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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삐딱하게 보기>에 관한 메모

by 정강산 2017. 4. 1.

2017년 1월 6일


실제의 대상과 원인 사이의 관계는 사후적으로는 필연성을 띠지만, 발생론적으론 전적으로 우연성에 의해 규정된다.

이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시켜볼 수 있다. 칸트 식의 미적 판단과 같이 사실과 가치를 매개하는, 선험적인 단일한 논리는 현실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과 가치를 매개하는 단락점은 전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역량에 의해 우연적이고 우발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소여의 일반성에 대한 어떤 저항이 출현할 수 있는 근본적인 까닭은, 바로 언어적 상징체계의 내부에 기입되어 있는 우연성, 즉 기표와 기의의 느슨하고도 임의적인 관계 자체에 있다. 이는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부터 예고된 언어학적 전회의 탐구의 산물이며, 버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전유' 자체가 가능한 조건이다. 지배의 단일하고 선형적인 역사로부터 소여의 역사를 이루는 요소들을 절단하고 탈구시킴으로써 그로서 새로운 의미를 도출해내는 개념적 전략으로서, 벤야민의 '알레고리'- (의미의) '성좌' 또한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언어 자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매개하는 우연성과 우발성- 이 언어적 전회의 성과는 대체로 퀴어 이론, 포스트 구조주의 철학, 문화연구의 담론 장에서만 논의되며 비실천적 후퇴의 상징으로 폄하되곤 한다. 허나 이러한 인과적 우연성의 인식론을 비실천적인 것으로 낙인찍는 것은 일면적인 관점일지도 모른다.

러시아 10월 혁명을 성공으로 이끈 레닌의 사례는 이러한 인식론의 실천적이고도 위협적인 힘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주류는 물론이고 그의 측근들 까지도 '내전을 혁명으로-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고리인 러시아에서부터 그것이 가능하다'는 식의 그의 테제를 미친 소리라 생각했다.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당내 거물들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공유했던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사회주의로의 이행 가능성의 상관관계'를 척도로 보면 그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고, 사실상 객관적인 것이었다.

허나 10월 혁명의 성공에 잇따른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의 수립은, 결과적으로 레닌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이때 레닌이 보여준 면모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따위의 것이 아니다. 분석 속에서 그러한 시차적 관점은 저절로 발생하지 않으며, 정세적이고 구체적인 개입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엇'을 알고자 한다면, 유럽의 열강들 중에서도 가장 낙후되어,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관리가 개입할 재화의 총량 또한 형편없는 수준이며 대중들의 의식상태 또한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하고, 공업 또한 아직 성숙하지 못했던- '불모의 러시아'를 '제국주의의 가장 약한 고리'로 탈바꿈시키는 전유, 논리적 비약의 계기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그가 체현했던 영웅적인 계기는, 그를 둘러싼 상징적 질서들의 임의성, 대상과 원인 사이의 우연성, 서사적 단락의 우발성에 대한 무의식적 인식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당시의 객관적 현실이자 하나의 테제였던 '자본주의의 발전단계와 연동된 개입의 적기(適期)'라는 지배적인 정세 인식이, 레닌이라는 반테제를 만나, 이른바 '기계적 유물론'으로 굴절된 채 전해져 내려오게 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지젝이 말하는 시차적 관점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연성에 대한 인식인 것이다.

지배의 선형적인 역사로부터 스스로 이탈하여 새로운 의미의 연쇄를 토대로 두는 우연의 역사를 조직하는 알레고리의 실증적 증언이 바로 레닌이라면, 논리적 인과의 필연 없음을 주장하는 것, 혹은 기표와 기의의 비관계를 주장하는 것이 굳이 비과학, 비실천의 오명을 뒤집어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론을 극한으로까지 밀어붙임으로써 소여의 것들과 비타협적으로 절연하는 모델과 결과물을 세계로 되돌려 보내는 일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이 성공하는 순간, '불가능한 것'은 '가능한 것'이 된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사유한다는 것을 어쩌면 이를 가리키는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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