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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

엘 콘데 데 토레필 인터뷰 질문지

by 정강산 2018. 7. 6.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젝트, 엘 콘데 데 토레필,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 아티스트 토크 사회용으로 작성)


작가소개 및 진행순서 언급: 

엘 콘데 데 토레필은 타냐 베옐러와 파블로 기스버트가 이끄는 컴퍼니로서,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보신 바와 같이 <풍경 앞에서 사라지는 가능성들>은 은유로 가득한 작업이라 즉각적인 독해가 어렵습니다. 이 작업을 두고 엘 콘데 데 토레필의 멤버들은 한 인터뷰에서 연극적 추상 혹은 무대에서의 추상을 만드는데 집중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일단 우리에게 주어진 단서는 본 공연의 형식적인 부분인 거 같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부터 독일, 포르투갈을 거쳐 폴란드에 이르는- 전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10개의 광경들에 대한 네러티브와, 퍼포머들의 기이하고 무의미한 놀이가 작업의 기본적인 프로세스이고, 이들은 서로 불협화음처럼 충돌하는 동시에 서로 섞여 들어가며 세계에 대한 어떤 심상을 유발합니다. 


본 아티스트토크에서는 작업을 독해할 수 있는 추가적인 단서들, 혹은 작업이 유발하는 심상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오갔으면 합니다. 우선 아티스트 토크 진행 순서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요, 제가 준비한 두어 개의 질문들을 던진 후, 플로어 토론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질문:

0. 이 작업은 은유로 가득 차 있다. 덧붙여 텍스트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지만, 그것은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모호한 행위들과 포개어지며 텍스트와 행위를 초과하는 알레고리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나는 관객들에게 하나의 단서가 주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당신에게, 이 작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적인 개념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리고 어째서 그런지 설명해주면 좋겠다. 먼저 이에 대한 내 인상을 말하자면, 그것은 ‘허무와 냉소, 묵시록, 데카당스’이다. 퍼포머들의 기행도 그렇지만, 제시되는 네러티브 곳곳에서도 일종의 퇴행, 비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변화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닫힌 역사의 시퀀스 말이다.


1. 마드리드와 관련된 서사에선 사라 메사의 입을 빌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에 비해면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 세기 동안 밝혀진 모든 진리는 지금 당장 상상력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열등하다”라는 진술이 등장한다. 허나 이러한 진술과는 달리- 오늘날 풍경은 인식을 압도하는, 충격, 전율, 숭고와 다시금 깊게 관련되는 것처럼 보인다. 알다시피 여러 작품들에서 대대적으로 관측되는 풍경의 복귀 같은 것이 있다. 이는 불가해한 물자체로서의 풍경이 인간에게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어떤 퇴행에 대한 진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때, 풍경이란 자본에 의해 매개된 이미지를 지시하는 ‘스펙터클’이라는 개념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압도적인 자연 풍경에 대한 매혹과, 문화산업을 통해 생산된 이미지에 대한 탐닉 사이에 어떤 인과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스펙터클에서 풍경으로의 이행이 포스트 스펙터클적 접근으로의 이동이라 간주될 수 있을까?



2. 묘사할 풍경이 되어주는 10개국들의 이미지는 모두 유럽 국가들로 채워져 있다. 당신들의 작업 네러티브에는 영미권도 마찬가지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질문이 탈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질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미리 알리고 말하건대, 논의의 단위가 되는 것은 왜 하필 전 세계가 아니라 유럽인가? 총체적 스펙터클과 데카당스는 유럽을 기준으로 나뉘는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유럽 특정적인 설정을 고수했는가?


3. 독일과 관련된 네러티브에선 우리가 홀로코스트를 기억하는 일이 이벤트가 되어버린 시간에 진입했음을 암시하는 네러티브가 등장한다.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강제수용소로부터의 해방 70주년을 기리는 동시대 예술가의 제의적 이벤트는 5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형화된 프로젝트로서 나타나고, 그러한 이벤트를 둘러싼 다양하지만 속물적인 반응들이 등장 한다. 그 속에선 보상을 기대하는 참여자들이나, 어떤 보상도 상정하지 않은 작가나, 각자의 욕망을 가지고 지니고 이벤트를 즐기고 있다. 이는 모든 정치적인 제스처들 또한 안전하게 가공된 과정 속에서 결국 어떤 의미화 과정도 일어나지 않게 되는 세계가 도래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헌데 나는 여기서 당신의 논조에 충분히 공감하는 한편으로, 당신이 동시대 미술을 둘러싼 조건들을 상당히 냉소적으로 조망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벤트화된 예술, 혹은 스펙터클한 프로젝트가 된 동시대 예술의 조건을 돌파한다는 것은 어떤 실천을 요구하는 것인가?


4. 나레이션의 일부 영역에선 예술의 가상성과 파괴력에 대한 자조 섞인, 그러나 한편으론 경탄하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예술은 혁명을 갈구하고, 그것을 착상시키지만, 동시에 결코 그것을 수행하지는 않고 지연시킨다는 언급이 그것이다. 이는 곧 사회와 분리된 예술에 대해 아도르노가 언급한 바 있는 예술의 원죄에 관련된 진술일 것이다. 연이은 나레이션에서 오늘날 위험이 제거된 예술은 이부프로펜, 즉 소염제에 비유된다. 허나 당신이 여전히 카스텔루치, 라스폰트리에 등이 예술을 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고 말했을 때, 여전히 예술은 세계에 대한 엄청난 분노를 없애 가지는 높은 단계의 승화 형식으로서 조명되기도 한다. 이 작업에서 예술에 대해 취하는 메타적 관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에 대한 냉소와 찬탄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5. 리스본에서 벌어진 서사에서는 음식에 예민한 소년이 소녀를 한 소녀를 보고 충격에 빠지는 모습, 가족적 관계에서의 역할로 인해 억눌렀던 자신의 욕망을 포르노를 통해 찾게 되는 어머니의 모습, 일에 열중하며 클래식을 듣고 만족스런 하루를 보낸 아버지의 모습이 등장한다. 브뤼셀(벨기에)과 관련된 서사에선 경험, 체험에 대한 비유들이 등장한다. 여기서는 독일 베를린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일상생활에 대한 비판의 연장에서 고안된- 상황을 만들어내는 기 드보르의 전략이 경험 경제에 포섭된 장면이 비관적으로 묘사된다. 스페인의 젠더 이론가인 파울 비 프레치아도(Paul B. Preciado)의 입을 빌려, 인류가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고 있다는 진단도 함께 등장한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의 장면에서는 뮤지션 블릭사 바겔트(Blixa Bargeld)의 입을 빌려 염세적인 진단이 등장한다. 그는 자조 섞인 한탄을 친구에게 내뱉는다. “나는 내 인생에서 수백 건의 콘서트를 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을 만났어. 나는 수백 곳의 도시에 있었고, 진리가 흥미롭지 않다는 발견에서 나온 두려움에 대한 반응으로 모든 것이 불충분 한 향연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어. 우리는 작은 것을 높이 평가하지. 우리는 사소한 것을 기념해.” 이렇듯 다양하지만 일관된 맥락으로 독해될 수 있는 사건들이 유럽 도처에서 벌어지는 모습들을 묘사하는 서사가, 당신의 작업에서 하는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6. 키에프와 관련된 서사에서는 우크라이나 시인 올가 셰브첸코바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는 가족 방문 차 들린 키에프에서 죽음에 대한 허무한, 영원회귀를 떠올리게 하는 시를 작성하고, 우수에 젖어 그 시를 다시 지워버린다.(...)


7. 작중 서사에는 바르샤바에서 메리 미즐리가 손자에게 쓰는 편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헌데 그의 입을 빌려 제시되는 지루함과 무위의 급진성에 대한 찬미는 68에 대한 반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알다시피 68년, 지루함은 부르주아적 생활세계에 대한 표상이었다. 따라서 당시 지루함은 격렬하게 거부되었지만, 어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그러한 지루함에 대한 비난은 창의성, 수평성, 탈중심성을 내세운 새로운 자본주의로의 미학적 갱신에 영감을 제공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신들에게 오늘날 지루함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플로어 토론:


맺음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