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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

백현진 작가 인터뷰 질문지

by 정강산 2018. 7. 6.

(이하는 2018년 5월 계원예대에서 진행된 백현진의 강의와 관련된 대담 준비용으로 작성된 질문지입니다)


*작가의 의도에 관해 설명하는 것에 관해 굉장히 조심스러워 하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백현진 님께서는 스테이트먼트에도 최소한의, 은유적인 서술을 하시지요. 실제로 적지 않은 경우 스테이트먼트는 외려 작업이 책임질 수 없는 데까지 나아가며, 작업의 의미를 제한하고, 작업과 유기적으로 관계하기 보다는 외려 전면적으로 부각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한편으로 이른바 컨템포러리 아트의 시기에 특징적이죠(다시 말해 스테이트먼트와 작가의 지성화는 고도로 매개된 사회관계 및 정형화되고 표준화, 규격화되어가는 전시 방식들, 소비자 관객의 등장과 관련된 현상일 듯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작가가 의도를 가지고 정갈한 언어로 자신의 작업 맥락을 설명하는 것은 백현진님의 말씀대로 가소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의식화된, 지식인으로서의 작가라는 상 자체가 이미 장려되는 하나의 모델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허나 그것은 동시에 긍정적인 효과 역시 있는 것 같습니다. 말없이 작업을 수행하는- 사회와 고립된 천재적 예술가 모델에 맞서 세속화된- 비판적인 예술가의 모델을 제시했으니까요. 더군다나 이미 스테이트먼트가 하나의 형식이 되어버린 이상, 작가는 이러한 조건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의 해석을 전적으로 관객에게 맡기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음악과 미술에 걸쳐있는 질문이 될 수 있을 텐데요, 백현진님은 나의 작업엔 주제가 없고(ex_방백앨범, 개인전 인터뷰 등), 여러 사람들이 각자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헌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똑같은 나무에서 자라난 나뭇잎들을 보더라도, 그들은 각기 상이한 질감과 모양, 줄기를 갖고 있지요. 그들 각각을 모두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우리는 나뭇잎이라는 이름으로 각기 상이한 그들을 동일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인간의 문명 전체가 바로 이런 언어와 개념 위에 바탕을 두고 있지요. 따라서 제게 모든 것은 다르다라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외려 기꺼이 동일성과 같음을 주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누군가 작업을 할 때, 주제를 가지더라도 그에 대한 개개의 독해는 다를 수밖에 없겠죠. 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제를 거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2017년에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에서 진행하신 <실직폐업이혼부채자살 휴게실>은 사실 이전의 전시들, 아라리오 갤러리에서의 <산만과 실체>(2008), PKM 갤러리에서의 <들과 새와 개와 재능>(2016)과 달리- 보다 명료하게 인간의 사회적 삶과 관련된 질문들, 먹고사는 것에 관련된 질문들을 던지는 데에 초점을 맞추셨던 거 같습니다. 물론 이전의 초상화 시리즈 또한 사회적 분위기와 밀접하게 독해되는 측면이 있지만요. 이러한 변화에 어떤 계기가 있는지, 작가님께 노동 혹은 먹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연기, 소리, 그림 등 전방위 예술형식에 개입해 오셨습니다. 헌데 그들은 각 영역 별로 상이한 감각에 근거하고 있고, 상이한 감각을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기 상이한 감각을 발전시킬 거 같고요. 한때 음악의 비물질성과 개방성을 약수물에 비유하신 적이 있으십니다만, 연기, 음악, 미술 그들 각 영역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그러면서도 동시에 공통되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그 중에서 위상을 나눌 수 있나요, 혹은 특별히 백현진님께서 보다 천착하고 싶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형식이 있나요.


*백현진 님의 음악에는 읊조림, 무엇보다도 비명이 자주 등장합니다. 애드립으로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표현들이 다른 가수들의 화성악적 기교와는 달리 낙심한, 단말마처럼 들리는 비명인 것입니다. 이건 들과 새와 개와 재능 중 사운드퍼포먼스<면벽>에서도 그렇죠. 내뱉는 듯한 음률, 터져나오는 파열음 등에 천착하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루프에서 진행하신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에서는 다윈이 진화를 진보라 잘못 표현할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고 생물간 위상 차이를 언급할 때 주의를 기울였다고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그 외에도 현대자동차에서 진행한 <brilliant>인터뷰나, 작년에 있었던 <올해의 작가상> 인터뷰에서 발전, 수정, 개선 등을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변화만이 있을 따름이라 말씀하셨죠. 인간은 곧 동물이라 주장하시면서요. 헌데 한편으로 이는 제게 진보를 믿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들리는데, 여기서 저는 짙은 허무주의적 계기를 읽었습니다(니체, 들뢰즈 혹은 리오타르에 심취하셨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백현진님이 쓰시는 적잖은 가사들에서도 그런 인상을 받죠. 허무감이 실은 역설적으로 백현진님의 작업을 추동하는 계기가 된 듯합니다. 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2014년부터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로 지속음, 앰비언트 사운드를 다루는 일에 관심을 두어오셨습니다. 50hz-100hz 사이의 중저음을 조작하며, 정신이 차분해지고 맑아지는 것을 느끼신다고 하셨죠.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상대하는 미술은, 작업의 각 요소들이 독해해야할 시각적 정보이자 도상으로서 제시됨으로써 인식론의 수준에서 쉽게 매개되곤 하지만, 사운드는 즉각적인 감각으로 제 귀에 내리꽂히는 것이라 언어적으로 매개되기 어렵습니다. 이건 사운드의 한계이자 강점이기도 하겠지요. 아무튼 보이는 것을 설명하긴 쉽지만 들리는 것을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론 사운드는 인간에게 직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인식 이전의 무언가에 관해 알려줍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곧 동물이라 주장하는 백현진님의 성향과도 아주 잘 맞을 것이라고, 백현진님께서 신디사이저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필연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문학동네 2016년 여름호에 수록된 남다은씨의 백현진 작가론에서도 그런 부분이 언급됩니다). 지금도 그런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시다면, 저음이 주는 어떤 측면이 그런 명상의 효과를 준다고 생각하시는지, 그리고 왜 저음의 앰비언트 사운드에 주목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2001년부터 쭉 이런 저런 영화들에서 배역을 맡아오셨습니다(특종: 량첸살인기: 김 작가 역/ 은교: 평론가 역/북촌방향: 작곡가 역). 단편영화를 직접 제작하시기도 하셨죠. 헌데 영화 평론가 남다은 씨도 지적하신바 있지만 제게 흥미로운 것은, 맡으신 배역들이 전부 작가, 평론가, 교수, 감독등이고, “예술가가 아니라 예술가인 체하는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은 대체로 지극히 속물적이고 어리석은 인물들이죠. 이런 배역을 골라 맡으셨다는 인상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백현진님의 지론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 선호하는 배역이 있으신지, 있다면 그 이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사실 분과 학문이 성립된 이후로 예술 또한 총체성을 잃고 분절되고, 또 독립적으로 고착화되어오지 않았습니까. 어떤 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를 사물화혹은 물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텐데요, 그게 한편으론 백현진님께서 싫어하시는 근대화의 과정이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백현진 님은 적어도 각 예술 영역을 고착화 하는 데에서는 벗어나 계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전방위 한 이력을 지니신 만큼, 자기 자신의 작업 기반이 끊임없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는 것, 혹은 고정된 정박점을 갖지 않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계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 염두에 두는 바가 있으신지요.


*일관된 작품 세계를 구축하지 않는 것 자체가 결국 백현진 님의 작품 세계라는 인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현진님의 작업에서 변하지 않는, 일관되게 염두에 두어왔던 상수(불변항)가 혹시 있을까요?

 

*시간이 남는 김에 기술적인 질문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워낙 많은 일들을 하셨지만, 범예술 계통의 직종들이 으레 그렇듯, 생계를 꾸리는 데에 썩 큰 도움이 되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것들을 포기해 오셨는지, 작업과 노동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으려 해오셨는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