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alogue

율리안 헤첼, <베네펙토리>(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젝트)에 관한 대화

by 정강산 2018. 5. 26.

율리안 헤첼, <베네펙토리>에 관한 대화


맹준규

정강산

(null)

 

:

율리안 헤첼의 작업 <베네팩토리>는 전유, 패러디의 방법론이 그 가장 극한적 수준에서 실현된 사례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관건이 되는 것은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부채감과 죄의식을 암시하는, 적출된 지방 덩어리가 비누로 가공되어 제 1세계에서 판매되고, 그 이윤의 일부가 제 3세계- 발전도상국의 시민들에게 기부되는 구조 자체의 아이러니함이죠. 그때 비누는 제 1세계 시민들의 부채감을 '씻어주는' 면죄부이자, 자본주의의 불균등 발전을 가리키는 오브제이며, 현재의 불평등을 유지하는데에 공모하는 상품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헤첼이 그 모든 것을 대자적인 수준에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모든 이들이 그러한 뉘앙스를 독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아쉽습니다만. '죄책감은 곧 생산적인 에너지'라 너스레를 떨며 그것을 이윤의 동기로 제안하는 것은 자기 패러디로 시작하여 자본주의에서 저항의 아포리아를 사고하게 만들죠. 동시대 예술에서 현존이 실체화되고 있음을 건드리는 부분이나, 렉쳐 퍼포먼스의 저렴한 경제성에 기대 자신의 작업을 구성했음을 밝히는 부분에서 특히, 그 모든 패러디가 이미 의식적인 수준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알 수 있지요. 결과적으로 그의 작업이 공모의 수준을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런 의식적 수준에서의 반성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어쨌든 그 결과물들이 렉쳐라는 형식으로 제시됐는데요. 헤첼이 비누를 만듦으로써 그 과정을 전유했다면, 그 모두를 보여주는 것 자체는 또 별개의 문제일 것 같습니다. 그것이 렉쳐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

바로 그 점에서 흥미롭게 본 것이 있습니다. 헤첼의 작업 컨셉은 언뜻 지방비누를 만들어 팔고, 기부를 행하는데에 있는 데에서 이미 완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헤첼 자신이 <베네팩토리>의 도입부에서 말하길, 자신의 작업에서 렉쳐는 주변적이고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사실 헤첼의 작업이 체제와 공모하지 않게 해주는 결정적인 ''은 결국 렉쳐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아무리 컨템포러리 아트가 관념화되었다해도 결국 오브제와 사건들의 배치의 수준에서 전개되는 작업은, 언어와 매개됨으로써 자신의 정박지를 찾기 때문입니다. 만약 렉쳐에서 그러한 극단적인 대자적 수준의 자기반성이 전개되지 않았다면, 작업의 첫 번째 공정인 비누제작과 기부 자체는 실로 '실용적인 박애주의' 및 체제와 공모하는 것이 되었더라도 놀랍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려 헤첼의 렉쳐는 작업의 구성에 핵심적인 요소이기도 한 것이죠. 우리는 어쩌면 여기서 '모든 예술은 해석학에 매개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끌어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헤첼의 작업에 대한 평가는 그러한 대자적 실천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혹은 그것이 잘 되었는지에 관한 것이 되겠군요. 저는 그런 관점에서 전용의 방식들이 갖는 몇 가지 특성들이 눈에 걸립니다. 헤첼의 렉쳐에서는 관객들이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지점들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전용의 렉쳐가 그러한 유머러스한 내용들을 삽입해야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항상 모든 관객이 웃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헤첼이 유머를 포함하지 않고 진지한 것처럼 완벽히 연기를 해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의 렉쳐가 그 자신이 벌였던 모든 행위들을 자기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관객의 수는 훨씬 적어질 것입니다. 혹은 그러한 비판의 역할은 작가 자신이 아닌 비평가로 이행돼 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헤첼은 비평이라는 측면을 작가 자신의 작품에 묶어두기 위해 필연적으로 유머나 비약과 같은 전용의 외부요소를 작업에 포함시켰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제가 고심하게 되는 부분은 이러한 유머가 위와 같은 연유로 인해 작중에서 매번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는 전용의 방식을 활용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 것입니다. 이러한 방편에 기대지 않는 전용의 표현이란 불가능한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근래 전용이라는 성격 하에 수행되고 있는 예술적 실천들을 전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달리 말해 관객이 그것이 전용이라는 것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그러한 예술적 실천들은 전용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관객들의 그런 능력 자체가 점차 약화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퍼포머가 그 자신의 수행이 예술적 행위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유머러스한 요소를 삽입합니다. 이는 자신이 그 모든 수행들을 자조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머에 웃을 수 있는 관객들 또한 점차 사라져 갑니다. 그러면 예술가는 다시금 강한 유머나 장치들을 삽입하고.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죠.

 

:

말씀하신대로 잘 이루어진 패러디는 부러 유머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가능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웃음이 작업 외적인 수준에서 레토릭에 머무는 경우가 분명히 있고, 이는 패러디의 통속화에 가깝겠지요. 하지만 러시아의 문예학자 미하일 바흐찐이 언급했듯, 해학과 웃음은 지배와 선험에 대항하는 유효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첼이 웃음을 유발하는 지점이 단지 자신의 비평적 스탠스를 보충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작업자체의 구성에서 연원한 것이라기보다 패러디가 작업의 형식과 유기적으로 관계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즉 패러디가 불가능해진 시점에서 패러디를 고수하는 것은, 이미 작업의 내적 형식자체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웃음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웃음으로, 그 형식 자체에 대해 분절되고 무관심한 웃음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겠죠. 허나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 불가능해진 패러디의 조건 속에서 감수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패러디 자체가 실체화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헤첼의 작업을 오늘날 유효한 패러디로 간주했을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작업이 예술의 자기의식적 반성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그런 것이었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패러디의 제스쳐를 유효하게 하는 것은 외려 높은 수준의 자기인식인 것이지요. 자신의 행위의 효과를 명확히 앎으로써, 그는 자본주의와 가장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기부와 감정(죄책감)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작동시키는 기제로서 재전유되는지를 보여줍니다.

 

:

어찌되었건 간에 헤첼이 보여준 자본의 특정한 순환구조는 상당히 예리하다고 평할 만 하겠죠. 물론 제가 헤첼이 그것을 아주 정확히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투정 많은 관객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헤첼의 작업이 우리에게 혹은 관객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가지게 될까요? 그의 비누 앞으로 손을 씻으러 줄을 이었던 관객들은 저마다 다른 표정과 생각 그리고 기분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모르는 것을 그대로 모르게 됐을 수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알고 있던 것을 그대로 더욱 잘 알게 됐을 수 있죠. 한편 그 둘을 오갔던 관객들이 없지야 않았겠습니다만, 모르긴 몰라도 충분치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헤첼의 농담을 들으며 웃고, 그것이 농담임을 모르는 관객들이 있다는 것을 또한 아이러니하게 여기며 웃음 지을 수 있지만 이러한 상이한 두 결과가 갖는 역설이 오늘날 자본주의를 전용으로 비판하는 것에 관한 심각한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헤첼이 그러한 단서로의 계기를 제공했다면, 그의 작업은 부분을 넘어 전적으로까지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직도 허기가 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작품에 관해 좋은 대화를 나누게 되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