에서 펼쳐지는- 식민화된 민중의 경험 속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정신적 열등감과 예속과 굴종의 습관”(98)을 상대하고 그에 반응하는 것을 중심으로 조직된다.


 이렇게 볼 때, 루쉰의 작업에는 부르주아 혁명이 실패하고 공산당이 막 수립된 시기, 식민지적 근대성과 봉건성이 혼종된 시기의 중국의 혼란이 각인 되어 있으며, 이는 독립 직후 역사적 지평에 그 어떤 정치적 해결책도 드러나지 않거나 가시화 되지 않는 아프리카 지식인들의 처지와 상당히 공통적이다. 그리고 이는 <광인일기> 특유의 서사적 종결 배면에 놓인 조건이 된다: 제임슨에 따르면 <광인일기>는 상충하는 두 가지 결말을 갖는다. 첫 번째로는 아이를 구해다오...” 라는 문장으로 집약되는, 끔찍한 상황에서 미래를 희구하는 주인공 시점의 결말이 있고, 두 번째로는 “(...)동생은 얼마 전에 회복되었고 관직을 받으러 다른 곳으로 떠났다오라며 식인의 현실로부터 후퇴한 동생의 소식을 전해주는, 환영과 망각의 영역으로의 회귀를 알리는 형 시점의 결말이 있다. 이러한 이중적인 엔딩의 분화는 서사적 텍스트가 진정한 미래에 대한 구체적 시각을 열어 놓을 수 있동시적이고 대립적인 메시지들의 복합적인 작용”(100)을 보여준다.


 이어 제임슨은 자신의 접근에서 중요한 몇 가지 단서들을 언급한다. 그는 모든 급진적 차이에 관한 실천은 타자성의 전략적 전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며, 3세계에 관한 논의에서도 이를 주의해야함을 지적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가들의 민족적 상황이 갖는 급진적 차이들을 계속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작업이라 말한다. 또한 문화를 고려할 때 주의해야하는 것은 문화 자체를 (경제, 정치적인)사회와 무관한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내적논리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도의 물질적 부분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 자체의 실체화가 아니라, 특정한 세력이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으로서 대두되는 사회적 배치와 맥락에 대한 고려가 중요한데, 왜냐하면 가령, 루쉰의 역사적 순간은 분명히 중국 문화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비판이 강력하고 혁명적인 결과들-이후의 사회적 형태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들-을 낳는 순간”(101)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호소는 교조적이고 맥락 없는,” ‘문화적 정체성은 곧 허위의식이다라는 식의 무맥락적인 “‘이데올로기적 분석의 관점보다는 역사적 관점에서 평가될 필요가 있”(101)는 것이다.


 예컨대 제임슨은 19세기의 스페인은 엄밀히 제3세계의 범주에는 들지 않지만, 영국, 프랑스 등의 관계 속에서 준주변부에 속했고, 따라서 당대의 스페인 소설가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Benito Perez Galdos)의 작업은 민족적 알레고리로 독해할 여지가 있음을 그 사례로 든다. 갈도스의 작업 <포르투나타와 하신타>에는 중상층 계급 여성과 평민 여성 사이에서의 동요하는 주인공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는 1868년의 공화주의 혁명(Glorious Revolution)(이자벨라 2세를 몰아내고 왕정복고에 의해 무너지기 전까지의 약 6년간 공화주의적인 임시정부를 세운 기간), 1873년의 부르봉 왕정복고(1814년 나폴레옹 정권이 실각함에 따라 프랑스 제1제정이 몰락하고 프랑스 혁명으로 쫓겨난 프랑스의 기존 왕실인 부르봉 왕가가 복귀하여 세운 왕정이 통치한 시대. 여기서 이자벨라의 아들 알퐁소 12세는 왕으로서 다시 권좌에 오른다) 사이에서 동요하는 스페인 인민의 혼란에 대한 환유로서, 개인적인 것이 곧 집단적이고 정치적인 사안으로 확장되는 민족적 알레고리의 측면에서 독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집단적인 것과 리비도적인 것, 개인적인 것의 논리적 위상과 순서에 주의해야 한다. 리비도에서 정치로의 확장이 아니라 반대로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리비도적인 것을 위한 장치로 간주하게 된다면, 애초에 작품을 출발시킨 집단적이고 공통적인 적대에 근거한 정치의 공간은 은폐되며, 물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분리”(103)의 극복가능성은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분할을 명시적으로 비판하지만, 그것은 그 분리에 대한 현상학적 설명(“적절한 이론”(104))을 통해서는 지양 될 수 없다. 제임슨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급하는 니콜라스 레이의 영화에서의 섬망증[각주:6]에 대한 묘사는 제1세계의 알레고리 구조가 제3세계의 그것에 비해 보다 무의식적임을, 즉 보다 은폐되어 있음을 지적하는 사례라고 주장하고, 3세계의 민족적 알레고리들에서 리비도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보다 가시화 되어있음을 주장한다.


 세네갈의 우스만 셈벤의 영화 <할라Xala>는 로버트 C. 엘리엇이 묘사한 풍자와 유토피아의 동일성; 상호 참조성을 예증하는 사례로서, 민족적 알레고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부패한 사업가 하지는 세 번째 부인과 결혼을 하자마자 딱하게도 성적 불능에 시달리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떠난 긴 여행에서 하지는 본인의 출세 이전의, 즉 외국 자본의 침투 이전의 아프리카에 존재하던 목가적인 공동체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아프리카의 정치적 독립 이후의 신식민주의적 상황(“새로운 민족적, 매판 자본적 부르주아지가 주도하는 타락하고 서구화된 화폐경제 속으로 극적으로 편입되는 과정”(106))을 압축하여 보여준다. 젊은 시절 민족주의자로서 하지가 보여줬던 전투성은 이후 매판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그의 현재 모습과 대비되며, (아마도 실제 세네갈의 역사에서 전개되었을) 독립운동과 전면적 사회혁명 사이의 간극과 단절을 강조한다. , “독립이라는 독이 든 선물을 받은 후 우스만이나 케냐의 응구기 와 시옹오(Ngugi Wa Thiong’o) 같은 아프리카의 진보적 작가들은 변혁과 사회적 갱생에 대한 열망은 충만하지만 그것을 현실화할 행위 주체들이 채 등장하지 않은 상태, 즉 루쉰이 느꼈던 것과 똑같은 딜레마에 처하게 된다”(107)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제3세계의 텍스트들이 으레 처하게 되는 미학적 딜레마로서 재현의 위기의 조건이 된다. 예컨대 라틴아메리카에 정착한 독재자 문학은 억압의 상징에 대해 양가적인, 즉 복잡하고 정리되지 않은(명확히 재현되지 못한) 감정을 특징으로 한다.


 요컨대 문화제국주의의 주체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것은 외부에 있는가, 내부에 있는가? 제국주의적 지배 이후, 후식민적 상황에서 모순은 보다 여러 층위에서 과잉결정되며 그 책임 주체는 상정되기 어려운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새로운 문학적 형식이 요청될 텐데, 여기서 우화(광의의 알레고리)는 전통적인 리얼리즘 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제임슨은 마누엘 푸익(Manuel Puig)<리타 헤이워스의 배반>을 후식민적 상황에서의 문학적 성취 중 하나로 꼽지만, 이에 대해 상론하지는 않는다). 우스만의 <우편환>에는 1960년 세네갈의 독립 이전에 소유한 우편환을 파리의 수표로 현금화하지 못하는 세네갈인이 등장하며, 우편환이 휴지조각이 되어가는 과정이 묘사된다. 제임슨에 따르면 이러한 설정은 근대의 민족적 관료제에 대한 비난이라기보다는 전통적인 이슬람의 자선이라는 가치가 당대의 화폐경제 속에서 겪는 역사적 변형의 문제”(109)를 드러내는 데에 집중되어 있다. 결국 루쉰의 <광인일기>가 묘사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우편환>은 이슬람적 자선이 분쇄되는 과정, 주인공이 동족들에게 잡아먹히는 과정, 우연한 보물의 도착이 사회 전체를 혼란과 야만에 빠뜨리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이는 <할라>에서 하지가 느끼는 내적 갈등으로부터도 마찬가지로 묘사되는 대목이다. 하지는 일부다처제에 의해 세 번째 부인을 맞지만, 이미 일부다처제의 의미는 전통적인 이슬람권에서의 그것과 많이 달라진 사회적 조건이 존재한다. 여기서 하지는 가족을 보전하고 자신의 사회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유랑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는 자신의 불행이 부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지만, 채무자들이 하지를 닦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지의 과거는 불행의 원인이 바로 자본주의적 소외와 물화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가 스스로 매판 자본을 자처하며, 부족의 땅을 매매하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촉진하는 작인이 되었을 때부터, 그가 겪는 모든 문제가 시작 된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자본주의적 착취 자체라기보다, 그와 동시에 위상학적으로 소거된 전통적인 삶의 방식의 상실이다.


 하지가 자신의 불행의 원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이내 거지와 룸펜들이 하지의 저주(할라)를 없애기 위해 린치에 가까운 모욕적인 의례를 강요하는 결말부의 장면에서, 풍자의 톤은 저주 자체로 소급적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텍스트는 이야기 내의 인물에게 닥친 의례적 저주를 주제와 내용으로 삼던 풍자로부터 별안간 의례적 저주 그 자체로-사건의 전체적인 상상적 연결고리가 영웅이나 그와 유사한 사람들에 대한 우스만의 저주가 되어 버린다- 드러나게 된다.”(113) 제임슨은 이를 풍자적 담론의 기원이 샤머니즘적 저주에 있음을 주장하는 로버트 C. 엘리엇의 주장에 대한 생생한 예증으로 읽는다.


 이 모두는 서양문학의 자기 지시적 담론들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그다지 고려할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제임슨은 제3세계의 문학이야말로 상황적 의식(situational consciousness)을 간취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유물론적 파열을 제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상황적 의식[각주:7]이란 자신의 자유의 기반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데에까지 도달한 노예의 위상에서야말로 간취될 수 있는, 3세계의 것으로 돌려지는 의식이다. 서로 다른 주체들은 인정을 위해 목숨을 건 결투를 치르고, 노예는 주인에게 목숨을 빚짐으로써 삶을 약속받는 대신 그에게 인정을 내어준다. 이제 주인은 노예의 인정을 받지만, 그 인정이란 결국 노예와의 관계 속에서만 작동하는, 즉 전적으로 노예의 존재에 의존하는 한에서의 인정이다. 곧 주인은 노예 없이는 자신의 어떤 자유의 조건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상태의 부자유의 상태에 놓기에 되고, 노예는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자유의 기반을 개척하는 역량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여기서 주인은 노예가 되고, 노예는 주인이 된다. 결국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물질적 저항인지를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노예뿐”(114)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3세계 문학의 알레고리의 실체는 제3세계가 제 1세계들과의 관계에서 놓인 실재적인 배치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그곳에서 개인의 이야기는 집단적 삶의 방식들과 매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동시에 제임슨은 주인의 입장에서 무력한 관념론에 빠진 제1세계는 상황적 인식을 간취하기 위해 제3세계의 존재를 명확히 직시해야함을 지적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몇몇 질문들을 열어놓는다: 정치적 무의식의 테제- 무의식은 정치적이며, 사회적으로 조직된 서사를 구축한다는 예술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궁극적으로 예술은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시도이기에, 가장 지엽적이고 경험적인 것조차 실재의 규정을 피해갈 수는 없다. 이것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환유라는 주요한 주장으로 이어진다. 본래 이것은 역사가 보편적인 한에서 보편적인 과정이지만, 여기서 제임슨은 이러한 테제를 제3세계에 특권적으로 적용하려 시도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제임슨 특유의 성취를 후퇴시키는 감이 있다. 개인적인 것으로부터 정치적인 것으로 확장되는 알레고리의 구조는 사실상 제1세계에서도 지배적일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제3세계적 알레고리의 특징은 개인->정치라는 포괄적인 형식상의 정의가 아니라 내용상의 정의로서 그때그때 상론되어야 할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제임슨 자신이 주목한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으로서의 세계화 이후, 1세계와 구별되는 제3세계의 독자적 토양이란 가능할까?(이글이 쓰여질 때만해도 86년이지만, 2020년대에는 어떨까?) 또한 2세계에 특유한 알레고리란 불가능할까? 여기서 제2세계의 존재는 거의 희미하다. 3세계의 알레고리와 제1세계의 알레고리가 있다면, 3세계와 제2세계의 알레고리적 체제를 상정하고 그 영향관계를 고려해 볼 수 있을까?

 

  1. 이 텍스트가 야기한 논쟁에 대한 간략한 정리는 다음을 참고. Tally, Jr., Robert T. November 9, 2017. "Fredric Jameson and the Controversy over 'Third-World Literature in the Era of Multinational Capitalism.'" Global South Studies: A Collective Publication with The Global South. Accessed date. https://globalsouthstudies.as.virginia.edu/key-thinkers/fredric-jameson-and-controversy-over-%E2%80%9Cthird-world-literature-era-multinational [본문으로]
  2. “(...)핵심은 우리 자신의 문화 텍스트들의 무의식적 알레고리들과 달리 제 3세계의 민족적 알레고리들은 의식적이고 명시적이라는 점이다. 즉 제3세계의 민족적 알레고리들은 정치학이 리비도적 역학들에 대해 맺고 있는 근본적으로 다른, 객관적 관계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104) [본문으로]
  3. “루쉰의 주장은 말기 혹은 후기 제국 시대의 무능하고 뒤처지고 붕괴되어 가는 거대한 중국에 사는 사람들, 곧 그의 동료 시민들이 ‘말그대로’ 식인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관료 사회에서 룸펜과 농민으로부터 고위 관료 특권층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계층화된 사회의 모든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89) [본문으로]
  4. 그러나 정확히 (정치에서 개인으로의 방향이 아니라 개인에서 정치로의 방향이라는) 이러한 전도가 제3세계에 고유한 실재의 어떤 측면에서 기인하는지, 이러한 전도가 필연적인 것인지, 그러한 전도는 서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등에 대해 제임슨은 해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소급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으로 서술 되고 있다. [본문으로]
  5. 제임슨에게 문화혁명이라는 개념은 역사적 마오주의 특유의 정치적 기획을 가리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레닌이 말했듯 “그 형식에 있어서 문학 운동이자 보편적 학문과 교육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는 생산적인 예술적; 문화적 실천의 양태와 효과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6. 급성, 기질성 뇌 증후군; 의식과 판단력, 인지력의 기복이 특징이다. [본문으로]
  7. 보다 평이한 용어로는 situational awareness(상황적 인식; 인지)가 있는데, 제임슨은 여기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 입각하여 관계의 배치와 그 총체를 인식 할 수 있는 유물론적 관점을 situational consciousness이라 가리키며 전자와 구분하여 사용하려 하는 듯하다. 한편 전자는 시간과 공간의 측면에서의 환경적 요인들과 사건들에 대한 인지이며, 그들의 의미에 대한 이해, 그들의 미래 상태에 대한 예측을 의미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