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alogue

라비 무르에, <시간이 없다>(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기획전)에 관한 담화

by 정강산 2018. 5. 26.

라비 무르에, <시간이 없다>에 관한 담화 


맹준규

정강산

(null)

 

:

작품을 흥미롭게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 없다>>가 정치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음과 동시에 그것을 철저히 무용하거나 불가능한 표현으로 해체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이해했을 것입니다. 작품에 관해 핵심적인 판단을 잠시 미뤄두고서, 그러나 저는 이러한 표현들 그 자체가 몹시 새삼스러운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를테면 라비와 리나라는 두 서로 다른 이야기꾼이 창작에 함께 관여한 것, 리나의 사적인 사진들이 디브의 이야기와 병치되는 것과 같은 세세한 설정들이 말이죠. 이것이 전달과 표현의 불가능성과 관련한 설정들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만, 제 질문은 사실 다음과 같습니다.

 

표현이 갖는 한계란 자명합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표현 자체는 예술에 있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까요? 예술가들이 픽션을 다룬다고들 하지만 사실상 재현이 불가능하다는 항진명제를 동어 반복적으로 읊조리게 되는 늪에 빠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리 보셨군요. 저는 사실 <시간이 없다>에서의 라비 무르에에 한하자면, 장치가 렉쳐와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기 보다는 텍스트를 위해 동원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렉쳐 퍼포먼스의 장점이자 단점이겠으나, 이야기 자체의 전달이 작업 구성의 8할을 차지하다보니, 그 언표된 정보를 따라 가는 것 외에 썩 흥미로운 부분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텍스트 외적인 장치들이 말하는 바가 아예 없진 않았을 겁니다. 물에서 녹아 흩어지는 여성 퍼포머의 사진 이미지들이 암시하는 바는 '재현된 이미지로서의 주체'에 관한 얘기일 것이고, 이후 용액에 백지상태가 된 인화지 낱장들이 모여 다시 스크린이 되는 것은 주체의 상이 투사되는 막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죠. 작가의 의도가 형식상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장치들은 '매개'의 선차성에 관한 얘기를 하는 듯합니다.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하신 것으로 압니다만, 이에 관해 작가가 언급한 부분이 있는지요?

 

:

바래지는 사진, 그리고 다시금 스크린으로 사용됐던 사진들은 말씀하신 바대로 주체성에 관한 유효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도 <시간이 없다>에서의 방점은 재현이 불완전하게 재현된다는 것, 주체성으로 이야기하자면 개인의 동일성 또한 불완전하게 재현된다는 것이겠지요. 작가 또한 비슷한 맥락으로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이러한 의견에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앞서 말했듯 과연 그것이 바래지는 사진, 이차적인 프로젝션, 서사에 관한 상이한 설명방식 등의 복잡다양한 성격들로부터 동시에 지시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뜻대로 서사의 재현이 불가능성을 포함하고, 주체의 동일성이 불가능한 리듬을 나름의 변주로서 극복한다면, 그에 대한 미학적 설명이나 지시는 단순히 마찬가지로 불가능하고 모순된 많고 많은 양상 중 그저 하나를 파편적으로 드러내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시 말하자면 라비가 동원하는 수단들은 재현의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공통분모를 가진 수단들임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별개의 장치들로 읽히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보셨을지 모르겠지만 빨랫줄에 걸린 하얗게 바랜 사진-스크린은 저에게 지나치리만큼 공연 전체와 무관한 대상으로 보였습니다. 어쩌면 연극 내에서 연극적이지 않은 요소였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

장치에 관한 설명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시간이 없다>가 최종적으로 정박하는 곳이 어디인지, 즉 그 작업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관해 얘기해보면 어떨까요. 처음으로 드는 인상은, 그것이 '거대서사는 환상에 불과하며 담론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오로지 텍스트의 효과일 뿐'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교리를 다소 불성실하게 재연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담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은 '이데올로기'가 되겠습니다. 다시말해 자신도 모르게 영웅서사 속에서 위치 지어진 주인공의 상징적 위상과, 경험세계의 수준에 존재하는 비루하고 어설픈 심리적 개인성이 충돌하고 서로를 침범하는 것이 렉쳐가 전달하고 있는 전반적인 서사이죠. 그리고 동상 및 영웅서사로 암시되는 '이데올로기'는 개인에 앞서 존재하는 억압, 환상, 기만 등 거짓된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자신을 재현한 동상이 건립된 이후로 주인공은 우스꽝스러운 내적 고양을 느끼며,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러한 진술은 절반은 옳은데, 실제로 그들(거대서사, 이데올로기 등)은 허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반은 틀린데, 왜냐하면 그들은 현실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가상이지만 실재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기만이라는 것이 아니라, 기만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현실을 작동시키는지, 기만을 제거하는 순간 현실 자체도 동시에 사라지게 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다>는 기만적인 이데올로기가 부정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필연이라는 점을 제시하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듯 합니다.

 

:

그것은 제가 이전에도 사용했던 표현으로 다시금 설명될 수 있겠네요. 라비는 <시간이 없다>에서 디브의 이야기를 사실과 허구의 조합인 팩션으로 구성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장치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요소로 작동한다고도 또한 말합니다만, 무엇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는 것이 이미 충분히 허구적이라는 것입니다. 허구로 구성된 현실에서 유효한 태도가 그것의 허구성을 알아차리는 것일까요? 이는 그럴듯하지만 현실 및 이데올로기가 허구라는 항진명제를 강박적으로 읊조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는 정확한 설명이지만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대로 유효한 태도란 허구의 효과를 모색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라비가 내놓은 디브의 이야기를 단순히 서사적인 수준에서 평가할 수도 있겠죠. 라비가 창작한 허구적 서사는 그 자신이 비판하고자하는 허구-현실 그 차제-보다 충분히 매력적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못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그렇습니다. 아마도 보들레르 이후 지속적으로 예술에서 하나의 구성적 흐름이 되어온 '팩션'이라는 방법론을 다시금 재고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작업구성의 윤리를 재고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팩션이 가지고 있는 진리계기를 부정할 수는 없겠죠.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서사들을 비틀고, 주어진 선험에 구멍을 내며 파열시키는 주요한 수단일 수 있습니다. 또한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채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 될 수도 있겠지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광풍이 관철되며 전통적인 공동체와 관습이 무너지고 믿을 수 없는 빈부격차와 대립이 가시화 되었던 남미의 초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발생한 '마술적 리얼리즘'이 어떤 재현적 서술보다 더 재현에 충실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문제는 '팩션'이 언제나 적절한 방식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로 그것은 어떤 이야기든 만들 수 있다는 허무감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라비가 이 작업을 팩션이라 밝힌 순간 외려 나름대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서사에 대한 감동이 반감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말씀하셨듯 이미 세계 자체가 가상을 통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차라리 현실에서 쉽사리 상상으로 도야하는 작위적인 구성보다, 때론 현실 자체에 천착하는 것 혹은 현실의 서사를 차용했으나 기꺼이 이 이야기를 '사실'이라 인정하는 것이 차라리 충실한 작품이 되겠지요. 요컨대 상품이 이미 환상을 내재하고 있기에 상품자체의 구조를 충실히 파악해 보여줄 수 있다면, 굳이 상품을 환상적으로 보이도록 꾸미지 않아도 된다는 말 입니다. 라비 역시 이야기 자체를 허구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 사실로서 다루는 부분을 명확히 암시했다면, 그리하여 가상의 도입은 예술적 장치 자체의 실행으로 한정했다면 훨씬 매끄러운 작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null)

:

. 라비의 허구적 서사에 관한 서로의 의견은 어느정도 비슷한 모양입니다. 이번엔 작품의 비슷하지만 다른 속성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요? 질의응답에서 한 관객은 서사를 구성하고 그것을 설명하는 라비와 리나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이야기꾼인지, 혹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라비는 자신이 그 둘 모두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만, 전통적인 이야기꾼도 하나의 단일한 교훈을 이끌어내고, 마찬가지의 이유로 자신들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하더군요. 저는 이렇듯 오늘날 어떤 방식으로 작가들이 파시즘의 위협을 다른 강박적인 방식으로 체감하게 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해석의 자유와 작품의 의미가 해체될 기회 및 여건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관객 또한 그 작품의 존재 의의가 대관절 무엇이냐고 묻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하신대로 디브의 이야기가 팩션이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관객이 받게 될 충격과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우리는 양껏 떠드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오늘날 작가들이 어째서 강력한 메시지를 (나타내길) 두려워하는지, 이야기의 덩어리, 볼륨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포함된 의미가 없거나 희박한 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위 두 질문은 아마도 같은 이유에서 비롯되지만 서로 다른 논의로 전개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보죠. 첫째, 우리는 위와 같은 금지-거대담론에 관한-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둘째. 기의 없이 비대해지고 있는 기표, 예술세계 그 자체의 물화된 볼륨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첫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서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대서사 입니다. 전체의 수준에서 각 부분들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며,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식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경유하는 담론이 바로 거대서사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일종의 '체계''위상'을 상정한 서사이죠. 근대국가, 근대사회의 발명과 더불어 생겨난 이성, 진보, 발전, 혁명, 해방 등의 개념은 거대서사의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헌데 문제는 그것이 쉽사리 청산될 수 없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 속에서 사유하고 행위하는 생산양식- 즉 자본주의 자체가 거대서사를 이미 산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화폐의 본질에 관해 묻지 않고, 그에 관해 의식하지 않지만 누구나 화폐의 본질을 안다는 듯이 행동함으로써 본질은 매순간 거듭 관철되지요. 이는 다른 쪽으로도 확장시켜낼 수 있는 논리입니다. 예컨대 누구도 성차의 본질에 관해 의식하고 있지 않지만 자연스레 성별구분된 화장실을 이용하며, 자신이 어떤 성별의 화장실로 들어가야하는지 잘 알고 있지요. 성차를 둘러싼 이데올로기는 이미 비의식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거대서사에 맞서 소서사를 실체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대서사에 머물며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대서사에 맞서는 이성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전체를 파악하는 이성 속에서 비로소 사태의 본질과 그에 대한 우리의 개입-실천 가능성이 나오는 것이죠. 레닌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기 전에 헤겔의 대논리학을 독해했었다는 점은 깊게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점에서 동시대 작가들의 거대서사와 규정에 대한 환멸은 유감스럽습니다. 그것은 총체적 이해를, 그리하여 결단을 회피하는 불성실한 태도입니다. 그리고 라비무르에에게 있어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었죠. 그에게 거대서사는 그저 부정적인 것으로서 외재적으로 비난되고 있을뿐입니다. 우리는 거대서사의 필연성마저도 이해할 때야말로 변화가능성을 논할 수 있게 될겁니다. 두번째 질문도 이것으로 함께 갈음하겠습니다.

 

:

말씀하신대로 오늘날 거대서사에 대한 환멸은 마땅히 거대서사의 거대함 자체보다는 그것의 세세한 설정 값들에 대한 비판으로 방향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는 오늘 저희가 함께 내리게 될 결론 중 하나가 되겠죠. 거대서사에 참여하는 것과 관련해 말씀하신 이성이 방향계 역할을 하게 된다면, 서사가 거대하다는 것만으로 혹은 일련의 정합성이나 절대성을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파시즘과 연관되는 일도 점차 수그러들 것이라 봅니다.

 

단지 아까 작품 내에서의 장치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정리하자고 하셨지만, 위와 같은 윤리적 결론 이외에 저희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나머지 요소들이라고 해봐야 그 안에서 사용된 예술적, 조형적 언어들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라비의 작업에 대해 불만으로 갖는 지점은 조금 상이합니다. 그의 태도도 문제이지만 저는 단순히 그가 만들어낸 스토리라인의 성격이나 수준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세 가지 서로 다른 방식의 이야기 전달방식을 활용하고 있죠. 리나가 들려주는 이야기, 양력, 1인칭 이렇게 세 가지 형식의 변주는 하나의 서사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서사는 여러 다른 매체들로 다양하게 감각될 때 그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는 수준보다 더 크고 방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몸집을 불리는 주된 전략 중 하나죠. 그런데 이것이 <시간이 없다>에서만큼은 상상계적 환상을 강화하는 것과는 반대로 그것을 해체하려는 초라한 형식적 전략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감행하는 렉쳐 퍼포먼스라는 작품 하나에 묶여있었음을(변주의 범위가 렉쳐라는 상위 개념 하에 묶여있었음을) 차치하더라도 라비가 그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바가 애초에 이야기가 아닌 기교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서사 자체를 해체하는 서사를 서사라고 불러줄 이유는 없습니다. 더더욱 그보다 드라마틱한 실제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있다면 말이죠.

 

:

그렇습니다. 해체주의적 방법론이 하나의 물화된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는 불충분한 비판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한편으로 레바논이라는 지역적 맥락을 고려할때 라비 무르에가 내린 결론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닙니다. 중동 지역에서 힘을 얻어 온 근본주의적 교리에 대한 비판은 어쩌면 해체주의적 수준에서 이뤄질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르지요. 모두가 순교와 영웅을 바라며 맹목적인 테러를 종용하는 것이 일상적인 상황에 편재하는 것이라면, 보편적 인권의 이념과 세속주의를 위한 시도는 어쩌면 철저한 해체주의적 언어를 경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헤겔식 표현을 빌리자면, 역사는 이성을 향해 나아가며 이성 속에서 정초되지만 어떤 순간엔 이성과 구별되는 열정에 의해 추동되는 것이죠. 라비 무르에의 작업 <시간이 없다>는 단순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재연이 아니라 역사주의적 측면에서 레바논의 맥락성과 관계하며 필연적으로 개시되어야할 단계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그 답을 어떻게 내릴 것인지는 개별 관람자들에게 달려 있겠지요.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