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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혁명을 리트윗할 수 있을까

by 정강산 2017. 4. 1.

2016년 11월 29일


아랍의 봄을 이끈 이집트 혁명의 주역-와엘 고님(Wael Ghonim)은 얼마 전 TED강연에서 놀랍게도,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며, 구심없는 수평적 네트워크에 대한 찬양을 거둬들인다. 헌데 고님의 반성은 현재 한국의 정세에도 시의적인 반성이지 않을까. sns는 호기심과 문제의식, 부과된 억압 등을 개인적으로 해소시키는 일을 방조하는 동시에 세계의 사건들에 대한 인지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 놓는다. 어쩌면 이는 양날의 검, 현재의 조건이자 한계일 것이다. 


예컨대 이집트의 정치적 조건- 권위주의적 폭압정치, 정보의 흐름에 대한 통제 등의- 에서는 정보에 대한 접근가능성을 확장시키는 sns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진실된 정보와 기만적 정보를 명증하게 분리되어 보이게 한 기제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카이로의 봄을 가능케 한 것은 sns였다고, 따라서 sns의 혁명적 역할에 관해 낙관할 수 있을 테지만, 와엘 고님이 뉘우치듯, 물질적 결집의 순간 이후의 현실을 조직해야하는 공간에서- 혹은 정보의 흐름이 가시적으로 차단되는 발전도상국의 지위를 넘어선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sns는 어떤 측면에서 외려 정치적 결집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인 1미디어 시대가 의미하는 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다: 오프라인의 정치적 조직을 통해 부여된, 구체적인 현장에의 참여를 통해 획득가능 한 것이었던, 따라서 자연스럽게 조직과 매개된 생생한 정치적 삶을 구현해주는 것이었던 당파성과 이념은 이제 아고라에서의 키보드 배틀, sns상의 공유와 좋아요와 리트윗 등을 통해 가상적으로 해소되며, 유의미한 물리적인 결집은 이러한 가상적 소통을 통해 사전에 차단된다. 이 곳에서 sns는, 정보의 과잉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보가 그 뿌리를 내려 조직됨으로써 온전한 지식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차단하며, 너무나 많은 사안들과 사건들, 개개의 사실들을 고려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고려하지 못하게 되는 휘발성의 공간을 마련한다. 


정보의 과잉은 지식의 과소를 유발한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모든 개개의 사실들을 따라잡기 위해 가해지는 초단위의 짤막한 정치적 평론들은 역설적으로 정치적 의식의 발생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능성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탈주술화된 세계의 주술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초 단위의 시간성을 편집증적으로 따라가도록 만드는, 일단 의심하며 어떠한 믿음도 없이 자신의 '고유한'(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을 타임라인에 게시함으로써, 그래도 나는 이런저런 조직들의 의사결정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즉 특별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함으로써- 좋아요 개수와 리트윗 개수, 혹은 조회수가 척도가 되는 인정투쟁을 하나의 실천으로 합리화 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정견을 드러내기 위해 물리적 조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고? 블로그에 내 정견을 드러낼 수 있는 기사를 스크랩하거나, 반정부적인 콘텐츠를 리트윗하거나, 그것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그런 게시물들을 공유하면 내 고유한(?) 정견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허나 그것은 이론가를 양성할 수도 없고, 활동가를 양성할 수도 없는 조건이다. 모든 현상에 대한 일별을 유도하는 sns는 원인을 사유한 이후의 행위를 유예시키는 공간을 형성한다. 모든 인간들은 상이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할 경우, 사라지는 것은 전체와 매개될 수밖에 없는 주체의 조건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현상을 본질으로부터 떼어내어 현상을 본질로서 보이도록 호도하는- 비폭력에 대한 요구, 권력을 잡길 꺼리는 아름다운 시민들을 기꺼이 존중하며 그들을 선도할 수 없는 대상으로 위치시키고, 실제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선도될 수 없는 대상으로 정체화시키는 작금의 상황 또한 이러한 사정과 그리 무관하지는 않다. 


문제는 sns에 대한 비평마저 sns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는 역설, 즉 오늘날의 sns는 또한 어떤 종류의 정치적 기획이라도 거쳐 가야만 하는 창구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그래서 인간들의 소통을 효과적으로, 촘촘히 매개하기도 한다는, 그 이중적 지위에 있다. 한편으로 인터넷과 sns가 열어젖힌 가상의 공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토대'가 아니라 '상부구조'이기에, 단순히 그것을 지양하는 것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sns에 대한 거리두기와 적절한 운용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에토스에 대한 끈질긴 비판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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