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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형상-픽션'론에 대한 노트

by 정강산 2018. 7. 29.

프랭크 커모드: 영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16, 17세기 영문학의 대가인 프랭크 커모드는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으며 컬럼비아, 하버드, 예일 대학 등에서 교수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의 명예회원이며 영국아카데미, 왕립문학학회, 미국인 문학협회, 프랑스 인문학회의 회원이기도 한 그는 1991년에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로맨틱 이미지: 종말의 의미Romantic Image: The Sense of an Ending>, <관심의 형식Forms of Attention>,<비밀의 기원The Genesis of Secrecy>, <역사와 가치History and Value>, <시의 열정An Appetite for Poetry>, <셰익스피어의 언어Shakespeare's Language>, 자서전<내 마음의 이야기Pieces of My Mind>등이 있다.


프랭크 커모드의 국내 번역상황: 1993년 문지에서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을 번역해 낸 적이 있으나, 현재 구매 가능한 저작은 인터뷰 대담집을 제외하고 국내 단행본은 󰡔셰익스피어의 시대󰡕(을유문화사) 이외엔 없다. 짧은 아티클로는 다른 저자들과 엔솔로지 형식으로 엮인 󰡔종말론󰡕(문학과지성사)에 “종말을 기다리며”라는 에세이가 번역되어 있고, 외국문학 29호에 “폴 드 만의 심연”이 번역되어 있다.



이중성의 형식으로서의 형상-픽션


유운성의 본 텍스트(“형상적 픽션을 향하여-커모드, 아우어바흐, 그리고 영화”(2017))는 “이론의 시학, 오늘날 이론의 의미와 의의”라는 대주제에 맞춰 프랭크 커모드의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 허구 이론의 연구(The Sense of an Ending)󰡕(1967)를 논한다. 이때 종말의식은 “종결에 대한 감각”, 즉 “무언가가 끝나리라는 느낌이나 인식”을 뜻한다.(제목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출판사의 판단 하에 커모드가 레퍼런스로 삼았던 조르주 풀레의 저작 󰡔Études sur le temps humain󰡕(1949) 󰡔인간의 시간: 프랑스 작가를 통한 연구󰡕(1998)가 추가되었다.) 


유운성은 “커모드에게 있어 픽션이란 이러한 느낌이나 인식을 구조화 하는 방식”이라 요약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커모드는 픽션의 기본구조를 ‘똑-딱’이라는 분절된 시간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사실상 연속적인 흐름으로서의 시간은 분절적 계기를 지니지 않으나 인간은 그것을 분절하고, 그 분절에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모든 픽션(이때의 “픽션”이란 ‘서사’로 바꾸어 부를 수 있을 것이다)은 ‘종결에 대한 감각’을 구조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운성은 “픽션은 크로노스(물리적 시간)를 카이로스(의미화된 시간)로 전환시키는 기술”이라 정리한다.(희랍어인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는 모두 ‘시’를 나타내는데, 이는 각각 ‘시각’, ‘시간’ 정도로 번역된다. 전자가 의미화 되지 않은, 주어진 자연적 시간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의미화 된, 문화의 영역으로 분절된 시간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에 더해, 특정한 대상을 자연적 측면과 인간적 계기에서 나누어 구분하는 또 다른 희랍어 태생의 개념(ζωή/βίος)을 함께 논의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념적 구분을 살펴보는 것은 동일성의 이중성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헤겔/아도르노, 헤겔/니체,들뢰즈). 요컨대 동일성은 억압이지만 동시에 생산적인 힘이며, 정치의 공간이기도 하다. 한편 이러한 시간의 분절을 철학적 수준에서 비판하는 저작으로는 베르그송의 작업(󰡔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과 들뢰즈의 작업(󰡔베르그송주의󰡕, 󰡔시네마I󰡕, 󰡔시네마II󰡕)을 참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자 모두에서 이는 동일성, 이데올로기 등과 관련되며 부정적으로 파악된다.) 


유운성은 본인이 영감을 받고 참조하려는 부분은 커모드가 현대적 픽션을 정의하는 대목임을 언급하며 이를 간략히 소개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현대적 픽션은, 형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지 않으며, 우연을 어떻게 필연으로 만들 것인지- 즉 연속성을 어떻게 형식으로 분절할 수 있는지(“형식과 우연의 조우”)를 되묻는 것을 그 골자로 한다.(이 대목에서 유운성의 요약이 명확하지 못했기에, 나는 차리리 현대적 픽션에 대한 커모드의 정의를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구분하는 들뢰즈의 도식에 비추어 이해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 생각한다. 허나 커모드가 논하는 ‘현대적 픽션’이 17-18세기 이후 넓은 의미의 근대의 문학을 포함하는 것인지, 20세기 이후의 모더니즘 문학에 해당되는 것인지는 재고해볼 문제다.) 커모드에게 픽션이란 곧 형식이고, 이때 형식은 운명, 즉 필연과 조응한다[형식 및 픽션에서 (베르그송이라면 ‘습관적 재인’, ‘공간화된 시간’이라 불렀을)필연의 계기를 강조하는 이런 논의는 문학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조해주기에, 작품에 대한 징후적 독해 및 정신분석학적 독해의 정당성을 예증하는 논거로 가져가기에 좋을 것이다]. 


이어 유운성은 어떤 우연(연속)도 형식화 시키는, 신화로 퇴행한 열화된 픽션은 “안정의 중개자”인 반면, 하나의 모델로서 스스로의 전복을 허하는 픽션은 “변동의 중개자”라며, 커모드의 논의를 요약한다(이는 각각 ‘이데올로기, 치안, 영토화/구성된 권력, 정치, 탈영토화’의 항으로 구분지어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어떤 픽션은 이데올로기에 머물지만, 어떤 픽션은 소여의 이데올로기를 허문다. 허나 그 뒤 검증이 필요한 가설과 검증이 불필요한 픽션을 구분하며 이를 통해 나치즘을 비평하는 대목은 너무 구리다. 나치즘은 “픽션의 이러한 속성을 간과한 데서 초래된” 것이 아니다. 그런 식의 평은 나치즘에 대한 추상적인, 현상학적인 수준에 머물 뿐이라 안하는 것이 낫다.).


결국 커모드에게 픽션이란 “결코 그런 때는 오지 않겠지만, ‘~처럼(as)’과 ‘~이다(is)’가 동일 한 것이 될 때까지” 변용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이는 곧 현실과 환상, 우연과 필연, 연속과 분절, 비동일성과 동일성 사이에서 운동하는 것이 바로 픽션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대목은 유운성이 이 글에서 성기게나마 개념화하려하는 ‘형상-픽션(figure-fiction)’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기에, 우리는 이러한 픽션의 정의가 그의 논의 과정 및 결론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는지를 유념하며 나머지 글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어 제안되는 것은 아우어바흐의 논문[“피구라(Figura)”(1938)]에서 등장한, 기독교적 전통을 두고 언급된 ‘형상적 해석(figural interpretation)’에 대한 논의다. 


“형상적 해석은 두 개의 사건 혹은 두 명의 사람persons 사이에 관계를 설정하는데, 이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자신뿐 아니라 두 번째 것도 의미화하며, 두 번째 것은 첫 번째 것을 포함하거나 충족시킨다. 형상의 두 극은 시간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둘 모두 실제의 사건이나 인물 figures로서 시간 내부에, 역사적 삶의 흐름의 내부에 있다. 그 두 사람 혹은 두 사건에 대한 이해는 정신적인 행위이나, 이러한 정신적 행위는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구체적 사건들을 다루지 개념이나 추상을 다루지 않는다.”


유운성에 따르면 형상적 해석(이는 특히 성경에서 등장하는 인물 혹은 아이콘(icon) 간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 제출되었을 것이다)에 대한 이러한 아우어바흐의 정의는 커모드의 픽션에 대한 정의와 상당부분 겹친다. 즉 인물의 구조와 서사의 구조는 유비되는 것이다(이는 프로이트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과성 및 개인과 사회의 모순을 설명하는 수준으로까지 격상되지 않으면 파편적인 진술에 그친다. 유운성이 이러한 유비에 주목했다는 점은, 그가 무의식적으로나마 천착했던 지점이 무엇인지는 이해가 되는 대목이지만, 그것은 인물과 서사, 인간과 사회의 동형성을 지적하는 작업이 되었어야지, ‘형상-픽션’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실체화되어선 곤란하지 않을까. 요컨대 유비에서 착안한 개념의 나열은 ‘인간-세계’라는 개념이 허무맹랑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무맹랑하다). 유운성의 구분에서 픽션은 이해, 형상은 인물에 조응하기에,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사건이나 인물로서의 형상 자체가 곧 ‘사유의 형식’이 되고 있는 사례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이를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물의 구조가 서사의 구조와 일치하는 사례를 찾는 작업이 될 것이다. 그는 “변화가 없고 항구적인 형식”이 “현상적이고 세속적인 역사성과 조우하는” 장이 바로 ‘형상적 리얼리즘’이며, 이를 가능한 픽션의 준거로 삼자고 말하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모더니즘적 충동을 의미하는 것인지, 좁은 의미의 형식주의를 말하는 것인지, 문예론에서 초월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일치를 유비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사실 이어 나열되는 영화들[카아로스타미의 코케 3부작(<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6),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1992), <올리브 나무 사이로>(1994)),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2000) 및 벤투라 연작]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형상-픽션’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예증하는지는 알 수 없다(영화를 본 사람이 있다면 설명을 해주면 좋을 것 같다). “형상-픽션이란 불확정성이 붕괴되거나 수축되지 않은 이중성duality의 형식”이며, “플롯이라는 형식 내부에 자리한 이중성의 형식으로서 그 불확정성으로 인해 형식의 안정성을 슬며시 흔드는 ‘물질적 유령’이라 이해해도” 좋다는 진술은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에 나름의 생각을 덧붙이자면, 유운성의 ‘형상-픽션적 영화’를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어는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is와 as 사이에서 존재론적으로 줄타기를 하는, 즉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운동하는 ‘애매한 영화’, 혹은 커모드적 의미에서의 종결에 대한 감각을 보존하는 영화. 


이런 맥락에서 유운성은 ‘~이다’와 ‘~처럼’의 양 항에서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순간 픽션은 수축된다고 얘기하며, 페드로 코스타의 영화에서 보이는 플롯의 생략을 불확정성을 플롯과 절합하기 위한 시도라 평하고- 이것이 필연으로서의 형식 내부에 우연을 도입하는 형상-픽션의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다. 즉 관객의 이성으로 완전히 투명하게 드러나는 플롯은 형상-픽션이 아니며, 어떤 이해도 차단하는 플롯 또한 형상-픽션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서사가 관객에게 온전한 동일성을 취하게 되는 순간 붕괴되는 일시적이고 간헐적인 계기를 지닌다. 즉 [형상-픽션적 영화는]“많은 부분을 감춘 채로 생략을 통해 열린 미지의 영역을 지탱하는 불확정적 존재로 남는 한 지속될 것이다. 물론 우리는 미지로 남아 있는 그 영역에 대해 끊임없이 탐문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픽션의 변용을 자극할 것이다.”(이론으로서 전개되기에 너무나 성긴 감이 있지만, 유운성의 논의가 포스트-주의의 계보에서 영화를 파악하는 방식과 친화적일 거란 짐작은 해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논의의 합리적 핵심은 들뢰즈의 영토화와 탈영토화, 주체론, 동일성에 대한 파악과 상당부분 겹친다. 고정된 영토로부터의 탈주, 혹은 소여의 홈 패인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접속 등등. 현대물리학에서 근거를 끌어오는 커모드의 논의를 적극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독해될 수 있다. 사실 커모드 자체가 포스트구조주의 및 포스트모더니즘에 친화적이기도 했다고 하니, 유운성의 근거가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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