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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갈 곳을 헤매는, 유예된 말

by 정강산 2018. 3. 13.

감히 말씀 드리자면 이 글은 내용상 미투 당사자, 미투를 둘러싼 반응, 성폭력 비판으로 일반적인 남성지배에 대한 비판을 대체하려는 경향 모두를 겨냥한 글인 거 같습니다. 부러 본 글이 염두에 두고 있는 구체적인 대상이 무엇인지 물어보셨습니다만.. 그런 방식은 치킨게임에 그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일찍이 변절한 자유주의 정치인으로부터 운동권의 남성지배문화의 본질을 연역하셨는데, 이때 말씀하시는 '운동권'은 학생운동일까요, 노동운동일까요, 농민운동일까요, 여성주의 운동을 제외한 모든 운동일까요, 혹은 구좌파일까요, 신좌파일까요, 그게 아니라면 조직의 지역 별 성향이 각기 다른데 염두에 두신 지역이 있으신 걸까요. 하지만 이런 질문을 되돌려드릴 필요가 없는 까닭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운동 일반'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이 얘기하는 바가 진짜 페미니즘이 따로 있다는 식의 주장으로 오도될지 모른다는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서동진 선생님의 주장은 더욱 섬세하게 현 사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논지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그래서 이 주장이 페미니즘의 의제를 무기한 지연시키자는 제안 정도로 독해되는 건 아쉽습니다. 그 핵심이 무고한 이들도 있다는 수준의 주장이 아니라 과연 이걸로 충분하냐는 얘기를 건네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요.


제가 생각하기에 말씀하신 '페미니즘적 접근방식'이란 우선 최소한 지금과 같은 금세 휘발될 윤리적 격정 없이도 페미니즘적 의제를 자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물질적/관념적 장치들을 확립하는 걸 말합니다. 넓게는 여성쿼터제에서부터, 여성주의에 대한 심화된 교육, 조직별 성폭력 대응 메뉴얼의 체계화, 피해자/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준의 합의와 그 시행, 여성주의 단체를 조직하는 일 등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제도와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지하고, 직접적인 인격 단위로 환원되지 않는 지배의 심급에 관해 개입하는 방식의- 사실 언제나 있어왔던 페미니즘의 실천방식 입니다. 이들은 폭로의 정치를 극복한지 오래이며, 성적 차이에 매개된 권력의 기제가 어디서 비롯되는지에 관한 규정을 염두에 두어 왔습니다. 한때는 "가부장제"라고 불린 개념과 그에 따른 지배의 양상을 파악해가면서 말이죠. 이는 '남성지배구조, 기울어진 운동장, 유리천장'이라는 개념수준보다 훨씬 엄밀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었지만, 지금은 '수치심', '모멸감', '공감', '연민' 등이 객관적인 지배를 지시하던 개념의 자리를 대체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쉽게도 아직 미투의 주창자들이나 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관계없이 온전히 그 지배를 재생산하는 심급을 규정해주는 언어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한쪽에선 폭로가 이루어지자마자 어떤 인과도 묻지 않은채 그의 편에 서는게 최선이라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선 펜스룰을 적용하는 것이 최선이라 합니다. 서동진 선생님의 주장은 양쪽 둘다 답이 아니라는 점을 선취하여 적시하는 것입니다.


물론 미투를 열성으로 지원하는 현역 페미니스트들의 당위와 그 성실함을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 운동의 주역이 그 참여자들에게 제시해야 할 것은 무한한 긍정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재고해보라'는 권유와 설득이기도 합니다. 1918년에 적색테러를 '비절차적 재판'이라 규정하며 (혁명적 소요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던)레닌과 대립했던 볼셰비키 지도부처럼 말이죠.


그러나, 저급한 행위를 상대하지만 그에 맞대응하는 수준 이상의- 성적 관계를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는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하는 스탠스는 솔직히 잘 보이지 않습니다. 땅콩리턴 사태의 주범 조현아가 '갑질'을 했다고, 그를 악인으로 몰아 매장하는 것은 답이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입장 말이지요. 절대악으로서의 가해자에 대한 비난과 지속가능한 비전을 내재한 운동을 혼동하는 순간 운동의 의제는 실종되고 제 2의 조현아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폭로-여론의 심판-사건 당사자 보이콧-이에 대한 동조-폭로'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미투의 양상이 이대로 끝나면 아쉽다는 점은 한편으로 자명합니다. 인격화된 한명의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비난 이후 그 피해여부를 헤아리거나 조직 내에서의 재발방지 대책 없이 곧바로 보이콧을 호소하는 지금의 방식은, 메갈리아가 펀딩한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퇴사조치 당한 넥슨 성우의 사례와 펜스룰 따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동원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만화가 이자혜가 성폭행을 종용했다고 폭로 되었을때, 피해자의 주장에 일관성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이전에 여타의 절차없이 그의 만화를 전부 리콜하고, 그와의 계약을 가차없이 파기하고, 연재 중인 만화 전부를 내리면서 '불미스러운 일로 파문을 일으켜 죄송하다'는 사과문을 게시했던 출판사, 웹들의 반응은 과연 사건을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도록 책임을 지는 행동이었을까요. 이때 이들의 행동은 권선징악의 윤리로 악당을 단죄했던 것일까요, 페미니즘적 요구를 수용했던 것일까요.


더불어 현 상황을 오로지 긍정적으로만 독해한다면, 미투운동은 역사적인 아나키즘의 실천과 조응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권력을 가졌던 개개의 인간들은 (사회적)죽음을 맞이하고, 여론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우리는 그들의 용기에 동조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피할 수 있었을 반동을 부르거나 어떤 유의미한 개혁 없이 소진됩니다.


몇년 전 박정근씨가 <우리민족끼리>의 게시물을 트윗하며 멘션을 보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되었을 때, 그는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적 투사로 소비되고 있었고, 그에 서동진 선생은 유희거리로 타자화되고 탈정치화된 북한을 조롱하는 것은 저항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국가폭력에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없다고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죠. 그러나 그것은 열렬한 반북주의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냉소적 조롱 모두가 보다 엄밀한 저항의 대상을 찾아야한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시기가 좋진 않았지만 필요한 주장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미투운동은 남성들의 폭력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여성들의 성토라는 점에서 연대해야 하지만 그들이 그려내는 적과 비전, 실천의 절차들이 충분히 규정적인지, 성 자체를 죄악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물을 수 있습니다. 그건 미투의 이상을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주장입니다. 통제가능한,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소요없는 혁명은 당연하게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성주의 혁명이라는 기차에 올라타 모든게 변할 거라며 낙관만 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장 펜스룰이라는 이상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그 방증입니다. 지금 페미니즘과 연대하고자 하는 이들은 급진적인만큼 카오스 상태에 놓인 시국을 올바른 방향으로 밀어주기 위해서 규정적인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수년이 지난 후에 '미투 정도의 거대한 규모의 운동 역시 남성지배에 관해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면요.


모든 운동에 선행되어야 할, 혹은 모든 운동이 진지하게 천착해야 할 이런 관점이 피해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남성학자의 고담준론으로 읽히는듯 하여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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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속에서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여성들의 증언은 부정할 여지 없이 경청하고 새겨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조건과 반향하며 그와 연동되었던 폐습을 부수고, 적어도 SNS상의 여론과 여타 언론매체에 대해 예민한 감각을 지닌 이들에겐 보다 의식적으로 성차와 권력의 쟁점을 염두에 두게 하였습니다. 폭로가 피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으로 비쳐진다는 것은 아쉽습니다만, 가해자가  비개방적인 조직 내에서 높은 사회적 지위를 점하고 그를 견제할 구조가 없었던 경우, 혹은 트라우마로 남아있는 개인적 기억을 발화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하는 경우 등- 폭로가 아니었다면 현실적 해결이  난망한 조건에선 유효한 수단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긍정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미투 행진을 통해 신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이 SNS를 벗어나 기존의 여성주의 조직들과 현실에서 만나 공명하며 의제를 다듬어갈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폭력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에서 미투운동이 지니는 역할을 다소 자세하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여전히 생각해 볼거리는 남아 있는 거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도된 폭력성의 문제입니다. 당연히 가해자로 지목된 이의 삶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자하는 욕망은 부정할 수 없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운동을 추진하는 주된 동력이 되어선 곤란하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건 폭로를 통해 그의 생업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적 제도 속에서 교육과 징계, 처벌 등의 장치들을 통해 부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의를 통한 사회적 압력을 형성하여 가해자를 반성시킨다는 발상은 그 절차적 수준에서 너무 불완전하며, 변덕이 심하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이는 인격화된 지도자에 의한 재판보다 공화주의적 권력분립 속에서의 재판이 가진 미덕이 더 많다고 가정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컨대 공식 재판 없이 SNS에서 여론의 반응을 겨냥한 폭로는 이미 수년전 조직 나름의 절차 속에서 사과하고 처벌을 받은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내 안의 악을 반성하기보단 외부의 악을 비난하는데에 동참했으며, 그 과정에서 성적차이와 권력의 엄밀한 관계는 말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마치 모든 피해자들이 가해자에 대한 분노에 사로잡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파탄내길 요구한다는 질 나쁜 착각(그것은 외려 미투를 선정적으로 소비하는 이들에 의해 투사된 것입니다)이 발생하며, 징벌적 쾌락과 역설적인 윤리적 전도를 키우는 등-  폭력적인 방식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그들에게 벌을 주지 말라는 것이 아니죠. 왜 법적 장치 대신 대중들이 그의 그릇됨을 소비하고 심판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장을 충분히 헤아리지 않고 왜 국가와 제도를 탓하지 않고 죄를 피해자들에게 돌리냐는 것은 논점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 안의 악을 반성할 필요없이('내 안의 악'따위는 없습니다), 성폭력에 관한 처벌 수위를 높일 것을 요구하거나 성폭력 대처 가이드라인의 보강과 실시 요구, 페미니즘 연구, 페미니즘 조직 등을 만듦으로써 이에 대처할 수 있고, 그렇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그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할거면 입이라도 다물라'는 태도입니다. 헌데 의아한 것은 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왜 하필 그런 광기에 가까운 유사인민재판으로 나타나야하냐는 겁니다. 그 속에서 당연히 처벌 이후 가해자의 복직과 피해자에 대한 지원에 관한 논의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아직은 이들에 관해 논의할 때가 아닌 까닭일까요? 


한편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던 배우가 자살했는데 대부분의 반응들이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충격적입니다. 모두 '겁쟁이가 그 정도 책임도 안지고 지옥으로 도망갔다', '여성들이 그 동안 당해온 성추행은 그의 목숨보다 더 무겁다', '악마같은 놈 잘 죽었다', '그가 자살한다고 그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장자연 때는 가만 있더니 조민기 때는 매우 설친다'... 모두 다 틀린 주장입니다. 문제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죄를 묻고 반성시켜야 죗값을 치를 수 있다는 겁니다. 요컨대 피의자가 죽은 상태에서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그의 의식에 어떤 개입을 할 수 있나요? SNS상의 공론(?)을 모아 법적절차로 죗값을 받게 하려는데 그가 심약해서 죽은 게 아니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정이 그런 것이라면 최소한 보이콧의 폭력을 비판하면서 지금과 같은 광기에 가까운 여론의 폭력을 충분히 재고했어야 합니다. 통제 불가능한 여론의 철퇴로 대충 내려쳐서 당사자를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방도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당사자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인권의 보편성이 선언된 프랑스 혁명 이후 합리화된 법체계가 담보했던 급진성이었죠. 헌데 이쯤되면 뭐가 악이고 폭력인지 분간이 안됩니다. 이건 인권의 후퇴이자 미투의 효과가 만든 그늘 아닌가요? 시민적 정치의 이상을 요약하는 'They go low, we go high'라는 모토는 폭로에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조리돌림 속에 얼마간 녹아 있는 걸까요? 대충 모든 혁명에는 순기능/역기능이 동시에 있다고 뭉뚱그릴수 있는 부분일까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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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별개로 얘기하고 싶은 것도 있네요. 스스로 적어도 좌파라 생각하시는 분들께 의문이 드는 것은, 당신들이 언제부터 경험주의자였다고 피해자들의 고통을 헤아리며 넋만 놓고 있냐는 겁니다. 다른 이슈들에서는 구조가 중요하다고 젠체하며 지적을 그리도 잘하시는 분들이 성폭력 이슈만 나오면 왜 정신을 못 차리고 공감만 하나요? 지지한다고 글 몇번 쓰고 이런 주장은 조롱하면 할일 다 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들에게 페미니즘은 고통 릴레이를 멈추는 게 아니라 즐기는 건가요? 도대체 피해자에 대한 지원대책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규정하려 시도하지 않고 외려 그들에게 피해자 주체성만을 투사하며 응원하고 죄의식에 빠져있기만 하는 일을 어떻게 반성폭력 운동이라, 여성들과의 연대라 감히 칭하나요? 모든 여성들이 피해자이자 약자인건가요,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피해자인건가요? 성폭력 피해자들이 정말 '공감'만을 원한다고 생각하세요? 


미투를 운동이라고 생각하긴 하시는 건가요? 모든 운동에 건전한 내부 비판이 필요하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내부비판의 부재가 모든 혁명에서 대숙청이라는 괴물을 낳았다며 그게 혁명을 잡아먹었음을 깨달았을 땐 언제고, 운동을 성역화된 불가침의 자연이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명백히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인간의 행위'인데도요? 운동이 본래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것이 운동을 비판하는 근거가 아니라 한 학자의 개입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동원되는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반지성주의가 운동/학문장의 적폐이자 우익 포퓰리즘의 맹아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 치열하게 고민들 하실텐데, 미투를 둘러싼 반응이 드러내는 반지성주의는 경계해야할 대상이 아닌가요? 이 글을 둘러싼 반응들에서 보이는 것처럼 적지않은 미투의 동조자들이 애초에 피해자의 인권을 존중하지 않은 가해자의 인권을 왜 지켜줘야 하냐며 무분별한 보이콧과 인신공격을 자행하는게 미투의 합리적 핵심일까요? 


'글이 어렵다, 사변적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다'. 최소한 글 내용에 관한 비판을 해야지 글이 어렵다는걸 언급하는게 진지한 비판인가요? 세상 문제가 대충 반성하고 사이다 마시면 해결 되던가요?


서동진 선생이 여성학회에서 논문을 심사하고 또하나의 문화; 여이연 등의 동료 연구자들과 토론하고, 젊은 여성주의 학자를 초빙하여 대학에 여성학을 교양과목으로 개설시키고 각종 성폭력 사건들 대책위를 꾸리며 전전긍긍할 때 당신들은 페미니즘을 오로지 존재론에 관한 것으로 축소시키는데에 기여하는 것 이상으로 뭘 했나요? SNS의 땔감으로 소비하는 거? 그냥 한번 공감해보는거? 경멸스러운 범죄자들과 다르게 고상한- 자신의 윤리적, 문화적 하비투스를 뽐내는 것? 


동지적 관계에서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에게까지 '맨스플레인'이라는 지적으로 파산한 개념을 들이대고 남성됨을 겁박하며 윤리적 협박을 일삼는다면 그건 아무에게나 맘대로 낙인찍을 수 있는 '명예보지, 명예자지' 따위의 마법의 주문과 다를게 뭔가요? 최소한 맨스플레인은 남성이 권위를 통해 여성을 일방적으로 훈계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헌데 최소한 이 글의 맥락이 페미니즘적 이슈로 독해되는 특정 사안에 대한 비판이자 특히 그를 둘러싼 남녀의 대응에 관한 비판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을텐데,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을 여성 일반에 대한 권위적 태도로 독해하며 이 글에 대해 스스로 윤리적 우위를 선취하려는 졸렬한 태도는 뭘까요, 여러분은 남성싫어주의를 하겠다는 건가요, 페미니즘을 실천하겠다는 건가요. 분석을 하기 싫어하는 지적 태만을 맨스플레인이라는 한마디로 커버하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정말로? 진짜로? 진지하게 말해도 '맨스플레인' 운운할거면 페미니즘 공부는 왜 해야 합니까? 무슨 기적의 논리인가요? 인식론 비판을 존재론 비판과 동일시 할 수 있을까요?


아랍의 봄에서 보듯 sns를 운동의 조건이자 한계로 파악해야지, 왜 운동의 시작이자 끝인 것으로 파악하나요? 개념의 엄밀함을 강조하며 신간 번역서의 질을 논하시던 분들이, 그보다 곱절은 중요해야할 운동의 비전을 제시하는 일, 비판을 통한 귀류법을 통해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에는 어째서 손놓고 있나요?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이 마르크스 변증법의 속류화를 불러왔다며 똑똑한 척할때는 언제고, 생물학적 결정론을 통해 여성들을 도매금으로 피해자 주체로서 호명하는 페미니즘의 속류화에 대해서는 쌍수로 환영하나요? 역사는 두번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운동이 당사자성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당사자성이 운동의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될 텐데, 미투가 성역입니까? 여성들과 어떤 사회적 관계를 만들 것인지는 남성들의 문제이기도 하지 않은가요? 마찬가지로 열악한 노동환경이 만들어내는 산업재해, 해고, 구조조정 등에 의해 실질적인 생존을 위협받는 노동자들의 운동에 대한 조언은 곧잘 하시면서, 실질적인 생존을 위협받는 여성들과 미투의 발전을 위해 보내는 조언은 아깝습니까?


지금은 한마디씩 던지면서 형이상학적 구조가 개체에 선행할거라 착각한다는 둥 뭐라는 둥 물어뜯지만, 결국 구조를 염두에 둔 개입이 최대한의 성과를 낸다는 점을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요? 결국 분위기가 가라앉은 다음엔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미투의 한계들을 비판할 거 아닙니까? 비겁하게 눈치보지말고 아닌건 아니라고 지금 비판하세요. 미투가 성적 차이의 제문제에 관해 변화를 앞당기는 초석이 될지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의 성과들을 날릴 폭탄이 될지 여부는 거기 달려있을 겁니다. 이런 주장이 반혁명에 복무한다고 말하기 전에, 손 놓고 있는게 되려 혁명을 잡아먹는 일이 되지 않을지도 부디 생각해보시고요.


마지막으로 어제 한 여성 동지로부터 건네들은 인상깊은 얘기를 여기에 씁니다.


"진지한 개입 한번 안하고서 여성들의 처우에 공감하는 척 슬쩍 끼어들어 의제를 흐리지 마세요. 당신은 남성인 이상 결코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느끼고 공감 못해요. 심지어 같은 여성이라 할지라도 피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느끼고 공감하기란 어려워요. 그리고 폭로와 그에 대한 공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일상적 성규범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물쩡 '공감'하려 하지마시고, 무엇이 문제인지, 여성주의적 장치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 이성적으로 '사유' 하세요. 반성은 공감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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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위와 같은 나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반비판할 수 있다. 이에 나는 어떤 인정을, 어떤 항변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역사유물론적 관점에서 정동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면? 비판이 아니라 공감이 시대가 요구하는 방법론이라면? 과도한 정념과 세계를 바꾸는 것 사이에  필연적인 인과가 있어야만 한다면? 문화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여론의 압력, 그 의도야 어쨌든 광기에 가까운 공론의 강제를 통해서 밖에 설립될 수 없는 것이라면? 으레 구조에 대한 고민이 없는 PC함을 비판하는 것이 애초에 이뤄져선 안될 것이라면?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은 사실 어떤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면, 양자의 권력투쟁에서 하나의 모델로서 마르크스주의가 이미 패배한 것이라면? 즉 20세기의 시대정신이 마르크스주의였고, 21세기의 시대정신이 페미니즘이라면? 이를 되돌리려는 어떤 시도도 역사에서의 반동이라면? 그래서 노동은 이제 자연이 되고, 성은 하나의 강력한 담론의 대상이 된 것이라면? 따라서 접촉이 친밀함의 표현이었든, 성폭력을 폭력일반으로 환원할때 바람직한 성적관계가 시장에서의 계약을 통한 거래와 닮게 되든, 이 모든 전제들이 다시 쓰일 질서로 대체되어야만 하는 것이라면? 인권의 추상성에 따른 보편성과 화폐의 추상성에 따른 보편성이 명백히 유비관계에 있으나 이를 통해 인권을 비판하기보다는 모든 낡은 것들을 대기로 날려버리는 자본주의의 혁명적 급진성을 얘기하듯, 차라리 지금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등가교환이라는 시장에서의 상품거래와 유비관계에 놓인 성의 계약화라면? 헌데 그것이 자본주의적 파편화, 문화가 붕괴되는 현상의 심화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라면? 근대 이후의 법질서와 무관하게 그것에 편입되지 못하고, 그를 통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이들에게 유일한 선택지가 sns와 같은 공론장에서의 폭로 이후의 여론의 압력을 통해 문화를 새로 쓰는 것이라면? 미투를 소비하는 이들과 무관하게 미투를 통한 주체화가 몫없는 자들이 몫을 주장하는 과정이라면? 폭력은 애초에 제어해선 안 되는 것이라면? 어떤 마녀사냥과 반지성주의와 무분별한 분노도 변화의 밑거름이 되는 시기에는 비판해선 안 된다면? 의식적인 운동은 애초에 폭력을 촉발하기 위한 것이었고, 폭력이 스스로 움직이는 순간부터는 그 목적을 다하게 되는 것이라면? 모든 관계의 윤리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때가 지금이라면? 당사자성이 모든 운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내 의도와 상관없이 나를 가해자 옹호자라고 볼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마련되어있다면? 요컨대 내가 옥수수 인간이라면? 모든 이론이 이론을 사용하는 주체의 존재론과 일치해야만 한다면? 기존의 좌파들이 갖고 있던 모든 생각이 그 토대에서부터 허물어져야 한다면? 내가 고려하지 못한 새로운  급진성의 기준들이 품행의 윤리로서 생겨나 버렸다면?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주체가 경험하고 느낀 바가 그의 말에 권위를 부여해주는 유일한 전거가 된다면? 현시점에서 약자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저항이 폭로의 형식이라면? 이러한 주장에도 절반의 진리가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정세에서 내게 최선의 진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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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어떤 주제에 접속해서, 짧은 말을 해야한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어떤 말을 하겠는가? 가십과 인물 위주로 시니컬하고 분노한척하는, 별 생각 없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지껄이는 주체가 된다. 세계의 구조와 다양한 사건들의 인과는 몇마디 말로 정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헌데 비슷한 지껄임들이 모이면, 마치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공론장을 형성한듯, 실제로는 결코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격차를 좁힐 수 없는 평행선으로 지속되는 것임에도, 어떤 착각이 발생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즉 트위터는 그 구조적 조건으로 인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껄이는 장치이며, 그런 한에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지껄이는 주체를 양산한다. 적대가 명확하여 사회적 금지가 명백한 순간에 그것은 제 역할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적대가 불투명하여 사회적 금지가 흐릿한 시기에 그것은 지껄임 속에서 신기루 같은 유사 적대를 만들고, 스스로 금지를 형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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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를 입었다는 심리학적 주체에 의한 진술과 피해자성은 그 자체로 마냥 투명한 것일까. 여론 재판 속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에게 가능한 자기변호의 기회는 주어지는 것일까. 우리는 아프간에 폭탄이 떨어지는 것을, 분쟁지역의 난민들이 겪는 고난을 공감할 수 있는가. 그 모든 고통을 공감해야하는가. 외려 사안이 폭력에 의한 고통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더더욱 공감보단 생각이 절실히 요구되는 사안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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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 모순이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인간은 불완전한 언어 위에서 유동하기 때문일까. 모든 문장은 그 문장에 틉입할 허점을 열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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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언어학자는 레닌은 재활용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혁명가 중 한명이라 평한적 있다. 이는 이미 그 삶의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한 과정을 통해 유니클로 티셔츠 등에서 복제될 수 있는 '반항아'로 등극한 체게바라와 달리, 레닌의 이름을 언급한다는 것은 적대와 냉전을 기억한다는 함의가 짙은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레닌을 복기하는 것이 곧바로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한동안 그의 이름을 입에 쉽게 담을 수 없었던 까닭을 증거한다. 


그러나 이제 레닌마저 그런 소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선정적으로 발췌한, 먹기 좋게 조각나 파편화된 어록을 실어나르는 트위터의 '레닌 봇', 레닌 코스프레..이 때 레닌은 적대의 흔적마저 상품에 의해 지워진 지금의 시대적 조건을 반증한다. 이베이에 즐비한 '소련군 모자와 훈장'은 어떤가? 이들은 적대의 잔해를 하나의 실체화된 이미지로 소비하면서, 그와 관련된 사사로운 일화들을 향유하고 소련의 1세대 혁명가들을 탐독하면서도 오늘날 레닌이 취한 입장과 가까이 있을 이들을 향해 '구좌파시스트'라 일축한다. 이제 유원지가 된, 무너져 내린 역사의 신전을 거닐며 땔감으로 불태울만한 조각들을 챙겨넣는 이들 앞에서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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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사회의 적대는 폭력과 반폭력을 둘러싼 싸움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반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국 폭력이라는 점, 폭력을 상대하는 반폭력이 자신의 대적을 미메시스한다는 점, 이 적대가 지양될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는 이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혁명은 자신이 어떤 부자유 속에 놓여있는지를 아는 이들에게만 허용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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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채로 사랑받는 것보다 나인채로 미움받는 것이 낫다.


결국 온전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이들은 언제나 세계에 홀로 있고, 외롭다.


나에게 공감하는 자, 나에게 동조하는 자가 있다해도 인간이 서로에게 영원한 타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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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해석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하며 권력투쟁을 하는 데에 놓여져 있는 거 같다. 당연하게도, 마르크스주의의 대상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라면, 페미니즘의 대상은 생물학적 성에 연동된 여성(성)이다(이때 '젠더'라는 워딩은 정확하지 않은데, 이는 대표적인 젠더연구자인 주디스 버틀러와 여성성연구자인 뤼스 이리가레이 간의 대립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기본적으로 남/녀 모두가 종속되는 체계로서, 그것을 변혁할 주체는 남/녀 모두를 포함한 '노동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그 실천의 방향에서도 남/녀의 차이를 부각시키길 망설인다. 허나 여성성은 여성의 문제이고, 여성이 종속되는 규범이자 조건으로서, 그것에 개입할 주체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여성에 대한, 여성에 의한 실천을 갖는다. 여기서 성적 차이는 화해할 수 없는 첨예한 심연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게 페미니즘은 근본적으로 분리주의, 정체성 정치만을 아는 자폐적인 경향으로 드러나며, 페미니즘에게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차이를 억압하는 추상적인 보편성의 화신으로 드러나는 것은 필연이다. 미투 이후 하나의 가설을 넘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두 대항담론 사이의 통약불가능한 영역과 그 한계이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는 일찍이 리오타르가 '포스트 모던의 조건'으로 적시했듯- 소서사, 구체성, 차이, 개별성, 다양성이라는 에토스가 승리를 거둔 때이며, 그것이 바로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피해자성을 통한 주체화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 유일한 원인이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한 러시아 혁명과, 이에 따른 사회주의의 시퀀스가 그 자체로 정당화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주의는 틀리지 않았지만, 적어도 경제의 적대와 모순이 불투명해져버린,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선 그 시대적 흐름에 따라 페미니즘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전례없이 심화되고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변혁운동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경제적 차이가 '경험적으로' 선명하여 다수의 대중을 동원하고 그러한 방식으로 주체를 급진화 시킬 수 있었을 때나 유효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중적 동원을 위한 주체화의 장치로부터의 위상을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가 짊어질 수 없게 되었을때, 경제적 불평등이 경험적으로 감각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을때, 적대는 이제 '경험적으로' 첨예해 보일만큼 가시화된 성적 차이의 문제에서 상연된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에서 성차의 문제는 적대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그 태생적 논리 속에서 성차는 바로 핵심적인 '적대'이자 '모순'인 것이다. 따라서 적대의 정치와 차이의 정치의 위상을 구분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의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새삼스럽게도 돌이켜보면 라클라우의 "텅빈 기표로서의 민주주의",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 혹은 적녹보라 패러다임 등은 이미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의 변화들을 힘겹게 따라가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에서 퇴장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자의 역할이 끝나진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계 속에 놓여있고, 역사의 굴곡 속에서 경제의 적대는 언제든 쟁점이 될 수 있다. 당분간 도약을 위한 웅크림의 기간을 가지며 페미니즘에 구성적으로 비어있는 공백을 보충하는 역할을 수행하더라도, 한때 페미니즘이 감내했던 부차적 역할을 감내해가며,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