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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사운드아트에 대한 메모

by 정강산 2019. 5. 23.

1. <미디어는 마사지다><미디어의 이해>등의 주요 저서들에서 맥루한은, 시대를 독해하는 유비적 틀로서 시각공간과 청각공간의 대비를 주요한 논의의 축으로 삼는다. 그에 따르면 시각공간과 청각공간은 단지 위상학적 차이를 갖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세계관 및 시간성에 대한 인식을 동반하는 범주이다. 그것은 매체의 변천에 따른 일종의 효과에 가까운데, 예컨대 표음문자가 발명되기 전, 연대기적 시간의 흐름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시기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 통일된 후각적이고도 청각적인 공간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즉 시각적 공간과 청각적 공간이 분기하는 계기는 바로 문자라는 미디어이다. 청각공간 속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음성을 통해 전래되는 구전으로 세계를 감지했으며, 신화적인 시간성 내부에서 부족적인 삶의 방식을 영위했고, 통합적이고 총체적인 방식으로 시공간을 인지했다. 반면 표음문자의 발생 이후 열리게 된 시각공간은 커뮤니케이션을 육성으로부터 분리하는 데에 그치치 않고서 인간으로 하여금 오늘과 내일, ‘-를 분할하는 연대기적 시간감을 갖게 했고, 삶에 대한 신화적 설명들을 점차 말소시키도록 했으며, 합리적 이성과 논리를 통해 세계를 감지하도록 이끌었다. 이 연장에서 맥루한은, 인쇄테크놀로지의 발달 이후 이러한 시각적인 것의 우위는 정점에 도달하였다고 간주하는데, 이 시기에 기술은 인간이 텍스트를 홀로 독해할 여지를 줌으로써 개인을 형성하고 동일한 인쇄물을 접하는 이들로 구성된 공중(public)’민족을 만들어냈으며, 동시에 산업혁명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절정에 달한 시각성의 시대가 닫히고 청각적인 것이 우위를 점하는 상황으로 접어들게 된 것은 전기테크놀로지의 등장에서 연원한 것이라 주장한다. 시각은 대상을 분할하고 절취하지만, 청각은 대상을 통합하고 보존한다는 점에서, -공간적 분할을 불가능하게 하는 전기는 청각적 요인을 세계에 편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루한의 주장은 전기테크놀로지가 지구 전체를 하나의 촌락으로 재구조화시키고 있다는 관측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에 따르면 전기는 시간과 공간을 다시금 통합시키는 주요한 매체로서 독해된다.

물론 맥루한은 이러한 유비를 통해 청각성을 낭만화한다기보다 청각적인 것의 헤게모니가 유발하는 격변과 효과 자체를 서술하는 데에 집중하지만, 논의의 적지 않은 부분이 지나치게 추상적이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서양과 동양, 이성과 감정, 합리와 직관, 부분과 전체 등을 도식화시켜 전자를 시각적 공간에, 후자를 청각적 공간에 할당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역사적 사실들(동양에서의 신분제를 비롯한 수직적 질서와 합리적 논리에 따른 백가쟁명 등등)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또한 매체 자체가 어떤 질적 단절에 따른 사회 전체의 재구조화를 유발하는지, 여러 사회, 정치적 변화들의 양적 축적에 따른 특정한 역사적 단계로의 진입이 그러한 매체를 발생시키는지의 선후 관계는 그때그때 구체적인 수준에서 분석되지 않으면 현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변적인 논의에 그칠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한 시대가 지배적으로 산출하는 감각이 존재하며, 그것은 특정한 장치(미디어)를 통해 매개되고, 때로는 특정한 감각을 산출하는 그러한 장치 자체가 시대를 규정하는 작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고실험의 측면에서 맥루한의 작업은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

이러한 사고실험을 존중한다는 전제하에 정리하자면: 청각공간은 절취 불가능한 전체를 감지하는 것이 규칙으로 주어진 공간이며, 선별불가능성에서 연원하는 우발적이고 임의적인 것을 받아들이기를 권장하는 공간이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화성, 구술적인 것, 총체적인 것, 통합적인 것과 관계하는 공간이다. 반면 시각공간은 절단된 부분들을 감지하는 것이 규칙으로 주어진 공간이며, 절취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롯된 목적론적이고 논리적인 공간이자, 합리성, 물화(표음문자가 역사를 발화하는 주체로부터 역사를 떼어냈듯), 연대기적 순차성, 파편화 등과 관계하는 공간이다.

2. 어떤 공간 전체를 ‘S’, 그 공간의 분할된 부분들을 ‘s’로 간주할 때, 시각공간에서 분할된 부분적 공간들과 전체 공간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s1+s2+s3+s4+(...)= S

 

반면 청각공간에서 분할된 부분적 공간들과 전체 공간과의 관계는 시각공간의 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리될 수 있다:

 

s1=S, s2=S, s3=S, s4=S, (...)

 

이는 시각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것과 청각적으로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각기 상이한 위상적 차이를 갖기 때문인데, 요컨대 시각적으로 한 공간 전체를 점유한다는 것은, 후면을 감지할 수 없는 시각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부분들의 총합으로서 이뤄질 수밖에 없지만, 청각적으로 전체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은 전, , , , , 하의 방향을 종합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청각의 특징으로 인해 부분이 곧 전체를 채우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 식은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차이를 공간적 점유의 측면에서 대조하여 드러내고 있다.

 

3. 알빈 루시에(Alvin Lucier)<I am sitting in a room>(1969)은 육성을 녹음하여 재생한 음향을 다시금 녹음하고, 그렇게 녹음된 결과물을 다시금 녹음하는 공정을 반복하여 최종적으로 최초에 녹음되었던 육성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여기서 루시에는 방 안에서 독백을 늘어놓는데, “I am sitting in a room”이라는 제목은 그의 독백의 일부 구절을 따온 것이다. 발화된 독백은 녹음을 거듭하는 와중에 점차 희미해지고, 이내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변하며, 결국 공간의 잔향만이 남게 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어떤 공간을 점유한 채 방 안에 앉아있던 ()’가 레코딩을 통한 지속적인 자기반영의 과정 속에서 공간자체로 스며드는 상징적 제스쳐이다. 주체와 객체의 분할에 근거한 있음은 바로 주체의 현존의 지표였던 육성 자체를 통해 지양되어 끝내 없음으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작업은 청각적인 것을 경유하여 주체의 있음에 관한 토대가 되었던 서구 존재론에 대한 발본적 비판의 가능성을 개진하는 것으로 독해 될 수 있다.

 

4. 구체음악(concrete music)에서의 구체란 말 그대로 실질적인 시공간 속에서 존재했던 현실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의 구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를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표(index)적인 것이 지니는 현실성을 떠올려 보면 된다. 이렇듯 구체음악은 세계에 이미 존재하는 소리의 요소들로 음악을 구성하는 특징을 갖는데, 샤페르에 따르면 이는 음악의 창작 내에서 구체(소리)에서 추상(작곡)으로 나아가는 벡터의 역전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구체음악은 소음과 음악의 경계를 문제시했던 20세기 초의 미래주의 하에서의 음악적 실험들에 빚지고 있으며, 미니멀리즘 음악과 테크노 음악 등을 예비하는 단계로서 역할했다고 볼 수 있다. 미니멀리즘 음악은 동일한 음률의 반복적 배치와 특정 구간의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녹음기를 통해 소리를 채집한 뒤 각 부분을 몽타주하고 지속 기간에 조작을 가하는 구체음악의 창작 방법론에서도 기술적으로 예고되어 있었다. 즉 녹음된 테이프를 루핑(looping)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구체음악으로부터 미니멀리즘 음악의 반복적 계기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구체음악은 전자음을 비롯한 생활세계의 모든 음향을 음악의 소재로서 전유했으며, 이는 전자음에 대한 루핑을 특징으로 하는 미니멀 테크노와 동형성을 지닌다.

 

5. 에릭사티의 <Vexation>짜증나게 하기”, “괴롭히기등을 뜻하는 그 제목의 뜻이 암시하듯, 청취자를 노이로제에 빠뜨리도록 설계된 곡이다. 청취자뿐만 아니라 연주자 또한 연주 과정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낄 것이 분명한 이 곡은 그 자체가 청취의 규칙을 상정하는 스코어적 구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예컨대 관객은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서는 안 되었다. 또한 악보의 총량은 반페이지 정도이지만, 같은 음률을 840번 동안 반복하는 것이 전체 작업의 완결이었기에, 이를 악보가 지시하는 대로 연주하면 13시간 이상이 걸렸다. 존 케이지는 이 악보를 에릭사티의 지인으로부터 받고 약 15년이 지난 뒤인 1963, 루이스 로이드(Lewis Lloyd)와 함께 맨하튼의 ‘Pocket Theatre’에서 여러 명의 연주자들을 섭외하여(한 사람이 전부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릴레이 공연을 조직했다. 케이지는 로비에 시계를 설치한 뒤, 관객들로 하여금 일정한 시간에 맞춰 출입을 하도록 했으며, 20분마다 5달러의 입장료의 일부를 환불해주었는데, 이는 연주를 오래 감상할수록 금전적 어드벤티지를 줌으로써 관객들을 붙들어 놓고자 했던 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총 공연 시간은 18시간에 육박했으며, 결국 전체 공연을 관람한 인물은 ‘The Living Theater’의 배우였던 칼 쉔져(Karl Schenzer) 한 사람 뿐이었다. 이 기이한 작업은 그 반복과 지속이 가져다주는 두드러지는 수행적 뉘앙스로 인해 그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직간접적인 영감을 주었으며, 일본 및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 재상연 된 바 있다. <Vexation>의 극단적인 단조로움의 시간이 열어젖혀 보여주는 (현실의 제도 및 매체들이 조직하는 시간과는 구별되는)다른 시간성에 대한 감각은 음악의 장에서 시도될 수 있는 반음악적이고 비판적인 기획을 환기할 뿐만 아니라, 미니멀리즘 음악을 일찍이 예고하고 있기도 했으며, 이후 시각미술의 장에서도 종종 참조하는 전위의 원형을 제공하였다.

 

6.

랑시에르의 <뮤즈의 변형>은 예술과 기술의 관계 및 양자의 위상에 관한 하나의 모델을 소묘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랑시에르의 본 글은 새로운 매체의 등장이 가능케 하는 새로운 예술적 실행들을 논하는 기술결정론적 주장에 맞서 예술적 대상과 그 생산을 둘러싼 조건을 선차적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즉 새로운 예술적 실천이 어떻게 새로운 미디어를 유효한 미적 도구로 만드느냐는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에 따르면, 예컨대 사진의 발명을 통해 가능해진 복제 기술의 예술로의 도입은, 그것을 예술로서 인정할 수 있는 일련의 실천들과 태도 및 실험을 요구한다. 그는 라우드 스피커와 스크린을 사용하는 사운드 아트에 대한 설명으로 논의를 시작하지만, 그 개별의 매체들이 지닌 역사에 관심이 없으며, 외려 그 작업의 구성을 예술로 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 “예술의 주권적 의지의 작용은 어디까지 대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질문한다. 해당 작업에서 등장하는 빛과 소리의 구름은 그 자체로 예술적 요소를 지닌 듯 보이지만, 동시에 그것을 예술이게끔 하는 것은 그 대상들을 그러한 방식으로 보이도록 조형해낸 예술가의 예술적 의지이기도 하다. 그는 이것이 예술적 실행과 예술의 경계에 내재한 모순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예술적 재료가 지닌 수동성과 예술가의 의지가 나타내는 능동성은 근본적으로 서로 분리된 층위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술적 질료는 애초에 개별 예술가들의 의지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대상에 가해지는 어떤 조작들은 마찬가지로 예술적 기술이 될 수 있다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이 지점에서 랑시에르가 역설하는 것은, 외려 이러한 모순 자체가 미적 체제에 고유한 특징이며, 따라서 예술은 비예술과의 명확한 구분을 갖기 어렵다는 점에서 예술로서 정립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에 내재한 이러한 모순적 계기를 직시하는 것은 시각적인 것청각적인 것”, “예술적 창조부와 지배에 대한 기계적인 분할의 위계를 물러나게 하는 평등주의적인 미적 체제를 명백히 인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7. 스티븐 코너에 따르면, 소리의 누출성과 팽창성은, 시각과 그에 조응하는 공간이 전제하는 유클리드적 수직성과 직선성을 마치 '냄새'처럼 침범하고, 뒤섞고, 해체한다. 이런 측면에서 소리작업은 가장 급진적인 형태로 만들어진 시각공간에서조차 여전히 존재하는 분할과 나눔을 인식하게하고, 문제시한다. 그래서 시각 공간은 그 특유의 시각장이 온전히 포섭할 수 있는 고정적인 직선성을 추구하며, 그 자리에서 달아나지 않으며 얌전하게 놓여있는 것을 선호하지, 누출성과 팽창성을 지닌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 즉 소리의 누출성과 팽창성은 공간의 벽면을 삼투하며, 경계를 흩뜨려뜨리고, 시각장의 경계와 위계 자체를 문제시하기에 미술관, 혹은 시각장의 타자로서 기능하며 그 구성을 확장하고 변형할 수 있는 것이다.

 

8. 구조주의 언어학자인 소쉬르에 기댄 현대 의미론에 한해 말하자면, 의미론의 대상은 언어 기호와 언어 의미 사이의 작용이다. 하나의 의미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혹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의미의 담지자는 주체인가 객체인가, 기호는 의미를 지시하는가 혹은 또 다른 기호를 지시하는가 등을 연구하는 것이 바로 의미론의 임무이다. 그런 점에서 노이즈를 의미론적 관점에서 논하는 것은 의미론의 범주를 초과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노이즈는 청자에게 어떤 심상을 주거나, 그로 하여금 특정한 기억을 환기할 뿐, 일정한 의미로서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이즈를 의미론과 관련짓기 위해선 애초에 기호적 의미망의 사슬을 벗어나 있는 노이즈의 위상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다. 노이즈는 의미있는 소리의 바깥에 있는 대상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얘기했듯, “유일하게 언어를 지닌 동물로서의 인간의 인식이 포섭할 수 없는 영역의 소리이고, 따라서 소여의 정치 외부에 놓임으로써 그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이해가능성의 지평 너머에 있는 노이즈는 동물의 소름끼치는울부짖음, 노예의 천박한웅얼거림, 타인종의 불길한웅성거림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타자성에 대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이즈는 의미 자체의 유예이고, 기표와 기의의 안정적인 지시관계 구조의 외부에서 그 작용에 간섭하는 어긋남이다. 의미를 지닌 것들의 장 속에서 노이즈는 의미에 간섭하는 불편한 잔여가 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의미 있는 소리를 제대로 들리지 않게 하는 것, 우리 의식의 지향이 항상 배제하는 것, 때론 스스로 의미있는 소리가 되고자 새로이 구성되는 것, 그리하여 무엇이 의미있는 소리인지를 되묻는 것- 그것이 노이즈의 운명이다. 역설적으로 이 지점에서 노이즈는 이미 질서잡힌 것으로서 혹은 주어진 것으로서 구성된 의미의 인과 모델을 해체하고 재조직할 구성적 외부의 위치를 부여받는다.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 정치의 형상은 노이즈의 존재 자체의 계기로서 주어져있는 것이다. 이렇듯 의미론에서 노이즈가 차지하는 위상을 경유하여, 우리는 노이즈의 문화적 의미까지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른 것혹은 틀린 것을 타자(other)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또는 다르고 틀림의 여부 자체를 판단할 수 없는 비존재 및 비체(abject)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9. 미첼에 따르면, 우리의 직관과는 달리 단일한 매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그는 어떤 매체가 단일한 감각에 기반하고 있다는 믿음이 최근의 예외적인 사례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온전히 시각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무성영화만 하더라도, 그것은 언어적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매체로서의 텍스트에 기대고 있었으며, 또한 음성적 매체로서의 연사의 육성에 기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언어, 네러티브, 알레고리, 형상 등을 제거하고자 했던 모더니즘 회화 역시 순수한 시각성을 반영하는 매체로서 여겨지지만, 그 역시도 "그려진 말들"로서, 시각성을 뛰어넘는 기호적 작용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었다. 이는 그림을 둘러싼 서사와 제목 등이 제거된 상황을 가정해보면 명백한데, 만약 폴록의 액션페인팅에 그의 특유의 라벨링이 가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작품이 아니라 단지 물감이 엎질러진 흔적으로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모더니즘 미학이 전제하는대로, 그림으로부터 서사적이고 재현적인 모든 계기를 소거한 뒤 '손에 의해 만들어진 물감의 흔적'으로서의 최소한의 규정만을 우리가 갖게된다 해도, '시각성' 자체를 규정하는 것은 화가의 촉각의 집적과 집중이기에- 그림을 단지 시각적인 매체라고 간주하는 것은 그림이 기대고 있는 감각에 대한 온전한 묘사가 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미첼은 모든 매체에서 특정 감각이 차지하는 비율과 위상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함을 역설하며, 흔히 '시각매체'로 간주되는 여러 대상들을 발본적으로 해체하려한다. 이러한 미첼의 주장이 매체 자체에 대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파악을 지향하는 것인지, 시각성의 역사와 서구적 근대의 역사를 엮는 대한 추상적인 비판에 대한 반비판을 지향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미첼의 논지자체는 단일감각에 기반한 것으로 가정되는 매체의 위상을 탈중심화하는 흥미로운 근거를 양자의 입장 모두에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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