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21일
미국의 귀금속기업 드레비스가 벌인 판매전술이 오늘날까지 영미권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한국도 예외가 아니다)에서의 청혼문화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새삼 놀랍다.
이제는 '제1의 자연'처럼 주어진 것으로서 느껴지는 발렌타인데이, 크리스마스 등을 상품판매과정에서 전유해내는 기업의 홍보전략이 성공한 사례를 보고 있자면, 역시 19세기 이후 지금껏 시간을 지배하는건 '이윤'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일군의 명민한 좌파들이 해온 모든 실천은 아마도 시간을 이윤 이외의 범주로서 점유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창설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뜬금없이 2017년에 100년 전 1917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 또한 그 사건이 미지의 시간성을 개척하는, 슬프지만 기쁜 시도로 여겨지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시간성을 사유하고, 새로운 시간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벤야민, 하이데거, 데리다를 가로지르며 종말론적 시간성으로서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 운운하는 글을 읽고서 드는 생각은, 학문의 장 속에서 시간성의 껍데기를 그러잡기엔 시간성에 대한 그 같은 방식의 개념적 분할이 시사하는 바가 있겠으나, 그것이 맹아적인 형태로나마 현재화되는 일은 모르긴 해도-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물리력을 갖는 실천에서 출발하는 일임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1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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