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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어떤 긴장

by 정강산 2017. 4. 1.

2017년 3월 24일


사회학적 범주와 계층의 맥락에서(높은 추상수준에서,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보다 낮은 층위의 위상적 단서로서 '사회학적 카테고리'를 적시한다) 학자와 이데올로그의 차이는 진영논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특정 사안, 현상, 이론이 가진 문제의식을 쉽사리 기각하지 않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로 관철되었던 지난 세기의 1,2,3분기에 지배적일 수 있었던, 혹은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그가 여전히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부르주아/ 프티부르주아/기회주의자/대중추수주의/모험주의'등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된다.

알다시피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는 대체로 일상적 실천들, 경험세계의 실천들과 합일됨으로써 이런 식의 대중적이고 강력한 동인으로 기능했다. 허나 이런 식의 표현들이 아카데미즘을 벗어나서 사용되는 순간, 언표의 대상이 발화하는 모든 테제들은 그의 정체성에 정박되고 고착된다.

최근 널리 통용되는 일상적인 표현들을 예로들면, 일베충, 한남, 꼴페미, 꼴마초, 오타쿠, 틀딱충 등이 이와 비슷한 표현들이다. 알다시피 과잉된 파토스로 점철된 이런 표현들은, 특정한 인물군상 내지 계층에 대한 (심화된)환상을 통해 작동하며, 대상의 모든 발화를 일축하고 무력화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가상인 동시에 실재이며, 논증을 초월한 주체의 승인을 그 조건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근본적으로 기계적 유물론, 존재론적 유물론, 개체론적 인식 등은 위와 같은 과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는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혹은 문화대혁명과 같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준 집단적 동원을 통한 정치적 기획의 발생을 도모하고자한다면, 혹은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가동시키고자 한다면, 또는 체제의 질적 단절을 꾀하고자 한다면, 테크노크라트에 머무르지 않고자 한다면, 이러한 당파성의 정치를 어떤 수준에서 승인해야 한다는 점이다. 
정치의 대상이 그러한 도식적인 계층적 카테고리로 귀결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치가 현실 속에서 물질화되기 위해선 계층적 카테고리 일체를 부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 현실속에서의 노동자, 농민, 군인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과 약속이 없이 어떻게 20세기의 혁명들이 가능했겠는가? 그러한 과도한 파토스가 없이 어떻게 왕의 목을 칠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찬밥신세가 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이 처해 있었던 딜레마, 혹은 마르크스의 텍스트가 가진 모순이 어쩌면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위 강단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 마르크스주의 양자에서 공명하는 것, 혹은 물신주의 비판의 마르크스와 이데올로기론의 마르크스를 동시에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다시 처음의 문제로 돌아가서, 학자인 동시에 이데올로그가 되는 것, 즉 진영논리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동시에 기꺼이 어떤 수준의 정체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당파성을 승인하는 것은 가능할까? 이는 전경과 배경과도 같은 것이어서, 어느 한편에 서는 순간 다른 항을 말소처리하게 되어 양자를 종합하는 것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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