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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알튀세르와 제임슨

by 정강산 2017. 4. 1.

2017년 3월 26일.

아카데믹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나마)각광받는 알튀세르의 위상을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구절인데,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중층결정적 사고라 할 법한, 인식론적 다원주의가 부과된 조건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오늘날 알튀세르의 중층결정을 신화할 필요가 있을까? 알다시피 모든 부문들이 경제로부터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시기가 바로 포스트모던의 토양일진대, 이 속에서 각 이데올로기 부문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아래에 인용된 구절에서 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알튀세르의 문제의식이 소진되었음을 지적하는 대목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간다.

당연히 모순은 중층적이고, 다수성을 띤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경험세계의 지각속에서 모든 심급들은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 현상한다. 허나 마르크스주의에 고유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율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서 출현하는 까닭이 무엇과 매개되어있는지, 어떤 기제로부터 가능해지는지를 따져 묻는 지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알튀세르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순의 다수성을 사고한 알튀세르라기보다는 외려 '최종심급'을 인정했던 알튀세르의 사고를 가늠해보는 것이다. 이 연장에서 60, 70년대 알튀세르의 정세적인 지적개입을 하나의 정태적인 구조로 환원하는 순간 놓치게 되는 부분을 추궁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알튀세르를 계승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이는 레닌을 현재화시키는 것이 레닌의 텍스트 일반에 대한 세세하고 섬세한 주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통해 유의미한 정치적 개입을 행하는데에 가까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 알튀세르의 사도들이 외려 교조적이고 답답해 보인다.


"맑스주의적 전통을 다룰 때 나를 괴롭히는 것은 알튀세르나 루카치 뿐만 아니라 그람시, 벤야민, 브레히트, 윌리엄스, 톰슨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자율적인 철학체계를 가리키는 유명상표로 탈바꿈되었다는 것입니다.(..)한 이론가에 대한 문화적 헌신은 정말로 소집단적 제휴관계의 상징이 됩니다.(..)알튀세르학파에서 이런 종류의 매력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알튀세르학파는 최근 좌파 중에서 가장 의기양양하고 적극적인 소집단 진영들 중 하나입니다.(..)알튀세르 현상이 지닌 그런 특징에 내가 정말로 매력을 느낀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어쨌든 그랬더라도 더 이상 실천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아 1968~69년에는 정리가 되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 알튀세르는 소규모 '혼성집단', 혹은 이론적 게릴라부대의 집결지가 아니며, 그 자체가 완전히 새로운 이론에 대한 유명상표도 아닙니다. 오히려 알튀세르는 맑스에 대한 흥미롭고 파편적이며 산발적인 주석자입니다. 출간된 그의 저서 중 어느 것도 정말 체계적이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개입한 결과이거나 진행 중인 세미나 작업의 요약들입니다.(..)알튀세르를 그 자체로 한 사람의 철학자로, 즉 새로운 철학체계를 하나 더 세운 이로 보고 접근하는 것은 어느정도는 프로이트를 거치지 않고 라캉에 접근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경우, 결국 기괴하고 실체가 없는 유사체계가 출현하여 지적 실체를 불필요하게 배가시킵니다.(..)분명한 것은 알튀세르의 작업에서 맑스주의적 전통이 삐걱가리며 전면에 등장하는 까닭에 그가 '고구조주의(high structuralism)의 큰 주제들과 그것이 열중해 있는 상당수의 문제를 함께 끌어들여 폭팔적으로 종합해낸 점이 때때로 무시되었다는 점입니다.(..)우리는 지금 프로이트주의가 충분히 퍼져 있는 분위기에 있기 때문에 라캉이 단속적으로 프로이트적 실천을 행하고 왔음을 알아보고 즐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맑스주의적 문화가 전무한 경우 알튀세르가 열중한 문제들은 먼 얘기처럼 보입니다."


"레너드 그린/조너선 킬러/리처드 클라인과의 인터뷰",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 52-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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