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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딜레마

by 정강산 2018. 3. 8.

마르크스주의가 정체성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인식론적 수준에서인가? 혹은 마르크스주의마저 그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혹은 마르크스주의 역시 필연적으로 정체성 정치로부터 시작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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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의 정치와 적대(모순)의 정치는 어떤 위상 관계에 놓여 있는가? 마르크스주의는 차이의 정치일 수 있는가? 혹은 자신 내부의 차이의 정치를 지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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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사회학적 계층으로 환원된 '노동자'에 의한 정체성 정치의 다른 이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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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극빈한 노동자들에 비해 풍족한 삶을 살았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발언권을 경제문제에 한해 제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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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자본>을 통해 자본-이윤, 토지-지대, 노동-임금을 자본의 삼위일체 정식이라 논하며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을 설득하려고 했던 것은 작업장에서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팔자 좋게 엥겔스가 준 돈으로 주식을 즐기며 연명했던 일개 지식인 프티 부르주아의 고담준론일까?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의 처지에 보다 연민을 느꼈어야 했을까? 오히려 그가 단순히 이데올로그에 머무르지 않고 150년이 넘는 동안 급진적 운동들을 견인할 수 있는 이념을 제공할 수 있었던 까닭은 체계에 대한 엄밀한 규정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인간주의를 배격함으로써 비로소 과학의 위상에서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며 성숙한 마르크스를 상찬한 초기 알튀세르를 기억하는 이들은 어디있는가? 여성은 당장 생존을 위협받기에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접근해야 하며 윤리의식이 투철한 남성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보호가 필요하다고? 남녀 모든 노동자들이 매번 겪는 산업재해와 인격적 모독, 때로는 미행과 사찰, 해고의 위협, 용역깡패와 사장 개인으로부터 당한 폭행은 작업장에 나가기도 무서울만큼 그들의 생존을 직접적으로 위협 받는 것이 아닌가? 그들 모두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한 명의 자본가에게 응당 개인적 상해를 가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해도, 산업재해는 물질화된 연대주의에 기반한 산업재해 보상보험으로, 인격적 모독, 미행, 사찰, 용역 깡패와 사장 개인에 의한 폭행은 법적 대응으로, 해고의 위협은 비정규직 축소와 노조를 통한 투쟁과 사회안전망의 확대로 해결해야 하고, 혁명 또한 이러한 장치들을 염두에 두는 한에서 이뤄져야 하지 않는가? 그게 테러리즘에서 마르크스주의로의 도약을 설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차이 아니던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유효한 개입이란 바로 그런 방식의 투쟁을 의미하지 않는가? 지금의 상황이 한편으로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는 모든 노동자들이 위의 전통들에 대한 사유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어떠한 조직에도 속하지 않은 채 SNS상에서 'me too'를 외치며 상사, 관리자, 사장에게 받은 구체적인 피해사실들을 열거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된다. 여성주의 담론에 대한 우리의 언어가 얼마나 부족한지 새삼 체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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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학문적 수준에서, 혹은 그에 따른 논쟁/논의의 수준에서- 경제적 차이에 따른 격차와 정체성으로부터 특정 사안에 대한 발언권을 박탈하려는 경향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부모가 CEO이기 때문에, 당신의 친척이 중견 기업의 사장이기 때문에, 당신이 지대를 받아 연명하기 때문에, 당신이 자본가이기 때문에, 혁명적 이행에 관해 논하거나 노동자들의 조합주의적 인식을 비판할 권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 지금 누군가 당신의 월소득이 나보다 2배는 많기 때문에 경제문제에 관한 한 입을 닫고 내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라고 말한다면, 그는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이는 당연하게도 좌파들이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학습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에서부터 중국의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완장을 찬 분노한 사람들에게 인민재판과 자아비판을 거쳐 조리돌림을 당하다 노동교화소나 처형장으로 끌려간 수많은 중산층들, 자본가들, 그의 친인척들, 그와 친하게 지낸 부역자들의 사례를 전해들을 때, 혁명에 대한 짙은 회의를 느끼며 딜레마에 빠지지 않은 좌파가 과연 어디 있을까? 한편으로 차베스의 볼리바르 혁명에서 눈여겨볼 점은 혁명적 시기에 으레 일어났던 그러한 폭력적 행위가 두드러지게 감소했었다는 점이다. 당시 볼리바르 혁명의 전개과정에선 개인들의 경제적 격차와 무관하게 누구나 그의 정책에 반대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정체성 담론을 주도하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사안에서 좌파는 이러한 사고 능력을 상실한다. 이제 좌파들은 문제가 되는 지점의 모든 원인을 특정한 성적 정체성의 문제로 기꺼이 환원하는데에 주저함이 없다. 특히 남성으로서는 근원적으로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차별과 폭력을 '경험'할 수 없다는, 묵묵히 피해자들의 발언을 전달하는 것만이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는, 폭력에 가담해 온 권력의 수혜자로서는 스스로 발언을 삼가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경제적 사안에서는 그토록 관대하게 수준에 따른 차이를 설정하지 않기로 합의한 좌파가 언제부터 차이의 정치에 백기를 드는 경험주의자가 되었나? 부분적으로 이는 과거 구좌파들이 온전히 품지 못했던 여성주의적 쟁점들에 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정도를 모르는 반성은 결과적으로 자신을 잃게 만들며, 원죄의식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당연하게도, 원죄의식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요컨대 자신의 자본가성을 비판하며 노동자성에 '공감'하고 무한한 시혜를 보냈던 모든 시도들이 소박한 공동체주의의 함정에 빠져 기껏해야 자본주의적 경쟁 속에서 도태되거나 소비될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사회적 기업으로 귀결되는 것이 우연일까? 그러한 접근은 외려 세계, 혹은 사회 전체 생산을 조직할 책임을 방기한다는 주장에는 모든 좌파들이 원론적으로 동의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공감'과 피해 호소에 대한 '연민', '동조'는 성차에 매개된 지배/예속관계를 온전히 규정하는데에 불충분하다. 그것은 외려 성차에 각인된 지배의 재생산을 끝내야 하는 책임을 방기하는 일이다. 근대 이후 정체성의 정치의 첫 번째 국면이 속류화된 마르크스주의였음을 인정한다면, 이제 그것은 속류화된 페미니즘에게 자리를 내어준 듯 하다.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는 잠언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