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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리얼리즘의 이율배반: 정동, 혹은 신체의 현재

by 정강산 2020. 10. 11.

리얼리즘의 이율배반: 정동, 혹은 신체의 현재

정강산

 

<The Antinomies of Realism>1"The Twin Sources of Realism: The Narrative Impulse"에서 제임슨은 이야기(tale)와 소설(novel) 혹은 레씨(récit)와 로머(roman)의 서사적, 장르적 차이를 언급하며, 그것을 이야기하기(telling)와 보여주기(showing)의 구별, 운명과 영구적 현재의 구별을 통해 규정한다. 제임슨이 요약하는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레씨는 과거시제적인 시간이며, 완료된 사건의 시간, 이미 역사에 기입되어 어떠한 창발과 개입도 불가능한, 불가역적인 시간인 반면, 소설은 임박한 사건의 시간이자 미래를 결정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결단의 시간이며, 그런 의미에서 열린 시간이다.[각주:1] 제임슨은 데카메론에 등장하는 일화 중 하나인 <Federigo's Falcon>을 레씨의 전형적인 사례로 꼽는데, 일화적인 것을 특징으로 하는 레씨에서 이야기는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장면을 제시하거나 서사의 현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기에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결국 레씨와 로머의 구별되는 시간성은 각각 인격적이고 정체성과 관련된 과거-현재-미래의 연속적이고 연대적인 시간과, 비개인적이고 비인격적인 의식이 지니는 영구적인(eternal) 현재라는 시간으로 분할되며, 통시성과 공시성의 분할로 이어진다.[각주:2] 그리고 제임슨은 리얼리즘이란 이 양 시간성의 극들의 교차점에 있는 것이자 이들의 긴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이라 설명한다. 어느 한쪽의 편에서 그것을 규정하려는 순간 외려 그 본질로부터 멀어지는 이율배반으로서의 긴장 말이다. 이렇듯 제임슨이 리얼리즘에 실체화된 규정을 도입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근대적 재현 체제의 신호탄으로서의 리얼리즘 자체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형식화 되어있음을 주장하기 위함일 것이다.


한편 2“The Twin Sources of Realism: Affect, or, the Body's Present”에서 그는 레씨를 선형적 시간, 모든 것이 이미 일어난 뒤의 연대기적 시간성, 과거시제의 시간성을 체현하는 형식으로 볼 것을 명시적으로 제안하며, <Federigo's Falcon>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됨으로써 사건의 강도가 점차 약해지며 이야기 전반의 긴장이 감소하는 방식으로 봉합됨을 지적한다. 이야기에서 일상적 삶으로의 이러한 전환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시간성과 관련된다. 이러한 서사에 동반하는 것은 어떤 부드러운 적막함(mild desolation)인데, 제임슨은 이러한 슬픔과 같은 기분이 리얼리즘 자체의 출현과 관련되는, 네러티브적 충동의 대립쌍으로서 정동적/정서적 충동을 예시하는 것이라 본다.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시간성은 포스트모더니티에 대한 제임슨의 개입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맥락화 되는데, “The End of Temporality”에서 제임슨은 우리가 시간적이거나 현상학적인 연속성의 감각의 퇴조에 따라 영속적인(perpetual) 현재에 살게 됨으로써 동시대의 부르주아적 경험의 퇴조를 읽어낸 바 있다. 제임슨에 따르면 동시대 혹은 포스트모던의 영속적인 현재신체로의 환원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현재 자체로의 경험의 경향적인 환원에서 남게 되는 것이 신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는 어떤 감각이 다른 감각들에 비해 우선시 된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신체적 감각이 고양된 존재로 격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 고립된 신체가 보편화된 느낌(sensation)의 더욱 글로벌한 흐름을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이 곧 제임슨이 정동(affect)”이라 부르고자 하는 감흥이다.[각주:3] 제임슨은 이 정동이라는 개념이 그를 통해 인간관계와 주체성의 형식에서 일어난 새로운 전환을 표시하려는 최근의 여러 이론들과 관련된다는 점을 알지만, 그는 정동을 전유하거나 철학적으로 바로잡고자 하기보다, 정동을 역사화하고 재현 및 문학사의 문제로의 그 수입을 한계 짓는 이원적 대립 내부로 그것을 통합함으로써, 이 용어를 제한되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자 한다.[각주:4]


이를 위해 제임슨은 정동/정서를 감정(emotion)과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전통적으로 감흥(feeling)과 감정(emotion)의 오랜 구분이 있어왔음을 언급하고, 여기서 감흥이란 보다 기술적 엄밀함을 담보하는 정동/정서로 대체될 수 있음을 논한다. 이는 정동[각주:5]의 대립항(으로서의 감정)에 대한 용법을 조정함으로써 보다 확실해지는데, 그에 따르면 감정이란 명명된 감정으로 재규정될 수 있고, 이를 통해 감정과 정동의 구조적 차이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의 개입을 수반하는, 이 문제에 관한 더 나아간 차원을 강조할 수 있다. 이 새로운 함축(“명명된 감정으로서의 감정)이 의미하는 것은 정동이 언어로부터 얼마간 벗어난다는 것, 사물들과 감정들에 대한 명명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며, 반면 감정이란 두드러지게도 이름들의 배열로 분류된 현상이라는 것이다. 사랑, 증오, 분노, 두려움, 역겨움, 기쁨 등등의 이름들은 전통적으로 색들의 체계와도 같이 현상에 대한 어떤 체계로 이해되어왔고, 그 체계는 문화와 시기별로 달라지는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제임슨에게 보다 명료해져야 할 것은 체계 자체라기보다는 이름의 사물화하는 효과(reifying effect) 바로 그것이다. , 말의 존재는 감정의 경험에 대해 외적인가? 만약 감정이 존재 차원에서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이 아니라면, 몇몇 절대적인 구성주의자들이 주장할 수 있듯, 아직 표현되지 않은 감정에 대한 분절언어 자체만으로 감정들이 퍼져나갈 수 있는 모든 창구가 열리게 될 것이다. 어찌되었든 물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되곤 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름이 필연적으로 감정을 물화시킨다는 것은 지명(nomination)에 선행하는 참된 경험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는 본래적인 개념에 대한 헤겔의 양가적인 배열을 잊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기획과 욕망을 객관화(대상화)하고, 그들을 풍부하게 하는데, 명명이란 그러한 객관화에 있어 근본적인 요소이고, 소외는 어떤 보편적인 과정인 것에 대해 유일하게 가능한 하나의 운명이라는 것 말이다.[각주:6] 제임슨은 새롭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일상의 인간 존재들에게 있어 무의식적이지 않았다면 최소한 휴지기에 있었던, 그러나 이내 삶의 재조직화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게되는- 존재의 발견되지 않은 상태를 분절해온 많은 단어들의 예가 있음을 지적한다. 19세기에 있었던 “ennui(권태, 지겨움)”의 전유이든, 다소 종교적인 함의의 “anguish(비탄)"을 대체한 “anxiety(불안)”이든, 우리가 정동이라 부르는 감흥에 대한 고대의 스콜라적 용어이든, 이들은 새로운 질문을 열어젖히며 존재를 새롭게 정향시켜낸 바 있다. 그렇다면 정동이란 그들을 의식으로 떠오르게끔 하는 이 이름에 앞서 존재했는가, 혹은 그 단어야말로 존재론적 실재 자체를 서서히 조정했는가?


제임슨은 물론 정동 자체가 그 명명의 과정에서 물화될 수 없느냐의 문제는 열려있지만, 그 역사적 언어가 어떤 주어진 지점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관한 제약을 구체화한다면, 존재론적 질문은 역사적 질문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명명된 감정과 정동을 구분함으로써, 그는 정동이 언어에 저항하고, 그로서 그것이 예술가들에게 그 본질을 파악하도록 하는 새로운 재현적 임무를 제기한다고 본다.


이에 더해 제임슨은 레이 테라다(Rei Terada)의 구분을 경유하여, 정동은 신체적 감흥이라면 감정은 의식적 상태를 가리킨다고 설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감정이 대상들을 갖는다면, 정동은 신체적 느낌 자체이다. 이는 정동이라는 개념에 실정적인 내용을 부여하는 것인데, 감정의 실정적인 특징이 명명되는 것이라면 정동의 실정적 내용은 신체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때 언어는 신체, 혹은 최소한 살아있는 신체와 대립된다. 따라서 감정들의 낡은 체계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되는 언어의 위기와 함께,[각주:7] 쓰여져야 할 신체의 새로운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누군가는 지각 및 주체성의 재현방식 등에서의 역사적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발자크 소설의 서술방식과, 그로부터 한 세대 이후의 플로베르의 작업을 비교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이 경우에서, 제임슨은 정동의 부상과 언어 및 재현에서의 현상학적 신체의 출현을 관련짓는 것, 명명된 감정들의 체계와 19세기 중반 경의 문학들에서 등장하는 이름 없는 신체적 상태들의 출현 사이의 경쟁을 역사화 하는 것은 적절한 작업일 수 있다고 보며, 플로베르와 보들레르를 감각중추(sensorium)의 전환의 표지로 읽는데, 그들보다 앞선 세대에서 발자크가 감각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이는 명확하다. Maison Vauquer라는 펜션의 방에 대한 발자크의 유명한 묘사는 답답하고 퀴퀴하고 쿰쿰하고 쉰듯하며 차고 축축하지만, 언어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감흥에 대해 얘기한다.[각주:8]


제임슨은 이름 없고 분류되지 않는, 유동하는 감각에 대한 발자크의 묘사가 정동에 가까워 보일 수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어떤 정동에 대한 환기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는 발자크의 묘사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는 데에 있다. 발자크에게 있어 어떤 육체적 느낌처럼 보이는 모든 것은 언제나 무언가를 의미하며, 그것은 주어진 캐릭터의 도덕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즉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어떤 의미이자 알레고리인 것이다. 그러나 플로베르의 시기에 이르면 감정을 나타내는 이들 기호들은 유지되지만 동시에 전형화 된다. 그리고 새로운 묘사는 그러한 전형적인 의미 너머의 밀도를 표명한다.


바르트는 살아있는 경험과 지적인 것(the intelligible) 사이, 존재에 관한 것과 의미에 관한 것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분리를 모더니티를 특징짓는 것으로 지적한 바 있다. 근대의 시간에서 감각적 경험은 우연적이며, 따라서 만약 그러한 경험이 어떤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그 확실성에 대해 즉시 의심한다. 그러나 발자크는 의미를 포기하지 않으며, 이름 없는 냄새가 그 방에 자신들의 자취를 쌓는 연금 수령자의 절망적인 비참을 구성하는 문제의 단락에서와 같이- 은유와 환유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이로서 우리는 플로베르의 묘사에서 나열되는 우연성들을 잘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보들레르 역시 마찬가지로 유용한데, 그가 쓴 "Le flacon"이라는 시에 등장하는 묘사[각주:9]는 시간의 퀴퀴한 냄새가 장식장의 꼬질꼬질한 촉각을 가로질러 불확실한 공감각 속에서 흘러가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은 자율적으로 되어서, 더 이상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심각한 철학적 질문들을 제기하는 역사적 문제(proposition)이다. 달리 말해, 19세기의 세속성 혹은 부르주아적 신체의 구축 이전에 정동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더 오래된 전 근대의 인간들은 앞서 언급한 다양한 감정의 체계들을 빈약한 수단으로 다뤄야 했는가? 제임슨은 여기서 자신이 제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 본질에 대한 진술과 구별되는 어떤 가설이라 말하며, 19세기 중엽 이전에는 그러한 정동이 이름 붙여지지 않았고, 언어로 표현될 길을 찾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역사적인 문제이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가시화 시켜내는 언어 자체의 문제이다. 여기서 가정되는 것은 명명되기 이전의 정동 혹은 감흥이란- 의식에 접근 불가하며, 그들이 명명된 감정들로부터 구별되지 않게 하는 방식으로 주관성에 흡수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는 정동에 대한 어떤 명제이든, 그것은 또한 신체에 대한 명제이자 역사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아도르노가 지적했듯, 가장 억압되고 오명 씌어진 감각인 냄새는 보들레르에서부터 프루스트까지 어디에서나, 정동을 분리시키고 그것을 확인하는 특권적인 매개물(vehicle)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감각적인 매개물은 그들이 신체적 감각 자체와 혼동되고 동일시되는 만큼, 그리하여 단순히 육체적 지각 정도로 환원되는 만큼, 재현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예컨대 각색의 타입의 정동에 관한 매개물로서 냄새의 유용성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그 주변적 지위, 어떤 상징적 요소로서의 그 저발달된 상태에서 기인한다.


이때 정동이 가진 특징들의 다양성은 이 새로운 요소(정동)19세기의 리얼리즘에 침투할 수 있는 방법들의 다수성을 시사하며, 어떤 새로운 정동의 리얼리즘을 향해, 어떤 고조된 재현의 현전을 향해 그것(리얼리즘)의 서사들을 열어젖힌다. 우리는 이미 이 새로운 현실성의 이름 없음을 주장해왔다. 그것은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들에서 확실히 구축될 수 있지만, 그 진정한 작동은 변증법적이며 집요한 재현적 명목론의 양 면 모두를 표현한다. 여기서 상징주의의 교리는 더 깊은 진실, 명명과 재현적 구축 사이의 발본적인 구별의 그것을 배반하는데, 이것이 어째서 정동이 레씨의 체제 내에서 제시될 수 없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름에 대한 유혹은 정동의 다른 특징, 즉 그 자율화에 의해 고무된다. 그것은 맥락을 갖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어떤 이유 없이, 명명된 감정들이 서로 갖고 있는 그 동종의(cognate) 실체들(대상)에 대한 구조적 관계없이 경험의 위를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정동이 어떤 원인도 갖지 않으며, 그 발생의 상황에 관해 어떤 관계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화학적, 정신분석학적 혹은 인간사이의 요인들이 제안되고 시험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자유롭게 부유하는 것이자, 이들 요인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남는 것이고, 이것은 명백히 영구적인 현재이자 얼마간 자기 충족적인 요소이며 자가 부양하는 것, 자신의 존재를 영속시키는 것으로서의 정동이 지닌 시간성의 기능이다. 여기서 제임슨은 정동의 또 다른 특징으로서 들뢰즈와 리오타르적 맥락의 강렬도를 꼽는다. 그에 따르면, 실로 리오타르적 용례에서는 강렬도를 정동으로 대체해도 무리가 없다.[각주:10] 정동은 단독성이고 강렬도이며, 본질이라기보다는 존재인데, 더욱 확립된 심리학적이고 생리학적인 범주들을 유용하게 뒤흔든다.


이것이 롤랑 바르트가 현실효과라는 개념으로 의미했던 것인데, 이는 리얼리즘에 대한 실체론적인 사유를 기호학적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공식화이고, 여기서 리얼리즘이란 문제가 되는 텍스트에 의해 생겨난 가능한 기호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이 전달하고자 한 바의 리얼리즘이 필연적으로 역사적이고 이데올로기적 지위를 갖는다 할지라도, “리얼리즘이라 불리고 그 자체로 인식되도록 고안된 텍스트가 <Writing Degree Zero>에서 바르트가 묘사한 종류의 신호와 함축을 발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제임슨은 리얼리즘을 기호로 환원하는 것보다 만족스러운 방법이 있을 것이라 본다.


자신이 도달한 지적 결과의 언케니한 감각으로, 바르트는 그의 입장을 역사화 한다: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에서, ‘구체적인 것에 대한 강박적인 참조는 언제나 의미 자체에 대한 무기와도 같이 양성된다. 마치 살아있는 것은 언표화(signify)할 수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다.” 이 지성과 경험, 의미와 존재 사이의 화해 불가능한 분할은 근대성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말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그것을 관념론으로 기울게하는 문학에서 특히 그러하다. 만약 그것이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현실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즉 무언가 현실적이라면, 그것은 순수하게 정신적이고 개념적인 범주에 의해 흡수될 수 없다. 구체적인 것의 이상은 이 두 차원에 대한 불가능한 종합을 시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현상학이 그것을 완수하기 위한 가장 정열적인 근대의 소명을 품었음은 명백하다). 허나 바르트가 여기서 서술한 것은 이미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우연성이다. 그 세대의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사르트르의 <Nausea(구토)>는 그것(우연성)의 발견에 씻을 수 없는 표현을 남겼고, 그 작업은 특정 지역의 형식의 문제에 있어 독특하고 반복될 수 없는 해결책이었다. 여기서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의미 없는 비-상징적 대상들을 수많은 수사적 기호들로 변형시킴으로써 그것을 스스로 재통합한다. 그러나 우리는 발자크의 상징적이고 알레고리적인 가능성들의 소멸에 의해 플로베르에게서 풀려난 정동이 바르트의 우연성- 의미와 이성적 개념화에 동화될 수 없는 자질을 나눠 갖는다는 것을 제안함으로써 또한 현상학의 목표들에 대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로, 여기서, 그것은 양립할 수 없는 존재와 의미가 아니며, 서로 반박하며 섞이는 데에 실패하는 알레고리와 신체이다.


이 전통적 의미에서 알레고리는 개인화를 의미하며, 그것은 명명(naming)과 지명(nomination)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체와 그 정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말(words) 자체이다. 이것, 즉 그 내용을 규정하려는 전제 없이 정동을 식별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다른 종류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곧 정동적 영역에 대한 이러한 약탈로부터 우리가 끌어내고 싶어 할 첫 번째 교훈이다. 은유와 은유적인 것은 그들 자체로는 의지 할 수 있는 가이드가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런치 플라워가 어떤 정동적인 차원을 가진다는 것은 추정에 지나지 않지만, 독자들은 얼마간 그것을 외부로부터 도입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성으로부터 최소한 하나의 특징을 존속시키는데, 여기서 뜯어진 낱낱의 꽃잎과 함께 점심은 파괴되어 먹을 수 없는 대상들의 비루한 더미(collection)로 분해된다.


그러나 정동이 그 경험이나 표현에서 진정한 자율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관습적인 신체 자체로부터 독립을 얻어야한다. 제임슨이 사르트르적 현상학 뿐 아니라 체현(embodiment)을 공식화 하려는 메를로 퐁티의 시도의 출발점이 되는, 정동에 대한 하이데거의 작업을 보는 까닭은 이 때문인데, 그것은 영어의 “mood”라는 역어로도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 "Stimmung"으로 집약된다. 하이데거는 Stimmung이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인지적이지도 않으며, 외려 그것이 세계 내 존재에 대해 구성적인 차원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하이데거적 혹은 사르트르적 Stimmung은 객체의 극(object-pole)과 같은 것을, 정동이라는 낱말에 의해 암시된 주체의 극에 더하는데, 이는 우리가 어떤 것을 주관 혹은 객관의 편에 있는 것으로 규정하도록 하는 치명적인 편견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예증한다. 그러나 현재의 맥락에서 그 대안은 환영할만한 확장을 열어주는데, 여기서 우리가 지금까지 단순히 정동이라고 불러 온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은 세계 또는 개인 주체이다.

그 독일어 단어는 어떤 청각적 차원을 도입하는 추가적인 이점을 갖는데, 이는 Stimme 혹은 음성(voice)에 대한 그 관계의 차원이라기보다, 그 용어가 (조화롭지 않은 것의 시끄러운 소리를 비롯하여)음악적 조율과 어떤 악기의 일치에 대해 시사하는 바의 차원에서 그러하다. 보다 넓은 음악적인 참조는 장조와 단조의 분위기를 암시할 뿐 아니라 정동의 반음계주의의 문제로, 강렬도에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미묘한 차이들의 전체와 정확한 음계를 따라서도 그 흥망성쇠(waxing and waning; 강화약화)의 운동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바그너의 트리스탕(1865)은 여러 이유로 (플로베르와 보들레르, 그리고 마네와 함께) 전통과 관습으로부터의 모더니즘의 해방에 있어 근본적인 표지로서 셈해지는데, 제임슨은 트리스탕이 또한 음악적 레씨(musical récit)와 베토벤이 소나타 형식과 기악(instrumental music)을 이끌었던 그 완성상태로부터의 해방 또한 의미한다고 본다. 여기서 반음계주의는 음계의 흥망성쇠를 의미하며, 그들 각자의 함의들(으뜸음과 하속음의 내적 논리)에 대한 모든 경외심을 해산시키는 음들의(tones) 아래 위로의 편차(slippage)를 의미하고, 이는 또한 각 음을 고유의 특정한 천연색(그 악기들 자체의 물질적 발달에 의해 표현되는)으로 전개시킨다.


그러한 음악의 진전(evolution)은 따라서 정동의 논리를 서술하기 위한 생생한 방법이며, 실로 어떤 미끄러지는 음계에 대한 참된 개념은 이미 사분음(quarter-tones)과 서구의 조성 체계에 대한 그들의 최종적인 분해를 시사한다(막스 베버를 따르자면, 서구의 모더니티와 합리성의 출현과 함께 말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의 이 시기에 있어서, 바그너의 혁신(주도동기(Leitmotiven)의 반복으로의- 소나타 형식이 지닌 시간성의 재조직화, 단순한 해상도를 위한 배치라기보단 정동의 매개물로의- 고조된 불협화음의 전환)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의 범위를 소나타 형식의 합리성”(혹은 베토벤에 의한 그 완성과 소진)의 분해로 제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반음계주의 자체와, 앞서 언급한 미끄러지는 음계로의 조 체계(key system)의 전환으로 말이다. 이 모든 것에, 아마도 앞선(pre-) 서구 음악의 양상체계(modal system)로의 기묘한 회귀가 있다. 즉 바그너적인 끝없는 선율은 그 자체 소나타의 과거-현재-미래의 체제로부터 상당히 구별되는 시간성을 투사하는 한편, 실로 그것은 우리가 이미 다른 맥락에서 환기시킨 바 있는 "영구적인 현재"를 매우 정확하게 만들어낸다. "이행의 예술(an art of transitions)”에 대한 바그너 자신의 의견은 언케니하게도 근대의 비평가들이 플로베르의 스타일에 대해 말해야만 했던 것을 선취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 그 속에서 이행이 점차 더 실체론적인 상태(혹은 음악적인 명명된 감정들”)를 대체하는 어떤 순수한 현재를 구축한다.


물론 이는 바그너가 베를리오즈(Berlioz)와 함께 개척한 음악적 색채(그리고 물질적 악기들)의 엄청난 물적 발전과 확장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데,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 광대한(그러나 동기를 갖지 않는) 점강음들(crescendoes)과 점약음들(diminuendi)을 배제하지 않으면서, 정동 자체에 대해 다변형적(proteiform)이고, 변성적이며(metamorphic) 희미하게 빛나고(shimmering), 가변적이며 단명하는 모든 것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명백한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바그너적 정동은 외적 형식(그리고 음악극의 개념 자체)에서의 위기와 혁명을 규정하는데, 이는 비록 리얼리즘 소설과 즉각적인 유사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어 올 중대한 형식적 변화들의 전조가 된다.


그러나 바그너적 반음계주의는 정동의 개념(그리고 새로운 신체적 현실?)에 대한 어떤 유용한 정초를 제공하며, 이는 바그너의 그것이 소나타 형식에 대해 갖는 긴장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 연속성(소위 말하는 끊없는 선율”)이 또한 바그너가 대체하고자 했던 더욱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에 있어 본질적인 닫힌 단위들과 에피소드들에 대한 체계적인 배제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 그 전통적인 형식이란 바로 아리아이다. 아리아가 우리가 명명된 감정이라 부른 바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선, 바그너의 음악적 연속성에 간간히 끼어드는 이따금의 노래들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실로 바그너의 긴 회고적 스토리텔링 구절은 낡은 아리아 자체를 대체하는 무엇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그 감정의 존재를 정초하고, 그 감정의 체현으로서 그 자체에 주목을 끌기 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고안된 것이 아리아인 것이다. 따라서 아리아에 대한 바그너의 거부는 실제로나, 그 개념에 있어서나 심도 깊은 비판이며, “명명된 감정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그리고 그에 맞서 그가 내세우는 것은 정확히 정동 자체이다.


오케스트라적 색채에 대한 본질적인 개념은 명백히 우리로 하여금 한 예술이 다른 것의 용법과 논리를 빌리는 것에 대한 그러한 설명의 경향을 상기시키며, 우리를 페인팅에서의 평행적인 전개로 되돌리는데, 여기서는 물질적 색(거트루드 슈타인이라면 물질적 유화 물감이라 말했을)에 대한 마네의 주목이 은밀하게 그것의 탁월함에 대한 스토리텔링 내용을 빼낸다(뭔소리야?). 실로, “반음계주의라는 말 자체는 그리스어 chroma로부터 연원하며, 이는 우선 피부혹은 피부 색을 의미하고, 그로서 단순히 그 물화된 감각들 중 하나가 아니라 신체 자체와의 구성적인 관계를 재차 단언한다.


따라서 시간은 널리 알려져 있듯 모네의 인상주의에 의해 영원하게 되는데, 이는 모네가 빛의 각 그림자를 다만 포획을 위한 어떤 구실로만 기능하는 독특한 사건으로 파악하면서 새벽부터 황혼에 이르는 하루의 모든 순간에 그의 건초더미나 성당을 그렸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이 빛의 새로운 국면과, 우리가 지금 파악하려하는 바그너의 반음계주의에 대한 시간성 사이의 내밀한 관계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한 수준에서 다음 수준으로까지 사실상 지각 불가능한 지각의 통로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인상주의에 있어서도, 그 요소들의 절대적인 이질성은, 그 속에서 새로운 종류의 현상학적 연속성이 단언되는 어떤 새로운 종류의 이질성으로 번역된다.


지각과 관련된 유사과학적 실험들(그리고 그 결합으로부터 우리의 감각지각이 이른바 도출되는 의미 없는 감각-정보로서의 그러한 신화적 개념들)의 성행은 또한 이 이중운동을 시사하며, 그를 통해 신체는 내내 지금까지 그 전통적인 개체들과 그들의 명명된 감흥들에 의해 저장되고 묶인 정동의 흐름을 내보내면서 그 가장 작은 요소들로 분석적으로 분해되며 어떤 추상으로서 과학적으로 재구축된다. 그러나 서사를 오직 페인팅의 재현적이거나 스토리텔링적 내용으로만 이해하면서 관습적인 설명이 그렇게 하듯, 이러한 발달을 서사에 대한 배척으로 보는 것은 그릇될 것이다. 물감과 회화의 시각적 정보에 대한 이 새로운 순수한 현재는 실제로 새로운 종류의 서사적 운동을 가지며, 눈의 움직임과 시각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개념, 그 새로운 시간성에 있어서 새로운 궤적을 일깨운다.


어떤 정도에서든, 이 모든 동시대적 증상들에 있어서, 한 특정한 감각적 이질성은 우리가 스타일이라 부르는 절대적 이질성으로 위장되어 있고, 새로운 현상학적 연속성이 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놀이와 변주들, 팽창과 수축, 강화(intensification)와 축소(diminution)에 대한 것이며, 정동 자체인 신체의 이름없는 새로운 삶에 대한 것이다. 정동은 신체 자체의 참된 색채가 된다.


그러한 변화가능성은 정동의 차원에 분위기의 미묘한 차이들을 충분히 기록할 수 있는 전환(transformation)과 변형(metamorphosis)을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 그것이 그 반대항으로 즉 우울함에서 조증으로, 우울에서 황홀함으로 변화할 수 있는 만큼 말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어 어원은 열감에서 치명적인 냉기로, 부끄러움에서 공포 혹은 충격의 창백함으로- 그것의 기온과 함께, 최종적으로 우리를 신체 자체로 되돌린다.


정동은 따라서 멜랑콜리에서 유포리아로, 침체(the bad trip)에서 흥분(the high)으로- 니체의 가장 조증적인 폭발(outbursts)에서 충족될 수 없는 침울함과 스트린드베리의 죄책감으로, 반음계적으로, 아래위로 신체적 음계를 정렬시킨다. 그것은 새로운 정동적 현상과 그들을 포획하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등록 장치들에 의해 조율되고 조직되기(orchestrated) 때문에, 비록 모더니즘이 전개했듯, 그들의 재현이 물들거나 채색되는 데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해도, 이는 명명된 감정의 역할 자체로부터 발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동에 특정적인 어떤 시간성의 경로로 우리를 올려두는데, 이는 제임슨이 점증(the incremental)의 미끄러지는 음계라고 부르려는 것이며, 여기서 각각의 극소한 계기는 음조의 조정과 강렬도의 증가 혹은 감소에 의해 스스로를 최후의 것(the last)으로부터 구별시켜낸다. 다른 것, 더 물질적인 예술에 대한 참조는 이러한 맥락에서 회피할 수 없는데, 이는 음악과 시각예술에서 훨씬 더 유형적으로 배치되어 신체와 그 감각의 문제가 남아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설명이 필연적으로 물자체에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고, 언어 효과의 구조를 특징짓는 데에 필연적으로 요청되어야 하는- 외부로부터의 언어가 신체 자체의 살아있는 경험을 홀로 있게 하기 때문이다.


회화에서의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음악에서의 바그너주의적 혁명- 이들은 플로베르와 보들레르에 의해 발명된 새로운 정동적 스타일에 있어 가장 명백한 유추들이다. 이들 전부는 실로 부르주아적 신체의 역사적 출현에 동시적이다(만약 우리가 헤겔주의에 맞선 반란으로서의 실존주의의 출현에 대한 관습적인 이야기를 따른다면, 불안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발견과, 소외 이론을 통한 벌거벗은 삶에 대한 마르크스의 극화 양쪽 모두 유럽의 1840년대에서 이 신체에 대한 경험의 급진적인 전환을 기록하도록 소환될 수 있다). 그 외부의 한계에서, 정동은 세계 자체의 인지 기관이 되고, 니체와 니체 이후의 현상학적 철학이 엇비슷한 시기에 발견하게 된 세계 내 존재의 매개물이 된다.


이제 제임슨은 그러한 정동이 취할 수 있는 몇몇 형식들을 살피고자 하는데, 여기서 그의 주요 관심으로 이해되는 그것은 새로운 존재론적 현재의 이 정동적 차원이 소설적인 것에 대해 행하는 것에 있고, 특히 그와 동일한 시간에 그것이 열어젖히고 파내려가는 극적인 가능성에 있다.

그러나 물론 정동의 내용은 그 자체로 가변적이며, 비록 우울증이 플로베르에게서, 트리스탕에서, 뭉크에게서, 고골에게서 일종의 상수로 남는다 해도, 그 반대항은 이 모든 경우들에서 매우 다르다. 또한 졸라에게서도 그러한데, 여기서는 주신제적인(orgiastic) 흥분의 어떤 기대된 과잉이 가정적인 보금자리와 불어로 "bonheur(행복; 행운; 즐거움)"라 부르는 형이상학적 위안(영어로 “happiness"라 명명되는 소소하고 실로 프티 부르주아적인 상태로부터 다시 한 번 상당히 구별되는 무언가)보다 훨씬 덜 진실하다. 예컨대, 여기, 졸라의 <La Débâcle>의 주인공이 대포와 총알이 날라다니며 내는 휘파람 같은 소리로부터 피한 채 어떤 작은 정원에서 “un dejeuner rêvé(꿈의 점심)”을 알 수 있게 되는- 출정(campaign)의 모든 열기와 먼지, 끝없는 강제된 행진의 노고, 그리고 소문과 공포의 혼란에 참으로 놀랄만한 계기가 있다:


"눈처럼 흰 테이블보와 컵 안에서 기포를 일으키는 화이트 와인이 가져다주는 기쁨에 겨워, 마우리스는 그 스스로도 놀란 식욕과 함께 가볍게 익힌 계란 두 알을 먹었다."[각주:11]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오찬의 슬픈 부스러기와는 그 어조에서 완전히 구별되는 어떤 순백 속에서의 막간의 일이며, 그의 동료 군인 쟝의 호사에 의해 나중에 입증되는데, 이때 고요와 휴식 속에 홀로 있는 밤 동안 그는 진짜 침대에서 잘 수 있게 된다:


"오! 쟝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저 하얀 시트들이었는데, 그것들은 그가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것이었다! ... 그는 그 순백에, 그 쾌적함에 미끄러져와 그 안에서 완전히 풀어져버리도록 그를 촉구하는, 저항할 수 없는 열망을 느끼면서, 마치 아이처럼 갈망하며 조바심을 냈다."[각주:12]


그러나 더 많은 것들이 우리가 작업을 마치기 전에 이 작업에서 흰색의 변형이 될 것이다. 실로, 리얼리즘 소설이 제임스가 장면 그 자체라 불렀던 것의 가능성을 배열시킬 수 있는 것은 졸라의 비범한 신체적이고 언어적인 감수성의 전개와 함께 한다.

우리는 정동에 대한 이 예비적인 논의를 그 형식들의 다양성이 그보다 오래된 명명된 감정들의 그것과 체계적으로 대립되는- 아래의 표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

정동


체계(system)

명명법(nomenclature)

운명의 표지(marks of destiny)

일반화된 대상

전통적인 시간성

인간 본질

동기; 목적(motives)

아리아

재현

닫힌 소나타 형식

나레이션

 

반음계주의(chromaticism)

신체적 감흥(bodily sensation)

영속적인 현재/영구성(perpetual present/ eternity)

강렬도

단독성

진단, 치료(diagnosis, medicalization)

경험, 실존주의

끝없는 선율

감각자료

엔딩의 문제(the problem of endings)

기술(description)

 

  1. Fredric Jameson, The Antinomies of Realism, Verso: London(2013), 18-19. 사르트르에게 절대적 과거, 즉 절대적으로 완료되고 이미 조건 지어진 시간이란 끊임없는 현재의 개입으로 인해 불가능한 것이지만, 레씨의 형식은 그와 같은 개입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레씨에 대한 사르트르의 적대감은 이해될 수 있다. [본문으로]
  2. Ibid, 25. [본문으로]
  3. Ibid, 28. [본문으로]
  4. Ibid, 29. [본문으로]
  5. 이하에선 ‘정동/정서’의 병기 없이 ‘정동’으로 통일한다. [본문으로]
  6. Ibid, 30. [본문으로]
  7. 여기서 제임슨은 부르주아주체의 본격적인 등장과 더불어 언어적 혁신 및 언어적 요구들의 가시화를 동반한 19세기와 구별되는 시기로서 ‘언어의 위기’국면을 상정하고 있다. [본문으로]
  8. "This room gives off a smell for which our language has no special word(...)" [본문으로]
  9. “dans une maison déserte quelque armoire- Pleine de l'âcre odeur des temps, poudreuse et noire(...)”/ "in a deserted house some cupboard - Full of the acrid odor of the times, powdery and black(...)"/ "한 버려진 집의 찬장에- 가루투성이에 검은, 시간의 매운 냄새가 가득하다(...)" [본문으로]
  10. 강렬도에 대한 리오타르의 언급은 에서 집중적으로 등장한다. [본문으로]
  11. Émile Zola, Les Rougon-Macquart, Volume V, La Débacle, Paris: Pleiade, 1967, 446. English translation by Elinor Dordra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00, 54. Ibid, 43에서 재인용. [본문으로]
  12. Ibid., 555; Dordray, 16 1-2. Ibid., 44에서 재인용.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