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9일
아도르노의 철학은 어쩌면 구체적인 모델을 가진 저항의 유형들에 적대적인 것으로 여겨질 법도 하다. 그의 사회 이론은, 사회의 발생이후로 지속적으로 산출되어온 항상적인 고통, 죄, 비합리성을 강조하며 아마도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의 총체적인 전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비관적 감수성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도르노에게 사회란 그 자체 일반성이 되어버린, 영속적인 지배의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데올로기 그 자체이다. 그에게 유토피아란 기원적으로 도달 불가능한 것, 즉 모델이 아닌,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무엇이다. 이는 한편으로 그의 초기강연집<자연사의 이념>에서부터 이론적 정립의 조짐을 보여왔으며 이후 <계몽의 변증법>과 <부정변증법>, <예술이론>등을 통해 '닫힌 전체'에 대한 거부와 비판의 몸짓들과, 경험적 요인들을 없애가지며 도구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예술적 가상이 성취하는 화해의 상을 드러내는 예술에 특권을 부여하게 되는 필연성을 시사한다.
그런점에서 아도르노는 으레 투명하고 자명한 것으로 여겨져 온 역사적 마르크스주의가 전제했던 계급적 분할을 믿지 않으며 "교환원리"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제법칙들을 관류하는 "총체화된 매개"에 의한 일반성과의 공모가능성에 주목한다. 이런 아도르노의 태도는 물신주의 비판의 마르크스와 공명하기도 하며, 권력의 편재와 항존을 사유했던 푸코의 작업, 혹은 언어를 통한 상징계로의 진입의 매개 속에서만 개체로서 사고할 수 있음을 역설하며 이를 항상적인 결핍의 조건으로 규정한 라캉의 작업, 어쩌면 라캉을 전유하고 예술로부터 진리계기를 발견하는 옹호하는 바디우의 작업과도 겹쳐진다.
허나 무한한 부정의 운동만이 지배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그의 테제를 달갑게 여기는 좌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같다. 많은 이들이 그로부터 식별하는 것은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적 회의주의의 흔적이다.
하지만 이는 일면적인 관점으로서, 그의 이론이 갖는 급진성을 온전히 평가하는 것일 수 없다. 아도르노에게 주술화와 탈주술화의 변증법과, 자기보존 욕구로부터 비롯된 자기기만과 사회지배는 역사의 상수이며, 따라서 그에게 부재하는 것은 사실 대안일반이 아니라 '낭만적인' 대안이다. 그에게 주술화된 세계는 탈주술화되고, 이는 다시금 주술화되며, 양자는 어떤 경우든 항상적인 고통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에게 유일하게 자유로운 것, 유일하게 동일화사고로부터 벗어난 대상은 바로 소여의 것들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연속적인 부정의 운동이다. 이는 해체주의, 욕망의 정치, 포스트모더니즘의 알리바로 그가 전용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진리와 총체성으로부터의 매개, 변증법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에게 진리란 부정의 변증법적 운동이다.
사실 아도르노의 사유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그의 이론이 구축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의 모델들이 소여의 일반성과 사회에 대한 부정과 거부로서 출현해야하는 당위와 토대를 마련하며, 동시에 그들마저도 "동일화 사고"와 "교환원리"에 매개된 한, 비합리를 산출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다. 저항마저도 저항될 것임을 가리키는 그의 사유에 도덕과 윤리가 들어설 자리는 없으며, 이 점에서 그는 고준담론과 추상적인 사변, 초월철학적 궤변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것들을 동일화시키는 동일화사고를 심화시키는 교환원리가 작용하는 역사의 특수한 시퀀스를 상대하는- 따라서 전체로서의 일반성을 상대할 것을 종용하는 과학을 말한다.
그리고, 주어진 것- 소여의 총체와 지배를 긍정할 것인가, 부정할 것인가 혹은 보위할 것인가, 비판할 것인가 또는 그것을 완결성을 지니는 하나의 닫힌 체계로 규정할 것인가, 모순적 긴장을 지닌 것으로 규정할 것인가의 기로에서- 우리가 많은 경우 후자에 손을 들어주어 왔으며, 그것을 엄밀하고 정제된 개념들로 옹호하고 싶었다면, 우리는 이미 아도르노주의자로서의 기질을 갖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는 좌파들이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인식론의 조건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를 할 것이 아닌 경우에야, 그를 좌파적 실천의 견지에서 전용할 공간은 충분하다. 이론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을 구분하는 것은 저열한 경험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당장의 가시적인 변화들과 구체적인 성과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경제학과 제도정치학 등의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학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나,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따르는 학문들에서도 사실 사정은 비슷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이념이 소거된 순수한 정보인 것처럼 소비될 따름이며, 실증적이고 구체적이라고 해서 세상을 더 빨리, 효과적으로, 올바르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러한 좌파적 관리의 도입자체를 가능하게 할 물질적이고도 인지적인 토대일 것이다.
당장의 가시적인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믿음 자체의 관철- 이것은 주어진 사실들의 세계를 상대하는 경제학이나 정치학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념을 통해 인간의 인식론을 매개하는 철학에 부과된 사명일 것이다. 경제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오래 전 작고한 무덤속 경제학자의 노예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이미 죽은 철학자들의 인식론적 노예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견지에서 가능한 저항을 사유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경유해봄직한 사상가이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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