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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alogue

강신대 작가 인터뷰

by 정강산 2018. 7. 6.

(건포도넷 게시를 위해 작성된 인터뷰 입니다.)


강신대 작가는 2015년부터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사월의 동행>, <컬랩스>, <격변! 미지로부터 코레아>, <과거의 점점 더 깊은 층> 등의 기획전을 통해 작업을 발표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관되게 오늘날의 영상 및 사진 이미지 자체의 위상을 탐구하는 작업을 전개해왔는데, 이는 곧 시각예술의 정치적 조건에 대한 질문과 관련된다. 본 인터뷰는 강신대 작가의 작업들에서 볼 수 있는 특유의 이미지론과 관련된 세부적인 쟁점을 되짚으며, ‘스펙터클’의 제문제와 포개어지는 질문들을 소개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인터뷰는 안산 모처의 카페에서 4시간 가량 진행되었다.


인터뷰일시: 4월 21일

인터뷰어: 안예슬, 안준형, 정강산





A: 먼저  작업에 관한 질문입니다. 후쿠시마와 세월호 이후에 재난과 파국은 오늘날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시급히 다루어져야 할 문제거리이자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보면서 재난팔이와 같은 식으로 거칠게 힐난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한 비평들을 어떻게든 수용해본다면 오늘날에는 재난과 파국에 대해서 어떤 편집증적인 윤리적 태도가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강신대 작가님 또한 작업에서 재난과 파국을 주요한 주제로 다루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작가님의 재난과 파국에 대한 생각과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실 수 있나요.


강신대: 저같은 경우에는 재난이나 파국과 관련된 전시에 많이 참여했었습니다. 하지만 재난이나 파국과 같은 현상에 천착했다기보다, 그것들이 이미지로 소비되는 방식에 관한 작업을 진행했었습니다. 오히려 재난이나 파국에 대한 전시나 기획에 참여함으로써 그 전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려 했던 것이죠.


작업을 진행할 때 가장 영향을 줬던 건, 그 당시에 재난과 파국이라는 것을 나 자신부터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다는 걸 파악하는 것이었어요. ‘재난과 파국’에 대해서 예술가들, 혹은 굳이 예술가들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이미지로서 다시 재생산해내는 구조들을 텍스트로서 파악하기 이전에, 미디어를 통해서 이미지를 소비하는 제 자신을 우선 발견한 거죠.


그때 그런 작업들을 하게 된 계기를 설명할 때 항상 이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십초, 정치적 행동주의의 예술가들이 연대를 외치면서 페이스북에 계속해서, 실시간으로 동영상을 공유할때 그걸 내가 어떻게 보게 되느냐라는 이야기입니다. 이십초의 짧은 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울컥하고, “연대해야지”라며 다짐하는 찰나 바로 다음 동영상으로 스킵되면서 케이팝 뮤직비디오가 재생되면 10초전에 봤었떤 재난, 파국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려요 케이팝하고 동일한, 평평한 이미지로 나한테 제시 되어버리는 거에요. 그것이 당시에 미술이, 재난과 파국이라는 현상들을 이미지로 재생산하는 방식이었고, 또한 미디어를 통해 지금 우리에게 제시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0416실시간’이나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와 같은 작업을 하게 된거죠.



A:  작업내에서 형식으로 주로 사용했던 ‘알고리즘’이나 ‘현대 미디어 기술매체’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습니다. ‘루드비코’ 작업에서부터 ‘#DMZ’, ‘4월의 동행’에서 있었던 <0416실시간>, 컬랩스에서 있었던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이르기 까지 작가님의 주된 관심은 인터넷과 스크린을 통해 변화된 시지각적 환경이 야기하는 관조나 소외의 문제에 걸쳐있는데, 이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진 이미지가 어떻게 특정한 알고리즘을 통해 매개되고 스펙타클이 심화되는 과정에 공모하는지에 관해 주목해왔다 고도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가상이 실재가 되었음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며 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변화했음을 주장하는 경향들도 있는데, 어떤 면에서는 그게 대세이기도 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스펙타클 비판에 주목하는 당위는 무엇이고, 그러한 비인기 종목에 천착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강신대: 현실과 가상이 완전히 변화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작업의 경향들을 대세라고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그리고 제가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비인기 주제라고 이야기를 하셨는데. 근데 그들이 보고 있는 현실이 그렇게 보여지기 때문에 가상이 실재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저와, 그러니까 ‘비인기 주제를 다루는’ 저와 ‘대세적인 작업을 하는’ 그들이 보고있는 현상은 동일해요. 하지만 다른 게 있다면, 그것을 현상학적으로 파악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의 어떤 부정성으로서 파악할 것인지, 그런 작업의 방식에서 나오는 차이라고 생각해요. 분명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현상 자체가 변화하고 있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게임적 리얼리티’가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문제들이 있죠. 흔히 우리가 변화된 자본주의를 이야기할 때 ‘게임적 리얼리티’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죠. 근데 그게 ‘게임’ 이전에 현실에서 드러난단 말이에요. 현상학적으로 파악한다면. 그들과 제가 바라보고 있는 현상 자체는 다를 게 없어요. 동일한 현상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걸 어떠한 작업 방식으로 풀어내고, 그리고 거기에서 어떻게 비판의 지점들을 파악하고 짚어낼 것이냐의 차이점인 거 같아요.



A:  아까 하셨던 이야기를 참조하자면, 정치적 행동주의 예술가들의 페이스북 동영상을 보고서 바로 케이팝으로 넘어가는 사례를 가지고서 말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게임적인 전환들을 즐기고 있다고 하면 너무 공격적인 해석인 걸까요.


강신대: 즐기고 있다기 보다는 현상학적인 것 아닐까요. 그대로 자기가 본 세계를 서술한다는 방식이겠죠. 즐긴다기 보다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그런 것이잖아요. 예술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도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서술할 것이냐’하는 문제였다고 한다면, 현상학적인 측면이 분명히 있고. 그런 작업 방식들은 지금 새롭게 나타났다기보단 이전에 계속 있어왔던 것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우리가 흔히 세대론 이야기할때도 그렇고, 또 그런 작업들을 다루는 세대들, 즉 ‘IMF이후’ 자신의 시간성을 파악하기 힘든 세대들이 ‘자본주의 리얼리즘’으로 나아가는, 그리고 그것을 그냥 현상학적으로 파악하고 작업에 서술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게 오히려 당연하게 보이기도 해요. 그 이후를 상상하거나 혹은 역사적인 사건 자체의 힌트를 얻는 게 힘들어지니까 말이에요.



A:  오늘 이야기한 것처럼 동일한 오늘날의 현상과 사건들을 한편으로는 긍정하는 작가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님처럼 그것들을 비판적으로, 즉 부정성을 서술할려고 하는 흐름으로 양분할 수 있다면, 작가님이 전시 ‘격변! 미지로부터 코레아’에서부터 진행한 작업 ‘인터네셔널가’ 같은 경우에는 그간의 작업들과 상이한 부분이 있어보였습니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그 안의 비판의 제스쳐가 지금 현재의 상황과 공모하는 지점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업을 보고서 이것 자체를 즐겼었던 이들이 있기도 했었는데, 이러한 반응들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강신대: 저도 이전의 작업하고 달랐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게 지금 이야기하셨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실에 공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런 작업들을 할때 유의하거나 다시 생각해봐야하는 지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정치적이거나 비판적 작업을 할때 말이에요. 이전에 미술계 내에서 했던 작업들이나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작업 경향은, 방금 사용하신 수사들을 따르자면 ‘공세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런 작업들이 나타내는 효과들에 대해서 고민해봐야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그게 직접적으로 정치적으로 보이겠지만 그 정치라는 것이 현실정치를 떠나서, 정말 지금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변화에 대한 힌트를 제공하거나, 아니면 비판적인 계기로서의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인지에 대해선 다시 한번 재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인터내셔널가> 같은 작업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하거든요. 현실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작업들이 과연 정치적인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요. 그리고 그 정치적이라는 작업들이, 작업내에서 직접적으로 그걸  드러내고 제시하려고 하잖아요. 그게 액티비즘으로 보여지기도 할테고, 다양한 방식들이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이 가져다 주는 효과들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하는 의문이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인터내셔널가> 같은 경우는 지금의 이미지에 대한, 또 동시대 이미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흔히 정치적인 어떤 작업들을 할 때 발생하는 오류들, 우리가 역사를 재고할 때 발생하는 오류들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작업인데. 저는 거기에서 오는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하신 것처럼, 그것을 이미지로서 즐기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했지요. 그런데 그런 이미지로써 소비될 때 나타나는 효과 자체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A: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긍정성의 경향들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의미에서인가요?


강신대: 오히려 부정적인 표상을 긍정적으로 제시해 버릴 때 나타나는 효과들인거에요. 긍정성으로 코스프레를 해버리는, 선물포장을 해서, 부정성을 선물 포장을 해서 긍정성으로 제시할 때가 있는거에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디스토피아적인 현상들, 자본주의 내에서의 부정적인 표상들이 생각해보면 긍정성이잖아요.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분명히 잘못 되었고, 또 변화시킬수 있다는 힌트를 거기서 얻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오히려 긍정성이고 유토피아적인 계기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고민들,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작업을 제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게 관객한테 제시되었을 때 혹은 이 전시를 떠나서 이것이 이미지로서 어떻게 소비되는지, 전시 이후에 어떻게 소비되는지 하는 것들도 고민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히 정치적 작업을 한다고 했을 때 놓치거나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제가 인터네셔널가를 그대로 뮤직비디오처럼 포장을 해서 웹에 유통시킨 이유도 그것이거든요. 거기에서 발생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A:  혹시 <인터내셔널가>가 유통되는 과정들도 전시의 형태로 드러나는 건가요?


강신대: 그건 알 수 없는 거에요. 그게 정말 “이제는 인터내셔널가 같은 음악도 힙할 수 있구나”라고 소비를 해버리든. 아니면 ‘이제 인터네셔널가를 이렇게 기억할 수 밖에 없구나’라는 방식으로 읽히든, 혹은 ‘이제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 이렇게 평평하게 시간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제시될 수 밖에 없구나’라고 읽히든, 분명히 각각의 효과들이 존재하고 그 효과들이 나타내는 정치적인 메세지가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런데서 오는 효과들을 기대하는 거죠.



A:  사실 다음 질문이 ‘정치의 긍정적인 계기 같은 건 없을까’같은 거였는데, 이미 충분히 답변이 된 것 같네요.


강신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그 음울하고 종말론적인 것이 한편으론 긍정성이잖아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해요. 정치적 행동주의의 작업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들이 있는데, 거기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이 있고, 그것을 이제는 거의 다 알고 있잖아요. 왜냐하면 이게 정말 ‘정치적 행동주의’로서 미술관에 들어왔다는 건, ‘정치적 행동주의’라는게 하나의 경향이자 장르라는 이야기 이거든요. 그냥 형식인 거예요, 비판의 제스쳐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정치적인’ 작업을 할 때, 그걸 돌파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지금은요.


그래서 오히려 제가 미술관에 들어가서 이런 작업을 하는게, 그렇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가 되요.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제시가 되는데, 정치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업으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는거죠.


 

A:  오히려 예술안에서 ‘정치적 행동주의’가 과잉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효과이기도 하겠네요. 아무튼, 최근에는 아무래도 재난이나 파국에 관한 관심이 진정이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정세적으로요. 말이 웃기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주제나 형식들을 찾아야 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작가님이 정치적인 작가이기 때문에, 재난이나 파국과 같은, 어느정도 오늘날의 정세나 경향과 연관되어있었다고 한다면. 또다시 변화되는 경향이나 정세에 대해서, 거창하게 말하자면 현재 세계의 정세에 대해서 특별히 신경쓰시는 부분이 있나요.


강신대: 흔히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작업들을 하는, 그렇게 분류되는 작가들과 저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저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현상에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계기 혹은 그 문화가 파생시키는 새로운 감각을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작업으로 옮겨가는 것에서 작업을 시작한다는 걸 얘기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대부분 지금 까지 있었던 작업들이 거의 다 그랬고. <파국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를 예로 들어보면, 슬럼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다가 그런 작업이 나온 건 아니었어요.



A:  그럼 파국이나 슬럼 자체에 대한 작업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식론적 태도?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작업이었던 건가요.


강신대: 네, 그렇기 때문에, 딱히 현실정치나 세계정세에 대해서 신경쓰면서 작업의 아이디어로 사용하려고 노력을 하진 않아요.



A: 매체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런 정세나 특정한 사건들이 말이에요.


강신대: 그럴 수 있죠. 후쿠시마도 그렇고 세월호도 그렇고 어떠한 이미지로서 혹은 스펙터클로 제시되는 현상이 존재한다면 그땐 그런 작업들도 할 수 있겠죠. 근데 뭐 특별히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A: 그렇다면 작가님이 최근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들이 있나요.


강신대: 최근엔 작업보다는 토크를 많이 하게 되면서 ‘예술가 생존담론’도 그렇고, 제가 약간 특이한 포지션인 것 같아요. 신생공간 관련된 작가들하고 엮이지도 않고, 정치적인 행동주의 작가들과도 엮이지도 않고, 세대론적으로도 뭉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 그들을 일종의 텍스트로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새로운 계기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런 고민들을 해요. 최근 ‘예술가생존담론’과 관련하여 토크에 참여하면서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건데, 한창 미술계 내에서 모든 학술대회를 가면 정동이 한창 ‘핫한’ 담론으로 대두될 때가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면 정동을 가장 잘 표현해낸 게, 그것을 잘 제시하는 게 SNS같은 거잖아요. 정동엔클로져 라고 표현하는 것 말이죠. 우리가 무엇에, 어떤 감정에 동일시되고, 어떤 것을 긍정하고, 내 취향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것은 페이스북이 가지고 있는 알고리즘이잖아요. 그 이후에 ‘플랫폼자본주의’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엔 ‘공유경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죠. 한창 미술계 내에서 ‘공유’가 화두였었잖아요.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거나 예술가들이 직접적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사물이나 생산수단 같은 것을 주변사람들이나 지인들과 공유하면서 말이에요. 그때 공유경제자체가 자본주의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모델로 긍정되는 계기들이 생기고, 많은 이들이 그런 작업을 하기도 하면서, 예술이 그것을 즉각즉각 수용하는 방식들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공유경제라는 게 사실상 ‘플랫폼자본주의’ 단계의 하나였고, 지금은 그게 부정성으로 제시되죠. 최근 몇 년을 보면, 자본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부정적인 방식의 표상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미술이 계속해서 긍정적인 것으로 소개하는 경향들이 지금껏 있었고.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이 최근에 있어요. 최근에 장난스럽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연구자들의 ‘반지성주의’같은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유행을 따라가는 것도 그렇고,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자체가 어떤 정형화된 모델이 아니라 계속해서 변화해 가고 있는데, 그런 변화되는 것에서의 부정성을 곧바로 가능성으로 파악하는 계기들이 계속해서 있었고, 그런 것들이 미술 내에서 즉각즉각 새로운 담론으로 제시되고 소비되는 방식들에 대해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죠. 오히려 냉소주의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건 지성주의의 가면을 쓴 반지성주의가 아닌가 하는 거죠. 생각해보면 몇 년 전에 이게 정치적인 작업으로 읽혔던 작업인데 지금보면 굉장히 신자유주의적인 작업으로 읽힌단 말이에요. 그런 것들에 대한 고민들이 최근에 생각하는 것들이에요.



A: 레퍼런스로 삼는 문헌들이나 공부하는 커리큘럼이 있으실텐데 주로 어떤 자원들을 바탕으로 작업을 진행해나가시나요.


강신대: 제가 했던 작업들을 보면 책도 많이 읽고 그럴 것 같은데 사실 작년에는 책을 한권도 못읽은거 같아요. 최근에 와서는 많이 읽긴 하는데 뭐 나름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어떤 작업의 주제가 주어졌을 때에, 그 작업에 대해서 다양한 텍스트를 읽어가는 방식이 있고. 그것 말고는 작업 전에 개인적으로 나름의 가설을 세워요. 최근에 읽은 것들은 <세카이계란 무엇인가> 하고. <게임적 리얼리티>라는 책, 그리고 그러한 일본서브컬쳐 내에서 발생했던 현상들에 대한 책들인데, 그런 것들하고 신자유주의 내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묶어서 텍스트로 읽기도 하고 그리고 그것을 한국 미술계에 대입해서 읽어보기도 하고. 혼자 가설을 세우면서 나름의 커리큘럼을 짜고 텍스트를 읽어가는 방식으로요.


기획전을 하면 작업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거의 다 유사할 것 같은데요. 기획안이 주어지면 그걸 둘러싸고 있는 텍스트들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레퍼런스를 삼는.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독해하느냐의 방식이겠죠. 최근에는 작가가 리서치를 한다는 게 그렇게 특이한게 아니니까요. 사실 가장 많이 하는게 리서치니까. 기획안이 주어지면 그 기획안에 대한 리서치가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니까. 그건 뭐 특별한 건 아니고. 그걸 어떻게 독해하고 매개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지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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