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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신) 유물론 시대의 주체성: 헤겔과 개념화(Subjectivity in Times of (New) Materialisms: Hegel and Conceptualization")

by 정강산 2020. 12. 20.

Borna Radnik

() 유물론 시대의 주체성: 헤겔과 개념화

"Subjectivity in Times of (New) Materialisms: Hegel and Conceptualization" in Subject Lessons: Hegel, Lacan, and the Future of Materialism

 

대개 철학적 사색에서의 전체 진보그것이 어떤 체계적이고 필연적인 진보인 한 

다만 이미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는 것의 제기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G.W.F. Hegel, Encyclopedia Logic, 88


정강산

 


보나 라드닉(Borna Radnik)은 존재와 사유의 불가분성을 주장한 칸트 철학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 등장한 메이야수의 주장을 소개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인간의 지평에서 사유와 존재는 서로 상관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무엇인 바의 대상과 사유 행위는 서로 완전히 엮여있다는 것이 상관주의의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물의 세계는 인간의 경험과 지각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곳에 접근할 수 없다. 칸트주의로 대표되는 상관주의의 모델 내에서는 우리는 결코 즉자 혹은 절대적 외부에 가닿지 못한다. 이에 맞서 메이야수는 원-화석(arche-fossil)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는 인간 종의 등장 이전에 존재했던 대상이자 그 자체로 소여인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원화석은 그것이 선험적 통각이든, 경험으로부터 초월해있는 범주이든, 칸트주의적 소여에 앞선 어떤 존재의 소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원화석은 인간적 범주의 한계 외부, 그 너머를 사고하도록 하며, 이는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으로 하여금 주체와 주체의 경험을 탈중심화시키는 철학이 되도록 한다.

허나 메이야수의 주장은 매력적이지만, 사유하는 주체는 필연적으로 개념적 규정(determination)에 연루된다. 유감스럽게도 개념규정은 그의 철학 또한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메이야수가 동원하는 모든 개념들-‘소여에서부터 원화석,’ ‘관계성,’ ‘주체,’ ‘객체,’ ‘외부,’에 이르는-은 전부 개념과 사유의 규정으로부터 연원하며, 이는 존재사유라는 가장 기본적인 항을 생각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사유는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따라서 메이야수가 사유와 존재 사이의 상관성을 끊어내려 진력할 때, 그가 명백히 인지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어떤 자기 재귀성(self-reflexivity)이 있는 것이다. 즉 주체 너머로, 주체 외부로 나아가기 위해 사유와 존재를 분리시킬 때조차 이미 사유하는 주체를 전제하는 개념규정이 개입하게 된다. 즉 우리가 인간 주체로 남아있는 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의 지평에서 사유할 수 있는 메타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개념규정은 주체의 사유행위로 소급된다.

이러한 자기 재귀성의 관성은 헤겔이 모든 철학은 본질적으로 관념론이며, 혹은 최소한 그 원리로서 관념론을 지니고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원리가 얼마나 잘 수행되었는가 하는 점이다...따라서 관념론적 철학과 실재론적 철학 간의 대립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헤겔의 논점은 모든 사유는 그것이 개념규정을 도입하는 한 개념화이며, 나아가 관념론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철학의 근간은 바로 개념화이다. 관념론과 실재론(우리의 맥락에선 유물론) 사이의 대립이 무의미한 것은, 결국 관념론이 사유와 존재에 내재적인 개념의 운동을 추적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론적 철학은 물질(matter)," "원자(atoms)”등등의 개념에 의존하나, 이들 전부는 사유 행위를 통해 제시되는 개념적 의미화(idealization)이다. 그러나 헤겔에게 이러한 바의 의미화는 주체 내부에 상상적 구축물로서 존재하는 표상(representation; Vorstellung)에 가까운 것이다. 이렇게 표상의 제약에 고착되어 있는 관념론은 주관적 관념론으로서,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서 대표적으로 예증되는 것인데, 여기서 우리의 경험 대상은 단지 선험으로서의 초월적 범주에 의해 인지되는 현상계일 뿐이다. 주관적 관념론은 표상의 형식만을 고려할 뿐, 그 내용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이러한 무관심함은 주관적 관념론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개념적 규정은 우리의 사유를 제약하지 않으며, 그 내용과 형식 양자에서 사유행위가 무엇인지를 구성한다. 헤겔에게 있어 우리가 사유하는 대상은 사유 활동 자체로 되돌아온다. 사유행위에 고유한 이러한 회귀는 헤겔이 “absoluter Gegenstoß" 라 부른 것으로, 절대적이고 내재적인 역-반발(counter-repelling)을 의미한다. 헤겔에게 이러한 절대적 되튐은 사유에 내재적인 작동과정이며, 맨 처음 제기된 것을 가능케 하는 개념적 전제를 제시함으로써 그 자신에로 되돌아오는 운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관적 관념론으로 물러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면, 견실한 유물론은 그 자신의 암묵적인 관념론적 토대를 모른 체 할 수 없다. 개념규정에 대한 유물론의 의존은 비밀스럽게 있기보다 외려 공공연하고 떳떳하게 선언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주관의 정신 내부로 객관적인 세계를 환원하는 것이 아닌데, 왜냐하면 개념규정의 구성적인 지위를 인정하는 것은 유물론을 배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거니와, 우리가 여기서 찬동하려는 바의 유물론은 그 논리에 있어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프랭크 루다가 말하듯, ‘관념론을 유물론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관념론의 소멸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 분할은 유물론 내부에서 재등장한다.’ 유물론의 이 분할은 알랭 바디우가 세계의 논리에서 묘사한 민주주의적 유물론과 유물론적 변증법 사이의 구별을 루다가 독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루다는 민주주의적 유물론과 유물론적 변증법 간의 차이를 유물론 자체 내에서 작동중인 관념(idea)을 승인하는 방식의 차이로 읽는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적 유물론은 관념() 없는 유물론이며, 반면 유물론적 변증법은 관념론 없는 관념론이다. 헤겔주의자로서, 루다는 바디우의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그의 해석을 배회하는 암묵적인 전제가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어떤 개념도 필연적으로 그 구성적인 관념론적 중핵을 인정한다는 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루다와 공명하며, 슬라보이 지젝 또한 관념론과 유물론의 서로 얽힌 본질을 요약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특징짓는 것은 정확히 그것이 관념론의 유산을 통합시켜낸다는 점에 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념(Idea)[각주:1]과 함께 있는 유물론이고, 관념론의 공간 바깥에 있는 영원한 이념에 관한 단언이다.” 지젝은 이념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내재화를 헤겔의 절대적 되튐의 (자기) 운동으로 해석한다. 헤겔의 변증법적 과정에 대한 지젝의 라캉적 독해에 따르면, “외부의 대립항, 즉 맹목적이고 지양될 수 없는 반복과 투쟁하면서, 변증법적 운동은 그 자신의 심연의(abyssal) 지반, 그 자신의 중핵과 투쟁한다. 달리말해, 화해의 최종적인 제스쳐는 이러한 부정성의 위협적인 과잉 속에서 주체 자체의 중핵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중핵에 내재하는 "부정성의 위협적인 과잉"이란 주체에서 연원하지 않는다. 지젝은 헤겔적 주체를 생성해내는 변증법적 과정이 실체로부터 출현하지만, 실체 그 자체는 주체의 소급적인 제기를 통해서만 안정되는 개념적 전제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주체성과 실체성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에는 어떤 확고한 근본 지점(foundational point)의 발본적인 결여"가 있다고 말한다. 루다와 마찬가지로, 지젝은 어떤 철학에나 근본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이지만 암묵적인 철학적 전제가 있다는 헤겔의 통찰을 따르는데, 그 전제란 바로 개념과 개념화 과정에 대한 의존이다.

루다와 지젝을 따라, 이 장에서 라드닉은 절대 이념을 구성하는 생성의 변증법적인 무한한 행위가 개념(주체)과 객관성(실체)의 통일로 말미암아 자기 재귀적인 모순을 벗어나는 어떤 유물론을 촉발한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그러한데, 우선 개념에 대한 헤겔의 교리에서의 전제 설정(positing presupposition)”에 대한 간략한 논증이 개념화란 항상 이미 사유행위 속에서 제시된다는 점을 확증할 것이고, 두 번째로 개념의 보편성이 특수성을 통해 출현한다는 사실은 존재론과 논리 혹은 존재와 사유의 불가분성을 보증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 절대 이념에 대한 사유는 필연적으로 실천적 활동으로서의 유물론에 고유한 변혁적인 활동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이다. 무한하고, 역동적이며, 변증법적인 운동인 바의 절대 이념은 변혁적인 활동이며, 내재적인 변증법이고, 주체에서 실체로의 운동이자 실체에서 주체로의 운동이다. 유물론의 주관적이고 실체적인 실천적 활동을 결정하는 것은 이러한 내재적인 변증법이다. 주체와 실체 간의 동등함은 이념의 규정적인 측면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사유의 영역으로의 후퇴, 혹은 보다 도발적으로 말하자면, 실재가 전적으로 주관적인 앎의 방식에 의존하는 식의 주체 지향 존재론이 아니다. 오히려, 헤겔적 절대 이념은 개념규정의 자기 재귀적인 측면을 인정한다. 즉 절대이념은 그 개념 내용이 개념을 객관성(즉 존재와 본질)과 통합하면서 개념규정을 내재화한다.

헤겔적인 전제 설정논리학의 개념에 대한 교설 부분에서 표명되는데, 개념 규정은 사유와 존재 양자에 내재적인-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전제로서 초래된다. 그러나, 설정 행위와 개념적 전제의 부정적 규정 간의 변증법을 해부하기 전에 우리는 사유(thought)[개념]구상(conceiving)의 동일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니트함머(Friedrich Immanuel Niethammer)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겔은 개념화란 단순한 사유의 수단이 결코 아니라고 단언한다. 개념이 사유활동의 도구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는데, 이는 헤겔이 꼬집듯 오성/이해(understanding)가 사유 이외에 여전히 많은 것을 하는 것처럼, 음식을 씹고 삼키는 것은 다만 먹기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개념은 사유 과정에서 배열되는 수단이 아니라, 사유활동 자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개념을 형식적인 범주로 간주하는 표준적인 철학적 주장에 맞서, 헤겔은 텅 빈 채 죽은 형식과는 한참 다르게도 개념은 규정적인(determinate) 내용을 지닌다고 말한다. 일견 단단해 보이는 내용과 형식의 대립 간의 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구상과 사유는 동일하며, 무한한 형식으로서의 개념이 그 어떤 모든 내용을 체화하게 되는 바의 동일한 운동이다. 우리가 사유할 때, 우리는 우리가 사고하는 것의 구조와 내용을 규정하는 개념규정을 암묵적으로 설정한다. 그 주제와 무관하게, 우리는 개념 속에서, 개념을 통해 사유한다. 개념규정은 사유에 내재적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고할 때면 항상 개념적 전제를 설정한다고 했을 때 헤겔이 의미한 바이다.

Setzen(설정; 정립; to posit)의 중요한 복합체는 voraussetzen(presuppose)인데, 이는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주장을 전제하고 요구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 앞서, 사전에 설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설정하기란 항상 이미 일종의 전제로서의 어떤 부정적이고 개념적인 규정을 이루고 있다. 인과 법칙으로 예를 들어보자. 물리적으로, 원인은 그 결과를 설정한다. 그러나 개념적으로, 원인을 내재적으로 결과 자체를 결정하는 어떤 전제로서 설정하는 것은 결과이다. 개념규정(예컨대 원인)은 결과의 내용을 통해 소급적으로 식별된다. 개념규정은 그것이 그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혹은 되튀어 온다는 의미에서 재귀적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고할 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형식과 내용 자체를 구축하는 개념적 규정을 설정한다. 예컨대 내 고양이를 생각할 때, 나는 매우 구체적이고 특수한 동물을 떠올린다. 그러나 내 고양이라는 사유는 고양이소유라는 보편적인 개념에 기대고 있으며, 이 개념들이야 말로 내 고양이라는 사유의 내용과 구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고양이라는 개념의 보편성은 그 자신의 타자, 즉 어떤 고양이에 대한 특수한 경험을 통해 나타난다. 내가 어떤 사유를 개진할 때, 나는 동시에 내가 이 사유를 생성하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게 하는 개념을 전제한다. 이때 개념은 어떤 하나의 보편이 아니라 그 자체 보편성이다. 개념은 특수와 개별을 포함한 세 가지 계기 중 하나로서의 보편을 갖는다. 특수로서의 객체와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개념 간의 관계는 부정적인 규정의 관계이다. 어떤 특수(예컨대 고양이)를 표현하면서 우리는 동시에 보편을 표현한다. 이 전제로서의 개념규정은, 우리 사유의 존재 자체를 구조화하고 틀 짓는 부정적인 규정으로서 작동한다. 절대 이념이 내재화하는 동시에 외화하는 것은 바로 사유 활동의 이러한 자기 재귀적인 본질이다. 사고하는 것은 곧 구상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개념은 자기 설명적인데, 즉 설명된 것과 설명은 동일하다. 어떤 사유이든 규명함으로써, 개념은 사유 활동에서의 개념의 사용을 통해 그 자신을 규명하며, 이는 논증적인 수입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개념의 논리가 존재론적으로 실재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로 헤겔의 사변철학은 사유에 포획된 사물에 대한 학인데, 이것을 주체 외부의 세계가 다소 주체의 정신에 의존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헷갈려서는 안 된다. 개념은 사물에 외재적이고 소외되어있는 규정과 관계로 이루어져 있을 수 없다. 사물을 사유하는 것은 우리를 사물에 내재한 보편으로 향하게 하며, 이때 보편은 그 자체 개념의 한 계기인 것이다.” 외부의 객체에 관해 사유하는 것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객체 자체에 존재하는 내재적인 개념 규정을 발견하도록 이끈다. 사유는 특수한 객체에 내재적인 보편적인 개념으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 구체적 보편은 특수를 통해서만 나타난다. “고양이에 대한 구체적 보편의 개념이 나타나는 것은 오직 어떤 특수하고 경험적인 동물로서의 내 고양이를 통해서이다.

그러나 보편성은 개념 자체 논리의 세 가지 계기 중 하나일 뿐이다. 즉 이런 저런 물질에 대한 규정적인 개념뿐만 아니라, 개념 자체에 대한 개념, 즉 구체적 보편으로서의 순수한 개념 자체, 그 안에 특수한 예화들로서의 어떤 개념이든 포함하는 바의 개념 또한 있다. 헤겔이 규명했듯, 개념규정은 그들이 사유에 대한 규정인 만큼 존재론적 규정이기도 하다. 헤겔은 외부의 실재 세계가 사유를 규정하는 것과 동일한 이성적 구조를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주관적 관념론의 도식과 정반대인데, 여기서 실재 자체의 본질은 앎의 주체에 전적으로 의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헤겔은 피히테의 철학을 주관적 관념론의 형식이라 규정한다. 피히테는 자기 설정하는(self-positing) “I(자아)”의 활동이 모든 사유의 근본적인 지반일 뿐만 아니라 그 활력으로 존재의 범주를 제정하는 활동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자기 설정하는 자아의 행위는 존재와 사유의 활동을 형성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설정하는 주체 내부에 근거하는 바의 활동이다. 피히테에게 외부의 실재는 자기(the self)에 의해 조건 지어지며, 자기에 의존한다. 피히테의 철학에 대한 헤겔의 주된 비판은 그 일면성이며, 그것이 실재를 전적으로 주체의 자기 활동에 근거 짓는다는 점에 있었다. 헤겔이 보기에, 자기(the self)에 대한 피히테의 생각은 그의 철학 자체가 지닌 제약에 의해 가로막힌다. 피히테의 주체는 개념이 실재뿐만 아니라 사유 활동 역시 규정하는 바의- 자기 설정하는 활동에 관여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실재 자체를 구성하는 데에 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객관적 세계의 존재는 전적으로 피히테적 자아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따라서 그러한 바의 자아에 의해 형성된다. 헤겔의 주요 목표는 이러한 일면성을 피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는 실재 자체의 본질이 정신에 의존적이지도, 정신에 독립적이지도 않으며, 정신과 실재 양자가 동일한 존재론적 구조를 지니는 바의 존재론적 테제를 생각했다.

헤겔의 절대이념은 사유의 타자성(즉 사유의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를 거부하는 반실재론이 아니다. 외려, 구상 과정은 이러한 타자성을 그 자신에로 통합하는데, 이러한 통합은 실재자체를 구성하는 규정이며, 주체가 단순히 실재에 투사하는바의 규정과는 구별된다. 사유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구상 활동에 연루된다는 측면에서 개념을 가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은 또한 존재론적으로 절대의 부정적 보편성 혹은 자아의 변증법적 구조와 일치한다. 자기 참조하며 자기규정 하는 통일성(unity)으로서의 자아는 그것의 타자에 대한 그 부정적인 관계성을 경유하여 하나의 보편이다. 반면, “자아는 자기 참조하는 통일성으로서, 그 자체를 모든 규정적인 내용으로부터 추상함으로써 순수한 개념 자체의 구조를 갖는다. 순수한 개념으로서의 자아는 그 규정에 있어 어떤 타자에 의존적이라기보다는 오직 그 자신과 동일하며, 그 자신을 규정한다. 다른 한편 자아는 자신의 자기 참조하는 부정성 속에서, “그 외의 다른 것과 대립하며 그것(개별적인 특색)을 배제하는 바의 단독성이며, 절대적인 규정성이다.” 헤겔은 물론 개념 혹은 사유의 범주가 경험적 체험의 가능성을 조건 짓는 바의 사고의 선험적인 초월적 형식이라는 칸트식 테제를 거부한다.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은- 오성의 12가지 초월적 범주가 전적으로 이성적이고 유한한 주체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런 범주는 존재론적으로 물 자체에서 연원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런 맥락에서 개념화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오성의 범주가 현상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의해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그것은 앎의 주체로서의 우리와 무관한 실재를 존재론적으로 구성한다고 할 수 없다는 점에서, 간주관적인(intersubjective) 것으로 유지된다.

헤겔의 관점에서, 칸트는 개념화를 어떤 추상적인 형식적 과정으로 전환하는데, 여기서 텅 빈 추상적 보편(예컨대 그 내용이 그에 대응하는 경험적인 현상에 의해 채워지는형식으로서의 필연성과 우연성)의 개념을 위해 특정한 대상에 대한 규정적이고 내재적인 내용은 기각된다. 칸트에 대한 헤겔의 비난은 칸트의 모델에서는 구상 활동에서의 진리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개념화에 대한 칸트의 설명은 그것이 오성의 활동이라는 것인데, 이 활동은 고착되고 정태적인 구조로 남아있다. 이때 개념화는 다만 진리 없는 어떤 서술(narration)에 지나지 않는데, 여기서 사유의 표상적(Vorstellung)형식은 특정한 예화들(instantiations)로부터 보편적인 개념을 추출하고 추상함으로써 단지 경험을 묘사하는 데에 그친다. 철학은, 만약 그것이 타당한 사변적 과학이 되려면,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 자체의 동일한 동학적 구조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개념화의 활동적인 동학을 오직 사유에만 메어두기 때문이다. 만약 칸트가 주장하듯 오성의 범주가 유한한 이성적 주체 내부에 있는 그들의 초월적 역할 이상의 존재론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면,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은 그것의 자기 부과된 한계로 인해 일면적인 기획으로 남게 된다. 헤겔의 사변 철학은 칸트의 철학적 구축물 내에 잠복해 있는 내재적인 모순을 촉발시킴으로써 오성의 고착을 파열시키고자 한다. 이성의 능력(faculty)을 오성의 능력에 견주어 맞세워 높임으로써, 헤겔은 이성의 전투는 오성이 정태적으로 만들어 온 것을 극복하는 작업으로 이뤄진다고 단언한다. 이는 현상과 물자체 사이의 칸트의 구별에도 적용된다. 헤겔은 철학에 대한 칸트의 서술적 접근을 그러한 서술 자체 내의 진리 함축(comprehension)의 필연성과 변증법적으로 통합한다. "나아가 서술 속에서 단순한 사태로 나타난 것을 이러한 진리에 기초하여 포함하기(comprehend) 위해, 철학은 사태에 대한 서술이 되어선 안 되며, 사태 내의 참된 것에 대한 인식이 되어야 한다.” 칸트의 물자체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외형(semblance)으로부터 진리의 내재적인 출현이다. 칸트에게 객관적 세계란 확실히 실제적인 한편으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순수한 (선험적인) 직관과 더불어 필연적으로 오성의 선험적인 초월적 범주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물 자체는 사유될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 경험 대상들을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칸트의 본체/예지체(noumena)[각주:2]는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강화하는 어떤 경계적 개념(boundary concept)"으로서 순수하게 부정적이고, 작용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현상계(phenomena)와 예지계(noumena) 간의 칸트적 구별은 오성에 의해 유지되는 고착된 분할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이러한 분할은 분해된다. 현상의 세계와 초감각적인 세계의 구별은 그 자신의 내적 모순의 무게로 인해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피히테의 자기 설정하는 자아 혹은 칸트의 초월적 주체와 달리, 개념에 대한 헤겔의 논리는 단순히 유한한 주체에 내재적인 사유 행위가 아니라, 존재 또한 구성한다. 사유와 실재 양자는 변증법적으로 동일한 동학적 구조와 기원을 갖는다. 그들이 그들의 내용에 관해 동일한 내재적 규정을 갖는(enjoy) , 존재와 사유는 항상 이미 상호 결속 되어 있다. 헤겔에게, (현상과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란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개념과 동일할 때에만이 참된 것이 된다. 개념규정은 사유 활동에 고유한 기본적인 전제일 뿐 아니라, 동시에 존재론적 발생(generative)이며 실재 그 자체의 구조적 전제이다. 자기 규정하고 자기 참조하는 자아로서의 순수한 개념은 주관적이며, 따라서 객관성을 구성하는 어떤 활동으로서의 그 동일한 변증법적 운동을 인식할 수 없다. 주관적인 것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것에서도 제 형식을 갖는 충분한 개념은 절대 이념이다. “개념이 그것에 절대적으로 충분한 실현을 획득하며, 이 실제 세계, 그 객관성 속에서 자유롭고, 그 주관성을 인식하며, 이 주관성 속에서 저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바로 이 절대 이념 하에서다. 존재와 사유의 통일을 그들의 개념규정의 측면에서 이해하고 인식하는 것은 절대 이념을 구성하는 것인 바, 왜냐하면 이념은 (주관으로서의) 사유에 고유한 개념화의 자기 재귀성을 인정할 뿐 아니라 또한 이 활동을 (객체로서의) 실재와 통일시키기 때문이다. 절대이념은 개념의 내용에 대한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을 갖는 무한한 형식이다. 논리적이고 존재론적인 활동의 전체 운동에서 나타남으로써, 절대이념은 그 자신을 개념규정의 노출이 되도록 드러내왔다. 그 내용에 대한 개념의 무한한 형식을 가지면서, 절대이념은 사유에 내재적인 변증법적 운동을 뒤쫓을 뿐만 아니라, 이 무한한 형식은 보편적인 것으로 발전하거나 되돌아오면서, 실재 자체의 구조로부터 출현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무언가로서의 이념은 주관적인 개념을 객관적으로 실제하는 것과 통합시킨다. 절대 이념은 동등하게 실체이자 주체인데 이는 그것이 상호적으로 주체(혹은 개념)를 실체와 통합시키고, 실체를 주체에 통합시키기 때문이다. 헤겔의 절대이념은, 베아트리체 롱게네스(Béatrice Longuenesse)가 지적하듯, “사유활동과 그것이 사유하려는 것 사이의 일치(agreement)이다. 이는 곧 개념과 그 대상의 일치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는 절대정신에 선행하며 개념의 전개를 구성하는 매우 개념적이고 변증법적인 운동을 통해서 발생한다. “절대가 주체와 객체의 일치로 구성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체의 운동, 사유의 대상을 구성하는 바의 나는 사유한다라는 통일성 내부에서이다.” 헤겔의 절대이념은 그 자신 내에 모든 개념규정을 포함하며, 사유의 구상행위를 인식한다. 절대이념은 절대적인데(즉 비상관적인데), 이는 그것이 모든 개념규정의 최후의 결과로서 출현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유의 규정이 그것에 앞서 제기되어 왔기에, 절대이념에게 사유할 대상은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 마르크스가 말하듯, 절대이념은 그 논리적 내용을 모두 소진시켜왔다는 이유에서 따분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절대이념은 수행적인 모순으로 빠지는 데서 벗어나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자기 재귀적인 동학이 명백히 사유활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존재에서도 고유한 개념규정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아 왔듯, 헤겔의 주체는 단순히 어떤 사유하는 유한한 주체를 가리키지 않는다. 롱게네스는 이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약 헤겔이 절대의 개념(notion)을 심원하게 전환시킨다면, 그는 또한 주체의 개념에 대해서도 그렇게 한다. '나는 사유한다는 어떤 유한한 주체의 사유가 아니다. 그것은 경험적 주체의 특정한 개별적 상황(circumstance)과 더불어 그 자신의 필연성을 가지는 과정의 통일성을 표현한다.”

질리언 로즈는 헤겔의 절대이념의 실천적이고 변혁적인 동학을 이렇게 표현한다: “절대를 사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우리 행위 속에서 인식함으로써 우리 행위의 규정인자(determinants)로서의 현실성(actuality)을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의 변혁적이거나 생산적인 활동을 인식하는 것은, 이론적인 이성과 실천적인 이성 그리고 설정하는 것과 설정된 것 사이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현실성을 승인하는 방식으로서 특별한 자격(claim)을 갖는 것이다. 변혁적인 활동은 행위에서의 현실성을 승인하며, 비행위와 행위를 대비시키지 않는다.” 헤겔의 절대이념은, 변혁적이고 변증법적인 활동으로서, 관념적인만큼 물질적이기도 한 어떤 실천(praxis)을 구성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공공연하게 그것의 고유한 개념적 전제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주의적 체계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바로 변증법의 활동적인 활력이며,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념과 함께 있는 유물론-을 특징짓고(inform), 마르크스를 다른 유물론자들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바로 헤겔의 절대이념이다.

마르크스 식의 유물론은 변증법적인데, 이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이 개념과 실재의 통일로서 이해되는 헤겔의 절대 이념의 역동적인 활동을 그 자신 내에 통합시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실재의 근본적인 기초를 물질로 설정하기보다는, 외려 단지 관조적이기만 할 따름인 유물론을 어떤 인간 활동으로서 실천하는 것으로 강조점을 변동시키기 위해 분투했다. 마르크스에게, 그 이전의 모든 유물론은 동일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즉 그들은 모두 물질적이고 외부적인 실재를 추상으로서, 즉 관조적인 사유의 대상으로서 이해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반성적인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유물론이라기보다 인간 활동에 근거한 유물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일갈할 때 명백하다: “포이어바흐는 개념적 객체와 실로 구별되는 감각적인 객체를 원하지만, 그는 인간 활동 자체를 객관적인 활동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따라서 그는 혁명적인활동, 실천적이고 비판적인 활동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한다.” 실로 헤겔적 태도로, 마르크스는 실재 자체의 객관적 진리는 사유 속에서 증명 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인간 활동에 의해 실천적으로 증명 가능한 무엇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헤겔의 절대정신은, 우리가 보아왔듯,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을 어떤 단일하고 동일한 사유 내부로 통합함으로써, 양자의 분할을 변형시키고 초월한다. 이념과 함께 있는 유물론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러한 초월성을 승인한다. 마르크스가 테제 8번에서 말하듯, “사회적 삶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오도하는 모든 모호함은 인간 실천과 이 실천에 대한 이해에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합리적 해결책을 발견한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단지 사회적 삶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이 인간 실천과 실천 그 자체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 해결책이 실천과 이러한 실천에 대한 이해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 실천, 그리고 이론과 실천에 대한 이해는- 개념규정과 객관성의 통일로서의 혹은 주체와 실체의 통일로서의, 또는 사유와 존재의 통일로서의 절대이념이다. 마르크스가 이러한 해방의 머리는(head)는 철학이며, 그 심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철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양 없이는 현실이 될 수 없으며,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실이 된 철학 없이는 폐지 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을 발견한다.

그것의 설정 활동에 고유한 관념론적 중심의 부족으로 인해 오로지 수행적인 모순을 만들어내고자 주체 너머로 나아가려 하는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과 달리, 이념과 함께 있는 유물론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숨김없이 그 근본적인 헤겔적 관념론을 공표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주체성을 그것의 원리와 통합함으로써 유한한 주체 너머로나아간다. 절대이념은 실체와 주체의 동등성으로서, 존재와 사유를 단일한 총체성 내부로 구성시켜낸다. 따라서 지젝이 실재 자체에서 작동하는 내재적인 적대와 긴장은 개념규정 자체에서의 긴장이지만, 이 개념규정은 실체 혹은 주체로 환원될 수 없으며, 양자를 동시에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옳다:

헤겔의 교훈을 받아 들여 온 유물론에게 있어, “외부의 실재”(실재 자체real-in-itself)는 실로 탈물질화되어 있으며, 순수하게 형식적인 상호관계의 "추상적인" 상호작용이다. 여기서 물질은(그 두께에 있어) 사라진다.” 주체에 저항하는 급진적인 외부성을 가리키는 것과 무관하게, 주체의 파악에 저항하는 객관성의 두께는 정확히 주관적 계기이며, 주체성의 가장 근본적으로 "물화시키는환상이자, 주체가 실재 자체에 더하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다른 주요 교훈으로 우리를 데려 간다: 우리가 (주관적인) 개념적 규정과 파악에 저항하는 외부의재료(stuff) 사이의 긴장을 상대할 때마다, 이 긴장은 분명히 이차적인 것으로, 본래적으로 개념들 자체의 짜임(texture)에서의 불균형 혹은 적대인 것에 대한 어떤 결과이자 물화시키는 ()인지 라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 헤겔의 기본적인 관념론적내기가 있다: 개념규정과 실재 사이의 모든 긴장은 어떤 개념규정의 내재적인 긴장으로 변형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유물론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이들 긴장 혹은 적대가 본질적이며 환원불가능 하다는 점에, 우리가 결코 어떤 순수하고완전히 현실화된 개념적 구조에 도달 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최종적인 분석에서, 이념과 함께 있는 바의 유물론으로서 변증법적 유물론은 주체-실체의 원리를 그 자신 내에 포함시킨다. 절대이념의 주관적 측면은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하여금 그것의 역동적인 활동에 고유한 개념규정을 인식하게 해준다. 이념의 실체적인 측면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실재 자체에 내재적인 개념규정을 인식하게 해준다. 주체에 대한 헤겔적 교훈은 주체는 단순히 주체가 아니라, 또한 동등하게 그리고 항상 이미, 실체라는 점을 드러낸다.

  1. 위 인용문에서 지젝은 idea를 표기할 때 부러 대문자를 사용하여 'Idea'라고 표현한바, 이는 idea가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법인 ‘사유; 사고’등과 구별하여 헤겔의 용법에서 개념을 맥락화하기 위한 것이라 판단, 대개 ‘사유’로 옮긴 idea를 이 경우엔 ‘이념’으로 옮겨둔다. [본문으로]
  2. “칸트에게 본체란 오성의 대상이며, 감각적/감성적 직관은 아니지만 어떤 종류의 직관, 즉 지적 직관에 주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감각적 직관은 객관적인 대상, 즉 실정적으로 주어진 무언가를 무조건적으로 필요로 하지만, 비감각적 직관은 대상에 대한 직관이 대상을 넒은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취하는 바, 여기서 대상은 어떤 지(intellect)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다.” 정강산, “상관주의와 그에 대한 불만들”에 대한 주해와 사변적 실재론에 대한 비판적 시론,” 크리틱칼, 2020년 8월 30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