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tudy

Sven Lütticken, "Filming Capital: On Cinemarxism in the Twenty-first Century" in <Aesthetic Marx>(2017)

by 정강산 2020. 4. 4.


자본의 재현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히토슈타이얼, 알렉산더 클루게, 앨런 세큘라와 노엘 버치, 재커리 폼왈트의 작업이 유통되는 과정과 그들이 주제를 형식화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춰 역사적 형식분석을 시도하는 글이다. 마르크스의 작업을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미학적 차원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글의 도입은 좋았으나, 2절 Representation and Accumulation 이하로 문제적인 주장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비물질 노동과 인지 자본주의론에 기대어서 인지적이고 정동적인- 예술적 노동의 편재와 21세기 육체 노동의 비가시화를 연관 짓는 견강부회가 거슬리고[각주:1], 그 연장에서 "일반지성"에 대한 해석을 완전히 자율주의자들에 기대어 얘기하는 부분이 그렇다[각주:2]. 이를테면 그는 3절 이하에서 마르크스가 그룬트리세를 통해 언급한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분리의 폐지상황-'노동이 그 직접적인 형식에서 부의 원천이길 그만두자마자, 노동시간은 부의 척도이길 멈추는 동시에 멈춰야만 하며, 따라서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의 척도이길 멈춘다'-이 포스트 포드주의적 실천에서 부분적으로 동반된다고 얘기한다. ""비물질 노동"의 부상이 부의 원천이자 척도로서의 양적으로 표현가능한 평균적인 노동력이라는 추상노동의 지위를 파괴하는 데에 복무한다"는 것이다(242).

 그는 위의 주장을 근거로하여, 클루게의 작업에 등장하는 모든 인터뷰이들이 무보수로 모종의 정동적이고 지적인 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작가들의 노동은 퍼포먼스를 상연하는 것, 그런 한에서 그것의 관람 또한 정동적 노동의 투여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히토슈타이얼이 한 렉쳐에서 언급한 "사회적 공장"[각주:3]으로서의 미술관은 이미 생산의 현장과 여가의 공간을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을 예증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추상노동은 애초에 그 노동의 성격이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상품생산 체계 내부에서 임노동이 성립하는 한 제거될 수 없는 총노동의 특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정동적인 작업을 요구하는 노동이든,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같은 지식을 요구하는 노동이든, 그외 무형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이든 그 모두가 이윤율을 증가시키려는 관심 속에서, 착취율의 상승시키려는 조작과 관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모이쉬 포스톤이 적절히 보여주었듯, 애초에 가치는 실정적으로 추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여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에서 노동 자체가 경유하는 형식이다. 

 덧붙여, 일찍이 문화산업의 대두를 경고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장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정동의 식민화, 미적인 것의 식민화, 내밀한 충동과 표현들의 계량화와 상품화로서- 가치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법칙의 확산과 자본에 매개된 삶의 영역의 편재를 지적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벤 뤼티켄에게 문화산업의 심화는 외려 포스트 포드주의에 따른 가치법칙의 붕괴를 암시하는 것으로, 부당하게 굴절되어 이해되고 있다(p.238을 비롯하여 2-3장 전반이 이를 반복하여 주장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다). 60년대의 자본주의가 이윤율의 저하를 해결하기 위해 생산을 재정비하고 부분적으로 도입한 생산방식이자 노무관리의 기술로서 포스트 포드주의를 이해하는 한, 그것이 가치법칙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알리바이로 사용되진 않을 것이다. 

 상기한 부분을 제외하면 최근의 급진적인 작업들을 나름 열심히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더불어, 예술 자체의 생산양식(“영화의 생산 논리라는 표현으로 지적되는)과의 관계 속에서 유물론적으로 맥락화 하려하는 접근 자체는 좋다. 이하는 글 일부에 대한 짧은 번역으로, 편의상 다소 구부려서 해석한 부분이 많고 파편적이니 참고용으로만 볼것.



 '미적인 것의 영역에 제한 되지 않는 미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미학(한스 마그누스 엔첸 베르거) 강조.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오는 '크루프의 사진/AEG공장은 그들의 기능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자본에 대한 마르크스 분석의 차원을 간취한다. 1928년 에이젠슈타인은 '주식 거래는 주식을 교환하는 이미지로 나타내져선 안되며(프리츠 랑의 닥터 마부스, 더 스필러에서 처럼), 변증법적 몽타주로 연결된 무수한 작은 디테일들로 나타내져야 한다'고 말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미학적 난관을 제시한다; 금융자본의 움직임은 재현 너머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노동은 이론적으로 재현될 수 있을 거 같지만 종종 그렇지 않다. 특히 영화는 노동을 가려왔다. 파로키가 썼듯 역화의 역사는 "공장을 떠나고"와 함께 시작했다면, 그 역사 전체에 걸쳐 영화는 "공장으로 끌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공장에 의해 격퇴되지도 않았다. 노동 혹은 노동자에 대한 영화는 주요 장르가 된적도 없고 공장 앞의 공간은 주변적인 것으로 있어왔다."


초기 마르크스와 성숙한 마르크스에 대한 마르쿠제의 의견 언급: '경철 수고 시기의 글들은 자본 이후에 그 이론적 공간과 기능을 찾는 것으로 읽혀져야 하며 마르크스가 소외되지 않은 생산양식, 객관세계의 미학적 구축, 사적 소유가 아닌 개인적 소유에 대한 개념을 발전 시키는 것은 초기 저작들에서다'. 그러나 이미 마르크스의 자본 그 자체가 정치경제의 미학에서의 어떤 실행이라는 심증이 있다.


마르크스는 1842년 샤를 데 브로제스의 아프리카 물신주의에 대한 고전적 논문을 공부하는데, 이는 그가 헤겔에게서 맞닥뜨린 것이기도 하다. 물신주의는 소위 말하는 예술의 등장 전의 문화, 종교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우상숭배(idolatry)보다 낮은 단계이며, 즉 인간이 물질을 만들기 전, 임의의 대상들을 섬기던 때이다. 그래서 헤겔에게 물신주의는 예술의 역사에서 설자리가 없고, 잘해야 선사시대의 것이었다. 그러나 "적절한 예술"영역 바깥에 있는 물신의 공간은 정확히 헤겔의 관념론이 오직 간접적으로 다뤘던 미학적 문제(모호한 논리를 따라 나타나는, 자연 세계 외부에 서지만 정신의 감각적 외양을 나타내지는 않는 대상들의 문제)를 지시한다. 맑스가 물신주의의 개념을 상품과 그 "신학적 번뜩임"에 적용했을때 그는 문제가 정치적인 것인 만큼 미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가리켰다. 상품의 가치는 그들에 투여된 노동에 의해 결정되는 한편, 이 노동은 대상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데, 그 가격은 다른상품들과 그것의 사회적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의 작동을 명료하게 하고 그들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이 명백히 비교적 광범한 작업을 요구한다는 것은 <자본>의 확장된 분석을 취한다. 맑스 시대의 예술에서 이 기획의 역사적 사례는 리얼리즘 소설이었다. 20-30년대에는 루카치의 리얼리즘의 유효성에 대한 옹호와 선결정된 실재의 재현에 대한 모든 믿음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비판이있었고, 지난 몇십년간 제임슨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역사적 시퀀스에 두고 이들이 자본주의의 이어지는 단계들을 반영하며 실재로부터의 점진적인 추상화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다. 부르주아 리얼리즘의 시기에 화폐적 등가물이 "대상의 특질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했었다면, 20세기 초에 교환가치의 법칙은 "안정적인 실체와 그들의 통일된 동일성에 대한 낡은 개념으로부터의 철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금융화된 자본주의의 승리와 "(자본이 그러하듯) 생산도, (화폐가 그러하듯) 소비도 필요로 하지 않는 화폐적 단위의 작동의 승리를 나타낸다."


"모던(혹은 낭만주의 까지도)의 시기처럼 문화가 현실세계로부터 물러나고 자율적인 예술의 공간으로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외려 현실세계가 이미 문화로 가득차 그것에 식민화 되었기에 외부를 갖지 않는-이전의 현실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문화 영역,"을 시사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식민화 되었다-에서 멈춘다면 보드리야르적이겠지만, 그것이 계속되는, 불균등한 효과와 사회적 적대를 생산하는 식민화, 착취, 축적의 과정에 종속되어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제임슨의 전반적인 분석에 조응할 것이다.(독자주-이는 보드리야르에게는 실재에 대한 고려가 희소하나, 제임슨에게는 실재의 운동과 긴장으로 인해 계속해서 열린공간이 등장하기 때문으로 보임) 제임슨이 '인지적 지도그리기'를 말할때, 그는 이 불균등발전의 대립적인 실재의 측면들을 나타낼 영화의 힘에 집중하고 있다. 


내 주제도 필름에 관한 것이다. 최근의 몇몇 영화와 비디오 작업들을 분석하면서(독자주-뤼티켄은 각주에서 이것이 선별되는 과정은 체계적이진 않았다고 고백한다.), 나는 완연히 엷은 대기로 녹아없어지는 실재의 측면들을 나타내고 매핑하는 그들의 방법에 대해 얘기하지만 또한 상품으로서 그들 영화의 상태와 영화를 가능케하고, 다시 그들 작업들에 의해 가능해지는 생산관계와 분배양식 또한 중시할 것이다. 그들이 미학적 실천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 한 그러한 영화적 에세이는 어떻게 상품이 세계를 가로질러 운항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만 기획들을 좇지 않으며 세계에 오고, 그를 통해 움직이는 그들 자신의 방식들을 통해서도 그렇게 한다. 


1.몽타주의 생산적 논리

노엘 버치는 엘런세큘라와 함께 The Forgotten Space(2010)를 제작했는데, 그 부제는 '한 필름에세이'였다. 노엘 버치는 에세이 필름이라는 개념을 소개하고 발전시키는데 역할을 했었는데, 이는 피쳐 필름과 관례적인 다큐멘터리에도 맞서는 것이다.(독자주-뤼티켄은 그러나 한스리히터가 Der Filmessay(1940)에서 그 용어를 먼저 다뤘음을 지적한다) 


"나는 에세이 필름을 고전적 의미에서의 '다큐멘터리'에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했다.(실재를 객관적으로 다룬다고 하는). 내가 적수로 삼은 것은 Flaherty와 Grierson, GPO였다. 에세이 필름은 생각을 이해시키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잊혀진 공간>은 어떤 의미에서 <피쉬 스토리>의 연장에 있기에 세큘라 작업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왔다고 볼 수 있고, 일단 버치의 것보다 세큘라의 기여가 좀더 이해하기 쉽다. 세큘라의 포토에세이 <피쉬 스토리>(1989-1995)처럼, <잊혀진 공간>은 해양 운송과 그것이 수반하는 노동 조건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자본>의 은밀한 영화적 해석으로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추상(이 맥락에서는 해운컨테이너에 의해 구체화된 추상의 실재)에 대한 에세이이다. 이는 세큘라의 말처럼 "쇠박스에 대한 있음직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중 완전히 자동화된 항구에 대한 부분은 실로 기계 발레(ballet mécanique)가 된다. 1970년대부터 지배적으로 되었던 컨테이너화는 상품을 올리고 내리는 데 필요한 육체노동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구는 자동화되고 바다와 항만은 "잊혀진 공간"이 되었으며 자본주의는 정보기술 시대의 그 "탈물질화된" 재발명을 자랑했다. <잊혀진 공간>은 사용가치를 희미하게 하고 별개의 질들을 측정가능한 특질로 전환하는 교환가치를 강조하는, 그리고 노동, 삶, 전체 공동체를 그 과정에서 변형시키는추상화의 물질적 작인으로서의 컨테이너를 빡세게 찍는다. 


네덜란드기반의 공공미술 단체에 의해 요청받은 이 프로젝트는 로테르담과 인근 분지들을 잇는 유통개발 프로젝트를 찍어달라는 요청에서 비롯되었고, 이 작업의 첫부분 "피닉스와 맘모스"에서 이부분을 다룬다. 또한 SKOR와 감독이 조력자와 펀딩을 구하는 동안 이 철상자들을 어떻게 찍을지 오랜 시간이 투자되었는데, 여기서 중국에서 만들어져 폴란드에서 소비될 푸우 인형이 사라지게 된다. 만약 푸우가 들어갔으면 추상적인 컨테이너에 의인화된 얼굴을 줬을 것이고, 컨테이너는 그 유통 전체의 맥락보다는 그 내부의 상품의 종류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을 것이다.


피터오스본이 말했듯 영화의 생산적 논리는 20세기 예술작품의 생산적 논리이다. 루카치가 항상 소설에 초점을 뒀다면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자본주의 생산에서 영화의 역할과 그 심원하게 양가적인 해방적이고 혁명적인 잠재성을 제시했다. 그러나 셀룰로이드가 퇴물이되고 필름 파이낸싱, 생산, 분배, 소비가 모두 결정적인 변화를 맞이하는 21세기 초에 관해서는 어떨까? 그 형식에서 <잊혀진 공간>은 반항적이게도 고전주의적인, 피쳐필름의 어색한 괴물처럼 보이는 반면, 알렉산더 클루게의 <고대로부터의 뉴스>(2008)는 현재의 생산적 논리에 과잉 적응한 것처럼 보인다.


클루게의 <뉴스>는 <자본>을 찍겠다는 1927-28년 에이젠슈타인의 실패한 기획을 재방문하는데, 그것은 짧은 단편들의 끝없는 시리즈를 포함하는 DVD세트의 형식이고, 그들 대부분은 클루게와 다양한 독일 쉬르캄프 문화의 대표자들, 역사적 인물로 변장한 코미디언 헬그 쉬나이더와의 대화이다. 이는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데, 클루게에게 시간은 중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 그 기획은 명백히 방송에 대한 텔레비전적 종사(enfilade)에 대한 선호 속에서 에이젠슈타인의 변증법적 필름 몽타주를 포기한 그 작품의 시간에 대한 것이다. <뉴스>는 매체와 생산, 분배에서 그 구조 자체에 생긴 발본적인 변화를 반영한다. 퍼포머들에 대한 클루게의 흐트러진 조립이 변증법적인 한에서, 그것은 개방되어있는 뒤섞인 담화의 변증법인데, 담화는 주기적으로 궤변의 명인으로 전락한다. 


클루게의 띵작에 대한 리뷰에서 제임슨은 에이젠슈타인은 일화적이지 않은(non-anecdotal) "산만한(discursive) 영화"를 이론화했었지만, <자본>을 촬영하는 것은 산만한 것과 일화적인 것의 변증법을 필요로한다고 말했다. 누군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상황들에서의 추상을 추적하려 할때, 그는 예시를-따라서 일화를-말하는 것을 거의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클루게에게 담화 자체는 종종  명인 퍼포먼스와 같은 일화적 종류가 되는 경향이 있는데, 반면 세큘라와 버치에게 영화적 "일화들"은 결국 음악에서와 담화 모두의, 썰물과 밀물이자, 진정한 리듬적인 몽타주인 전체로 재통합된다.


컨테이너의 지리적 궤적은 컨테이너화의 효과와 여러 측면들을 탐사하도록 하는데, 영화는 클루게의 <뉴스>보다 선형적이다. "이미 존재하는" 푸티지를 사용하는 몽타주처럼 "에세이 필름" 요소의 시그니쳐 부족은 누군가로 하여금 에세이로서의 그 지위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할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그 에세이적 특성은 휴머니즘적 일화로 축소되길 거부하며 대신 사회 경제적 분석에 이르는 나레이션을 한편에, 다른한편에 분석을 선형적인 방식으로 추동하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이미지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씬들과 시퀀스들은 분석에 제공되는 여담(digressions)에 기여하며 "외려 들쭉날쭉한 구조"를 향한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데에 잘못된 중단과 재개, 서성거림이 많다면 이 또한 이 영화가 설명적인 렉쳐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다.


다양한 정도로,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작업들은 소비에트 몽타주 스쿨과 1960년대 후반의 "시네맑시즘"에 빚지고 있다(고다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러나 변증법적 몽타주와 영화의 생산적 논리는 더 이상 전과 같지 않다. 세큘라와 버치는 고전주의의 형식에 가까운 반면 클루게는 시/청자에게 잽핑((특히 광고를 피하여)리모컨을 돌리는 행위) 편집과 그 자신의 비선형적인 변증법에 도달하는 것을 허용하면서 텔레비전적 논리를 포용한다-이는 제임슨이 프로이드적 자유연상의 마르크스적 형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상영이 극장을 벗어난 장소에서, 전통적인 필름의 형식을 벗어난 매체를 통하여 이뤄지는 것을 '포스트 시네마적'이라 하는데, <잊혀진 공간>은 이런 포스트 시네마적 시대의 생산적 논리에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관중을 찾고 있는 영화이며, 이 과정은 끝나지 않는 과업이다. 버치는 그가 옹호한 에세이 영화와 같은 종류의 것은 "낡았고, 시청률(ratings)이 왕이며, 관객은 조금이라도 복잡한 것을 따라가기엔 너무 벙어리다"라고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의 아트하우스에서 상영 했을때 오직 130여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텔레비전 상영은 명백히 더 높은 시청률을 보였는데, 그러나 세큘라와 버치는 TV에 맞춰 더짧은 편집판을 만들어야 했다.


누군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촬영하려한다면, 에이젠슈타인에서처럼 이미 (그러나 불완전하게) 후기 자본주의적인 입장에 대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는 명백히 그 자신의 영화 주제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그 안에서 그에 맞서 작동시키고 있는 그 비합리적 논리에 개입하고 그것을 전경화할 수 있을까? <잊혀진 공간>은 전지구에 걸쳐 운항되는 박스들에 의해 그려진 선을 추적하지만, 필름 자체의 분배에 대해서는 어떤가? 그것은 디지털 형식으로 상영될 것이기 때문에, 2011년 암스테르담 전시 Marx Lounge와 같은 일반적인 필름 유통에 의해서는 예견되지 않은 맥락에서 상영하는 것은 더 흥미로운 선택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노동과 여가의 분할선이 존재하길 멈춘 문화적 노동의 체제에 그 영화를 새겨넣는 것이다.


(...)


  1. 예컨대 이에 따르면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은 자본에 의해 고용되어 총노동으로 수렴할 수 있느냐 여부가 아니라 물질노동/비물질노동이라는 유사 존재론적 수준에서 파악되며, 이 구분을 받아들이더라도 '세계의 공장'이 된 아시아 혹은 신흥 공업국가들에서의 물질노동의 범람을 설명할 수 없다 [본문으로]
  2. 마르크스는 지식일반 자체가 상품이 되는 순간에 대해서 논한바 없고 생산력의 발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지식에 관해서만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으로]
  3. 이는 일찍이 수십년전 이탈리아 자율주의자들에 의해 명명된 개념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