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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가장/냄새/대지/아무말

by 정강산 2018. 12. 2.

가장의 근심이 의미하는 것


카프카의 <가장의 근심>에 등장하는 오드라덱(Odradek)은 실체가 없는 대상이다. 가장으로 추측되는 화자의 말과 달리, 그것은 러시아어 사전에도, 독일어 사전에도, 영어 사전에도 등장하지 않는 미지의 낱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묘사하는 화자의 말에 의지하여 그 존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해명할 수밖에 없다. ‘그것에 대한 화자의 심상의 나열이 본 소설의 전체내용이므로, 그 대상의 정체를 파악하길 우회할 수는 있어도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드라덱은 무엇인가? 그것은 별 모양의 실패처럼 보이는, 여러 색깔로 한데 묶인 노끈과 연관된 것이며, ‘한 가운데에 옆으로 뻗어 나오는 작은 봉이 달려있는 수평봉이 붙여져 있는 무엇이다. 또한 그것은 나름대로 단정한 마감이 되어있으나 빠르게 움직이기에 자세한 묘사는 불가능한 무엇이다. 그것은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만, 다시 되돌아오며, 때로 질문에 대답하기도 한다. 화자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오드라덱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알고 있다. 무언가가 목표와 행위를 지니고 움직인다는 것은 그것이 필멸의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데, 화자에 따르면 이러한 운동성은 오드라덱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오드라덱은 앞서 언급했듯 때로 말을 하며, 어쩌면 화자가 죽은 후에 그의 자손들의 자손들의 자손들에게 마찬가지로 옮겨 다닐 수도 있다.

 

즉 그것은 나무토막처럼 운동하지 않지만, 빠르게 움직이며 운동하는 것이다. 그 연장에서 오드라덱은 이미 죽어있는 것인 한편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것은 살아있는 시체living dead’ 혹은 유령에 가까운 존재로서, 소설 속의 가장에게 그자체로 익숙하지만 괴로움을 유발하는 모순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허나 항상 곁에 있지만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대관절 존재하는가? 이런 점에서 결코 완전히 파악 불가능한 오드리덱의 감각적 특징은 사실 열거하는 게 무용한 것이다. 요컨대 오드라덱의 물리적 특징은 오드라덱의 존재에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 모습이 실패가 아니라 공에 가까운 것이었다 해도 가장은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오드라덱은 고브리덱이 될 수도 있고, ‘아힝흥행이 될 수도 있으며, ‘라릭구소가 되어도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무엇을 말하고자, 앞서 자신이 서술한 것을 뒤에 서술된 것이 부정하는, 사후적으로 무위로 수렴되는 서술을 했을까. 달리 말해, 그는 왜 말하기 애매할 뿐더러 표현으로부터 달아나는 대상을 내세워야 했으며, 그렇게 한 가장의 독백에서 나타난 오드라덱이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 적어도 확실히 답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그것이 카프카가 근대 도시의 일상에 반응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오드라덱은 자율적으로 오고 가며 작동하는, 그러나 죽어 있는, 감지되지만 정확히 알 수 없는, 음험한 시간에 대한 알레고리일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장의 근심>, 합리적인 도시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체험은 스스로를 벌레처럼 혐오스럽고 하찮은 것으로 여기도록 조직된다는 <변신>을 보충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합리적 도시의 시간에 조응하는 합리화된 노동의 시간은 생산되자마자 상품 속으로 소비되는 것이고, 살아있지만 이내 죽은 것으로 전화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마치 오드라덱이 그러하듯, 불가해하며, 또한 마치 오드라덱이 그러하듯, 인간의 삶이 재생산되어야 한다는 비루한 이유로 인해 다시 되돌아온다. 그래서 오드라덱은 분명히 서술될 수도 없고, 가장의 삶이 한참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영원히 되돌아오게 되는 실체 없는 대상인 것이다. 결국 카프카에게 오드라덱이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운동하고 운동하지 않는 시간의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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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새가 의미하는 것


오늘날 냄새란 무엇일까. 혹은 후각이란 무엇일까. ‘맹인에게 색을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종종 제기되나 후각 장애인에게 꽃냄새를 설명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국가에 따라 격차가 있기에, 적어도 영미권에선 이와 관련된 연구들이 종종 제안되는 듯하지만, 국내에선 관련 연구가 전무한 수준이며, 우리의 경험세계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본격적인 탐구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그렇기에 후각을 시각과 청각에 비해 아직 식민화되지 않은 경험으로 셈하는 논의들이 적지 않은데, 예컨대 프루스트 효과와 관련된 논의들이 대표적이다. 이때 냄새는 유일무이한 경험의 매개자로 간주되며, 특정한 과거의 기억을 효과적으로 상기시켜주는 일종의 아우라를 담지하고 있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서 나던 퀴퀴한 담배냄새, 어머니의 향긋한 로션냄새, 할머니의 구수한 청국장 냄새, 첫 애인의 달콤한 비누냄새 등- 누구나 냄새와 관련된 강렬한 기억을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는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유일무이한 경험의 매개자로서 냄새의 위상을 여전히 긍정할 수 있을까? 후각이 점차 관리되고 통제되기 시작할 때, 프루스트 효과의 전복적인 힘을 논할 수 있을까? 알다시피 오늘날 일상 속에서 날 것 그대로의 유일무이한 냄새는 환영받지 못한다. 체취를 제거하기 위해 동원되는 탈취제, 향수, 바디워시, 샴푸 등을 제조하는 회사에서는 냄새의 기예라 할법한 연구를 시도한지 오래이며, 점차 대상의 냄새는 상품을 통해 구성되기 시작했다. 그곳에 가야만 나는, 혹은 그 사람에게만 나는 냄새를 맡기란 이제 어려워졌다. 공간의 동질화는 으레 감각의 동질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어느 공항에 가도, 어느 커피숍에 가도, 어느 쇼핑몰에 가도, 어느 미술관에 가도, 어느 공중화장실에 가도, 어느 PC방에 가도 안전하게 소비할 수 있는 허용범위의 냄새들이 편재한다. 일정 규모 이상의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각 지점별 매장의 냄새를 통일시켜 온 것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아마 오늘날 프루스트가 재림한다면, 그는 레오네 아주머니의 마들렌에서 계란 비린내가 난다고 타박하거나, 코스트코에서 제조된 항상 똑같은 맛을 내는 마들렌을 먹곤 더 이상 과거와 현재를 접속시키는 냄새의 힘을 얘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냄새를 저장해주는 ’Smell Memory Kit‘, ’Smell Snapshots‘, ’Scentography‘, ’Madeleine’ 등의 장치가 의미하는 것은 어쩌면 프루스트의 죽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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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미술


대지미술은 미적 가상에 의한 매개를 거부하고 화이트큐브 바깥의 실재를 탐구하고자 했던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화이트큐브에 대한 비판이 그 시효를 다하여 화이트큐브가 억압이 아니라 미적 가상의 존립을 위한 최소한의 보루로 여겨질때, 덧붙여 장소특정적 미술 및 공공미술의 문맥으로 대지미술의 문제의식이 상당부분 흡수되었을때 대지미술의 당위가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라 보긴 어려울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제 대지미술은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대지미술을 참조하고 그 형식들을 차용하는 것이 의미를 갖는 것은, 화이트큐브 바깥에서 자연상태의 질료를 통해 물질성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에 가닿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편집툴 또는 레디메이드 오브제 혹은 안료를 벗어나 바위, 나무, 흙, 잎사귀 등을 통해 풍경을 배경으로 무언가를 표현해본다는 것은 진귀한 경험임에 틀림없다.

<잠재적 구획>
본 작업은 경계와 구획, 보다 미시적으로는 '선'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약 한뼘에서 두뼘 사이의 나뭇가지들을 산길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선을 그리게 꽂아 이어 놓은 것이 작업 형식의 전부다. 가지들은 길을 따라 삐뚤빼뚤하지만 적당한 간격으로 서있다. 그러나 이렇게 배치된 나뭇가지들을 마주한 사람들은 설령 그것이 여느 울타리와 달리 성기게 짜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자연 이상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관람자들은 주변 경관과 잘 동화되지만 어딘가 어색하게 겉도는 그 나뭇가지로 된 선을 자연과 분리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자연상태에 선형적인 것은 매우 드물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등산로를 오다니는 이들)들은 아주 얕게 박힌 채 엉성하게 짜인 가지의 배열을 피해서 이동한다. 무언가를 통해 선을 긋는다는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닐지라도 모종의 구역을 나누는 분할의 기제로 작동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 조악한 모양과 기능없는 상태로 인해 어떻게든 넘어 다닐 수도 있는 것으로서, 이로서 만들어진 건 '최소한의 경계'라 할 법한 무엇이다. 결국 본 작업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경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경계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무엇보다도- 경계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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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말


글을 쓰는 이라면 누구나 각자 상이한 나름의 문체를 가지고 있다. 글을 구성하는 방식 또한 각자의 결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시를 잘 쓸 것이고, 누군가는 에세이를 잘 쓸 것이며, 누군가는 논문을, 또 누군가는 소설을 잘 쓸 것이다. 그리고 나는 논문과 같은 설명문의 글에 길들여져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알게 모르게 추구했던 것이 그런 방식으로 나타났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다. 감성적이고 감상적이며 모호한 유비를 가능한 한 배격하고, ‘라는 주어를 최대한 절제하며, 논지가 체계적일 것 등등이 바로 내가 어렴풋이나마 따르고 있었던 글쓰기의 규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새 내 밖에 있다. 그것은 이제 나와 따로 산다.

 

언젠가는 김수영의 시를 읽고 나도 덩달아 시를 깔짝여 본적이 있다. 또 언젠가는 아버지를 역사 속 인물로 남기고 싶은 마음에, 태백산맥에서 조정래가 보여준 문체를 염두에 두며 아버지와의 일화를 전기 형식으로 풀어내 본 적도 있다. 헌데 나오는 것마다 좀체 성에 차지 않을 정도로 볼품없고 기가 막혀서 그만두게 되었던 것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는 없는지, 제 관성대로 굳어진 내 글투는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미 수시로 눈먼 글쓰기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글이 그렇지만, 내 글은 유독 제 혼자 갈 길을 갈뿐, 내 변덕과 바람대로 나아간 적이 없다.

 

그래서 때론 역시 글은 이래야한다며, 나의 글에 흡족한 채로 퇴고를 할 때도 있지만, 어쩔 때에는 빈약한 내 언어가 아쉽기만 한 순간도 있는 것이다. 내가 개발새발 써놓은 비루한 체계적인 글들보다 무언가 알듯 말듯 아리송한 잠언과 형형색색으로 차려입은 표현들이 더 오래 남을 것이라는 예감. 결국 언어는 놀이에 불과하다는 느낌.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을 뿐 실재에 가닿을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언어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직관. 그렇게 가끔 엄습해오는 내 무능한 글에 대한 환멸은 그러나 꼭 오래가지만도 않는다. 아마 이미 내 것이지만 실은 내 것이 아닌 것이 되었으니.

 

내 말들이 내 밖에 있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 부러 애꿎은 자아를 타박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내 것이 아닌 것을 바꾸고자 한다면 결국 나를 죽여야만 한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나의 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허망한 소리를 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것은 이것이 나의 맨 끄트머리 부분이기 때문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구나 제 나름의 가장자리를 가지고 사는 법이다. 그건 나의 바깥에 있지만 나에게서 벗어나있지 않은 것 속에서 나를 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원 같은 것이다. 지금 내가 흉내 내고 있는 것은, 그러나 한사코 나에게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것이다.

 

적어도 그 속에서 나는 적당히 세련되면서도 살집이 오른 자아가 흠뻑 묻어나오는, 그리 싫지만은 않은 느낌의 문투를 만들어보기 위해 애써본다. 이건 좋게 말하면 이미 내 것이 아니게 되어 저만치 앞서나가는 말을 다시 내게 당겨 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사고실험이자 눈먼 글쓰기이다. 내가 품지 못했던 말의 집들을 세워보는 것. 혹은 말의 집들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지켜보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다소 박하게 볼 구석도 없지 않아 있다. 형식 속에 침잠하지 못한 채 변죽만 실컷 올리다 급격히 부피가 줄어드는 중언부언과 결국 부서지고 말 허약한 지붕. 결국 나는 그리 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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