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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전시코멘트

by 정강산 2018. 7. 6.

정강산

 

<미러의 미러의 미러>

 

인플레이션 상태에 처한 페미니즘의 제문제에 개입하는- 열화된 세대 특정적 방법론을 작동시킨 전시로 읽혔습니다. 파편화된 언어, 이미지, 기호들을 통해 형식화된 작업들은, 현재 담론이 유통되는 우세적 공간이 복제가능한 얇은 층위의 클리셰들과 가상에 근거한다는 점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본 전시가 유효한(현실적인) 주장으로 반향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지만, 동시에 그 한계 또한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사의 반사에 대한 또 한번의 반사가 아니라, 미러링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거울의 무한한 반사작용으로부터 벗어난 사회적/미학적 개입은 어떤 방식으로 형식화 될 수 있을까요. 다른 한편으로, 빈곤한 이미지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처한 부정적인 조건으로부터 이미지를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Noah>

작가의 의도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이 전시는 미지의 대륙에 대한 환상과 튤립 바이러스 등에 관한 역사학적 단상을 알레고리로 삼아 전체성, 동일성에 대한 비판의 방식을 탐구한다는 작업들로 채워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명확한 쓰임새를 갖게 될, 그러나 지금은 비어있는 유휴 공간을 전시의 장소로 사용했다는 것은- 고정된 것, 따라서 정태적이고 선험적인 동일성과 체계로부터 벗어나 유동하는 가능성에 관한 유비를 암시하려는 것이었겠죠. 헌데 사운드 퍼포먼스, 다큐멘터리식의 영상, 가변 설치, 이 모든 게 유휴 공간에서 벌어진다는 점은, 우연성과 사라짐, 사건, 유목 등 동시대 예술에서 유행하는 여러 형식들이 다소 산만하게 엮여있다는 인상을 줬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작가가 들뢰즈 및 일단의 포스트구조주의 정치철학과 생기론에 관해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점은 도록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헌데 현학적인 수사와 개념으로 점철된 스테이트먼트가 의미 있는 작업의 형식으로 잘 드러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사실 전시 전체의 핵심이 되는 구멍을 일종의 파열과 균열에 대한 메타포로 가져가려한다는 컨셉은 아주 명확한 것인데, 그런 명료함과 단순함에 저항하기 위해 과도한 사변을 외삽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동일성에 구멍을 내고 파열을 만들어낸다는 작가의 당위가 와 닿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사변의 과잉이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느껴졌고, 따라서 작업의 전개 또한 추상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동일성은 현실 속에서 자아, 성별, 인종, 국가, 종교, 화폐 등으로 체화됩니다. 동일성이라는 동일성은 없기 때문에, 동일성은 항상 맥락 속에서 자신의 구체적인 육신을 갖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동일성에 대한 비판은, 적어도 철학자들이 아닌 한에서야 굳이 동일성 비판이라 명시하지 않고서도 자아, 성별, 인종, 국가, 종교, 화폐 등을 비판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것입니다. 헌데 본 전시는 파열을 가리키는 메타포 이외에는 그에 대해 암시하는 바가 전무했던 기억이라, 동일성이라는 동일성, 즉 구체적 동일성이 아니라 추상적 동일성을 비판하고 있다는, 그리하여 동일성에 대한 설익은 답변을 내놓는 전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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