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ssay

동시대의 시간성에 개입하는 사례로서의 예술작품

by 정강산 2018. 7. 6.

<동시대의 시간성에 개입하는- 사례로서의 예술작품>


인간의 규정소가 특유의 종적 방식으로 물질대사를 수행해야하는 경험세계의 육신, 사회적 관계 속에서 부여된 상징적 정체성으로 구분될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존재론에서 본질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을 구분하는 작업은 대상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는 위상과 층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필수적이다. 적지 않은 철학적 작업들은 바로 이렇게 존재에서의 본래적인 것’, ‘참된 것을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전개되어왔다. 조에(Zoe)와 비오스(Bios)의 차이를 논하며 생체적 삶과 정치적 삶을 구분하는 아감벤, ‘그저 존재함살아있음을 구분하는 오스카 와일드, 존재자와 존재를 이격시키며 존재란 언제나 특정한 시간과 구체적인 상황 속에 놓인 것임을 역설하는 하이데거,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는 헤겔 등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도 또한 마찬가지의 논변을 펼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시간은 사회적 수준과 자연적 수준을 지니며, 이는 전체로서의 시간이라는 동일한 대상의 두 가지 측면이다. 이때 자연적 수준의 시간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시간, 매개되지 않은 시간, 반성되지 않은 시간, 지양되지 않은 시간, 따라서 여하의 본질을 논할 수 없는 상태의- 미분화된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은 사회와 무관하게, 공간이 존재하게 된 이후로 언제나 존재하며, 사회의 시간이 정초될 수 있는 직접성의 근원이다.

 

반면 사회적 수준의 시간은 곧 시간이 정치화된 차원을 가리킨다. 이러한 시간은 인간과 무관하지 않은, 인간에 의해 세워진, 따라서 지배의 문제를 회피할 수 없게 된 시간으로서, 대자적 시간, 매개된 시간, 반성된 시간, 지양된 시간, 따라서 객관적 본질을 지닐 수 있게 된- 그 시원으로부터 분할된 시간이다. 사회적 시간 속에서 인식론과 존재론은 일찍이 헤겔이 가족, 시민사회, 국가 등에 관한 논변 속에서 관측했듯- 뚜렷이 구별되는 동시에 통일을 형성한다. 이속에선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존재가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질문과 동일한 것이 된다. 반대로 존재 조건에 관한 논은 인식 조건에 관한 논과 포개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수준의 시간을 가리키는 이름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지배의 문제가 매개, 표상, 굴절되는 것임을 가리키는 동시에, 그로인해 발생하는 불투명성이 필연이자 해명을 요한다는 점을 지시한다. 사회적 시간은 광의의 공동체로서의 사회이든, 근대의 특수한 발명품으로서의 사회이든, 문명과 낮은 단계의 분업이 발생한 이래로 그 자신에 대한 전일적인 조망이 불가능하도록 스스로를 구부려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논해야 하는 시간은 바로 사회적 시간이다. 모든 예술이, 특히 근대 이후의 예술이 첨예하게 가시화된 무대 위에서 상대해왔던 것은 바로 이러한 층위의 시간이라고 볼 수 있다. 보다 정확히는 예술이 근거해온, 따라서 예술을 규정해온 지평은 바로 이러한 차원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다다이즘, 구축주의에서부터 상황주의에 이르기는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이러한 사회적 시간/역사를 대자적 수준에서 극도로 명확하게 파악했던 흐름이었다.

 

물론 오늘날 사회적 시간은 쪼그라든’, ‘수축된’, ‘협소해진’, ‘납작해진등등의 수식이 암시하듯-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희미하게만 감지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전지구적인 통합과 동일성의 근본적인 기제가 되는 국제적 수준의 교역과 상품/금융시장의 강력한 심화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동일한 세계에 살고 있음을 파악하고 시간의 성좌를 그려내 보일 수 있는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적 시간을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역사의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를 살릴 수 있어야한다. 그리고 정치를 살리기 위한 작업은 현재의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을 따라 매 순간 무의식적인 층위에서 발생하고 있는 계급투쟁의 장소를 의식적으로 파악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는 제임슨의 인지적 지도 그리기혹은 루카치의 총체성개념이 지시하듯- 서로 관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율적인 것으로 현상하는 상이한 층위의 대상들을 관련짓고, 그들의 관계가 필연적인 것임을 논증하는 과정을 포함한다.

 

이런 측면에서 히토 슈타이얼의 작업 <Is the Museum a Battlefield?>(2013)는 전체에 대한 인식을 간취하는 방법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교육용 렉쳐와 다큐멘터리를 조합한 형식을 띠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된다:

 

미술관은 전쟁터인가? 보통은, 미술관은 전쟁터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적 실재와 격리된 상아탑이다. 그것은 5%를 위한 놀이터다. 만약 예술가가 사회적 실재를 가지고 무엇이든 해보려 한다면, 분명히 명백한 것은 미술관 안에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격리되고 고립된 영역이 전쟁터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전쟁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 전쟁터의 시선에서, 현대 미술 공간인- 미술관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리고 거기서 미술은 어떻게 보일까?”

 

해당 작업에서 그녀는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경유하여, 역사감각의 부재 효과로서 정치의 상실을 조명한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정치의 상실이 관측되는 바로 그 곳에서 정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촬영 중인 히토 슈타이얼 본인의 모습이 바로 PKK(쿠르디스탄 노동자당)의 요원으로서 자신의 친구가 죽어간 전장의 이미지와 병렬된다. 이때 발생하는 효과는 냉전 이후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된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찍은 이미지가 독일제 무기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당한 쿠르드족 여전사의 흔적을 비추게 된다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있는 양 지역의 지리적 거리는 자본의 운동에 기생하는 전쟁으로 인해 밀접하게 통합되어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어 등장하는 것은 군수산업회사 록히드 마틴에서 생산한 코브라 헬기에 붙는 미사일의 모양과, 독일계 금융기업 DZ 뱅크 사옥의 모양을 유비하는 장면이다. “총알은 일직선상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원을 따라 순환하며 날아간다. 전장에서 미술관으로, 미술관에서 다시 전장으로, 그러한 순환은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을 죽인다.” 여기서 슈타이얼은 건축물의 구조 자체에 숨어있는 공격성에 주목하는데, 미사일과 건축적 형상을 조응시킴으로써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시금 전지구적 연결성에 관한 얘기이다. 요컨대 그녀는 전쟁을 지원하고 전쟁에 의해 몸집을 불리는 군수 회사, 그 군수 회사를 지원하는 금융은행, 국가, 자본은 연결되어있으며, 동시대 미술관들 상당수가 이들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차분히 논증한다. 따라서 비정치적인 미술관은 정치와 폭력으로 가득 찬 전쟁터로서 탈신비화 되는 동시에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특정한 맥락을 부여받는다. 상기한 서사를 통해 슈타이얼은 비정치적인 미술관이 전체 생산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매개되어있는지를 밝힘으로써 미술관이 이미 객관적으로 전장이라는 사실을 제시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장으로서의 미술관에 개입할 필요와 전략을 사유하게 한다. 여기서 사회적 시간(역사), 그 내용이 되는 지배와 기만의 특정한 계기는 일순간 파악되며, 대자적 수준에 존재하는 대상의 의미를 드러내 보인다. 한편 이런 과정에서 회복되는 것은 전체의 이념으로서, 이를 통해 그녀의 작업은 사회적 시간을 보다 선명히 드러나게 하는- 정치의 계기를 지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