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2일
이데올로기 투쟁은 그 자체로 현실을 만드는 실제적인 투쟁이다. 우리가 언어의 외부에서 사고 할 수 없는 한, 현실은 언제나 언어를 통해 매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17년의 러시아 10월 혁명이 열어젖힌- 물질화된 사회주의 국가들의 연속적인 출현이 마르크스의 <자본>이라는 단 한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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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위대한 사회주의적 실험들이 처한 사후적인 비난으로부터의 반동으로 출현한 이런저런 수평적이고 탈 위계적이며 탈 중심적인 실천들을 보고 있자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직립보행을 위해 걸음마를 시도했던 아기가 자빠져 무릎을 다치니까- 아예 걸음마를 걷지 못하도록 발을 잘라 땅에 찰싹 붙어 수평적으로 기어다니게 한다고? 그러다 팔꿈치 뼈가 아작나서 아예 못움직이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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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철학 수고의 "인간주의적"마르크스, "소외론적" 마르크스와 <자본>의 물신주의에 관한 챕터를, 자본주의의 운동과 역할을 해명하지 못했던 시기의 미성숙한 마르크스의 흔적으로 쉽사리 격하하는 이들, 어쩌면 교조적인 알튀세리안들이 정작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념적 조건-다양성, 차이, 개별성, 미시성- 속에서 출현한 '타자'의 정치학에 시혜적인 시선을 보내고, 신사회운동들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하지 못한 채, 도처에서 식별되는 정체성 중심의 주체화에 함구할 때, 나는 모종의 역설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타자'라는 정체성에 갖힌 정치적 기획들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알튀세르가 비판했던 의미에서의 인간학적 전제들에 침잠하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많은 좌파들은 이제 시민사회운동에는 한결 개방되어 있지만, 그러한 아량은 분단 모순과 반제국주의라는 테제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는 nl을 향하지는 않는다.
이쯤되면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각기 상이한 담론에 의해 매개되고 현상하는 현실과 운동들 사이의 접합과 평등한 연대를 강조하는 라클라우의 테제를, 신좌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수용했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평등한 연대에서 고의적으로 제외되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다양한 담론을 바탕에 둔 운동들의 우연적인 상호 접합은 적당한 개방성과 포용력, 정치적 올바름을 편하게 입증할 수 있는 대상에 한해서만 참조되는 알리바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연장이 아니라 소수자적 권리로부터 출발하는- 좌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못미더운 까닭도 이 때문이다. 선별적으로 연대의 대상을 걸러낼 것이라면, 왜 처음부터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밝히지 않고, 상이한 운동의 담론들을 포섭하고 침범하려하지 않는가? 상이한 운동들의 자율적인 공간을 존중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은가.
담론들 간의 위계적 역할과 각 담론이 가지는 추상의 밀도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 한, 차이에 관한 모든 논의는 자유주의적이고 상품미학적이며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이데올로기와 연결된다. 차라리 차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힘의 역학을 통해 관철시키고자하는 근본주의자들이 그런 점에선 현명해보인다. 엄밀한 의미에서 근본주의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들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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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유물론자는, 정체성의 정치로 인입되는 소수자들의 몸짓을 마냥 긍정하기보다, 그러한 정체성이 사회적, 제도적, 과학적, 담론적, 기술적 시도들의 물질적 작용으로 인해 구성되어 온 것임을, 그런 과정 속에서 그들이 일반성으로부터 배제되며 수탈되어 온 것임을 지적한다.
진정한 유물론자는 소수자들의 권리향상을, 소수자적 정체성의 자율적인 지위를 긍정하는 속에서 정치를 시작하지 않으며, 그 과업을 관념적 실재, 객관적 이성, 이데올로기 장치의 장악 및 구축 속에서 구하려한다(그것이야말로 인간학적 전제들에 기대지 않는 방법이다).
진정한 유물론자는 소수자적 정체성이 곧바로 급진성과 관련되지 않으며, 그들 역시 권력과의 공모로부터 곧바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진정한 유물론자는,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를 만들기 위해 특정한 국면에 기꺼이 인륜과 도덕률, 인간적 감수성을 포기한다. 스파르타쿠스, 로베스피에르, 전봉준, 맑스, 레닌, 마오, 김일성, 체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호치민이 그런 이들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윤리를 확립하는 일은 곧 윤리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헌데 오늘날 유물론자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윤리를 토대로부터 자유로운 또 다른 토대로 가정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관념론자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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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하는 순간 발화되지 않은- 누락되고 탈락된 것들이 즉시 발화된 언표를 향해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글 쓰는 것이 점점 어려워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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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진지하게 상대하는 사람치고 소비의 위상을 윤리적으로 구분하여 착한 소비/나쁜 소비를 분리시키는 것은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가치의 실현을 통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지속을 위해 필수적인 덕목이라는 점에서 소비는 윤리를 초월하는 차원에 있고, 추상화 된 노동을 경유하여 '상품'이라는 것이 생산되는 한 특정한 방식의 소비에 특권을 부여하는 모든 시도들은 우스워질 수 밖에 없다.
허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해도, 현실에서 우리는 불매운동을 비롯한 시도들에 매달리게 되고, 예컨대 얼마 전 새삼 재조명된 것처럼-농심이 국가권력과의 카르텔을 통해 삼양을 재치고 라면 판매율 1위를 탈환했다는 혐의가 짙다는 사실을 곱씹으며 농심 대신 삼양을 택하리라는 다짐을 한다. 헌데 삼양을 택한다고 해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정확히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을 온전히 정상화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자본은 윤리를 따지지 않으며, 선악을 모른다. 외려 윤리적이고 합법적이며 정의로움을 자처하는 이들의 경영이나, 그러한 인간적인 이미지들이 덧입혀진 경우 더욱 불투명해지는 것이 자본의 동학이다. 우리시대의 가장 도착적인 프로그램이 있다면 소비자 고발을 꼽고 싶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한 프로그램은 생산현장의 소유주가 어쩌다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어떤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그러한 상품을 생산하게 되었는지, 그들이 고용한 직원들의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일부 비양심적인 생산자들-사업자들- 자본가들을 경질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임을 전제하는 문제설정 위에서 모든 서사를 기획한다.
허나 개별 사업자들이 이윤의 최대화를 위해 매번 투자내용들을 적절히 조절할 것을 요청받는 자본주의의 보편성 속에 존재하는 한, 결함있는 생산물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포장하여 내놓거나, 이윤의 일정 부분을 제품의 품질 개선에 투자하여 생산물에 대한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것은 정확히 '이윤율'의 상승을 염두에 두고 취해진다는 점에서 동일하며, 단지 경영전략의 문제일 뿐인 것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사회적 기업 역시 마찬가지의 아포리아를 지닌다. 문제는 상품에 일정한 비율로 투여됨으로써 가격을 형성시키는 지배적인 축이 되어, 그것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현상시키는 노동의 분할을 통해 나타난 대상화되고 추상화된, 상품을 만드는 노동 자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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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즐긴다: "군대는 직책사회다". 이 말은 일견 옳은 것처럼 들린다. 이는 군번과 지연에 관계없이, 직책에 따라 그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합당한 대우와 권한을 누리고, 누려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군대라는 조직 체계가 지니는 계급제도로부터 비롯된 부조리와 문제들을 은폐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시도의 연장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직책사회'라 규정하고, 그 속에 경제적으로 분할된 계급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포장하며 모두 각자의 소명과 능력에 따른 고유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다(발리바르와 랑시에르 같은 이들은 성문화된 법 자체를 위와 같은 방식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교리를 비판하며, 무력하고 공허한 것처럼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저항들이 바로 그렇게 어딘가에 기제된 법, 명제들을 테제로 삼아왔음을 지적한 바 있다. 허나 이러한 지적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가정하는 부르주아 법에 대한 관념과 본질적으로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의 참조점, 준거점으로서 "대전제"가 되는- 성문화 된 법들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전제하는 '허울 좋은 명목이자 텅빈 기표로서의 법'인 한에서, 저항세력들의 참조점으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군대에서 우리가 체험하는 부조리와 불합리는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난다. 그것은 선임자들의 질책과 (성)폭력이기도 하고, 잦은 훈련이기도 하며, 신체에 가해지는 통제이기도 하고, 후임자들의 무능력이기도 하며, 선임 혹은 상급자로부터의 요구와 기대, 후임 또는 부하들의 방만함이기도 하다. 헌데 이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현상하는 부조리, 불합리는 언제나 계급제도를 경유하여 출현한다. 앞서 열거한 종류의 문제들과, 그 이외의 결점들을 지배적으로 재생산하는 결정적인 기제는 바로 계급이다.
군내 부조리를 완화하고 해소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그러한 문제들이 계급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망각하는 한 유의미한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바른말, 고운말 쓰기 운동, 언어순화 캠프, 감사노트 작성운동, 레크레이션과 워크샵이 가미된 장병 협력증진 운동, 대대;중대;소대 단결활동;대회;회식, 1303 국방헬프콜 운영, 주기적인 설문지 작성, 마음의 편지, 분대장 관찰일지 작성, 또래 상담병 운용...셀 수도 없이 많은 제도들이 군내 악폐습의 일소를 위해 시행되었고, 또 그로 인해 일정부분 성취된 부분도 있지만, 그들이 불평등한 위계와 임무분담, 권한 등을 매개하는 계급제도를 타격하지 못하는 한에서 근본적인 수준의 해소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증거한다(이는 자본주의의 계급적대를 완화하기 위해 시행되어온 사회보장제도와 형태론적으로 유사하다). 결국 "군내 부조리 척결, 선진병영 만들기 프로젝트" 따위의 시도들은 계급제도의 폐지가 아닌 이상 시늉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군내부의 조합주의라 할 법한 휴가를 둘러싼 병사들의 갈등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굵직한 훈련이나 대회에 맞춰 나오는 몇장의 포상휴가는 매번 분란과 쟁취의 대상이 되는데, 이러한 현상에 대응하는 3단계의 인식론이 있을 수 있다.
1단계는 다른 소대원들에 비해 자신이 푸대접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 경우로서, 이 단계는 유아적이고 1차원적이며, 군대의 이데올로기와 완벽히 일체가 되어버린 단계다.
2단계는 병사 수에 비해 지급되는 포상이 너무 적은게 문제라 여기는 경우이다. 이 단계는 휴가 '분배'의 문제를 각 구성원들의 능력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도출시키는 단계를 벗어나, 파이의 크기에서부터 찾는, 보다 고차원적인 인식론이다.
3단계는 병사들이 목을 메달 수 밖에 없는 휴가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시하며, 휴가를 얻기 위해 감내되고 합리화되는 군내부의 부조리와, 상급자에 의한 모욕, 나아가 계급과 매개된 군대 제도 자체를 도마위에 올리는 단계로서, 여기서는 휴가 비판을 통해, 휴가란 전적으로 부하와 지휘관 사이의 힘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이 인식되며, 언제나 군대라는 조직의 합리성과 매개된 개념으로서 시혜적으로 배분되는 '휴가'가 아닌 방식으로 휴식 여건을 조직할 필요가 제기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휴가 이상으로, 군대 자체에 대한 메타 인식이다. 이 3단계는 변증법적 인식론으로서, 군대 외부의 제도를 사유하고 실행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발생할 수 있는, 지젝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자체로 '시차적 관점'의 인식론이기도 하다(마르크스를 여러 방식으로 독해할 수 있을테지만, 위와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정치경제학자가 아니라 경치경제학/경제학 비판론자로 읽는게 마땅하리라 생각한다).
군대의 계급과 자본주의의 계급은 굉장히 다르지만, 그들의 아포리아, 논리적 난제를 사고하는 어떤 측면에선 추상수준에서의 비교가 가능하다.
적대의 기제를 온전히 보존한 상태에서의 봉합적이고 매너리즘적인 타협들, 파이/몫/가치의 분배를 둘러싼 지난한 논쟁들. 결국 전역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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