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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맑스코뮤날레 분과세션 “인문학의 위기인가, 사회과학의 위기인가” 토론문 (2021. 5.16)

by 정강산 2021. 8. 21.

정강산(독립연구자)

 

김민정 선생님께서는 김도현 선생님의 작업, <장애학의 도전>에 부재하는 구조적 체계에 대한 고려를 지적하고, 계급적 문제설정의 부족에 대해 비판적으로 살피는 작업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김도현 선생님께서 저작 내에서 장애인이라는 개념 분할을 만들어내는 주요 원인으로 자본주의를 들며 장애인은 가용한 경제인구로의 집계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 ‘적자생존의 경제모델로서의 신자유주의에 내재한 우생주의등을 언급하셨으나, 김민정 선생님께선 이런 부분들도 충분히 존중을 하며 좀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하고 계시기에, 전반적으론 동의가 되었다. 이전에 5회 맑스코뮤날레 때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상임공동대표가 오셔서 장애인과 자본주의의 불화로 발제를 하셨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김민정 선생님께서 염려하셨던 (김도현 선생이 설정한) 관계의 문제(여성문제의 한편엔 여성이, 다른 편엔 남성이 있고 비슷하게 장애인 문제 또한 비장애인과의 관계 문제임을 논구한)와 관련, 아마 김도현 선생님의 논점은 장애의 범주가 일종의 주어진 실체가 아님을 얘기하고자 했을 것이다. 즉 양자가 헤겔-맑스 식의 모순 내 통일처럼, 공동의 그러나 가변적인 배치 하에 있는 사회적 관계임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 연장에서, 성차의 억압과 차별의 주요 기제가 자본주의의 사적 생산과 계급구조에 있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장애인에 대한 억압 역시 그러하다는 주장에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건 분석의 전제이기보단 결론이 되어야 할 거 같다. 여러 정체성 기반의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과 이행모델 내에 좀더 유기적으로 들어올 수 있으려면 좀 더 많은 작업과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인 것이다. 김민정 선생님이 종종 의지하시는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가 썼던 자본주의와 인종차별이라는 작업처럼, 혹은 사회재생산이론가들이 가사노동논쟁에서 나온 문제들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부의 구조적 분할로 정립하는 것처럼, 상이한 듯 보이는 억압기제를 유기적으로 통합해내는 작업이 장애인문제와 관련해서는 훨씬 더 이뤄져야 하지 않는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소수 활동가들 말고는 장애와 자본의 매개에 관해 누구도 그 정도의 규정적인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고, 정작 좌파 단위 내에서도 장애인과 자본주의의 필연적 불화를 이론적으로 상세히 규명한 작업이 거의 없으며, 실제로 장애인들의 투쟁 현장에도 좌파단위들이 결합이 다른 부문들에 비해 덜되지 않나 싶다.

또한 선생님께서 담론적 상대자로 설정하신 프레이저(Nancy Fraser)가 맥락화한 분배냐 인정이냐라는 테제가 철저히 맑스주의적이지 못하다는 부분에 대해서 이견이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맑스주의나 사회주의 실험의 쇠퇴와 정체성 정치의 대두를 이미 실제로 맥락화하고 있는 테제이고, 이미 다만 경제에 그치지 않는 총체로서의 생산양식 내지 그 사회구성체의 선차성이 여타의 심급들과 동등한 하나의 지점으로, 혹은 그만큼도 영향력이 없는 무언가로 격하되어 나타나는 세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소 병렬적으로 여러 심급들을 나열하는 입장은 변화된 사회의 정치조건을 반영하는 객관적 필연성을 지니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로부터 경제환원론으로 가는 것은 외려 현재의 다변화된 사회세력들의 존재를 충실하게 상대하는 작업일 수 없다는 점에서 저는 프레이져의 경제결정론 비판에 동의하는 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지점에서 프레이저의 삼중도식(분배, 인정, 재현)이 또한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프레이저의 구도는 체계의 존재론적 깊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적녹보라 패러다임 혹은 교차성이론과 유사한 한계라고 생각한다(물론 이들이 연대의 정치를 가능케 할 수 있는 구호로서 유효하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씀드린 아쉬움의 연장에서 외려 현재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러한 기제들의 연관이자 층위와 깊이에 관해 규명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한다. 김경아 선생님과 이기홍 선생님이 주로 참조하고 계시는 비판적실재론을 우리가 생산적으로 이용하는 방법도 거기에 있을 거 같다.

다음으로 김경아 선생님의 작업에 관한 인상을 말하자면, 그러한 작업 기조는 큰 줄기로 봤을 때 90년대부터 있었던 작업이긴 하다. 이는 맑스주의를 통한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반비판 혹은 대결이라는 인식론적 문제틀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91년에 나온 제임슨(Fredric Jameson)의 작업(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이나, 93년에 나온 토니 스미스(Tony Smith)의 작업(Dialectical Social Theory and Its Critic) 같은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영미권에 비해 한국에선 대륙철학의 양적 수용이 시간상 늦게 이뤄진 감도 있고,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인 소비 자본주의로의 진입 자체가 90년대 이후로 가시화되었기 때문에, 한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탈근대담론을 수용하는 양상 역시 늦었고, 그에 대한 체계적인 반비판을 수행할 수 있게 되는 시기도 유예된 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조건에서, 자생적인 저력에서 나타난 한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 비판은 거의 없었던 거 같고, 그나마 2000년대의 지젝의 작업 소개를 통해서 그런 탈근대담론에 대한 반비판의 구도가 도입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 김경아 선생님은 바스카(Roy Bhaskar)의 흄/칸트 비판(“경험적 실재론”)의 구도를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로 확장하고, 여기서 존재론의 부재를 읽거나, 광의의 탈근대 이론가들이 과학방법론의 체계에서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피면서, 그런 탈근대담론이 한국적 상황에서 맥락화된 사례들을 중심으로 하여 바스카의 (칸트의 초월이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에 대해 초월적인)초월적 실재론과 마르크스적 반영이론의 관점에서 반비판하고 계신 거 같다. 탈근대 담론이 새롭진 않지만 외려 공기와도 같은 조건이 되었을 때, 그들을 결산한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선 기술적인 문제들에서의 이견을 드릴 수 있겠다. 아마 탈근대담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연구자들이라면, 소쉬르 이후 그 영향권에 있는 흐름을 전부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의 개념으로 소급시키기엔 사실 무리가 있지 않느냐는 비판을 할 것이다. 사실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대륙철학의 복잡한 결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채 뭉뚱그려 파악한 미국 발 개념이다. 예컨대 알튀세, 레비스트로스, 라캉, 바르트, 데리다, 들뢰즈, 푸코 등 이들이 비록 소쉬르의 영향권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었다 해도, 이들 전부를 엄밀한 의미에서 일관되게 묶어줄 담론은 사실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그런 추상화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개별 논자들 각각이 아니라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해야만 하는 그 당위에 대한 서술이 좀 더 선제적으로 제시되면 더욱 설득력이 생겼을 것이다.

이하로는 내용적인 부분에 대한 몇몇 이견을 드리려한다. 김경아 선생님께서는 탈근대이론가들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젖줄이라 할법한 소쉬르의 도식 자체에 반실재론, 해체론, 허무주의가 내재해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러나 외려 소쉬르의 도식은 실재를 거부하는 유아론이 아니라, 언어의 유물론이기도 하지 않나? 소쉬르가 지적한 기표와 기의 간의 결합의 자의성은, 곧 언어가 인간의 의도와는 독립적으로 구조화된 체계라는 점을 규명한 것이기도 했다. 즉 우리가 사과라는 기표에서 사과다움을 느끼거나, 그것이 마땅히 실재의 사과가 가진 속성을 합리적으로 표현한다고 여기는 것은 환상이며, 언어는 그저 약호 간의 차이에 의해 객관적으로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는 소쉬르 통찰의 핵심은 결국 주체가 담론에 선행하지 않는다는 점을 규명한데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소쉬르의 기호론은 외려 허무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상부구조들이 개별의 인간에 앞서서 구조화 되어 있는 지점들을 드러내는 무기가 될 수도 있지 않겠나. 달리말해 우리는 자본가를 자본의 인격적 담지자로 파악한 맑스와 비슷한 견지에서 소쉬르의 작업을 조명할 수도 있다. 소쉬르의 기호학에 기대어 발전한 초기 바르트 식 이데올로기 비판인 신화 비판이 좋은 예일 텐데, 바르트는 주체에 앞선 언어로서의 여러 담화들이 자본주의의 실재를 파악하기 어렵도록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는 점을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외려 기호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있어 흥미로운 것은 소쉬르 때까지 유지되었던 기표와 기의와 지시대상의 삼각모델에서- 데리다와 후기 바르트로 왔을 때 전면화 된 기표의 무한한 연쇄로 요약되는 텍스트성으로의 이행이 아닌가? 이런 부분은 자본주의적 필연으로 맥락화할 수 있다. 일전에 제가 다른 지면에서 얘기한 적이 있지만, 60년대 후반부터 데리다, 후기 바르트 등의 텍스트론이 뚜렷하게 가시화되고, 이어 미국에서 이들이 ‘theory’ 로서 각광 받게 되던 맥락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미국에 대한 유럽과 일본의 추격으로 인해 금본위제가 흔들리던 때이고, 브레튼우즈 체제가 무너지고 달러본위의 변동환율제로 이행하던 때이다. 텍스트의 외부는 없다라는 말로 요약되는- 어떤 실체에 대한 근거도 부정했던 텍스트론은, 어떤 근거도 없는 불태환 지폐가 편재하게 되는 신자유주의 축적 조건을 맥락화했던 이데올로기적 시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지평에서 고려된 포스트구조주의는, 한때 제임슨이 지적했듯 심화된 자본주의의 물화 단계에 상응하는 지적 흐름으로 조명될 수 있으며, 비로소 내재적으로 비판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저 역시 들뢰즈에 그리 호의적이진 않지만, 김경아 선생님의 몇몇 구절들은 들뢰즈에 대한 내재적이기보단 외재적인 비판이 될 것 같기도 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왜 그토록 현명했던 맑스주의자들이 들뢰즈의 시좌에 빨려들어 갔는지에 대한 좀 더 세심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욕망의 해방/탈주와 스피노자식 역능의 자유에서 탈출구를 본 들뢰즈식 해법은 신좌파의 에토스와 공명하는 데가 있고, 이는 그것이 기존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내지 스탈린주의로부터 사람들이 느끼는 염증을 먹고 자랐음을 의미한다. 결국 문제는 당대의 실재 자체에 있다. 그 연장에서, 김경아 선생님의 지적대로 들뢰즈의 개념이 여타의 철학들에 비해 지나치게 수사적이고 은유적인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은유를 통해 가닿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지점이다. 들뢰즈가 윤리철학적/도덕적 비평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외려 그는 기본적으로 니체적 계보에 있기에 도덕을 그리 높게 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들뢰즈의 언어가 소설적이고 은유적인 것은 그가 바로 명확한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개념들을 자본주의의 물화로 파악하기 때문이라 봐야한다. 즉 들뢰즈는 한편으로 은유적 개념들을 통해 그런 주체-객체의 분할을 지양할 수 있는 형식을 찾는 미학적 시도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벤야민 또한 갖고 있던 충동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정교한 아나키즘적, 낭만적 공산주의자로 간주되는 게 맞다. 그의 헤겔 혐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동일성-보편성 비판, -객의 변증법을 넘어서는 강렬도의 개념을 보면 특히 그렇다. 들뢰즈의 배치론(assemblage; agencement)은 결국 주객 도식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저런 대상들이 아니라, 각자 고유의 차이와 강도만을 지닌 미분의 존재론적 평면이 있고, 따라서 세계는 없으며, 다만 배치만이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실 스피노자의 코나쿠스 개념에서 확장된 독특한 생기론적 유물론이다.

그의 기계’, ‘흐름의 절단개념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각이한 역능으로, 각이한 강도로 고유하게,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끊임없이 유동하는 존재들이 있고, 이들의 (생철학적 함의가 짙은) 존재론적 항상성과 운동성은 모든 개체를 기계로 파악할 필요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라서, 앞서의 존재론적 평면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형세(배치)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들을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고, 자본주의가 이러한 흐름을 가장 잘 전유하고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 들뢰즈의 작업은 독특한 방식의 자본주의 비판이다. 문제는 주체와 객체의 분리와 그 변증법을 한갓된 철학 개념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상대해야 할 결정적이고 실재적인 전장으로 읽어야 한다는 건데, 들뢰즈는 그 지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들뢰즈의 모든 개념은 결국 주-객의 분할을 넘고자 하는 것이고, 그건 사실 맑스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마르크스는 그 주-객 분할의 철폐가 목표가 되어야 하지 존재의 전제가 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객의 돌이킬 수 없는 분할이 근대성의 표징이라면, 그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맥락화이고, 그것을 지양하는 것은 관념적으론 이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경아 선생님도 지적하셨듯, 그와 같은 존재론에서는 공동의 세계에 대한 집단적이고 기획적인 이행이 안 된다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 외에 그의 자본주의에 대한 미학적 비판의 충동 자체는 정당하게 평가해야할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이 지점을 잘 헤아려야 외려 그들의 논리를 내재적으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알튀세르에 대한 입장을 보자. 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자 했던 알튀세르의 경제결정론 비판과 이데올로기 장치의 도입, 과잉결정이 포스트모더니티가 일반화된 이후에는 오히려 하나의 멍에이자 협약주의적이고 다원적인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원천처럼 보인다는 점은 공감한다. 그 포스트마르크스주의란 곧 정치 전략에 있어 계급전선에서 인민전선으로의 전환, 반자본주의 노선에 대한 반신자유주의 노선의 우위 혹은 신사회운동의 자율적 공간에 대한 존중 등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전환에 대한 환멸은 이해함직하다. 그러나 문제는 알튀세르가 그러한 변화의 원사이자 원천이 아니라, 알튀세르 또한 그가 처해있던 어떤 실재에 대한 필연적인 반응으로서 그의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노정했다는 점 아닐까. 알튀세르의 헤겔 비판과 과잉결정을 비롯한 개념들을 문자 그대로 읽기보다, 그의 기획 전체가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을 위해 도입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지점들을 좀 고려해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김경아 선생님께서는 탈근대 담론을 협약주의로 규정하신다. 헌데 그 지점에서는 좀 더 섬세해질 수 있을 텐데- 탈근대 담론의 핵심줄기가 소쉬르 식의 언어적 전회를 한편으로 끼고 있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긴 하지만, 탈근대담론은 들뢰즈의 생기론적 접근이나, 혹은 스스로는 탈근대담론임을 부정하겠으나 사실 그러한 조건에서만 나타날 수 있는 최근의 사변적 실재론의 경향에서 알 수 있듯 외려 존재론적이거나 객체편향적이기도 하다. 특히 브루노 라투르, 그레이엄 하먼, 메이야수 등등은 극단적인 실재론자들이다. 그러니까 외려 탈근대의 핵심은 이행의 정치와 대상으로서의 사회의 실종에 있으며, 그런 조건 하에서의 주체 편향과 객체 편향의 이론적 각축에 있는 듯하다. 즉 양자의 매개를 살피는 변증법의 상실이 가장 큰 특징인 것. 최근 헤겔이나 아도르노에 대한 대대적인 재독해가 유행한 것 역시, 객관적으로 이런 조건이 전제되어 있지 않을까.

이기홍 선생님의 경우엔, 마르크스의 악명높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을 과학방법론에 입각해서 정리한 부분이 특히 좋았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작업에서 추상과 구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 없이 논의가 사변적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반영이론적 측면에서 확실히 해명해 둔 점 말이다. 맑스의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의 규정 및 다양한 것들의 통일로서의 구체에 대한 규정은 맑스 특유의 반영론이자 변증법이 전제되어 있고(즉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은 인식의 출발점으로 나타난 구체를 다시금 사유 내로 지양시켜 파악하는 방식이지만 그 자체가 구체적인 것을 생산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은 객체를 사유 내에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레닌과 루카치의 반영이론(언어는 실재와 교통하나, 실재자체가 아니며 맑스와 달리 헤겔은 이 점을 이해하는데 실패했다), 텍스트성의 포화를 맑스주의 변증법 내로 융화시키는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이 근거한다(실재는 텍스트를 통해서 가닿을 수 있으나 텍스트가 아니다)는 점에서 사실 전통이 깊은 개념틀이고, 더욱 규명되어야 할 부분인데, 어쩌면 이기홍 선생님의 작업이 이 부분과 비판적 실재론이 엮일 수 있는 지점들을 찾아 주신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기홍 선생님께는 비록 비실론과 맑스의 방법론이 그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확고히 구분되는 지점, 그러니까 양자의 층위와 깊이의 차이에 관해 여쭤보고 싶다. 양자는 비슷한 방법론을 공유하며 서로 보완할 수 있는 관계이겠지만, 그만큼 다르기도 하지 않았던가?

종합하자면, 결국 본 세션의 의미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개념 대비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적 인식론의 구조적 우위와 강점을 표현한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크게 동의하고 공감하는 바이지만, 문제는 인문학을 비판의 상대자로 놓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적 양태를 규정하고 생산하는 조건에 대한 비판이 아니겠는가?

중요한 건 어떤 실재가, 자본주의의 어떤 단계가 이와 같은 인문학의 헤게모니를 발생시키는지를 보는 것 아닌가? 더구나 문제는 오늘날 사회과학이라는 것이 인문학과 다른 영역으로 남아있는 상태를 전제할 수도 없다는 데에 있다. 즉 전통적으로 사회과학의 영역에 자리하는, 실재론적인 지식들조차 취향으로 소급된다. 인문학으로 표상되는 지적 취향의 백화점적 소비 사태는 심지어는 마르크스주의조차 위험하지 않은 분과 학문이자 자기계발의 목적으로 전유되게 해왔다. 그런 점에서 2010년대 이후로 각광받아온 인문학이란 특정한 분과라기보다는- 소비자본주의의 조건에서 문화적 우세종이 된 중산계급의 탈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지식을 구부리는 방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저는 구조적 이행의 불가능성이 어쩌면 그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변혁에 대한 비전이 명확할 때 대중은 자연히 규정적인 이념으로 따라온다. 당장 80년대의 사회과학 붐이 그것을 증명한다. 당대의 사람들이 현재의 사람들보다 더 똑똑하거나 이념적으로 투철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에겐 다만 집단적인 운동과 비전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철학 대 사회과학 혹은 인문학 대 사회과학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그보다 훨씬 심원한 실재의 변환과, 그러한 전환을 표상해내지 못하는 좌파의 교착상태이다. 사회과학이란 결국 사회적 실재에 대한 규명이고, 사회적 실재란 그 본질상 자연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중력만큼이나 보편적이다. 그리고 그 보편성이란 결국 근본적으로는 정치적인 지평과 관련 있다. 정치는 공동의 문제의 제 1 지평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정치의 죽음은 사회과학의 죽음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태를 어떻게 넘을 것이고, 사회과학으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마르크스주의로의 전환이 어떻게 가능한가? 결국 사회과학의 부활은 조직된 운동과 실천의 영역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