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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들뢰즈에 대한 노트

by 정강산 2018. 7. 28.

자동적 재인과 주의 깊은 재인 간의 베르그송의 구분을 운동-이미지('지각-변용-운동'의 과정으로 요약되는; 헌데 변용이 일어난 순간 이미 그것은 자동적 재인과 거리를 두는 것이 되지 않는가? 들뢰즈에게 변용이란 긍정적이며 생산적인 개념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각-변용-운동'이라는 정리는 적절한 정의인가?)와 시간-이미지에 유비하는 들뢰즈의 논의는 영화에서 시간성이 현현하는 방식의 전환을 통해 주체성의 발생을 이해하는데에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인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도둑>(1948)을 시작으로, [시네마 2]에서 검토되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유럽 1951년>(1952)). 운동-이미지에서 동일성은 전제되어 있으며, 완결된 체계로서 드러나지만, 시간-이미지에서 동일성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해체된다. 이때 '운동'과 '시간'이라는 항을 대비시키는 것은 베르그송의 논의와 마르크스의 논의 어딘가에 걸쳐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그에게 비어 있는 것은 정치경제학, 혹은 객관적인 사회체계로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총체성이다. 그의 말대로 지각과 행동 사이의 자동적인 인과의 거리를 벌려놓을 때, 감각과 행위 사이의 소여의 단절이 수행되고, 들뢰즈 식 표현으로 "제1의 주체성"은 새로운 주체성으로 대체된다. 그러한 과정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이데올로기론에 대한 나름의 수긍과 비판을 전제로 한다. 혹은 총체성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식이라는 루카치식 테제에서 노동계급에게 진리를 인식할 전일적인 시점을 보장해주는 위험을 제거한, 현상학적 묘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논의는 그러한 고전적인 입장들로부터의 후퇴처럼 독해될 수도 있다. 시간-이미지에서 관측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이 발생할 수 있는 (늘 성공하는 것 만은 아닌)주의깊은 재인은, 결국 저항세력이 자유주의에, 혹은 파시즘에 굴복하는 과정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상적이다. 문제는 운동-이미지와 조응하는 자동적 재인의 물질적인 조건은 현실의, 실재적이고 객관적인 사회체계이자 국가이며, 화폐라는 사실이다. 동일성에 대한 비판이 유일하게 구체성을 띄게 되는 순간은 바로 그것이 현실의 동일성의 체계들과 연동되어 이해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미지'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선험적인 단언이라기보다, 현실의 동일성을 개념적으로 규정하고 비판하는 일이다. 허나 들뢰즈의 논의에서 이러한 공간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토대에 대한 염두가 빠져 있는 것은 포스트 주의자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들뢰즈가 [시네마2]에서 주체성을 설명하는 방식, 혹은 헤겔에 맞서 차이를 실체화시키는 방식은 랑시에르가 정치[주체화]를 간헐적인 순간들과 연결시킨 방식 및 플라톤에 맞서 감각의 재분배를 실체화시키는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물론 이러한 논의들은 부분적으로 소여의 체계 너머의 주체를 그려보여주는 미덕이 있다. 허나 문제는 정치란 언제나 소여의 체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동일성을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헤겔은 숱한 포스트주의자들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덕목, 즉 체계에 대한 내재적 파악을 갖도록 해준다.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이고, 이성적인 것이 현실적이라는 그의 유명한 표현이 시사하듯- 사회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은 현실의 조직 및 체계와 분리하여 사고 될 수 없는 일이다. 그에게 가족, 시민사회, 국가로 파악된 이러한 사회적 기관들은, 마르크스에 이르러 노동자들의 정치조직으로 전유되었고, 레닌에 이르러 '당'으로서 구체화 되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것은- 여러 부침에도 불구하고 생산양식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을 통해 전례없는 변화를 실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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