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8일
모든 선험과 소여, 클리셰를 거부하고 끝내 실재를 온 몸으로 끌어안는 단독자 뫼르소. 그는 사랑을 말하는 것에서조차 클리셰를 거부한다. 재판과정에서 드러나는 기술적 합리성은 그 자체 소여의 언어, 클리셰와 완전히 포개어지는, 추상화된, 합리화된 모더니티를 그린다. 사형집행일 전날 참회를 설파하러 들어온 목사를 향해 그 자신이 어떤 가상에도 기대지 않고 죽음이라는 진리와 마주할 준비가 되었음을 부르짖는 장면은, 어쩌면 니체가 말한 초인의 모습을 제시하는 것 같다. 카뮈가 그 자신이 실존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을 잊혀질 때면 한번씩 했다는 사실을 차치 한다면, 우리는 이방인을 어떤 각도로 조명할 수 있을까? 하이데거적 실존주의자? 혹은 상징적 질서의 틈을 말하는 잠재적 라캉주의자(라캉적 의미에서 뫼르소는 그 자체 환상을 가로지른 인물이 아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인권운동가? 한편으론 사르트르와 그 사이에 오간 견제와 절연의 과정이 정확히 어떤 양상이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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