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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작업을 위한 노트

by 정강산 2018. 2. 27.

제임슨에게 문화는 생산양식의 형식이다. 허나 그는 문화를 상부구조로 간주하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교리를 재연하는 것보다 복잡하게 접근하는데,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생산양식의 본질이 서사로서 현상하는 장소로서의 문화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이는 반영이론과 조응이론의 사이에 걸쳐있는 것으로, 전통적인 맑스주의자들이 문화를 단지 생산양식의 반영으로 간주하면서 문화를 경시했다면, 제임슨에게 문화는 생산양식의 필연적인 표현형태이자 그 논리가 상연되는 곳으로서 주목된다.


나아가 신좌파들이 문화로부터 단순히 낙관적인 저항을 읽어낸다면 그는 그로부터 저항을 읽는 동시에 경제의 선차성을 강조하며 문화형식자체를 역사화함으로써 문화의 한계마저도 놓치지 않는다. 단순히 제임슨이 역사주의의 입장에 서 있지 않은 이유가 이것인데, 그는 역사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형식주의를 사고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내용중심의 비평(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들의 서사가 제시하는 부르주아성을 판별하고 저자의 의도와 배경의 급진성을 따지는 크리스토퍼 코드웰, 에른스트 피셔 식의)이 작품의 현상학적 측면에 주목하는 형식주의 비평 앞에서 몰락한 뒤, 제임슨은 작품의 형식적 현상학적 측면을 역사적 내용의 필연적인 외화로 간주하며 내용과 형식의 구분을 넘나든다.


즉 그의 변증법적 방법론은 독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들 간의 "유비 또는 상동관계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취소하는 것"(숀 호머, 59)인데, 이러한 제임슨의 시도에서 여러 문화적 현상들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섬광같은 찰나에 필연적인 역사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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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제는 중세의 신학이 했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수많은 종교적, 문화적 특질들이 혼재한 미국적 특수성에서 나온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을 제외하면, 오늘날 신을 공격하는 이들은 더 이상 중세에 갈릴레오가 보여준 결의와 저항이라는 맥락을 차용할 수 없다. 신을 희롱하며 근본주의자들을 조롱하는 이들은 우선 이미 죽은 시체를 건드리며 자신이 맹목적인 비합리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을 행하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파편화된 삶의 양식이 편재한 오늘날의 조건에서 공동성과 화해, 구원을 약속하는 신은 객관적이고 유물론적으로 대두된다는 점까지는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중으로 멍청하다. (한때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멘셰비키의 기계적 유물론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을)우매한 유물론보다 총명한 관념론이 총명한 유물론에 더 가깝다는 레닌의 진술은 현재 종교와 세속주의 간의 대립의 형식에서 다시금 재현되고 있다. 문제는 세속주의를 자처하는 이들이 충분히 세속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며, 종교에 대한 피상적인 비판만을 일삼는데에 있다. 한때 종교가 가졌던 허위와 기만을 비판했던 이들과 견줄만큼 세계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이들은 오늘날엔 경제비판을 수행하는 이들이 되었다. 라스 리, 알베르토 토스카노, 테리 이글턴 등의 작업이 시사하듯, 극단적이지만 발본적인 믿음은 역사적으로 유효했던 좌파의 기획을 이끌었던 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에 대한 비변증법적인 비판은 본질적으로 누워서 침뱉기, 좌파의 자기 비하에 가깝다. (동시에 형식적으로 투사의 활동은 수도사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그들은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아버지의 간결한 지적도 염두에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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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의 비평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작업의 형식과 내용이 그 자체로 완벽히 실현되었음을 전제하고, 대상으로부터 출발하는, 작업이 숨기고 있는 객관적인 암호를 독해하는 탐정처럼 글을 써야할까? 

그게 아니라면 작업을 독해하는 자아의 계기에 보다 방점을 두고 대상의 만듦새부터, 그 유효성을 판단하는 판관처럼 글을 써야할까?

작품의 현상학적 측면에 집중하여 그것이 당장의 공간에서 가동시키고 있는 의미망을 기술하는 속기사처럼 글을 써야할까? 

작업의 방향과 형식이 지시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춰 세계의 어떤 부분을 주해하는 논설가처럼 글을 써야할까?

이 모든 질문들은 형식주의적 비평과 역사주의적 비평의 담론을 관통하며, 그 효과로 파생되는 쟁점이다. 

그러나 이들과 구별되는 변증법적 비평은 그러한 형식과 내용이 지금의 시점에서 필연적임을 밝히는 과학자의 모습을 띠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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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구성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이 속에서 자아는 대립을 통해 전진하며,

인식은 모순을 먹고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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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을 잊은 이들에게 혁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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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이 심리학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니체가 종교에, 헤겔이 국가에 그랬듯, 문제적 상황을 규정하고 이를 뛰어넘는 인식론을 마련하여 새로운 현실을 열어젖히고자 하는 의지는 모든 사유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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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담론에 천착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세대적 특수성으로부터 작업과 실천의 당위를 곧바로 연역하는 조야한 유물론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들 그것을 급진적이라고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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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불균등발전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세계의 어떤 지역에선 민족자결이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암호와도 같은 말이라는 점을 암시하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민족자결을 조롱한 로자의 국제주의는 원론적으로는 옳지만,  구체적이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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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모든 연구는 심증을 통해 물증을 찾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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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화된 장치들을 가동하며 (합법적인)폭력을 행사하는 관료 기구의 집합으로서의 국가는 명백히 '사회'와 다른데, 이는 군사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차베스가 특히 토지공사라는 국가장치를 통해 대대적인 토지개혁에 착수했던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제 3세계의 많은 혁명이 국가장치의 축소판이자 그 원형적 형태인 군부를 통해 행정력을 장악하는 사례는 그들이 사회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국가에 개입한 것임을 알려주는데, 사회는 기본적으로 그 실체가 없이 국가에 매개되어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는 국가가 강제하는 여러 보장제도를 통해 만들어진 장치들로 연대를 물질화 시키는 물질적 배치의 총합이다. 이 지점에서 사회와 구분되는 국가 본연의 위상과 함의를 파악하기 위한 기본적 근거는 어쩌면 헤겔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회를 이런 유물론적 방식으로, 일종의 발명된 것으로 간주하는 접근은 한때 사회가 수행했던 고유의 역할과, 사회와 국가의 관계, 나아가 국가의 독립된 기능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연대를 비롯한 시민의 삶과 관련된 제문제를 기술적 측면에서 사고하게 함으로써 사회와 국가를 인식하는데에 으레 따라붙는 윤리적 함정을 피해가게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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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출수 없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라는 앰마 골드만과 신좌파들의 모토는 대략 20세기 중반까지 좌파들이 터부시했던 개인과 (민주적)참여에 대한 쟁점을 표시한 잠언이다. 이 말은 나름의 진리계기를 지닌 필연으로서 제안된 것이다. 허나 내게 그것은 때로 유아론적 어리광처럼 들리기도 한다. 모든 계층, 모든 개인을 고려하는 혁명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춤출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과 같다. 요컨대 토지개혁을 실행했던 소련에서 춤출 수 없는 지주들이, 혹은 미투와 같은 사건 앞에서 춤출 수 없는 남성들이 그것을 (대격변 정도를 의미하는 느슨한 의미에서라도)혁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상상해 볼 수 있는가? 모든 혁명은 피를 먹고 자라며 숱한 개인의 심리적, 물질적 소요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모두가 춤출수 있는 혁명,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라는 모토는 보편을 향한다는 전제가 없으면 명목론에 그치며, 보편적 체계를 겨냥한 운동이 염두에 두어야하는 필요조건인 한에서만 급진적 의미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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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프랑스 혁명 이후 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 찬탈을 통한 변화를 원하며, 생산양식의 방향과 성격을 염두에 두고 정치에 개입하는 이들은 항상 당대의 급진파이거나 보수주의자이다. 중도는 대체로 보수주의자의 편에 서지만 결코 변화의 주역이 되지는 않는- 일종의 변수로서 작용한다. 이 지점에서 변수로서의 넓은 범주의 중간계층에 포함되는 '관리자 계급'을 변혁 운동이 고려하고 전유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뒤메닐 식의 주장은 정치 공학적 측면에선 유효한 측면이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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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철학의 핵심은 변증법이다. 모순은 대립을 통한 양질전화, 혹은 지양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되는 것으로서, 변증법의 한 과정 내지 요소인데, 이는 체계의 불안정성과 결여, 구성적 틈, 이에 따른 대상의 변화가능성을 겨냥하게 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변증법의 특징인 이자적 관계 내지 구도는 으레 단선적인 진보의 시간관으로서 폐기대상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헤겔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외려 모순은 주어진 하나의 대상 내부에서도 항상적인 분열과 파열, 적대가 발생하고 있다는 점까지 사유하는 개념이다. 바디우식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이의 정치에 호의적인 논자들이 동일성의 전범으로 헤겔을 지목하는 것은 다소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보다 생산적인 독해 속에서 헤겔은 동일성의 불가능성을 주장한, 그리하여 동일성 내부의 차이와 그 변화양상에 주목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변증법에서 강조하는 동시적 사고, 긍정성과 부정성을 종합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윤리적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즉 그것이 좋으냐, 나쁘냐, 선하냐, 악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칸트식으로 말하자면 사실판단의 문제에 가까운 것으로, 외려 대상의 객관적 측면을 실재론적으로 파악하는 문제와 관련되어있다. 요컨대 변증법에서 논하는 긍정성과 부정성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객관적 대상이 그 대상 스스로로서 성립되게끔하는 조건을 파악하는 동시에, 대상이 더 이상 대상이 될 수 없게끔하는 구성적 외부, 혹은 결여를 파악하는 것. 이것이 바로 모순을 사고한다는 것이며, 긍정성과 부정성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인 것이다. 자본주의로부터 엄청난 생산성과 합리성을 보는 동시에 그 속에서 계급투쟁의 항구성을 확인하는 마르크스의 작업은 섣부른 윤리적 결론을 내려했던 당대의 많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과 과학적 사회주의간의  차이를 형성하는 기제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동시에, 변증법적 사고가 어째서 아도르노의 말처럼 "대상으로부터 출발하는 사고"인지 설명해준다. 

(...)

또한 헤겔은 국가. 시민사회. 가족의 관계를 향한 그 특유의 대상과, 변증법, 모순, 지양이라는 개념들을 통해 사회 구성과 이행의 계기를 거시적인 수준에서 파악하는 사고의 원형이다. 마르크스가 헤겔에게서 빌려온 것은 바로 이러한 넓은 수준에서의 인식론일 것이다. (...) 문답을 통한 진리의 탐구과정으로서의 고전적인 변증법에 대한 정의 또한, 진리를 향한 운동으로서 질문자와 대화자간 변증이라는 구도를 통해 헤겔이 논하는 정 반 합의 구도를 이미 예고하고 있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사실 주체가 텅빈 상태에서 타자에 의해 재생산되며, 그 구성적 공백으로 인해 항상 대립 위에 놓인다는 라클라우무페의 적대론보다 훨씬 급진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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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실재와 칸트의 물자체사이의 유비 관계를 파보는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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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내자마자 해당 코드와 서사를 차용하여 복제되는, 혹은 재생산되는 문화적 키치의 세속화의 논리는 상품화의 논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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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미술학원을 다닐때 물감의 질에 따른 가격차이와 서열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조소냐가 명품이니 신한은 보급형이라니 하는 것이었다. 분명히 큰 차이 없이 동일한 색을 내는 물감인데, 그들 속에서도 나름의 위계가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fine art

1. 가격이 상이한 캔버스 3장 위에 동일한 색의 가격이 상이한 물감들을 바른다. 그 값으로 각 작품의 가격을 책정한다.(관객들은 동일한 사이즈에 동일한 방식으로 채색이 된 작품들에 상이한 가격 캡션이 달린 것을 본다)


2. 가격이 상이한 캔버스 위에 동일한 질감의 연필을 긋는다. 그 값으로 각 작품의 가격을 책정한다.


(이때 노동시간은 작품가격에 책정시키지 않는다. 본 작업은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설정함에 있어 예술행위와 노동의 유사성을 주장하기보다 그 생산자체가 여러 브랜드가치와 시장가격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주목한다.)


함의와 의도:


-작품을 구성하는 전제에 대한 메타비평 시도.


-미술이 이제 익숙하게 전유하는 레디메이드적 구성의 전제에는 단순히 공산품이 아니라 그것의 화폐가치가 개입한다.(변기 이래로 상어, 박제된 호랑이 등의 구하기 힘든 재료와 금,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귀금속의 개입이 이뤄졌는데, 레디메이드라는 형식 자체에 대한 비평적 작업은 부재한다.)


-미술은 가장 순수한 질료단위에서부터 가격과 매개되어있다.


-결국 발라놓으면 비슷한 색들 사이의  화폐적 격차를 보여줌으로써 fine art라는 개념이 가진 한계를 재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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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적 맥락에서의 통화정책의 강조와 브레튼우즈 체제의 와해 간의 상관성?

-냉전과 브레튼우즈 체제 성립의 상관성?

-IMF와 제 3세계 원조의 긍정적인 상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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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거나, 비슷한 사람을 보면 왜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일까. 이는 라캉을 통해 완벽하게 설명가능하다. 결국 우리가 독특성과 유일성을 담보받는 이름은 상징계에서의 임의적인 차이를 통해 규정된다. 따라서 같은 이름을 한 사람, 같은 옷을 입은 사람, 같은 성격과 지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유일함을 불안정하게 하는 대상으로 나타난다. 자신과 똑같은 생김새를 지닌 사람이 있고, 이를 마주치면 죽게 된다는 도시전설인 도플갱어와 관련된 음모론은 이런 점에서 일말의 진리계기를 담고 있는데, 동일한 기표가 만약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그 기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채 상징적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행 또한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요컨대 상징계에서의 구별짓기를 통해 타자와 구별되는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은 상징계에 진입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이기 때문이다(맞춤 제작을 통해 미세한 차이가 돋보이는 정장을 맞춘 후 제작 도안을 손에 넣어 기어코 파기해버린다는 귀부인들의 취미를 떠올려보라). 이러한 파악을 통해 스스로의 욕망이 보편적으로 결정되는 지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상징을 재배열하거나 고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된다. 그것은 자신과 타자의 동일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사회적 규칙들과 요구들로부터 빗겨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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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의 팬덤분석과 수용미학적 접근, 미시적인 저항과 텍스트의 전유에 대한 강조 등은 푸코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역사학에서 미시사, 문화사, 개인사의 유행은? 이들의 시기가 교묘하게 연동되는 것을 보면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결코 환상에 불과한 개념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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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철학비판을 시도하는 것은 한 철학에 대한 다른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발생한 물적 조건들을 드러냄으로써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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