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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Moishe Postone_History and Helplessness: Mass Mobilization and Contemporary Forms of Anticapitalism

by 정강산 2020. 4. 10.

"역사와 무력함: 대중동원과 반자본주의의 동시대적 형식"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이 글은, 여러 본질주의적인 저항의 방법론에 대해 일관되게 취해질 수 있는 가치형태론의 입장의 한 갈래를 시사하고 있다. 본래는 2001년의 911테러에 대한 독해를 둘러싸고 벌어진 좌파들의 우왕좌왕에 개입하려는 정세적인 관점에서 작성된 것이라 911의 여파가 희미해진 것처럼 보이는 최근에는 다소 지엽적이고 역사적인 텍스트로 읽힐 수 있겠지만, 특정한 정체성을 실체화하는 운동, 추상적인 적대와 지배를 공간화 된 방식으로 상상하는 운동, 존재론적 차이와 비결정성에 기댄 운동 모두에 생산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 분석과 함의를 담고 있다.


 일찍이 근대의 반 유대주의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과 관점을 보여준 이전 작업들의 연장에서, 모이쉬 포스톤은 반 유대주의를 물신화된 반자본주의적 ‘반응’으로 규정하며, 이를 근대(자본주의)에 특정적인- 굴절된 대항 헤게모니적 정치의 형태로 본다. 테러와 이에 대한 좌파들의 대응 배면에 있는 반 유대주의, 폭력의 정치학 등의 이데올로기들을 해부함으로써 그는 반세속적 근본주의와 테러를 독해하는 여러 다른 입장들(예컨대 부러 유럽중심주의적이라는 오해를 사서 받는- ‘보편적 유럽의 가치’를 경유하여 테러의 정치를 비판하는 지젝식의 입장과 같은)을 넘어서서, 그것을 일종의 자본주의에 대한 추상적인 거부로 확고히 맥락화 함으로써 내재적인 비판을 위한 길을 열어 둔다. 


 추상적인 지배의 과정을 구상화하는 것- 이는 포스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자 비판을 전개하는 데 전제가 되는 입장이다. 여기서부터 냉전 시기에 대한 그의 입장, 60-70년대의 신좌파들에 대한 평가, 근대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분석 모두가 도출된다. 누군가는 이를 한국 내부의 우파(때론 좌파까지도)민족주의자들에게 적용하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페미니즘을 비롯한 신사회운동 전반에 적용하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그의 입장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산력에 대한 모든 강조는 결국 생산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하며, 토대에 대한 모든 강조가 상부구조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듯이 현실 속에는 자본이라는 자본은 없고 항상 특정한 행위자들 속에 체현된, 여러 국가적/지역적/계층적 세력관계 속의 자본이 있다. 그러나 포스톤에게는 이 피비린내 나는 현실의 여러 관계들을 사고할 공간이 많지 않아 보인다.


 이는 포스톤이 자본을 이해하는 방식에 내재한 지적 편향에서 연원하는 것인데, 요컨대 그는 루빈 식의 전통 위에서, 물신주의와 가치법칙을 자본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고려하며, 모든 분석에서 이 점을 전제로 자신의 논의를 전개한다. 이 점에서 그는 착취론 혹은 투하노동적 접근과는 대척점에 서는데,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의 여러 차원 중 추상수준이 가장 높은 지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원칙 자체는 자본주의의 이해에서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현실의 관계들 속에서 상론되어야만 하며, 정세적이거나 그보다 짧은 시기의 역사적 국면을 분석함에 있어서는 때로 사라지는 매개자로서 남아야만 한다. 요컨대 그것은 일종의 ‘고독한 최종심급’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포스톤에게 자본주의적 지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추상노동의 지배이기 때문에, 지배에 대한 물화된 접근은 지양되어야 할 것, 언제나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설정된다. 즉 그에게 지배란 영원히 실체화되어서는 안 되는 공간으로 유예된다.


 그러나 과연 지배는 물화된 표상을 가져서는 안될까? 물신주의를 통해 모든 지배의 상황을 논하는 것은 결국 좌파적 베르그송주의라 할 법한 것에 갖히게 되지 않을까? 언표된 것이 결국 누빔점을 통해 특정한 의미의 관계 속으로 정박되듯이, 지배는 때로 구체적으로 지각가능한 것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프랑스 혁명의 이행 동력에서 마리앙투아네트라는 육화된 적이 필수불가결했던 것처럼,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인민들의 적개심을 고려하지 않은 채 러시아 혁명을 논의할 수 없는 것처럼, 역사는 그 모든 소요와 오류들 마저도 생산적으로 지양하여 자신의 밑거름을 삼지 않는가. 물론 보다 공정해지자면, 포스톤이 여기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비전도 없이 그 '적'만이 남아 있는 상태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과연 구체적인 정치적 파열과 생생한 힘 관계들이 펼쳐지는 중기지속, 혹은 단기지속의 사건현실 속에서 포스톤의 추상 수준이 곧바로 등장하는 것이 얼마나 유효한 울림으로 남을지는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즉 포스톤의 도식을 한국의 여러 사건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매개 고리에 대한 분석들이 필요하다. 더불어 냉전시기에 대한 그의 입장 또한 비판적으로 곱씹어 봄직한데, 그는 케인즈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와 현실 사회주의 국가 모두를 국가 주도의 자본축적 방식이라는 점에서 수렴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비록 물신주의를 바탕으로 그 나름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지만(마치 메자로스가 '자본 시스템'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 현실사회주의를 비판했듯), 이와 같은 시선 속에서는 역사적 파시즘 체제와 현실 사회주의 또한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여러면에서 비슷했지만, 동시에 여려면에서 화해불가능할만큼 구별되었다. 이들의 질적 특징들을 섬세하게 분별하지 못한다면, 좌파적 아렌트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런 입장은 냉전이라는 맥락 속에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거부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울림과 의미를 지녔을테지만, 냉전의 종언 이후에 그 정치적 의미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외려 오늘날 더 필요한 것은 역사적 파시즘, 현실 사회주의, 케인즈주의적 자본주의- 그들 사이의 불연속성과 차이를 사회구성체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뜯어보는 작업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여전히 베일 속에 높인 국가의 한계와 기능을 규명하는, 여태껏 좌파가 가보지 못한 길을 여는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국 실정적인 현실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전혀 없다고 질책하기에는, 구조는 거리에 나오지 않는다는 말에 구조가 거리를 활보하고 있지 않느냐고 대꾸했다는 라캉식의 답변으로 그를 변호하고 싶을 정도로, 그의 논의들은 매우 진귀하다. 물신주의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가 없이 과연 어떤 실천이 가능할 것인가. 상기한 의문들을 무릅쓰더라도 그의 논의가 유용해지는 순간들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기에 섣불리 결론을 짓기보다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경합하는 여러 모델들 중 하나에 내기를 걸었던 작고한 거장의 사유를 들여다보고, 우선은 차분히 그의 작업들을 음미하는 게 정도일 것이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전문을 번역을 해두고 싶지만, 일단은 파편적인 번역과 가벼운 평들을 적어둔다:



포스톤이 말하는 역사적 우연성의 영역은 상부구조, 정치적 변화들인 것으로 보인다. 반면 역사적 필연의 영역은 토대의 수준에 놓인다. 이는 이글턴이 말하는 토대-상부구조의 관계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것이다. 즉 토대는 객관적인 물적조건이며, 정치적 실천들이 상대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실천의 조건을 형성하는 실재이고, 반면 상부구조는 그 지반 위에서 가능한 실천의 영역인 것이다. 여기서 포스톤은 필연에 있어 우연의 관계, 자본주의적 발전에 있어 민주주의의 관계에 관해 나름의 답을 내놓고자 한다.(94) 광대한 차원의 역사적 패턴들은 자본주의의 동학에 있으며, 이는 계획에 의한 사회적 협력의 이점과 시장에 영향을 받는 모델의 비교에 대한 논의에서 뿐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들에서도 간과되어 왔다. (부러 계획경제를 얘기하는 부분에서 자본축적을 얘기하는 것은 메자로스가 자본 시스템이라 부른 ‘추상노동’의 기제가 작동하는 한 그 체제가 시장에 의해 지배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본주의적 체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논하기 위함일 것이다)(94)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비결정성"을 존재론화 하지만, 포스톤이 보기에 비결정성은 사회, 정치적 행동의 목표가 되어야하지 그 자체를 사회적 삶의 존재론적 특징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비결정성은 외려 자본에 의해 발휘되는 제약이 극복될 때 가능해지는 것으로서 재전유 되어야 한다.(95) 비결정적인, 후기자본주의적 삶의 사회적 형식은 역사 외부에서의 "호랑이의 도약"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자본의 내재적 긴장에 의해 형성된 역사적으로 규정된 가능성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95) 돌이켜보건대 소련의 흥망성쇠는 내재적으로 국가 중심의 자본주의의 흥망성쇠와 관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95) 이 문제는 국제주의와 대항 헤게모니적 정치학의 문제에 밀접히 관련되어있는데, 이것이 이 에세이의 주제이다.(95) 소련 붕괴 이후의 국제주의는 긴 냉전에서 특징적인 국제주의의 형식들과 매우 다른데, 냉전의 국제주의의 형식들은 이원적이었고, 그 형식의 측면에서 국가주의적(nationalistic)이었다.(95) 그 형식은 다른 한 진영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이는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할 더 큰 전체의 부분들로서 양 "진영들"을 간주하기보다 한쪽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합리화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중국의 옹호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즉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원론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포스톤의 시점에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에 의한 특정한 상부구조적 표현이기에 일원적일 것이다)(95) 이는(진보주의자들이 마주한 딜레마를 문제화하거나 해방적 의도를 가진 비판을 공식화할 가능성을 지향하며 이 형국을 분석하는 것) 미국 정부에 의해 지지받는 많은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체제들 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국가들을 "반제국주의"로서 합리화하는 냉전의 구도의 이원론을 파열시키는 국제주의의 형식을 발전시키길 요구할 것이다.(96) 이 신-반-제국주의의 핵심에는 전지구적 발전에 대한 패티쉬적 이해가 있는데, 이는 곧 추상적인 역사적 과정에 대한 정치적이고 행위자적(agentive)인 관점에서의 구상적인 이해이다. 추상적이고 동학적인 자본의 지배는 전지구적 수준에서는 미국에 대한 것으로, 좀 변주된 방식으로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것으로 물신화되어왔다.(96) 이 세계관이 1세기 전의 것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인데, 여기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종속적인 지위는 영국과 유대인들에 의해 점령된다.(96) 그러나 직관에 반대되는 -스스로를 좌파적 입장에 있는 비판으로 이해하는 오늘날의 헤게모니 비판과 헤게모니에 대한 우파적 비판이었던 것 사이의- 이 유사성은 세계에 대한 물신화된 이해가 겹친다는 것을 가리키며, 그러한 이해는 오늘날의 대항 헤게모니적 정치의 구성에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갖는다는 것을 시사한다.(96) 이 새롭게 부활한 매니키즘은 당대에 신좌파를 전염시켰던 정치적 폭력에 관한 깊은 혼란의 재출현을 동반했다. 그 결과는 포스트포드주의적 시대에 충분한 비판을 공식화하는 데에 있어 대항 헤게모니적 운동이 마주한 난관들을 강조하는 대립의 형식이다. 이 대항 헤게모니적 대립의 이원론적 형식은 오늘날의 세계에 충분치도 않고, 100년전 제국주의적 경쟁관계를 규정한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데에 봉사할 수도 있다.(97) 911테러를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정치적 반응으로 독해하는 좌파들의 일반적인 주장은 폭력의 정치에 대한 이해 는 불충분한데, 그러한 폭력은 학대받고 상처입고, 억압된 자들의 반응(반동)으로 이해되어야하며, 행위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 일반적인 이해에서는 폭력의 특정한 형식의 정치학이 거의 심문되지 않는다. 폭력은 하나의 응답으로서 정당화 되는 것이다. 이 도식 속에서는 세계에 단하나의 행위자만이 있으니, 그것은 미국이다.(97) 이런 류의 주장은 그러한 불만이 표현되는 의미틀에 개입하지 않고 그러한 행위들을 수행하는 이들의 불만에만 집중한다. 그러한 주장들은 이러한 폭력을 추동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심문하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시민들을 향해진 폭력에 의해 암시된 류의 정치학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지도 않는다.97) 반유대주의가 아닌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가능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이 아랍과 무슬림 세계에 퍼져있는 반유대주의에 눈을 감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유대주의는 좌파에게 매우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한다.(98)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Russian: Протоколы сионских мудрецов) or The Protocols of the Meetings of the Learned Elders of Zion is a fabricated antisemitic text purporting to describe a Jewish plan for global domination. The hoax, which was shown to be plagiarized from several earlier sources, some not antisemitic in nature,[1] was first published in Russia in 1903, translated into multiple languages, and disseminated internationally in the early part of the 20th century. According to the claims made by some of its publishers, the Protocols are the minutes of a late 19th-century meeting where Jewish leaders discussed their goal of global Jewish hegemony by subverting the morals of Gentiles, and by controlling the press and the world's economies.-wiki)와 같은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랍세계에 도입되는 과정 언급.(98) 근대의 반 유대주의는 본질주의적 담론의 한 형식으로서, 이는 그러한 모든 형식들처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을 생물학적이고 문화적인 용어로 이해한다. 한편으로 반 유대주의는 그 포퓰리즘적이고 명백히 대항 헤게모니적이며 반세계화적 특징으로 인해 인종주의와 같은 다른 본질주의적 형식들과 구분될 수 있다.(99) 근대의 반유대주의는 막대한 권력을 유대인들에게 돌리는데, 이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이며, 전지구적이고, 만질 수 없다. 그 핵심에는 엄청나게 막강하고 비밀스러운 국제적 음모가로서의 유대인에 대한 개념이 있다. 나는 다른 곳에서 근대적 반유대주의적 세계관은 자본의 추상적 지배-인간을 그들이 지각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의 강제 속으로 종속시키는-를 국제적인 유대인들의 지배로 이해한다고 말한 바 있다.(99) 독일 사민당의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과 같은 이들은 한 세기 전에 반유대주의를 바보들의 사회주의라고 말했고, 우리는 오늘날 반유대주의를 바보들의 반제국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저항하는 의식의 물신화된 형식으로서, 대항 헤게모니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잡히지 않는 지배의 지구적 형식에 맞선 소수의 운동의 표현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위험하다.(99) 내가 아랍 세계에서의 근대적 반유대주의의 최근 격상에 대해 얘기하고자하는 것은, 그것이 물신화된, 반자본주의의 심원하게 반동적인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반유대주의의 격상을 단지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실수다. 이 경험적인 환원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단순히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반동으로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외려 미국과 이스라엘은 그들의 경험적인 역할을 훨씬 넘어서는 이데올로기 내에서 주체의 지위를 점유한다. 그러한 위치는 또한 1970년대 초반 이후의 엄청난 역사적 전환, 즉 포디즘에서 포스트 포디즘으로의 이행에 대한 참조 속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99) 이 이행의 중요한 측면은 (‘국제적’에 대비되는 것으로서)초국가적인 경제 네트워크와 흐름의 증가하는 중요성인데, 이는 영향을 발휘할 국가적 주권의 쇠퇴를 동반해왔다.(99) 포드주의의 붕괴는 국가 주도의, 민족적으로 정초된 발전의 시기의 종언을 의미했다. 그것이 공산주의적 모델이든, 사회민주주의적 모델이든, 혹은 제3세계의 국가발전주의적 모델이든 말이다. -> 상부구조의 한계로서 작용하는 토대의 변화에 따른 상부구조 모델의 변동 강조. 국가의 문제에서도 포스톤은 명백히 독일적 전통에 서있는 듯하다.(100) 신자유주의 이후로 쇠퇴한 아랍 세계의 상태야말로 위에서 제시한 근본적인 역사적 재구조화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 전환은 1967년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패배보다 더 아랍의 민족주의를 약화시켰다.(100)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실패가 만든 공백에서 자라난 이슬람주의와 근본주의는 이슬람의 쇠퇴 이유를 명백히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다.(101) 미스터리한 역사적 힘의 부정적이고 현혹적인 효과를 마주한 대항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반유대주의. 이들은 위협으로 이해된 어떤 세계를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물신화된 반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설명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설명은 반실증적이지만, 70년대 이후의 이슬람의 종교적 퇴행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파시즘이 실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뚤어진 저항이라는 것은 실정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것처럼, 구조조정의 광풍을 맨 처음 경험한 미국의 집배원들이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실은 고통의 표현인 것처럼.(101) 이슬람의 테러를 단순히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이해할만한 일 정도로 덮어 놓는다면, 미국은 글로벌 자본주의 자체와 동일시 되어 물신화되며, 오늘날 글로벌 자본의 동학에서 부상하고 있는 유럽 연합의 지위를 간과하게 된다.(102) 포스톤이 여기서 말하는 무력함(helplessness)이란, 911테러 이후 나온 좌파들의 반응이 결국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순을 굉장히 나이브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의미이다.(102) 과거 60-70년대의 반전운동은 내부의 차이는 있었으나(그들을 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세력으로 보든, 그들을 냉전구도에서는 포함되지 않는 해방세력으로 보든),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진보적인 변화를 위한 더 일반적인 투쟁에서의 하나의 표현이었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그러나 오늘날 반전 대중동원 세력은 그들과 많이 구별되는데, 요컨대 그들의 미국에 대한 반대는 더 진보적인 대안의 이름으로 행해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의 바트 정권을 보라.(103) 최근의 반전 동원은 과거의 반전 운동이 가졌던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변화의 전체 담론이 대문자 옳음이길 그만두게 된 것이다.(103) 미국의 전쟁에 반대하며, 동시에 이라크의, 더 일반적으로는 중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운동이라는 맥락에서 요구된 것을 표현하거나 구성하는 데에 최근의 대중동원은 실패하고 있다.(103) 중동에 대해 보다 섬세하고 비판적인 관점을 줄 수 있는 이라크의 진보세력을 어떤 대중동원도 참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며, 이는 좌파의 실패를 나타낸다.(103) 현재의 상황에서 아이러니 한 것 중 하나는, 미국에 대한 반대가 더 이상 진보적 변화의 옹호와 관련되지 않는 물신화된 "반 제국주의적" 입장을 채택함으로써,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미국의 신우파가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전통적으로 좌파의 언어였던 것을 전유하고 심지어 독점하도록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103) 물론 부시체제는 중동의 민주적 변화에 대해 말하지만, 그건 무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오직 부시정부만이 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좌파가 그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는 냉전과 그에 관련된 이원론적 세계관의 유산이다.(104) 한 세대 전에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진보적으로 여겨지는 해방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는 것을 수반했다면, 오늘날 그것은 그자체로 대항 헤게모니적이라 여겨진다.(104) 진보적인 진영이 어떤 공간적인, 본질적으로 이원론적인 틀으로서 정의되는 한, 진보적인 이라는 개념의 내용은 국제적 수준에서, 점점 힘의 지구적 균형의 우연한 기능으로 될 것이다.(104) 좌파들은 어떻게 유일한 정치적 문제가 미국 정책밖에 없는 공간으로 후퇴하게 되었나? 포스톤은 정치적 폭력의 문제를 참조하여 이 문제를 우회하겠다고 말한다.(104) 그러한 테러는 베트남 공산당이나 칠레와 같은 곳에서 20-30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역사적인 현상이다.(104) 1980년대에 아프리카 국민의회의 중앙위에 들어온 백인 남아공 시민들에 대한 테러 요구. 이는 복수의 욕망이자 이를 통해 아파르트헤이트에 백인들이 반대하게 될 거라는 계산 하에 제기된 것이었지만, 중앙위는 이를 전략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적 문제에서 반대했다. 해방을 위한 운동은 시민을 주요 타겟으로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105) 911공격은, 68에 있었던 소련의 프라하 침공과 유로코뮤니즘의 몰락만큼이나 근본적으로 신좌파들 사이에 널리 퍼진 폭력과 저항의 개념들을 문제에 부쳤다.(105) 조르주 소렐에 대해 언급하며 포스톤은 좌파가 폭력을 낭만화하며 점차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의 이념 자체와 상관없는 무장운동들을 지지해갔던, 오늘날 패착에 책임이있는 주관적 요인을 분석한다.(106) 창조적이고, 혁명적인 폭력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역설적인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을 표현하며, 승인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창조를 허용하는 파괴의 물결을 통해 세계를 계속해서 영구혁명하는 자본주의 말이다. 실존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폭력을 통한 개인의 자기구성의 개념은, 개인에게 자본주의에서의 통합하는 단위들을 특징짓는 것을 투사하는 것을 수반한다.(106) 전통적인 좌파에게 폭력은 단지 어떤 사회를 위한 투쟁에서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소렐, 파레토, 파농에게 폭력은 그 자체로 찬미되고 있으며, 그 자체로 해방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돌이켜보건대, 우리는 실존주의적 폭력이 부르주아 사회의 파열에는 효과를 미쳐왔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국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이행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107) 68을 감싼 무정부적인 분위기에 대한 서술.(107) 폭력에 친화적인 실천들의 한계를 논하며 그것이 60년대의 신좌파들이 기댄 소렐주의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하는 포스톤(108) 60년대의 폭력의 찬미는 근대 세계에서의 행위의 능력에 대한 심각한 실망에 의해 야기 된 것이다. 즉 그것은 정치적 의지, 정치적 행위자의 실제적 효과에 관한 기저의 실망을 표현했다. 고도화된 무력함의 역사적 상황에서, 폭력은 무력함의 분노를 표현했고, 그러한 무력함의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이행의 도구라기보다는 외부자이자 타자로서 자기 구성의 행위가 되었다.(108) 그것이 포드주의적 세계의 관료적 기초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자본의 동학에 의한 그 세계의 파괴와 공명한다.(108) (나이브한 폭력을 예찬하는 견지에서 이해된) 그 저항이라는 개념은 무엇이 저항을 받고 있는지 혹은 연루된 저항의 정치- 즉 비판, 대립, 봉기, "혁명"의 결정적인 형식들의 특징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포스톤은 저항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이 어떤 저항인지가 결정적임을 얘기하고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저항하지 않는 세력은 없기 때문이다.(108) 글로벌 신자유주의 질서와 미국을 완전히 뒤섞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이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109) 오늘날 우리는 새롭고 확장된 수준에서의 제국주의적 대적의 시대로의 귀환의 시작을 보고 있을 것인지 모른다. 계속되는 긴장이 대두되고 있는 지역 중 하나는 대서양 권력과 프랑스-독일의 공동통치를 중심으로 조직된 유럽 사이에 놓여있다.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부분적으로 이 경쟁관계에서의 오프닝 신호탄이라고 볼 수 있다.(109) 한 세기 전 독일은 베를린-바그다드 철로를 통해 영제국에 맞서려했고, 더 최근엔 이라크의 바트 정권이 프랑코-독일의 클라이언트 국가가 되는 중에 있었다. 2000년에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가 석유 판매를 주재하는 통화로서 달러를 유로로 대체한 첫 번째 국가가 되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세계의 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에 도전이었다. 문제는 유로의 블록이 미국에 비해 더 반동적이냐 진보적이냐가 아니라, 이 행위, 그리고 미국의 반응이 지구적 수준에서의 자본간 경쟁관계의 시작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는 것이다.(109) 걸프만과 그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다지려는 미국의 시도가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부시행정부의 이데올로그에 의해 사용된 용어법과는 다른 의미이다.(109) 1차 대전 직전에 독일의 군부는 반동적이고 귀족적인, 야만적인 러시아로 대표되는 중앙 유럽에 대한 것으로 전쟁을 포장하는 데에 기여했고, 이는 독일 사민당이 전쟁을 찬성하도록 이끌었다.(110) 좌파는 이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