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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민중미술 구술자료

by 정강산 2019. 10. 28.

질경이

 

쓰여지거나, 어딘가에 그냥 ?설거적?으로 쓰여질 일들을 해온거지. 근데, 그 부분에 대해서 내가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게 내가 마지막 넘은 산이야. 그래서 넘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어떤 상황에서 조건이 되면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뭐 안 되면 글을 쓰고, 그래도 안 되면 말로하고, 뭐 그래도 안되면 말을 안하고. 그냥 그렇게 생각했어. 그리고 그 대신 내가 부끄럽지 않게, 과연 최선을 다했나, 이것만 그냥 물어보자. 무엇으로 나를 표현하는가는 중요한게 아니다. 다 똑같다. 이 생각하는데 햇수로 내가 한 3년 괴로워했어.

 

Q. 그게...

 

A.생활문화운동 시작해서, 이 엄청난 양의 허드렛일에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그때도 만약에 옷을 만들어서, 그때 패션 전공하는 애들도 운동권에 있었거든 후배들이. 걔네들이 이일을 하겠다고 했으면 난 안했어 이거. ??????????? 이걸하자고 내가 얘길 해놓고 막 글도 쓰고 책도 내고 막 강연도 하고 그랬는데, 아무도 안 하겠다는거야. 안하겠다는 이유는 뭐냐하면, 이게, 아무것도 아닌 허드렛일이기 때문인거지. 그냥 이례적으로 한번씩하는 일이라고, 이거해가지고 뭐 운동의 역사에 기여한다고 생각지도 않고, 그다음에 자기가 명예가 되지도 않고, 또 돈도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다 허드렛일이라 생각해가지고 아무도 안하겠다는 건데, 나는 고만 내가 그 사이에 이걸 하자고 얘기를 해버린거지. 내 이름으로. 그러니, 일은 벌려놨는데 아무도 안하면은, 그래서 항상 그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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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배님 몇학번이세요?

 

A. 76학번이에요.

 

Q. 76 학번. 그러면은, 76학번으로 대학생활 시작 했으면은, 정상적으로 휴학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게 된 건가요?

 

A. 4학년 1학기 때 휴학을 해서, 1년 쉬고 졸업을 했죠.

 

Q. 그러면은 그 학교 다닌 시기가, 그 유신, 박정희유신정권이었는데, 학생때 시절을 잠깐 회고를 해보면, 그때 지금의 이지연을 만든 무언가 싹이 트고 있었을 거 같은데, 그 학생시절과, 그리고 또 홍대에 그 탈패도 만드셨는데, 그게 학생시절에 만든건지 아니면 그 이후에 만드신건지 뭐 그런 것들을...

 

A. 4학년 1학기 때, 내가 그 탈패만든다고 1년 휴학한 거에요(웃음),

 

Q. 고 얘기를 좀 해주시죠. 그리고 학생시절에 어떤 영향들을 받았는지..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뭐 여러 가지 있었을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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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대학에 들어왔을 때 나는.... 정말 좋은 그림을 그렸으면 하는 생각에서, 대학을 홍대를 온거에요. 그리고 나를 그림을 그리게 만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나서 보니까, ?익희대? 선생에게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그림을 배운 분이에요. ?이주영? 선생님이라고... 그때 나는 내가 그림을 좋아하고 잘그리고 남들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했지만, 그림을 전공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집안의 강력한 압박감에 늘 시달리고 있었어요. 근데 그 선생님 때문에 사실은 용기를 내서 그림을 선택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남들처럼 이렇게... 미술지도를 받아서 미대를 온게 아니라, 미술실에서 그냥 혼자 그렸어요. 그 선생님은 나한테, 미술지도를 해주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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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림은 어떻다. 너는 그림을 그려야 된다라는 말만 해줬죠. 근데 그 선생님이 말씀하시는거 들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내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대학교까지 유일하게 내가 내 스승으로 인정하는 분인데, 이런 생각했죠. 저 선생이 나중에 나는 내가 꿈꾸던 제자가 너야 라는 말을 분명히 하게 될거다. 서로 그런 관계였어요. 그래서 사실 그림을 선택하게 된거고, 내가 이시대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여자로서 반드시 그려야할 그림이 뭐가 있을거다, 아주 쉽게 그런 생각을 한거에요. 그러고, 그거를 대학교 가면은 많은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찾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요. 근데 대학교 들어오는 순간, 좌절했죠. 학교 행태를 보면서 여기선 아무것도 찾을 수 없구나, 그래서 1학년 2학년때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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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기를 미친 듯이 열심히 하는, 잠깐이라도 쉬면 큰일 날 것처럼 미친 듯이 실기를 하는 것으로 이제... .. 그것을 채우고 있었는데, 그것만 갖고는 안된다는 걸 내 자생적으로 알은거에요. 왜 그리지? 뭘그려야되지? 왜그리지? 왜 이렇게 그리지? 이런 생각이 나는 늘 있는데, 주변을 보면, 다 정해진대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거에요. 누군가가 정해놓은 것을 하고 있는 거에요. 난 그게 너무 이상했어요. 그래서 왜 해야하지, 이생각 때문에 아주 미치는줄 알았어요. 근데 그- 암흑과 같은 그 시기에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홍대안에 사실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 처음엔 연극반에 들어가서 연극도 하다가, 거기서도 이제 못찾았어요. 그러고서 나와서 탈반 있다 그래서 가서 보니까, 있다그러는데 없어(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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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봉진/봉준이형?이 있다고 해놓고서 학교안에 동아리가 안 된거야. 할려고 했으나, 없어. 그래서 이제 그때 만약에 ?봉준이? 형이 탈반을 만들었으면 내가 조금 편했을지도 모르는데, 없는거야. 그래서 이제 그런 상황에서 음...답답하니까 공부를 시작했는데, 나랑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주변에 이제 선배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이제 ?임명순?, 또 임정희, 그리고 서울대에 한 친구, 그리고 홍대에 손영남, 이렇게 네명이, 나까지 다섯명. 그래서 다섯명이 모여서, 이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하는걸 확인하면서 서로 놀래고, 공부를 하기 시작한거죠. 그래서, 경제사, 역사, 미학...(웃음) 근데 이제 지금 상상할 수 없는게, 그때는 모든게 금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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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살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하면, 서울대에서 공부하는 철학 동아리가 있어요. 그 사람들하고 그냥 아주 자발... 자연스럽게 연계를 해서, 그들이 독일어로 된 원본을 번역을 해오면 우리는 일주일에 한번씩 몰래몰래 만나가지고. 번역을 해오면, 우리가 같이 토론해. 근데 걔네들은, 실기를 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번역을 해오면 우리가...이런 실기적 관점에서도 얘기를 해보고 같이 토론을 하는 그런 모임을 하나는 했고. 그다음에 또하나로는, 내가 그때 사실 이런 그룹을 만들기전에 한 1학년 2학년때 너무너무 깜깜한 암흑기를 보내면서, 그때 막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그랬어. 어떻게 이놈의 학교에는 선배라는게 하나도 없냐. 나중에 선배라고 나타나면 내가 그냥 아구창을 날리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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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사실 선배가 필요했어요. 근데 내가 이제 그런 공부를 하면서 내가 너무 2년동안 그 답답했고 이런 것을 겪을 후배가 있을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래서 후배들 눈여겨 봤죠. 그런걸 답답해하는 애들이 있는가 없는가. 그때 이제 내눈에 세명이 들어왔어요. 그게, ?이은홍?, ?성유수?, ?이정인?, 그래서 우리 셋이 걔네들 셋하고 나하고 같이 이제 만나서 공부를 시작했죠.

 

Q. 그러면 79년 봄에 휴학을 하신거잖아요.

 

A. 그쵸 4학년 1학기때 휴학을 했으니까.

 

Q. 4학년 1학기니까. 휴학을 왜하셨어요?

 

A. 아 휴학은, 내가 4학년 될 때까지, 홍대에서 탈반이 그냥 있다고 말만들어가지고, 없는거에요.

 

Q. 실제론 존재하지 않았다?

 

A. ,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나는 이제 무슨 생각이 들었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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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암흑과 같은 그...깜깜한 몇 년을 보냈기 때문에 사실 그때 진짜 이러다 내 미치치 싶을만큼 고통스러웠거든요. 뭐냐 이게 도대체. 예술은 뭐고. 뭐야 이게? 이런것 때문에. 근데 나처럼, 내가 그런걸 겪고서 나가는데 나처럼 그런 애들이 또 생길거 같은거에요, 많이. 그게 제일 걸렸어요. 졸업할때가 됐는데.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 탈반 하나만 만들어 놓고 가면 그런 애들이 거기와서 찾을 수 있을거 같은거야. 나도 거기가서 찾았다가 없어서 이렇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그래서 이제 보니까 왜 탈반이 이렇게 안만들어지지? (웃음) 보니까 이제 동아리를 만들려면 지도교수가 있어야 되는데, 탈반하면 다 데모한다라는 그 공식이 있어서, 다른 학교에서, 서울대 연대 고대 다. 그러니까 홍대 학교에서는 탈반의 지도교수를 할 교수가 없는 거에요. 아무도 안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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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이 형도 하다가 그게 안돼서 막혀서 지금 못하게 된거 같애, 만들고자 했으나. 그래서 이제 제가 지도 교수를 찾아야지. 그러고서 이제 홍대 교수 명단을 착 물색을 해봤어요. 미대교수들은 안되고, 글 쓰는 교수를 찾자. 그래서 소설가, 국문학과 교수 한분과, 그때 마광수 선생이 전임강사였어요. 근데 내가 제일 먼저 찍은 사람은 마광수였어. 아 이사람은 뭔가 새로운걸 할 수 있을거 같다 해서(웃음), 마광수한테 갔는데, 마광수 선생이 연극반 지도 교수를 맡은 거에요. 근데 내가 있던 연극반을 빼올 순 없잖아. 그래서 이제 포기하고 찾은 사람이 소설가 ?서종태/서정태?. 그래서 이제 서종태 선생한테 갔는데, 그때 이제 어떻게 갔냐하면, 내 친구둘, 여자애들이 둘이 갔는데, 하나는 홍대 최고 미인이고, 하나는 홍대 최고의 어린왕자 같은 애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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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 제가 이제 좌청룡우백호 걔네들하고 같이 가서, 나는 무슨 얘길 했냐하면, 요약하면. 교수님, 지도교수가 필요하고 탈반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런데, 탈반하면 데모한다고 생각해서 도장 안찍어주실거죠? 근데 제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전 제가 확실하게 알기전에는 아무 행동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근데 저는 지금 아는게 별로 없어요. 그 다음에, 전 겁이 많아서 데모를 못해요. 1년동안 아무일 없을 겁니다(웃음). 그렇게,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근데 내 옆에 있는 좌청룡 우백호 둘이, 교수님 얘 말은 믿으셔도 됩니다(웃음). 옆에서 훈수를 들었어요. 몹시 고민스러웠겠지. 근데 나는 진심을 얘기한거에요. 그 사람을 속여서 도장찍으려고 한게 아니라, 실제로 내가 탈춤도 제대로 모르고 이론적인 점도 책 몇권 읽은 것 밖에는 없고. 그다음에 누구한테 체계적인 지도를 받은 것도 아니고. - 혼자서 고민하고 쫒아다니는데 내가 무슨 행동을 하겠냐고 아는게 없는데. 그대로 얘길 한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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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도장을 찍어주셨어요(웃음). 그래가지고(웃음). 그래가지고 탈반이 생긴거에요. 그래서 내가 초대 탈반을 하고, 그 뒤에 김주영이가 하고. 그다음에 조영일이가 하고.

 

Q. 그럼 ?김홍기/김봉진? 선배님은?

 

A. 선배는 그 우에 만들려다가 못만들었지. 탈반의 원조지 원조 그냥(웃음).

 

Q. 원조긴 원존데 탈반에 그럼 그 뒤로 안들어왔어요? 같이 활동은 했어요?

 

A. 그냥 후배들이 선배라고 생각하고,

 

Q. 활동은 같이 했어요?

 

A. , 활동은 그때 뭐 바깥에서 문화활동하고 이럴 때 그냥 큰 틀에서 같이하고 그런거지. 학교안에서 공식적인 동아리로는 내가 만들고 초대회장을...이 겁만은게 이게 이러는 거죠(웃음).

 

Q. 그럼 79년에 이제...

 

A. 아 그 다음에, 그렇게 해놓고 나니까, 얘기할 때 나는 탈춤도 제대로 모르고, 필요해서 만들어놓긴 했는데 아무것도 아는게 없는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하면, 고대 음악대를 찾아갔어요. 내가 왜 연대를 안가고 고대를 갔나 몰라. 그 먼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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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내가 농악대가서 대장 나와(웃음), 농악대 거기 많아요. 그래가지고 내가 거기고 까놓고 얘기했어요. 내가 홍대에서 탈반을 만들었는데, 내가 춤도 못추고, 민요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는데, 니네가 와서 좀 가르쳐줘야 되겠다, 그랬어요. 걔네들이, ‘좋아그러고 와서는 일주일에 두 번씩 와가지고(웃음), 걔네들이 다 가르친거에요. 그러고 나는 내가 모르니까, 아 나는 그 전에. 깡통은 아니에요. ?운율탈춤/운을탈춤?, 3학년 때인가 운율 탈춤 전수회 가서, 거기서 몇 개월 배웠어요. 운율탈춤을. 그래가지고 전국 민속 경연대회에 운율 탈춤을, 2,3개월 배우고나서 운율탈춤 대표팀에 껴가지고 전국 민속 경연대회도 나갔어. 78년도에. 근데 대회가 나흘인테 이틀하고나서 박정희가 죽은거야. 그래서 대회가 폐막하고 올라온적 있거든요.

 

Q. 박정희 이제 죽고. 시대가 어수선해졌잖아요. 그리고 80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근데 이제 탈반도 만드셨는데, 80년 고개를 넘어가는 즈음에, 우리 미학이나, 우리 미술, 우리 문화, 이런거에 관심이 많았던거 같아요. 왜냐하면 이제 그 민화, 불화, 이런거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그걸 또 공부하러 들어가셨잖아요.

 

A. 그게 제가

 

Q. 그게 졸업하고 가신거에요?

 

A. 아뇨 휴학한 상태에서. 휴학은 내가 왜했냐하면 아까 탈반 만들어놓고 나서 이제 그것도 그렇고. 또하나는, 졸업하려고 보니까, 내가 너무 아는게 없는거에요. 그래서 이런 식으로 졸업을, 내가 나를 못시키겠는 거에요. 그래서 휴학을 했어요. 그래서 이제 들어간게 봉원사, 이대 후문에 있는 봉원사 앞에 작업실을 얻어서,

 

Q. 아 작업실 거기다 얻으신거에요?

 

A. 어 아예. 절 옆에다가. 살았어요 거기가서. 그래서 이제 우리 여자 다섯명이...

 

Q. 그래서 그 공부를 하기 위해 작업실을...

 

A. , . 여자 다섯명이,

 

Q. 누구누구에요?

 

A. 아까 얘기했던 윤명순, 임정희, 서울대 친구하나, ?배연경?이라고 있어, 지금 조각하는.

 

Q. 그래서 임정희 선생님이, 그 얘기를 저한테도 하시더라고요. 두렁 창립할 때 나도 기여한 바가 있어 그러시더라고요.

 

A. 두렁 전에 우리가 이미...

 

Q. 모임을 가졌었으니까.

 

A. . 이미... 2.. 2년 이상 전...

 

Q. 그게 근데 그 모임을 어떤 동아리나 이런 두렁처럼 정식 이름을 가진 모임은 아니었던거죠? 스터디 그룹?

 

A. 여자 다섯명이 모여서 아예 다 집을 나왔어요. 완전 공동 생활을 한거에요.

 

Q. ?

 

A. 집을 나왔다니까 다.

 

Q. 그럼 다섯명이 같이 산거에요? 그것좀 적어놔봐. 적어놨어?

 

A. 그래서, ?손용남/손영남?까지. 홍대 네명에 서울대 하나 이렇게 같이 했는데, 작업실에서, 하루의 시간들을 서로다 공유하는거에요. 먹고자는 시간만 빼고서는 전부 공부. 끝장을 보자. 예술이 뭔지, 우리가 끝장을 보자. 이렇게 한거에요.

 

Q. 그럼 봉원사를 그냥 막무가내로 찾아가진 않았을거같고.

 

A. 방을 얻었죠 거기에.

 

Q. 방을 얻고.

 

A. . 거기다 방을 얻고. 나는 내가 ?????라고. 그 전에, 어떻게 했냐하면, ... 도대체 우리게 뭐지? 전부 주변에 어떤 서양의 사조들을 쫒아가는 걸로 홍대가 이뤄지고 있잖아요. 대세가. 그거는 아닌건 알겠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모르는게 갑갑한거지. 그걸 알면 내가 이렇게 고민이 안되는데. 아닌건 아는데 방법이 없어.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그걸 찾느라고, 진짜 미친년처럼 박물관에 다니면서 보고, 도대체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했지? 우리는 뭐지? 이런, 이런 막연한 깜깜한 상황속에서 그냥 다니다가. 내가 탈춤을 한 이유도 그거에요. 예를 들어 그때도 이제 소수의 운동권 학생들이 있었고, 일반 학생들은 그 소수의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 그 다음에 막연한 불안, 양 갈래가 다있었어요. 그래서, 막연한 동경을 쫒아가거나, 막연한 불안으로 떨어지거나 둘중에 하나야. 근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둘다 아니다. 왜 저렇게 해야되는지를 알아야지 움직이는거 하나와, 두 번째, 사람마다 장기가 있고 전공이 있고 특성이 있잖아. 근데, 그때 운동권은 어떠냐면, 그걸 다 무시하고, 워낙 소수니까. 목숨건 투쟁을 해야되는 거에요, . 그러니까, 음악하는 사람도, 공대도, 미대도 다 상관이 없어, 전공이. 도리어 그건 다 버려야 되는거고. 전부다 다 목숨건 전위투쟁을 하고 지하투쟁을 해야하는 상황인거에요. 나는 그건 아닌거 같은거야.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림을 아무것도 아닌거라고 버려버리면, 그러면 도대체 예술이 존재할 이유가 뭐야? 난 그것도 너무 궁금했어요. 그래서 그 답을 찾고 싶었어. 그래서, 그래서 공부를 한거에요.

 

Q. 근데 이제 그때 당시 생각을 해보면, 70년대 홍대, 서울대 보면, 대체로 주류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익히 잘 알 듯이 뭐 어쨌든 단색화가 거의 모든걸 휩쓸고 있었고...

 

A. 그런 그림을 안그리면 졸업도 안시켜줬어요.

 

Q. 졸업도 안시켜줬고, 그게 굉장한 파워였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 문화, 우리 미술을 스터디하고 그걸 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당돌한 모험이거나 아니면...

 

A. 미친년이죠 미친년.

 

Q. 그렇죠 아예 미술계에서 작정하고 나는 그냥, 뭐라고 할까, 소수자가 되는 그런 것이었을텐데

 

A. 그쵸. 스스로 이제 왕따를 자처한건데, 그냥 이건 웃기는 얘기지만, 나는 고등학교때 모든 재료를 다써봤어요. 워낙 출중한 스승님 밑에서 있었기 때문에(웃음), 나를 작가 대접을 해주셨어 고등학교 때부터. 그 선생님은 나를 발굴해서, 날 작가로 고등학교때 만들어주신거에요. 모든 재료를 다써보고 들어갔어요 나는. 그니까 대학교 와서, 실기에 있어서는 홍대선배들이 대단하게 인정을 해주고, 이제 그쪽으로 쭉 갔을 때, 스스로 왕따가 되지 않고 그쪽에서 성공할 수 있을, 충분히 있을 조건이었어요 솔직히. 그런데(웃음), 데생할 때는 최고 점수를 받았거든(웃음). ?윤형근/윤용근? 선생이, 데생을 우리 지도 하셨을 때, 완성하지 않은 내그림을 최고 점수를 주셔서 내가 찾아갔었어요. 다른애들은 완성했는데 나는 완성도 못했는데 왜 최고 점수를 주셨냐. 당돌하지... 선생님이 딱한마디 하셨어요. 나는 선을 보는걸로 무슨 그림이 될지 알아. 그래서 속으로, 어머, 대단한 작가시구나 이러고 왔다니까. 그걸 확인하러 간거에요. 그래서 내가 홍대 다니면서 유일하게 인정한 분은 윤형근 선생이에요. 작가로서. 난 그분이 그런 고초를 겪으신 분인지 그땐 전혀 몰랐어요. 최근에 알았어. 그래서 왜 그때 그분과 통하는데가 있었는지 최근에 확인한거에요. 근데, 그런데 이제 아닌거를 그런 느낌들이 자생적으로 나는 누구에게나 사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근데 그게 느껴지는데 어떻게해. 그니까 찾아가야지. 도대체 다른 나라에선 어떻게 했는지, 남들은 어떻게 했는지, 옛날사람들은 어떻게 했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전통이라는게 뭣땜에 이어져내려오는건지 너무 궁금하잖아요.

 

Q. 근데 전통에 여러 가지가 있었을텐데, 굳이 불화를 선택을 한단 말이에요.

 

A. 왜냐하면 민화도 끊어졌죠. 그다음에 풍속화도 끊어졌죠. ?접맥?, 인간의 손으로 전달되는게 없는거에요.

 

Q. 육화전승이 안되니까.

 

A. 어어어. 그래서 내가 탈춤을 한 이유도 그거에요. 그림쟁이는 눈으로 봐서 자극을 받는게 제일 좋거든요. 그다음에 직접 스승과 함께 연마하는게 제일 좋아요. 근데 보니까 그게 다 끊어진거야. 이제 어쩌지? 그래서 느낌을 전달받는게 중요하다, 그래서 몸으로 남아있는거, 그래서 난 탈춤에 관심을 가진거에요. 그래서 한거고. 그다음에 그래도 손으로되는걸 찾아야되는데 뭐가 전승되는게 있지? 박물관을 아무리 다녀도 말하는것처럼 머나먼 남의 나라야 이거, 전통도. 그래서, 멀긴 마찬가지야 서양거나 이거나 멀긴 마찬가지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몸으로 전수되는 걸 찾아보니까 탱화밖에 안남아 있는거에요. 그래서 찾아갔지.

 

Q. 그 스님이 그걸 직접다 받아주셨어요?

 

A. 그래서 나는 스님한테가서 옆에서 보고, 그 다음에 내가 경계한건 뭐냐하면 전수자는 안된다. 탱화선의 맛만 보고 나오겠다. 1년동안 맛만 본거에요. 그림을 맛보고...

 

Q. 이제 그런, 그쪽에 전수자로서 그런 전통의 장인에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것이 내 몸에 익혀지고 그것을 가지고 활용할 새로운 미술을...

 

A. , 이게 뭐지? 그것만. 그것만 느끼려고 한거에요.

 

Q. 얼마정도 걸렸어요? 그 시간이?

 

A. 1년 살았어요 거기에. 매일 가서 그렸죠.

 

Q. 그럼 모두가 다같이가서...

 

A. 아니 나만. 다섯명이 갔는데, 다섯명이 공부를 같이하고, 작업도 다 해요. ?윤정/은정이?는 글쓰고. 작업은 안했지. 글쓰고... 나머지들 주일이 밥먹고 공부하는 게 일이었어요. 근데 나는 그중에서 시간을 빼서 가서 실기를 하고 온거죠.

 

Q. 그 훈련이 갖는 의미 이런건 뭐였어요? 1년정도면 맛만보자가 아닌 정도로 가신거잖아요. 1년정도면 그렇지 않아요?

 

A. 스님이 붓도 만들어주시고, 그 붓을 제가 계속 썼죠. 이런...그 탱화에 선을 그을 때, 어떤 마음으로 그어야하는지를 어렴풋이 조금...맛본거죠.

 

Q. 그 서양식 석고 데생이라든지, 학교에서 배운 그 선과는 완전히 다른 선이잖아요. 이건 이제 붓을 써야하니까.

 

A. 그것땜에 문제인데. 내가 왜 석고데생이나 서양식 미술기법을 열심히 했다 그랬잖아요. 그걸 잊어버리는게 더 힘든거에요. 연마하는 것보다. 근데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면분할로 바라보는 시각을 버리는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왜 가서 전수자가 되지 않으려고 했냐하면, 그런 방식이 몸에 익을까봐. 그래서 그 방식으로 세상을 볼까봐. 그렇게 안보려고.

 

Q. 그러면 80년 상황은, 서울의 봄도 있었고, 본격적인 전두환에 저항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고, 1년간 그런 과정을 수행했다하더라도 시대적 그런 격변의 현장을 어쨌든 또 보고 계셨을 텐데...

 

A. 어떻게 됐냐하면, 그때까지가 이제 공부를 해서, 판단력을 기르고 이러는 것에 집중을 했잖아요. 내적 연마를 했는데, 80년 광주항쟁이 딱 터진거에요. 그때 공부를 딱 놨어요.

 

Q. 그 소식이 들려왔군요 서울에.

 

A. 아 그럼요. 같이 옆에 있었던 사람들이랑 이제 관련되어 있고. ......이것도 그림이 한 장도 안남아 있긴한데, 다섯명이랑 어떤일이 있었냐하면, 여기서 1년쯤 되었을 때, 홍대교수 한분이, 건축과 교수 한분이, 미국에서 계시다가 한국에 들어오신분이 계세요. 근데 그분이 한국의 대학생들이 공부를 제대로 안한다고 굉장히 실망을 하셨는데, 우리를 보고 희망을 얻었다면서 우리 작업실에 자주 놀러오셨어. 근데 겨울에 우리가 연탄난로 이만한거 켜가지고 바들바들 떨면서 공부하고 이러는거를 보고서는, 서초구에 소라아파트라고 멘션아파트를 그분이 설계를 하셨어요. 최초로. 그래서 설계비로 아파트 두채를 받으셨어요. 한 채는 팔고 한 채는 자기가 쓰는데, 우리한테 그 한 채를 무상으로 줄테니 거기와서 작업실로 쓰라고 하신거에요.

 

Q. 그래서 그쪽으로 다 옮겨 갔어요?

 

A. 제가 어떻게 했냐하면, 그쪽으로, 여기서 일년 마무리하고 그쪽으로 옮겨가서, 광주항쟁 직전이죠. 옮겨 가가지고, 거기서 다시 또 아예 집을 나서다가 다 같이 살면서, 같이 공부를.. 심지어 어느 정도냐면 연애하는 것도 다 공개했어 다. 연애하는데 시간 많이 쓰면 안돼. 혼나(웃음). 그정도로 이제 시간을 아껴서 공부를 한거에요. 근데 거기서 돈도 같이 벌었어요. 맨션아파트의 애들에 미술지도를 했는데 서울대 홍대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 다섯명씩이나 가르친다고 하니까 엄청 많이 와가지고(웃음).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그돈이 다 어디로 갔냐, 유인물 만드는데 이런데로 갔는데, 그 거기가 아지트가 됐죠. 이른바 운동권의. 그래가지고 광주항쟁이 터졌을 때 우리가 뭐를 했냐하면 거기서, 사람들이 무서워서 유인물을 안봐요. 길거리 가다가 길거리에서 체포되어서 들어간 사람 많았어요. 유인물 한 장만 있어도 들어갔거든. 그래서 무서워서 유인물을 보지를 않아. 그래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했냐하면 글을 안보면 그림을 그리면 한눈에 보잖아. 탁보면 다 알게 그려주면 되잖아. 그래가지고 광주항쟁을 알리는 판화를 만들었어요. 그래가지고 그거를 ?윤임형순 임정희 나? 셋이서 밤에 작업을 밀은 거에요. 둘은 빠지고. 거기서 갈등이 생겼어요. 그런거 행동은 안하겠다는 쪽과, 행동을 해야한다는 쪽과. 그때 정리가 된거에요. 그래서 둘은 빠지고, 셋이서 한거죠. 그래가지고 이제 그거를 다른 유인물과 이걸 넣어서 우편으로 다... 그때 ?서울대문? 뭐 탈패들, , 그선배들하고 지금은 다 뭐뭐뭐들이 되어 있지만. 그분들하고 이제 그 작업을 해서 다 연인으로 팔짱끼고 다니면서 우채통에다가 곳곳에 다 우체통에 집어넣고 다녔죠.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이제 저는 ?관재수?도 없고 무슨일을 할 때 완벽하게 증거인멸을 잘하는 타입이라가지고(웃음), 그 판을 다 쪼갰어요. 그다음에 모든 기구를 다 분해를 한 다음에, 우편물 넣으러 다니는 사람들 부분부분적으로 다 나뉘어져가지고 각 부분에 쓰레기통으로 다들어간거에요(웃음).

 

Q. 완전히 흔적도 없이...

 

A. 흔적도 없이 싹 그냥 없앴어요. 그러고서 이제 우리는 괜찮을거라고 생각을 했죠. 근데 어디선가 터진거에요. 근데 그날은 이제우리가 주말에는 당번이 있어. 주말엔 집에들 가. 근데 그때는 당번이, 임정희가 당번인 날이었어요. 임정희가 당번이었고, 그때 사귀던 남자친구가 그때 같이 있었는데, 밤에 총을든 한 30명의 남자들이 거기 쳐들어 온거에요.

 

Q. 그 방에?

 

A. 그 아파트에. 보안대인지 기무사인지 어딘지. 총을든. 그런데 같이 있던 남자가 지금은 모대학 교순데, 그 같이 있던 사람이 행시, 외무고시 둘다 합격을 한사람이에요. 학교 졸업하기 전에(웃음). 그래가지고 이제(웃음). 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이사람들이 띵, 정보가 잘못됐나 혼선이 약간 있는 사이에 연락들이 되어서, 다 토꼈죠. 그래서 그때 바로 그 자리에서 연행이 안되었어요 그 남자 덕분에. 그래가지고 나와서 연락이 되가지고 세명이 그때부터 도망을 다녔어요.

 

Q. 그럼 그시기 80년 지나 8182년 넘어갈 때, 8210월에 두렁이 결성이 되는데, 그렇다면은, 제생각에, 추론을 해보건대, 뭔가 그런 운동 조직 혹은 뭐 그게 꼭 미술조직이 아니라 하더라도, 문화조직, 어떤 조직의 필요성같은게 있었던건가? 아니면 왜 그들이 그 결성을 하려고 결의를 했지? 이런 생각이 좀 들어요.

 

A. 어어 뭐가.

 

Q. 두렁, 두렁.

 

A. 두렁이?

 

Q. 8210월에 이제 결성을, 이제 발기를 한거니까. 그건 뭐냐하면 8182년 그 무렵이되면, 추론컨대 뭔가 이제 이런 개인으로, 3명의 여성들이 하던것과 달리 뭔가 다른 조직의 필요성 같은걸 느끼셨던건지.

 

A. ... 그림을 이제 보면은 그때 탈춤운동이, 민족문학 부흥운동 같은게 일어났던거, 그다음에 탈춤운동이 건진거, 이런 것들이 전체 운동권의 활성화에 결정적 역할들을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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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미술도, 제가 그동안 했던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래서 방향을 어떻게 가야 되는가 하는 캄캄한 암흑기에 내가 했던 행동들인 거에요.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고 부닥치고 공부도 했다가, 그러다보니까 어느날 이제 미술사, 예술사, 경제사가 관통을 하는 것을 제가 느껴서, 그때부터는 공부에 대한 열등감이 없어졌어요. 아 이게 이렇게 관통이 되는구나 하는게 이제 한순간에 정리가 되는... 고 순간이 이제 한번 있었고, 또 그 시점이 80년도의 상황과 맞아 떨어지면서 삶의 질이...아 뭐라 그럴까, 싹이 빡 튼 그런, 전혀 달라진 느낌 있잖아요. 그느낌을 이제 나는 그때 받았어요. 그래서 내 인생의 전기가 80년도 광주민중항쟁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고게, 하여튼 그 시점에 왔고요. 미술...나는 그림에 대한 열정이 내 삶의 주제였거든. 그러니까, 무슨 그림을 그려야 되는가가 공식적으로 그때 얘기되는 것은, 준비가 안되어서 그렇지 언제든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있었던거죠. 근데 이제 내가 혼자 있었으면 못했을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고, 토론이 되니까, 그리고 또 같이 구체적으로 한 사람과 알고 있는 옆에 사람도 있고, 이렇게 하니까, 그게 이제 굉장히 자연스럽게 고 시점에 모이게된거에요.

 

Q. 근데 이제 그게 보면 아까는 이제 그런 여성 분들과 스터디를 했는데, 결의를 할때는 ?김봉진? ?장진형? 이런 분들이 넘어간걸 보면, 그 탈패 활동이 계속 어쨌든 꾸준하게 지속은 되었던거 같고, 제가 보기엔.

 

A. 진형이는 탈패 아니고 연극반이었어.

 

Q. 연극반이었고.

 

A. 응 나한테 연극 가르쳐줬어요 1학년때.

 

Q. 그럼 그렇게 어떻게 모이게 된거에요? 그 사람들이.

 

A. 그니까, 이제, 우리 여자들 모임에서 이런 그림이 있어야 된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들이 두렁의 주역으로 이제 안갔잖아요. 이유가 뭐냐하면, 아까 내가 조사받았다고 그랬잖아요. 처음에 일을 도모할 때 많이 떨어져 나갔고. 조사를 받으면서 각자가 또 다르게 인생이 뭔가 달라진거에요. 조사 받고 그 이후에...것들이. 그래서 사실은 호랑이 아가리까지 들어갔다가 여차여차 과정 거치면서 나오게 됐는데, 그 이후로 이제 임명순은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Q. 그랬죠.

 

A. 그 다음에 임정희는,

 

Q. 독일로.

 

A. 독일에서 온 유학생과 결혼을 해가지고 독일로 갔어요. 나는(웃음)... 온갖군데가 지뢰밭 같은 ?새발?로 들어간거죠.

 

Q. 대학, 그러면 졸업은 몇 년도에 하신거에요?

 

A. 1년뒤에. 81년도에.

 

Q. 81년도에. 1년도에 졸업하고, 그러니까 졸업하고 82년이면은 바로거든요.

 

A. 그러니까 내가 졸업하고서, 81년도 927일날 또 결혼을 했어요. 결혼도 왜했냐 하면, 그게 빨리... 빨리 할 형편이 아닌데 왜했냐면...... 신경쓰이는 남자가 갈곳이 없는거야. 수배가 해제가 되가지고. 수배가 됐을 때는 그... 아무데나가서 그냥 ?돈가식서가식?해도 괜찮잖아요? 근데 수...정말 가난한 사람은 수배가 해제가 되고나면 갈곳이 없어...아무것도. 가정도 해체되고, 자기 기반도 해체되고. 그다음에 군대 강집 끌려갔다가 감옥살다가 군대갔다가 끌려갔다가 와가지고, 아무것도 자기거라고는 몸둥아리 하나밖에 없는 상태에서 수배까지 당했는데, 수배가 해제되고나니까 아무 것도 없는거야, 갈곳이 없는거야. 그래서 내가 결혼하면은 돈을 모아서 방이라도 하나 만들 수 있겠지, 그래서 결혼을 빨리 한거에요.

 

Q. 그럼 결혼도 빨리 한 상태에서 두렁 조직을 같이 도모한거네요.

 

A. 그니까, 같은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 그쪽은 문화운동을 이제 뜻을 두고 하는 사람이니까 같은 일이죠. 같은, 큰 같은 범준데 내가 미술에 특화된 부분이 조금 더 있는거지.

 

Q. 그러면 이제 그...

 

A. 다 도모했죠. 동의하고 도모하고 같이 했죠.

 

Q. 도모하고. 근데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은, 이제 그 4.

 

A. ?진영이/지명이?는 이런데, 사실 그때 초기에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근데 진영이를 내가 꼬셨지. 봉준이형하고. 누구를 데려다????그 얘기를 하다가, 진영이가 또 형이 아주, 서울대 운동권이에요. 그러니까 홍대에서 그런사람 찾기가 힘들거든. 진영이 만한 인물이 어딨냐 해서, 진영이를 땡겼지. 하자, 같이하자 막. 그랬는데, 막 안한대. 진영이가. 그다음에 또 뭐라그랬냐하면, 나는 결혼을 해가지고, 시어머니도 있고...그때 막 애를 낳았을 때에요. 왜냐하면 팔십...삼년....도 아이를 낳기 직전이었다. 막 배도 부르고 ?시어머니있고? 막 이랬을 때라서 83년도 2년에 이제 애를 낳았거든. 그니까, 내가 이 회장을 맡아서 할 형편이 못되는거에요. 먹고사는것까지. 가정 형편상. 그래서 내가 진영이 한테가서 그랬어요. 진영아, 니가 회장을 하면 모든 뒷바라지 내가 다할게. 니가 제발 회장을 해다오(웃음). 위로 모셨지(웃음).

 

Q. 그리고 83년에 첫애를 낳았는데 또 83년에 보면은 그 창립, 7월에 창립 ?예행전? 준비도 해야되고, 83년에 민청? 민청학련? 민청련?

 

A. 민청련은 83년도 930일에 결성이 됐죠.

 

Q. 결성이 또 되죠. 그러니까 7월에 창립 예행전,

 

A. 내가 생각하기도 싫어(웃음).

 

Q. 그래도 83년에 그런 굵직한 일들이, 창립 예행전도 ?예협에서? 만들어져야 되고,

 

A. 그때가 애 낳고서 한 4-5개월만에 이뤄진 일이에요. 돌도 되기 전에.

 

Q. 그러니까, 그러면 그 에오게를 계속 왔다갔다하면서 동료들하고 했을거 아니에요.

 

A. 나는 에오게를 많이 갈 수가 없었고요. 에오게는 우리 남편이 에오게를 만든 주역, 주역이어서, 봉준이 형이랑 다 고등학교 동창, 그래요. 대학교만 달리갔지. 그리고 탈패고. 그니까, 그리고 그때 이제 감옥 살고, 강집 당했다가, 나와서 합류한 상태였고. 합류할 때 이제 내가 그... ... 그때 그 서울의 봄때, 장산곶매라는 연극을 했어요. 서울지역에 대학생 탈패들 다 모여가지고. 황석영작, 그 다음에 그때 뭐 저기 ?탈하는? 선배 누구야 ?최이현/세열?선배도 오고 이렇게 해서 다 모여갖고 저기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 했어요. 그게 2월달이잖아. 2월달에 했어요. 5월달에 광주가 터졌는데 2월달에 그걸 했다고. 그게 또 하여간 굉장히 어마어마한 작업을 한거죠. 탈패들이 모여서.

 

Q. 그러면은 창립 예행전이 ?아지라판?을 이제 주제로해서 작업을 한건데, 하긴 그랬을거 같아요. 얘가 이제 갓난애기니까. 그래도 왔다갔다 하긴 했지만 작업을 또 했잖아요.

 

A. 작업을 그니까,

 

Q. 발표도 하시고. 창립 예행전에서.

 

A. 그때는 어떤 때냐하면 내가 그 강남에서 미술학원을 하면서 어린애들 미술을 가르친... 부잣집애를 그림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신고해서 이제 거기 내가 창고에서 살았어. 학원을 막 내서 가르치고 창고에서 나는 살고 이제 그랬었을땐데. ... 그런거 하면서 이제 창립 준비랑 이런거를 다했고. 민청련 만들때도, 우리 집이 옥상에 있는 단칸방이었는데, 거기 가끔이제 김근태 선배랑 주모자들이 거기 모여서 밤을 새면......그때가 이제 내가 83년도 2월에 애를 낳았는데, 이제 930일날 됐잖아요. 고 사이에 얼마나 많이 만나서 밤을 샜겠어요. 그때는 민청련만들 때 전부다 사실 목숨을 걸고 만들었어요. 이거 만들다가 우리는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만든거거든요. 그럼 방이 한칸인데 회의하니까 어떻게해요. 나는 애들 가르치고 집에 와갖고 우리애를 업고, 그러고서는 밤을 꼬박 옥상에서 ?비둘기들?하고 같이 밤을 새는거지. 그리고 아침에 사람들, 회의 끝날때쯤 밥을 해. 그러면 그 김근대 선생, 선배의 그 썰렁한 농담이. 나와서 내가 이렇게 밥을 하고 애 업고 밥을 하고 있는걸 보면 나한테 그래. 나는 세수 안한 여자가 예쁘더라. 그런 썰렁한 농담을 하고(웃음). 그렇게 이제, 고런 와중에 그 시기가 이제 전체적으로, 비공개, 비합법에서 합법으로 치고 치고 나오는... 그니까 사회운동의 싹을 보낸 시기고 민청련이라는게, 독자적인 운동권을 표방했다가는 옛날엔 다 빨갱이로 걸렸잖아요. 근데 민청련, 그래서 그전에 민청련 전에는 어땠냐하면 다 기독교 천주교 다 불교 다 끼고 했어요. 학교를 졸업한 운동권들이. 근데 민청련이라는 것은 그거 다 띠고. 독자적인 사회 운동권으로 선언한거거든요. 그러니까 전두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기 때문에. 다 죽을 각오로, 했고, 나는 큰애를 업고 그 창립하나를 판거고, 그래서 상징얘기를 우리 남편이 만들었는데,

 

Q. 그 두꺼비.

 

A. 두꺼비 얘기에요. 살신성인 얘기를 상징화 해서 만들었고, 이제 그 그림을 그리느라고 내가 애를 업고 자료를 찾으러 다니면서 낮엔 애들 가르치고. 부잣집 애들. 밤에는 그림 그리고(웃음).

 

Q. 그럼 그걸 직접 그리신거네, 두꺼비? 요만하게 해가지고 찍어서..네 거기 있으시죠. 그래요. 그러면은...

 

A. 그거 찍을 때는, 민청련 창립할 때 처음에 저거 500장 찍었는데 그날 진영이가 와서 나랑 둘이서 찍었어요. 진영이는 기억도 못할거야. 우리 학원에 와서 같이 찍었어요.

 

Q. 그렇게 보면 아까 그 후배들 ?이정희 임성숙 이은홍? 이런 후배들은 또 홍대 민화반하고 연관이 있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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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니 걔네들은

 

Q. 민화반 쪽은 아니었나요?

 

A. 아니 그... 그런건 없어요.

 

Q. 아니었구나. 그리고 이제 또 바로 84?이듬해/이른/이름? 창립전을 준비도 했잖아요 두렁이. 그거를.

 

A. 그래서 내가 그때 같이하는 공동창작 그림들을 ?주영이나 은홍이나 뭐 효순이?나 이런 애들이 이제 같이 참여해서 많이하고, 그 다음에 그때 들어온 신입 후배들 하고. 나는 그런 것을 할 형편이 못됐어요. 민청련에 ????????(웃음). 그다음에 집안에서는 시어머니의 화풀이를 내가 다 받아야 돼요. 개천에서 용난 아들 하나 키워놨는데 이놈의 아들이 맨 감옥이나 들락거리는 그 열불이 나서 매일 하는 것을 내가 다 받아야 돼요. 그런데다가 또 시어머니랑 같이 키우게 되고 맡겨놨다가 나왔다가 업었다가 막 이러니까... 그 다음에 먹고 살아야, 돈을 벌어야 되잖아요. 그 다음에 나먹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후배들의 활동비나 단체에 필요한 돈들도 마련해야 되잖아. 거의 미친년처럼 시간을 쪼개썼죠(웃음).

 

Q. 그럼 창립전에 나왔던, 그게 창립전이었나? 더 이상 물러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거는 일종의 자화상이네요?

 

A. 실존인물은 있어요.

 

Q. 아 그래요?

 

A. , 그게 인천....

 

Q. 본인이 아니시고?

 

A. 실존인물이 내가 아니고, 그 실존인물이 있어요. 근데 걔나 나나 그냥 막상막하에요. 근데 걔는, 초등학교 졸업하고 인천에 와서 공장노동자를 했는데, 고아인 남편하고 이제 만났는데 그 남편이 블랙리스트 사건에 걸려서, 인대가 끊어진채 연행이 됐거든요. 그래서 그때 그 블랙리스트 사건을 주제로 제가 그린거고, 거기에 부처의 후불탱화 양식을 연결시켜서, 지금과, 과거와 미래와 이거를 한 화면에다 집어넣어서 그린거에요.

 

Q. 그 김봉준 선배님도 봉원사를 가셨다고, 배우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같이 하셨어요?

 

A. 아뇨 따로 했어요.

 

Q. 따로 하셨어요?

 

A. 나는, 봉준이 형은 여러 가지 많이 했을 거에요. 근데...몰라 나는 봉준이형하고 같인 안했어요.

 

Q. 같이 한거는 아닌데.

 

A. 봉준이형하고는 공부도 같이 안했고. 그림도 같이 안그렸고. 서로 알기는 하는데. 두렁하자고 만난거지(웃음).

 

Q. 근데 두렁이 이제 표방했던...

 

A. 같은 과야 같이 배웠어.

 

Q. 그러니까. 표방했던 미학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하는게 많았고. 그리고 두렁에 이제 그 창립전에 걸린 ?조선 순화 민중 탱화? 같은걸 보면 어쨌든 ?괴화?를 변형해서 그런 그림을 그렸잖아요.

 

A. 봉준이 탱화 뭐 많이 했죠.

 

Q. ... 그럼 두렁이 그런 공동작업을 하거나 두렁의 미학을 산그림 산미술로 정립을 했는데, 여기서 얘기하는 산미술론 이런거 다 집필은 김봉준 선배님이 하셨다고 하지만 그래도 두렁 내부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합의나 어느정도 서로가 의견을, 의견이 통했기 때문에...

 

A. 그쵸 왜냐하면 많이 통한거죠. .

 

Q. 그쵸 이견을 별로 없었던거죠, 그부분에 대해서는.

 

A. 그쵸. 이런 방향으로 해보자. 그건 사실 가설이잖아요. 그니까 이런 방향으로 해보자, 그래, 괜찮을거 같애. 그렇게 가면 뭔가 답이 나올거 같애. 이런... 합의였다고 보면되죠.

 

Q. 두렁 초기 그런 산그림 산미술론에 대한 물론이제 김봉준 선생, 선배님이 했지만, 두렁이 추구하고자하는 거에 대해서는 두렁 창립 맴버들이나 또 후배들이나 크게 그거에 대해서는 없었던거네요 그죠?

 

A. 어떻게 보면 두렁은 각자 이렇게 하던 사람들의 연합이에요. 그러고 봉준이 형은 그런걸 하고 싶으니까 그런걸 많이 한거고, 각자가 여러 가지 생각을 가지고 여러 가지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모인거고, 또 아까 진영이도 얘기도 했지만, 동의를 백프로 한게 아니라 반쯤 들어와 있는 경우에는 확 잡아땡기기도 하고. 많이 잡아 땡겨서 들어왔지. 그때. 이렇게 하는데, 이렇게 하는게 맞아! 같이하자! 이렇게 잡아땡겼어요. 우선희도 땡겼고, 진영이도 땡겼고, 그래서 이제 우리가 좀...

 

Q. 혹시 창립전 했을 때 기억이 좀 나세요?

 

A. 나죠.

 

Q. 그러면 그, 흥미로운거 몇가지가 있어요. 창립전 사진기록을 보면. 그러니까 예행 전때는 탈쓰고 연희하는 장면만 몇 개 있지만, 그래도 그거는 마당에서 굿하는 장면이니까. 그 장면 속에 등장하는 몇 가지가 좀 궁금한게 하나가, 1984년에, 물론 83년에 예행전을 했으니까, 그 다음에 창립전인데. 왜 창립 예행전을 따로 했을까. 이건 또 모든 미술 그룹에서 보면 예행전이라는 것도 처음이거든요. 창립전을 바로 하는데. 결성하고 창립예행전하고 창립전하고. 그래서 두렁은 결성은 82년인데, 예행전 83, 84년 창립전. 근데 이런거죠. 다 지나고나서 제가 그래서 물어보는거에요. 84년이 동학 90주년이었거든요. 그 그림에 ?동학농민신상이?걸려있고, 여기 이제 줄에 보면은 ?시천주조화전영세불명만사지? 동학의 주문이 걸려있고. 심지어는 ?시월시월?에서 그 ?수원에 검결 ?노래가 걸려있어요. 그래서...

 

A. 그거 저기 장산곶매에서도 그걸 우리 남편이 칼춤을 그걸로 췄어. 지금 그 주문으로 해가지고.

 

Q. 아 그러면 두렁...

 

A. 그 공유, 탈패들에게 공유된 문화에요 그게.

 

Q. 아 공유된 문화였고. 그리고 동학이라고 하는 그 어떤 정신에 대한,

 

A. 것을 살리고자 하는 게 공유된 그 시대의 우리의 문화에요.

 

Q. 그러니까 두렁만이 아니라.

 

A. .

 

Q. 이쪽 연희쪽에서는.

 

A. 연희쪽에서는 이미 그렇게 공연도 다. 장산곶매에서도 그게 나왔다니까.

 

Q. 그쵸 네.

 

A. 그니까 우리남편은 느닷없이 제대해가지고 구경하러왔다가 잡혀갖고 칼춤췄어.

 

Q. (웃음) 칼노래에 칼춤 추셨군요.

 

A. 어어.

 

Q. 그러면 두렁, 두렁도 보면 그 산미술 뒤에 보면 전봉준. 동학농민 신상 이런게 그려져서 걸린걸 보면, 한편으로는 그런 동학에 대한 단순히 이것을 이미지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동학이 꿈꾸었던, 사회개벽에 대한, 사회변혁에 대한 꿈들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거를...

 

A. 그게 두렁이, 미술운동, 기존의 미술운동과 전혀 다르게 시작했는데 도리어 뿌리가 탈춤쪽하고 같다고... 거기서 출발한 그런 여정들이 나는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보는거고. 봉준이 형도 탈춤 연희쪽에서 잔뼈가 굵었잖아요. 탈바가지 만들고 뭐 이렇게 하면서. 그리고 그 탈춤 연희쪽에는 각 대학의 탈패들이 다 모였고, 그들이 다 운동권이었고. 그리고 그들이 다 빵잽이고. 이런 그 시대에 20대 젊은이들의 뜨거운 문화가 있었던 거에요. 반체제 문화가.

 

Q. 근데 이제 전시를 오픈하는 날, 일반적으로 전시를 오픈하는 것은 어쨌든 탈패출신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충분히 설명은 드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해보면, 어쨌든 인사동에서, 경인미술관에서 정식 갤러리를, 전시실을 빌려서, 오픈 하는날 길놀이를 해서 고축을 하고 굿까지 했단 말이에요. 이건 또 뭔가.

 

A. 처들어 간거지. 기존의 갤러리라는 고정된 문화에 우리가 새로운걸 갖고 처들어간거에요. 이렇게 거기다 갖다 해보는걸로. 그것 때문에, 문화패들이, 젊은 문화패들이 다모였지 그거보러. 그리고 예행전이라는 것도 사실은 보면은 그림을 걸어놓고 나서, 그때 각 문화패들이 모여서 그림갖고 토론들을 했어요. 그림이 어떻게 가야 되느냐. 이게 미술패들만 한게 아니라, 그림의 형식이 어쩌고 이게 아니라. 주로 탈춤 하는 사람, 뭐 민요, ?유인열?도 있었어. 뭐 민요하는 사람, 뭐 춤추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에오게에 다 모여있었잖아요? 그니까 그 종합 문화패들이 우리가 새롭게 주장한 그림을 보고서, 그들의 시각에서 뭐라고 한마디씩 미리 다 걸러준거지. 그 토론회를 하느라고 예행전을 한거에요. 그래서 우리 나름대로 이론을 우리의 종합적 시각에서 한번 정리해서 세우는 거. 그러고 나서 나간거야. 이게. 그냥 나간게 아니라.

 

Q. 두렁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한거에요? 근데 사실 그때 당시에 보면 다 세련되게 짓잖아요. ST, 뭐 무슨 아방가르드다. 혹은 뭐다 이렇게 하는데.

 

A. 그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거를 한 거에요. 그러고, 보면은, 우리가 이제 하는게 삶과 그 다음에 일과,

 

Q. 놀이.

A. 놀이와, 예술과, 그니까 그 안에서 예술이 있다. 그런 것을 주장을 하잖아요. 그니까 두렁이라는데가 그런 데 아냐, 논두렁 밭두렁이 바로 그게 모인데잖아요. 그런데다, 더군다나 촌스럽기까지 하지. 딱맞는거야 그게. 그래가지고(웃음). 이런 저런 얘기들이 나왔는데 그 두렁이라고 했을 때, 다들 그런 취지에서 합의를 했죠.

 

Q. 그럼 산미술이라고 하는 것은.

 

A. 그럼 딴건 다 죽은거냐(웃음). 바로 그렇게 생각이 되잖아요(웃음). 그런 주장을 하는거지. 삶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 과연 살아있는 예술이냐하는 주제를 가지고 늘 얘기하고, 그런 취지에서 주장을 하고 그림을 그렸잖아요. 난 그것에 그냥 하나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봐요.

 

Q. 그 어쩌면은 그래서 사실 84년에 창립 미술전 이런 전시 맥락하고도 두렁의 취지하고도 잘 맞아 떨어진거 같아요. 그리고 이제 85년에 보면은 이제 20대의 힘전, 그런 그 탈취 사건이 있고.

 

A. 85년 전에 그얘기를 해야 되는데.

 

Q. 어떤거요?

 

A. 그 두렁 만들기 전에, 효숙이 정임이 은홍이 이렇게 나랑 했던 작업이 하나 있어요. 80년도부터 시작해서 했는데,

 

Q. 그게 신명으로 이어지는 그건가요? 그 흐름이?

 

A. 그 흐름이...은홍이는 이제 신명으로 이어졌죠. 근데 신명으로 이어진거는 이제 주형이 형일이 이렇게 홍대 탈반에, 내가 1대고 23대들이 다 신명으로 이어지면서, 노동자 문화를 이제 새롭게 만들어내는 일들을 하면서, 공동체 놀이 책이 이제 나오게, 결과물이 하나가 공동체 놀이인데, 각 노동현장으로 가면서 노동자들이 조직화될 때 노동자 문화패를 조직해서, 조합운동 활성화하는데 아주 직접 개입을 하게 되죠. 그래서 전국노동자문화운동 연합을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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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사실 그런거 하느라고 내가 전국구로 뛰었죠. 울산에도 갔다가 거제도 갔다가 하여간 그런...

 

Q. 그게 84년 후반 부 뭐 85년 넘어가는 그 시기인가요?

 

A. 그때부터 시작해가지고, 87년도 노동자대투쟁까지 쭉이어지죠.

 

Q. 아 쭉이어지는.

 

A. 에에, 그리고 그때 갈때도 어떤때는 이제 굿을 하는데 이제 ?이해주?선생을 끌고가기도 하고. 거제도 갈때는. 뭐 하여간 그런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처음 시작이 어떤거냐 하면 내가 한 쪽으로는 여성 5인 그룹이 이제 같이 살면서 항상나는 걱정이 그 뭐야 나같이 그런 암울한 암흑기를 참 견디기 힘들고,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거든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그래서 후배들하고 모여서 책도 보고, 이런저런 책을 보고 뭐 우리가 커리큘럼이 있어 뭐가 있어. 그러고 기존 운동권들이 하는 그런 커리큘럼 갖고 하는건 난 내 맘에도 안맞고 자존심도 허락지도 않고. 그래서 그냥 예술과 관련돼서 다양한 책들을 보면서 그냥 같이 이제 난상토론을 했어요. 내가 주도할 형편도 아니고. 그러다가, ....80년대 어떤걸 했냐면, ?서병선/박병선? 목사가 민중교육 연구소에서 소장을 하실땐데, 그 초보노동자의 감성 분류에 따른 민중교육론이라는 걸 논문을 냈어요. 그래서 노동자의 감정을 7단계로 나눴어. 슬플 때 화날 때, 뭐할 때, 뭐할 때, 7단계는 종교적 ??. 종교적 심성 이렇게 나눴는데, 그거를 이제 목사님하고 어떻게 하게 됐냐하면 나는 내 후배들이 나랑 책읽고 토론정도하는 거 갖곤 안된다고 생각을 한거에요. 그러고 80년도 이제 광주항쟁을 겪고 나서는 어떻게 실천하고 연결되는 것이... 책읽는거 만이 능사가 아니다, 라고 생각을 했기 땜에, 어떻게 실천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것을 그림말로 만들기로 한거에요. 그래서 그냥 그것도 그 이론만 갖고 사람들이 외워가지고 가서 그냥 가르치면 또 가르치기 식의 공부가 될거 아니에요. 실제 노동자 주체적인 교육, 교육방법이 없으면, 그 교육론이 현실화되기 힘들다는 거죠. 그래서 그것을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교육방식을 하는데 그림이 쓰일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거에요. 그러고, 우리애들, 후배들은 책은 몇권 읽었고 생각은 있지만 현실을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그때 우리 남편이 노동자들한테가서, 그때는 선배지 남편이 아니고. 노동자들한테가서 많이 탈춤을 가르쳤던 그 그룹들이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쪽에다가 요구를 했지. ... 그런 노동자들하고 우리 후배들하고 좀 만나게해서 하자. ?박병선?목사의 이것을 주제로 해서 우리는 그림을 그리게 하자. 그래서 다 합의를 해서, 목사님도 좋아하시고. 그래서 그 작업을 시작을 했어요. 그래서 그 해고 노동자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면, 그때 그 노동자들은 기개가, 대학생들 만나면 반죽여요. 가서 실컷 얘기듣고 욕도 먹고 이제 이러면서, 그 얘기들,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림그린걸 갖고 보여주고 그얘기를 또듣고 고치고, 이렇게 교류가 이루어진거고. 나는 그때 조건이 뭐였냐하면 목사님한테, 그냥 일반 대학생들이 현장 취업하는 것처럼 미대애들이 그렇게 들어가는게 과연 바람직할까하는 생각이 난 들었어요. 그 또하나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대 사람들이 하는,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뭐지? 그러면, 노동현장에 이 교육, 이 작업을 가지고 들어가서 교육하는 사람들한테 보조로, 보조강사로 따라서 넣어달라고 그랬어. 그러면 얘네들이 가서 보고 느끼는게 따로 있다, 그리고 또 뭔가 작업을 할 수 있을거다, 그 현장에 미술패는 없었거든. 탈패는 있지만. 그니까 현장에 미술패도 만들고 싶고, 이제 그렇게 한거에요. 그렇게 약속을 하고, 그래서 그 작업을 하고, 1년가까이 했죠. 두렁하기전에.

 

Q. 그니까 그게 아까...

 

A. 80년도.

 

Q. 몇장정도가 됐다고 했죠?

 

A. 100여장 정도 됐어요.

 

Q. 100여장 정도.

 

A. 그러니까 한 단계에 10장씩을 목표로 했거든. 일곱단계니까, 그림은 거의 두배가까이 그렸으니까 100장이 넘죠. 그 중에 70장은 1차 이제 선별을 했는데 참 안타깝게 분실이 됐어요.

 

Q. 그 작업이.

 

A. .

 

Q. 알겠습니다. 제가 가능하면,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책으로, 당시 허목사님 텍스트, 책이 묶인게 하나 있어요. 그때 당시에. 선생님 논문쓰신거 목사님, 그거 책을 제가 전시 뒤에 한번 찾아서, 책은 남아있어요. 허병선 목사님 논문만 모아놓은거. 근데 그 그림은 찾으면 참 좋은데. 그리고 85년 상황을 좀 보면 이제 85년 되면 두렁이 밭두렁 논두렁으로, 이제 현장조직하고 지원조직이 만들어지고, 또 그 무렵에 이제 신명으로 새롭게, 두렁.. 두렁에 ?반기?는 아니라 어떻게 말해서 독립적인 어쨌든 또하나의 그룹이 생기는 거잖아요?

 

A. 그니까, 그때는 미술운동 차원을 그냥 넘어서 버린거에요. 온갖 허드렛일이 다 쏟아지고, 그다음에 그때 이제 노동자들 다 현장에서 조직이 되고, 이런 부분이 굉장히 급박하게 돌아가는 부분들이 있어서, 모든 힘을 다해서 그쪽으로 이제 들어갔어야 되는데, 그쪽과, 또 하나는 이제 그...나같은 경우는 이제 개인적으로 남편이 민청련하고 나도 거기 가입을 했잖아요. 근데 그 민청련이라는게 새로운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해놓고 새로운 이정표를 새우는 일이라, 사실 그게 너무 벅차고 사실 목숨을 거는 일이었고, 그쪽 관계된 일이 하나 있고, 그다음에 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자 미술에 대한. 미술적 입장에서 보면 노동자 미술의 새로운 영역을 여는 건데, 크게 보면은 사실은 이제 노동운동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는거죠. 근데 기존의 노동운동은 예를들어 이런거죠. 정치투쟁도 마찬가지고, 문화패들을 대하는 대접이 이런거에요. 행사가 하나 있으니, 너 와서 풍물좀 쳐, 너 와서 노래좀 해, 여기 걸개그림 하나 그려봐. 그거 아니라는거죠. 전체 전략 단위에서 문화패가 같이 들어가서 전략을 짜야 된다, 근데 그동안 문화는 전부 그렇게 소모품,

 

Q. 선전대 역할을 했죠.

 

A. 으로 대접을 받아온거에요. 그 내부적인 사투를 엄청 했어요. 그것 때문에. 그래서 노동자문화운동 연합을 따로 결성을 했지. 그리고 의장이 남편이었던거야. 그리고 그거의 일을, ?김주영, 조영일?, 나 이런 친구들이 중심이 돼가지고. 그게 신명이에요. 그리고 각지역에 운동, 노동자 운동패들을 다 따로 조직을 하고 그들이 또 그쪽 조합하고 연결이 되고, 우리는 거기를 또 후원을 가고, 그래서 내가 울산에 비행기타고 가서 그림 같이 그리다가 올라오고 이러기도 했거든요. 그 시절에. 그런일들을 이제 한건데 그때 한예를 들면 그게 팔십...몇년 돈가, 애를 둘을 데리고 갔을때니까. 여름에 수련회를 갔어요. 전국 노동자 문화 운동 연합에 수련회를 갔는데, 부산에 수산대학에서 했어요. 근데, 500여명 가까이 모인거야 전국 노동자 문화패가. 근데 그때 내가 그림을 어떻게 했냐하면, 사전에, 각지역에 미술패들하고 각 직장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하고 사전에 그림을 이제 쪼가리를, 자기네 현장에 그 올해의 전체목표가 어떤데, 그런걸 이루기 위해서 각 현장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잖아요. 그걸 토론해서 그 그림말같은, 만화처럼 막 그림을 그려서, 그 지역 미술패들이 가지고와요. 여기서 이제 우리가 그거를, ?육행도?형식으로, 그 가운데는 내가 이제 어떤걸 그리냐, 가운데는 ?이심이?와 노동자 대표적인 얼굴을 하나 그려. 그다음에 밑에, 산 굽이굽이를 우리 삶의 굽이굽이를 넣고, 그 산 굽이 하나하나마다 작업장을 다 집어넣어 주는거에요. 그럼 이사람들이 와서 만화로 그려온거 갖고 거기다 다 그림을 그려. 그렇게해서 이제 그림을 사전에 완성을 해가는데, 전체 구호하나만 빼가. 빼놔. 큰 그림을 그려서. 그 다음에 이제 그날 저녁때 다 모이면, 저녁때, 그 그림을, 걸개그림을 거따 걸어요. 그 다음에, 빈 깃발에, 그 자리에서 우리 공통의 구호를 무엇으로 할것인가를 그 자리에서 조별토론을 해. 500여명이. 그래가지고 거기서 결정이 돼, 구호가 하나. 그러면 어떻게 했냐하면 노동자들이 인간 쌓기로 탑을 쌓으면, 내가 바케쓰에다가 검은 물감 타가지고 큰 붓갖고 올라가서 맨꼭대기에 올라가서, 사람들이 불러주면 예를들면 뭐, 군사독재타도 예를들어서 그렇다 뭐 아니면 노동해방 그랬다 칩시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면 내가 노자를 써. 인간탑 위에서. 내가 4층탑 타고 올라간거 같애. 그다음에 !’, 동자써. 글자를 다 쓰고나면 거의 그림이, 나는 그때 그리면서 ?개화?보다 더 위력있다. 개화는 완성된걸 올렸잖아. 근데 이거는 그림 완성을 다같이 한거야. 초벌그림에도 다 참여했지. 그니까 그림을 조직적으로 완성한거죠. 그래서 그냥 우리가 두렁할 때 공동창작 했던거랑은,

 

Q. 또 다른...

 

A. 달라. 어어. 다른 그런 것들을, 근데 그 그림들은 다 없어졌잖아요? 근데 요 만한 스냅사진에, 내 사진첩에 하나 있어. 우리애들 데꼬가서 했던게. 긍까 그렇게 그림을 완성한 것들이 기록에도, 요만한 스냅사진 하나 외엔 남아있는 것도 없지만, 난 그게 이제 삶의 현장의 그림이라고 생각했고요, 그때. 그다음에 이 정도 열기가 어느정도 뜨겁냐하면, 그날 밤에 억수로 비가 왔는데, 500명이 풍물을 치는데, 가죽이 젖어서 소리가 퍽퍽나고 꽹과리 소리만 드높아. 그런데, 내가 멀리서 보니까 500명이 풍물을 치는데, 그 위로 수증기가 이렇게 확~이렇게 사람들이 내뿜는...

 

Q. 열기 때문에...

 

A. 비를 맞았는데 열기가 올라가잖아요? 전체가 산이 됐더라고 이렇게. 500명이 엉켜갖고 산이 됐어. 내가...너무너무 놀라운거죠.

 

Q. 엄청난 감흥이네요.

 

 

A. . 그런거를 이제 본게, 나는 그게 아, 이게 예술이다. 이게 살아있는 예술이다, 이런 생각을 했고. 또한번은 울산에서 현대노조 처음 만들어질 때. , 도크에서 다 모여갖고 농성을 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급파해서 갔어요. 갔는데 깜짝놀랜게, 내가 이제 그린, 남자 노동자의 얼굴이 있거든요. 이렇게 주먹을 쥐고 슬픈 눈으로 바람을 맞이하는 얼굴이야. 나한텐 한 장도 없어 그림이. 근데, 깜짝놀랜게 갔는데, 사람들 작업복 뒤에, 헝겊에다 그걸 박아갖고 옷핀으로 다 뒤에 꽂고 있는거야. 한 만여명이.... 누구그림인게 뭐가 중요해, 누구그림인지도 모르겠어, 근데 맘에 들어서 골랐겠지. 나는, 그린 사람으로서 엄청나게 뿌듯했어요. 아 사람들이 그 많은 그림중에서 오늘 같은날, 자기 등판에 저 그림을 그리고 싶었구나, ?난 그래도 저게 괜찮았다는?(웃음), 그런, 그런게 제가 삶에서 느낀 기쁨이에요.

 

 

Q. 밭두렁 논두렁 쪼개지고, 그니까 어쨌든 이원화되고, 활동에 또 신명이 생기고, 또 현장으로 들어가고 모든 두렁이 공통적인 선배님들 얘기가, 그 현장, 그렇게 그룹이 이원화 되면서 사실 현장에 들어가는 분들은 서로 연락이 되지 않았고, 또 지원조직 분들은 현장이 연락이 안되니까, 지원조직은 지원조직대로 힘이 들었던거 같고, 그래서 8687년 그 무렵은 두렁이 각각 개별적 활동들로 펼쳐졌던거 같아요. 두렁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두렁의 한 맴버로서, 이제 예를들면 인천으로는 ?나원식?, ?성여수? ?정정엽?, 이렇게 뭐 들어가고, 이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이제 각각 서로가 연락이 안됐대요, 당시 이제 콜로퀴엄 해보니까. 그래서 무얼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각자 이제 거기 안에서 각개전투 하듯이 해야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두렁의 역사에서 보면은 사실 굉장히 흥미로운 역사이면서 이게, 그니까 모두가 함께 이렇게 활동하던 시기에서 실제로는 이제 일종의 뭐 굳이 표현하자면 혁명조직처럼, 또 노동자 조직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을하고 또 선생님 같은 경우는 어쨌든 신명을 통해서 생활문화 전반에 대한 고민을 시작을 하던 그런 시기인거 같고.

 

A. 그니까 나는 이 미술운동의 영역을 넓혀내서, 이제 의식주로 넓혀내는 거가, 그때는 사람들이 그게 되게 한량한 일이라고 생각을 한거야 운동권에서는 다 치열한데 이거, 왜 이런 한량한 일까지 시간 쪼개서 하냐, 이런 후배들도 있었어요. 근데, 나는 그게 이제 이게 대중의 풀(pool)인거에요. 이 치열한 소수의 운동권이 언제까지 소수로 있을 거냐고. 근데 일반대중이 전면투쟁에 하나도 없던거에요. 그래서 이 생활문화 운동이라는게 사람들이 만만하게 접근할 수 있는 커다란 풀이잖아요. 그래서 그 정말...내가 평생 세시간 이상 못자고 살다가 몸이 아작이 난건데, 정말 그 없는 시간에 그거를 한거죠. 그래서 그, 그렇게 하면서 정말 다양한 일반 사람들하고의 그 접맥지점들이 좀 이루어졌거든요. 그래뭐 YWCA, 공예주방운동 연합, 뭐 전교조, 이런데들하고 접맥지점들을 거기서 많이 만들어냈고, 그 다음에 대학생들 조직 중에서도 학생 복지위가 그때 생겼었어요. 그쪽하고 이걸 만들어서 학생들을 쫙 조직해 들어가고, 그런 ????를 넓혔고, 그다음에 나는 85년도에는, 그니까 음...민청련이 이제 딱 2년만에 이제 그야말로 아작이 났잖아요. 그니깐 다 구속자가 돼버리고, 보복을 심하게 당해서, 전기로 지지고 몽둥이로 두들겨패고 뭐, 이런, 그리고 극도로 남영동 대공분실, 안기부 중앙 저기 남산 이런데서 당했던 상황이라, 막 미치고 죽고 이러는 상황이어갖구. 사실 지금도 그때 미친사람이 지금도 병원 들락거리고 그렇게 살아요. 감당하면서 살아. 그다음에 많이 죽었어. 그때 같이 했던 사람들이. 같이 뛰었던 여자들도 죽고 남자들도 죽고. 요새 바빠요 그런거 기일 챙기기도. 근데 그런 상황에서 그때 민가협을 만들었잖아요. 그니까 85년도 1212일날 민가협이 창립됐거든. 그니까 85년도 9월달서부터는 우리가 다 구속되기 시작해가지고. ... ?김근태? 선배가 9월달에 구속되시고, 우리 남편이 108일날 신촌에서 잡혀들어갔고, 그래서 그때부터는 이제 민청련에... 죽은 민청련을 살려내기, 그다음에 민가협창립, 그다음에 각 단체들 학부모, 장기수, 노동자 이런 부분들을 합쳐서만들어내기, 그다음에 또 이제 뭐 해외에 알리기, 뿐만 아니라 그때 돈이 없어서 돈도, 운동자금도 마련했어야 됐어, 민청련 같은 경우도. 그래서 그때 내가 그런지경으로 떨어지니까 그 같이 했던 활동들에 그니까 문화예술이 접맥되기 시작한거에요. 그래서 그건 앞으로 조명해야될 부분인데, 그래서 민가협을 만들때도 제일 처음 만든 게 민가협 수첩이라는걸 만들었어요. 그래서 거기보면 운동가, 그 다음에 이런 것... .

 

Q. 그게 남아있는게 없죠 아직도?

 

A. 있어요. 있어.

 

Q. 있어요?

 

A. . 운동가, 그다음에 도서목록,

 

Q. 그게 민가협에 있나요 남아있는거?

 

A. 나한테도 하나 있어요.

 

Q. 이따가 좀 보여주셨으면 좋겠는데.

 

A. 이따가는 못찾아. 내가 언제 생각해서 찾아야, 이제 넣어놨어. 그때,

 

Q. 알겠습니다(웃음).

 

A. 그때 보냈던 편지들 막 이런것도. 그런것도 만들고 그다음에 민가협 창립총회할 때 각자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학생, 엄마들, 노동자, 가족들, 장기수 가족들, 다 너무나 틀려요. 학생 엄마는 유명 대학교 학생회장 엄마들이기 때문에, 자부심이 너무나 대단하시고. 또 장기수들은 거의 간첩으로 몰려있고. 노동자들은 또 인제, 학생엄마들이 노동자들을 한 수 밑으로 보기도 하고. 이런 사회 통념이 여기도 그대로 반영되는거에요. 근데 이제 민청련 가족들은 학생운동했다 노동운동했다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좌우의 문제에 대한 정리가 돼있는 사람들이니까, 우리가 구속되면서 이 구속자 조직을 하나로 만든거죠. 그래서 민가협이 민주화운동, 민주화실천가족운동 협의회거든요. 그래서 그거를 이제 이름을 그렇게 짓고, 창립선언문을 쓰고 이걸 이제, 나와 내 친구와 요 민가협 가족, 민청련 가족들이지, 같이 한 거죠. 그렇게...해서 이제 그런 걸, 수첩을 만들어서 처음에 딱 자식 구속됐을 때, 또는 가족이 구속됐을 때, 당황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어떤 증표처럼 이제 수첩을 내가 확대를 했고. 그 다음에 창립 총회도 거의 마당극처럼 만들어서 전체 창립 총회가 기독교회관 강당에서 열렸는데, 전체가 다 울음바다가 됐어요. 대성통곡하는, 그런 바닥, 바닥이 됐고. 그 다음에 85년도 말에 이제 만들어놓고나서 보니까 민청련같은 경우는 후배들이 진짜 차비도 없을만큼 힘든거에요. 그래서 돈은 벌어야 되겠는데, 나는 돈을 벌 때 정말 잘 벌어야 된다고 생각해. 아무 돈이나 받으면 항상 문제가 되잖아요. 그래서 그때 그림을 그린게 제가 민족 상징물, 장산곶매이야기, 이심이 이야기, ?골굿대? 이야기를 연하장처럼 긴 그림으로 그렸어요. 그리고 그때, 이런 때에 이런 설화를 봐라, 우리 살아갈 수 있다, 이런 걸 하고 싶어서. 이제 세장이니까 내가 이제 ?주영이? 한 장 ?은홍이? 한 장 그리라 그랬어(웃음). 난 이렇게 밑그림만 그리고(웃음). 그릴 시간이 없는거야, 그래서 내가 걔네들 밑그림 그냥 받아갖고 내가 다 뭐야 주필로 그렸어요. 그래가지고 장산곶매는 노란색, 돌굿대는 빨간색, 이심이는 푸른색 중심으로 해가지고 시리즈로 완성을 했는데, ... 굉장히 많이 팔렸죠. 외국까지. 나는 그때 그런 생각이었어요. 운동하는데 성금내고 이런 것이 아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얼마나 멋있는지 봐라. 어디가서 니네가 이런거를 구할거야? 이 돈 내고 사는걸 고마워해, 이런 마음으로 한거지(웃음). 그래가지고 그때 그게 이제 뒤에다 편지를 쓸수 있게 해놨어요. 앞에는 그림이 있고, 뒤를 딱 넘기면, 글이, 얘기가 이렇게 있고 뒤에는 편질 쓸수 있게 해가지고. 그 뒤에다 편지를 쓴 것들을 내가 며칠전부터 모으기 시작했어. 그래서 이제 몇 개를 받았어요. ?김근태? 의장한테 보낸 편지도 있고 문목사님한테 보낸 편지도 있고. 그 카드 위에. 그걸 다 수집해가지고 전시하자고 했어. 원화가 마침 나한테 있어요. 그래서 그 원화와, 그 연하장 위에 쓴 편지들을 같이 하면, 예술이 삶에, 미술이 삶에 어떻게 연결돼서 힘이 될 수 있을까 조금이라도 이런 사례가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Q. ?깡순이 이은호? 선배님 사건 얘기도 좀 듣고 싶은데요. ?사전과 진실? 작업이었죠?

 

A. .

 

Q. 고거 얘기좀 해주세요.

 

A. 사전과 진실이 ?인두지칭서? 만환데, 그 인두 지칭서를 주영이 나 은홍이 셋이서 작업을 한거고, 깡순이는 서노련 신문에 은홍이가 연재했던 네칸짜리 만화에요. 이제 그런데, ...참 세월이 무상하죠. 그때 서노련 의장이 김문수였습니다(웃음). 근데 이제 그 편집하는 장소에 하여간 수사대가 들이닥쳤는데 그때 은홍이가 거기서 같이 잡혀갔어요. 그래서 은홍이가 잡혀가자마자 주영이하고 나하고는 바로 자료수집을 해가지고, 노동미술이라는, 우리가 민중미술이라는 말만 썼지, 노동미술이라는 안했었거든. 그래서 이때 노동미술이라는 개념을 공개시키자, 공론화하자, 그래서, 노동자미술의 개념정립을 위하여, 라고 제목을 붙인 다음에, 그 탄압 대책위를 구성해달라고 했어요, 민미협에. 그래서 회의 요청을 해서, ...구속 노, 구속 화가 이은홍 탄압대책위를 구성을 했어요. 그래서 12일로 토론을 해서, 사람들한테 그 내용을 전달을 하고, 그 자료집을 내달라고 민미협에다가 요청을 하고, 그 다음에 도망을 갔죠. 그것도 구속되자마자 순식간에 그일을 저질러 놓고 튄 거에요. 왜냐하면, 조사하는 동안에 누구 얘기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렇게... 튀었다가, 한 제가 두세달, 석달 넘어가고 이제, 넘어가서 조사가 끝났다는게 확인이되어야지 나타나니까, 확인 되고나서 나타났는데, 그니까 이제 민미협 전체 회의할 때 제가 마침 갔어요. 그래서, 자료집이 전 당연히 나왔을 줄 알고 자료집을 다오 그랬어요. 그런거 하자고 난 민미협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거거든. 또 민미협이 20대의 힘전 이후로 만들어진 거잖아요, 대오각성을 해서. 20대의 힘 전은, 두렁이 그린 노동자 문제 때문에, 문제가 된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그 연장선상에서 민미협에서 당연히 받아야되는 문제라고 저는 생각을 했죠. 또 그렇게 얘기했고. 동의했고. 그래서 당연히 나왔을 줄 알았는데 보니까 안나왔어요. 그래서 그때 이제 대표하던 선배한테 왜 안나왔냐, 이렇게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 선배께서, 이런 혹시, 이런 게 혹시 앞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싶어서 얘기를 뭐... 하는데 이건 개인에 대한 폄하는 아닙니다. ~ 이은홍이가 영웅주의자라는, 이은홍이 그놈 영웅주의자 아냐? 이렇게 얘길하는거에요. 한번도 안만나봤는데 어디서 무슨 얘길 들었는지. 그래서 내가 발끈 했어요 그래서. 아 그 자식이 얼마나 얼철철한 놈이라 내가 맨날, 저기, 대기만성할 놈이라고 하는 놈인데... 걔가 무슨 영웅주의자야? 말도 안돼. 그랬더니, 아 돈이 없어 못냈어. 그러는 거에요. ... 실제 그랬을 수도 있죠. 근데 제가 그말에 너무 기가 막혔어요. 그래서, 돈이 없었으면 미리 얘기하지, 내가 우리 집세 보증금이라도 빼올텐데. 그러면서 못참고 이제 욕을 한마디 했죠. 심한 욕을 했죠 공개적으로. 선배에게, 대선배에게. 하여간 그런 사건이 있어서, 그러고나서 제가 당장 내놓으라고 원본을. 그래서 원본을 가지고 민가협에 갔어요. 또 그땐 제가 민가협 대변인이었으니까, 그래서 민가협에 내자고 했죠. 근데 그때 총무로 ?임재근?선배가, 전체 관리하는걸 임재근 선배가 했는데, 아무 거리낌없이 그래한마디. 여기서 내야되겠어, 미술패에서 안받아. 그러니까 그래, 내자’. 민가협에서 그거 나왔어요. 자료집이. 웃기죠.

 

Q. 80년대 후반 상황을 얘기를 좀 해주세요. 왜냐하면 그 두렁하고 어쨌든, 제가 이제 얘길 들으면서 이런 거 같아요. 선배님 같은 경우는, 두렁의 창립도 주도하고 또 창립에도 관여하시고 활동을 하셨지만 지금 보면, 다른 이제 문화운동 또 정치운동, 사회운동과 결합해서 가기 때문에, 미술운동도 있지만, 미술운동 자체만 있었던게 아니고 가족이 또 문화운동, 정치운동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 다른 맴버들하고는 다른 결의 또 역사가 있었다, 라고 생각이 돼요.

 

A. , 맞아요. 그니까 결이 다른 쪽에, 제가 그쪽으로 가서 뒷바라지, 허드렛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웃음)...

 

Q. 그니까 민가협활동도 해야 되고, 또 두렁의 맴버이긴 하지만, 언니지만 그쪽 역할을 또 많이 할 수는 없고,

 

A. , 늘 마음이 아프죠, 그런거는.

 

Q. 그리고 80년대 후반은 그래서 이제 두렁을 보면은 각자 그런 시기를 견디면서 지냈던 거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모두가 그랬던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이제 ?이지현?이라고하는 한 존재, 그니까 두렁의 맴버로서 또는 문화운동을 하는 한 사람의 부인이고, 또 실제로 본인이 문화 운동가로서, 다른 사회운동, 정치운동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는 80년대 후반의 상황. 그 상황에 또 예술가의 꿈을 끊임없이 가질 수밖에 없었던 또 한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에, 이제 그런 부분에서 80년대 후반을 한번 회고를 해주시죠....876.10 항쟁과 그 이후.

 

A. 그니까 87년도에 어떤 일이 있었냐하면, 그 사이에 제가 걸개그림들을... 그것도 이제 노동운동 하는쪽까지 직접 결합해서 하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그때, ?문숙명?이라는 열...여섯살인가, 그정도 되는 애가 수은 중독으로 죽은 일이 발생했어요. 체온계 회사에서. 그래서 이제 서울 지역에 노동자 문화패들하고, 그 장례식 걸개그림을 그렸어요. 나는 그림을 많이 그릴 수 없는 형편에서 살았지만, 그렇게 막 온갖일들을 하다가, 그림패라는 것 때문에 느닷없이 그림을 그려야되는 상황으로 이제 가면, 느닷없이 그림을 그려요. 근데 그때도 이제 그런 상황이 된거에요. 근데 그때 가서 제가, 깜짝 놀랠만큼, 한번한번 할때마다 내가 노동자들 그 수련회때 그 그림을 그릴 때 제가, 사라... 개화보다 우리가 더 나갔나? 이런 걸 느꼈던 것처럼. 그림이 사람을 이렇게 흥분시킬 수 있구나, 이렇게 하나로 만들 수 있구나 느꼈던 것처럼, 그때 그 문숙명 걸개그림을 그릴 때는, 그니까, 되게 이제 놀랬던게..., 그때도 이제 형식은 비슷해요. 가운데 문숙명이 얼굴을 그리고. 그다음에, 걔가 살아왔던 과정들을 밑에다가 이제 그 탱화형식으로 이렇게 하나씩 다 단락을 그려서 거기다 이렇게 다 그려 넣었어요. 근데 그 노동자들이 했단 말이죠. 근데 가운데가 얼굴이 크니까, 여러사람이 와서 색칠을 하게 된거에요. 누구는 얼굴을 하고, 누구는 팔을 하고, 누구는 목을 하고 이렇게 하는데. 색깔이 다 다른거에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제가 다 붓을 놓게하고, 다 모이라 그래서 토론을 했어요. 무슨 토론을 했냐면, , 우리가 이렇게 색깔이 다 다르다, 당신은 왜 이색깔을 칠했냐, 다 얘기하라 그랬어요. 왜 이색깔을 칠했는지. 그다음에 뭘토론했냐하면, 얘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겠느냐. 열 몇 살에 취직을 했던 거면 초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한거잖아요. 그럼 어떤 환경에서 자랐겠어. 그렇게 못 먹고 이런 애가 이런 수은 공장에서 중독이 되고, 이랬던 애가 오장육부가 다 망가져서 죽은 거 아니냐. 그런애들의 얼굴색이 어떻겠냐. 색깔을 통해서 인간과 사회구조를 보는 연습을 한거에요. 가능하더라고. 지금 난 그렇게 보거든요. 사람 얼굴 색으로 오장육부 어디가 탈이 났는지 알아요. 그때 그 상황에서 그것을 찾아내서, 노동자들이 엄청 충격을 받았어요. 나도. 그래서 색을 통해서 이 사회를 보고 인간을 보는 게 가능하다는 깨달음 같은거를 그와중에 또 받았고. 그에 이어서 어떤 일이 있었냐하면, 그때 성완경 선생이 미국에서 한국의 민중미술전이라는걸 기획을 해서 들어오셨고, 엄혁이라는 친구가, , 그 밑에 일을 하러 따라들어왔는데, 저한테 연락이 왔어요. 두렁에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요>를 출품해달라고 거기에. 근데 그때 내 생각에, 그거는 84년도 얘기에요. 내가...진짜 막... 전지 한 장에 212명인가 그림자까지 인간이 가고 이러는 거에요. 더 크게 그렸어야 되는 그림인데, 내가 사는 방이 딱 고만해. 그러고, 고 전지 한 장 펴놓으면 토끼발로 걸어다녀야 돼. 그래서 그거 한 장이나 그린 거거든요. 근데 그건 내가 혼자 그린거잖아. 실제 한국의 민중미술에서 뭐가 중요하냐하면, 실제 삶에 이것이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한 그림이냐가 난 더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 기획전을 할래면. 그래서 제가, 그 그림을 내라 그러길래 내가 뭐라 그랬냐면, ?문숙명?그림을 내겠다 그랬어요. 이거는 공동창작을 한거다, 초보노동자들과. 그리고 이 그림을 그리면서 우리는 굉장히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 다음에 그 그림을 들고 장례를 치렀거든요. 길거리에서 이렇게, 했단 말이지. 그래서 그런 현장에 있는 그림이다. 한국의 민중미술 전이라면 이것이 가는 게 마땅하다, 내 개인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러고서는 보여주려고 문숙명, 18미터 됐어요. 그걸 접어서, 차가 없으니까, 또 백기완 선생님이 기사가 있었어, 대통령 선거 나가며 뭐 이랬던 때라. 그 트렁크에다가 싣고, 선생님 기사가 그 사무실 저기, 서촌에 있는 그 사무실에, 그 위에까지 들고 올라가서 갖다 펼쳐서 보여줬어요. 그때 이제 보고난... 보고나서 엄혁씨가 한 마디가, 딱 한마디 했어요. 그림이 너무 커요. 그다음에 두 번째. 제가 기억력이 잘 없는데 이런거는 딱 찍혀서, 머릿속에서.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뭐라그랬냐하면, 선생님의 그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요> 그림은 굉장히 형식이 독특하기 때문에, 이 그림이 출품되면, 전세계 평론가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그림입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화가로서, 굉장히 의미있는 전시가 될 겁니다. 이렇게 얘길 하더라고요. 그래서........내가... 그래서 그렇게 얘기 했어요. 내가 화가로서 유명해지는게 나한테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니다, 그랬으면 내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냥 접어갖고 내려왔어요. 그러고 다시는 가지 않았어요. 그때 또 한마디 했죠. 누구누구, 우리 선배 누구누구는, 87도 대투쟁 할땐데, 누구누구는 여기 출품하려고 절에 들어가서 그림그리고 있다는 거에요. 그럴 수도 있겠죠, 나는 거리로 갑니다, 그러고서 그냥 싸갖고 나왔거든요. 그런게 하나 있었고. 그 다음에, 그런 기회들이 작가로서 어떻게, 손짓하는 그런 기회들이 있어요. 그게 한 두 번 굵직하게 있었는데, 하나는, 한국에서 누군가 어떤, 그 사람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데 아트뉴스라는 잡지를, 미술 잡지를 창간을 한다고, 그때 88년도에 제가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글과 그림을 이제 모아서 장산곶매라는 책을 냈는데, 날아라 장산곶매라는 책을 냈는데. 그게 제가 한 십...십 한 오륙년 이상 인세를 엄청많이 받았어요. ?하늘/한울? 출판사 그게, 저기 수백권 책중에서 5위안에 들어가는 책이어서.

 

Q. 저희한테도 필독서중에 하나였어요.

 

A. 나중에 왜 그런가 했더니 필독서로 인정돼서 그렇게 많이 샀나봐.

 

Q. 학생때 많이 읽었어요 저희. 아니 그리고 저기 뭐냐, 90년대에 학교 다닐 때는, 그 책꽂이에 하나씩 있었어요.

 

A. 아 그리고 쉽게 썼잖아. 그림도 막 개발새발 그리고 그래갖고 쉽잖아요. 거기 은홍이가 그린 것도 있어요(웃음). 바빠 갖고 야 너 하나그려’(웃음). 근데 이제 그... 그 책, 이런 책이 나왔다고 이제 보도가 됐는데, 그때는 제가 민족 상징물들을 다 그려놨을땐데, 그 편집인이, 그 책을 발행하신 분이, 찾아오셨어요. 그때 우리 사무실이 저쪽에 기독교 회관 건너편에 옥상에 있었는데, 찾아오셔서 제 그림을 좀 보러왔다 그래서 제가 이제 민족상징물 이런 걸 좀, 보셨어. 그때 달력을 만들었기 땜에 달력을 볼 수 있었어요. 그랬더니 뭐라... 첨엔 뭐라 그랬냐면 아 그림 갖고 대성해도 되겠네, 왜케 고생을 하고 살아요? 이러는 거에요. 그러고 무슨 제안을 했냐면, 그 잡지에 창간호부터 화가 ?이기연?을 향한 소설이라는 코너를 하나 만들자는 거에요. 그림을 하나 놓고, 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어떻게 살았나, 이거를 이제 밑에다가 글로 쓰는데, 그 글을 소설가를 하나 붙이겠대요. 그러고, 그 소설가가 쓰는 글을 내가 감수를 하래요. 그러면 내가 걱정될거 아무것도 없지 않냐고.

 

Q. 그래서요?

 

A. 그런데요, 나는 이제 그런 거에요. 나한테만 이익이 되는건 있을 수 없잖아요 이 세상에. 왜 이거를 하지? 그러고 내가 이 사람이 이렇게 해서, 나를 유명하게 만드는 건 곧 상품이 된다는 얘긴데, 내가 이런 상품이 돼도 될까?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에 내가 값나가는 상품이 되는게 도움이 될까? 그러고, 저 사람한테 상품이 내가 돼야 되는건데, 이런 생각이 들어서, ?원덕수? 선생을 만나서 상의를 했어요 그때. 몇 사람하고 상의를 했는데, 원덕수 선생은 나랑 견해가 같아, 그건 상품화의 길인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원덕수 선생님이 말씀하셨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니가 원칙주의자라고 욕을 엄청하더라고 나한테. 그냥 하지 뭐! 왜 이렇게 생각이 많어(웃음). 그래서, 거절 했는데, 한 두달을 연락을 왔었어요, 하자고. 간곡하게. 그래서 나중에는 우리 남편이 아주 그냥 매몰차게 나서서 거절을 했는데도 한 두달은 끊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경우가 하나 있었어요. 그 이후로 그잡지가 어떻게 됐는지는 나는 몰라요. 고것까지가 있었고, 또 그 전에 거슬러 가서는, 80년도에 지게꾼 판화 만들었을 때, 그때 내가 안양 근로자 회관에, 천주교에서 하는 안양 근로자 회관에 미술패를 만들려고 하니, 전부다 미대가고 싶은 노동자들이 오는거에요. 그니까 노동자 중에서 좀 상층 지향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오는 거에요. 뭐지? 그래서 어떻게 했냐하면, 탈반 안에 토론과정에 내가 미술을 넣었어요. 그땐 이제 결혼하기 전인데, 80년도에, 나중에 남편, 남편될 선배가 탈반 지도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거기 곁다리 껴가지고, 토론할 때 미술을 집어넣었어요. 그래서 나중에 노동자 미술 정리된 형식들이 그때 많이 개발한건데, 뭐냐면, 그림그리라 그러면 딱 잘 그리려하고 데생하는 게 그림인줄 아는거에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그림을 해체를 했죠. 동그라미 그리기. 하나둘셋, 하나둘셋, 그럼 아홉 개잖아요? 그래서 웃는 얼굴, 우는 얼굴, 화난 얼굴, 이건 아무나 스마일마크 아무나 쉽게 하잖아요. 그렇게 그리게 해 처음에. 그다음에 제목은 오늘, 오늘 창작 탈춤의 주제가 월급날이다, 그러면 자 월급날 이 아홉 개 중에 내 얼굴은 뭔가, 뽑아. 하나 꺼내. 그다음에, 내얼굴이면 내 머리모양과, 내 특징들을 거기다 그려넣어. 그럼 되게 쉽게 되잖아요. 그 다음에 세 번째, 말풍선을 달아 월급날에. 이러고 난 다음에, 그걸 들고, 탈춤기본동작 ?팔막중?동작 배우면, 그 동작하면서 나와가지고 그거 대사 말풍선 읽고 들어가. 그게 하나 더에요. 다 모으면.

 

Q. 그게 가만있어봐, 어디 책에 실려있지 이게?

 

A. 우리 그 노동자 미술, 노동미술인가 거기 노동자미술인가 있어요. 그 사례도 다 있어. 왜냐하면 내가 그거 하는 즉시 다 공개해서,

 

Q. , . 제가 봤던 기억이 나서(웃음).

 

A. 현장에서 다 써먹었거든. 공동체 놀이에도 이런 거 다 삽화로 집어넣고 그랬는데, 이렇게 한 연구가 되면 바로 노동현장들 다 써먹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내가 많이 개발을 했죠 그렇게. 근데 어느날 그... 근로자회관에서 지게꾼 판화를 가지고와서 이 그린 사람 작가를 좀 만났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온 거에요. 근데 난데. 몰르고. 근데 거기에 독일에서 온 고문이 있어요 여자분인데, 뚱뚱하고 큰 분이야. 근데 그 분이 그 그림을 보고서 작가를 찾아달랬다는 거에요. 그래서 올라갔어.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서 선배랑 같이 올라간거에요. 그랬더니 그 선생님은 그 그림을 보고 남자가 그린줄 알았대요. 그래서 같이 올라갔더니, 이 사람이 그린줄 아니까, 이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여잔줄 알...여자라고 느끼고서 이 사람이 나한테 책을 한권 보여줬어요. 그게 콜비츠 판화에요. 내가, 판화책을 딱 펼쳐보고요, 그림을 보고서 그렇게 강력한 충격을 받은적은 처음이야. 근데...가슴이 콱 찌르더라고. 그래서 나는 콜비츠를 알게 된거야. 그 전엔 몰랐어요 무식해서.

 

Q. 아니 그전에 소개가 잘 안됐어요.

 

A.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80년대에 화가 스물 한명인가, ?이용준? 선생이 평론집 냈잖아요. 거기에, 한명의 여자가 내가 들어있잖아요, 스무 명의 남자와. 근데 거기에는 아마 이렇게 되어 있을걸요? ...중국의 목판화 운동을 연구하고, 전체 흐름이, 그 다음에 콜비츠도 연구하고, 그래서 그 아류를 하고 있는게 생기고(웃음), 근데 전혀,

 

Q. , 그렇죠. 아니지.

 

A.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이 얘길 내가 많이 했어요. ?이용준?선배께 이 얘길 많이 했는데, 근데 정리는 하여간... 제 삶과 좀.. 좀 달랐어요. 근데 그때 이분이 무슨 제안을 하셨냐면, 판화전을 개인전을 열어주겠다고 이야기를, 80년도에. 독일 문화원에서. 근데 그때는, 광주항쟁도 독일문화원에서 따로 인터뷰 해서, 관계자들 인터뷰해가지고 독일로 내보내기도 하고 그런 걸 했거든요. 그러고 그 고문이라는 여자 분은 아버님이 노동운동가여서 히틀러때 총살당한 사람이에요. 그 얘기도 하시면서,

 

Q. 그럼 그게 80년 이면 굉장히 일찍 만나신거네요.

 

A. 내가 막 활동 시작을 할 때지.

 

Q. 그럼 그 지게꾼 판화를 그때 만...

 

A. 그때 80년도에 한 거라니까, .

 

Q. 팔십년도에 하신거에요.

 

A. 응응. 그래서, 결혼하기 전이야. 내가 81년도에 결혼했는데, 그니까 그 전이니까 81년도 927일날 결혼했으니까, 만약에 81년도라면 9월 전(웃음), 8월까지 전이고(웃음), 그러고 그 그림이 돌아다니면서 그 분을 만난거니까, 81년도면 초반이고, 80년도에 내가 안양 거기를 갔어요. 80년도 말쯤 될거에요. 근데 그때 사실 되게 고민했어요. 근데 그때는 내가 막 이제 공부하던 거를 탁 집어던져버리고 현실로 뛰어들어서 막 다닐 땐데, 그림쟁이로서의.... 뭐라 그럴까, 좋은 그림을 그려서 그림으로서 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욕심과, 본능과 뭐 이런 경계쯤에 있는 거 같아요. 근데, 다 버렸다고 생각해도 그런 제안을 받으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단 말이죠. 그때도 그게 수면위로 올라와서 한 일주일간 고민했어요. 할까? 왜냐면 그림을 그린 게 꽤 있었거든 판화 뭐 이런 것들이. 결혼하기 전이니까 또 많았어. 근데, ... 고민을 했죠. 거기서 전시를 한다는 건 그 당시에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인 거죠. 결론은 안하는 걸로 냈어요. 이유는, 유명해지는 게 안 좋을 때에요. 알려지는 게 안 좋을 때. 나는 이제 내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지 막 실험에 들어간 거에요. 그런데 그때 유명해져버리면, 그것이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냐고.

 

Q. 그렇죠.

 

A. 근데 이런 한국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작가 하나 발굴하는 것의 성과는, 나라는 사람보다는 그쪽에 돈을 대고, 한국에서 실험을 하는, 한국의 민주화를 실험을 하는 그쪽에는 하나의 성과가 되겠죠. 냉정하게 보면. 나는 돈을 대는 그들이, 물론 좋은 의도로 하겠지만, 마냥 고마워만 해선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유명해지지 않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다(웃음).

 

Q. 이제 저희가 한 한시간 정도 분량으로 촬영을 하는데, 시간이 좀 많이 된거 같죠? 그래서 그 요 부분을 정리하고 끝내야할 거 같은데, 어쨌든 이제 80년대 후반에, 우리가 이제 두렁을 얘기하려고 온 거였기 때문에. 근데 이제 두렁의 맴버이긴 했지만 80년대 후반에 가면 말씀하신 생활문화, 혹은 생활예술 혹은 문화운동 이런 생활문화에 대한 관심과 혹은 그쪽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성으로 더 많이 기울어진 거 같애요. 근데 저는 그것이 두렁의 정신과 크게 틀리진 않는다는 느낌이 많은 거에요.

 

A. . 저는, 두렁 정신의 확산이에요, 이게. 우리가 두렁할때도, 만화, 판화, 손수건, 가방, 달력 별걸 다 만들었잖아요. 근데 옷은 개연성이 딸리고 대중화하기 힘들어서 사실 고까지 못넘어간거에요. 근데 나는 이제 그 영역까지 넘어가서, 사실 내가 만드는 옷은 패션이 아니에요. 이거는 그래서 제목을 내가 철학이 담긴 옷을 만든다고, 생각을 담아서 입는 옷이 어떤가 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이게 두렁 정신의 확산인데, 고정관념이 그림을 그림의 영역에 자꾸 붙들어 매기 때문에, 자꾸 회귀를 하는 거 같애요. 당사자들도, 주변도. 나도. 나도 그런 갈등을 이겨내는 데 굉장히 힘들었어요. 왜냐면, 좋은 화가로서, 좋은 작가로서 뭔가 인식되고 싶은 욕심이 없는 줄 알아도 어느날 어떤 계기에 불쑥불쑥 올라온단 말이죠. 그거를 늘 들여다보거든요. 제가 마지막에 넘기힘든 산이 그거였던거 같아요(웃음).

 

Q. 그러면, 다시 반추해보면, 굉장히 중층적인, 아까 얘기한 시각예술 미술운동, 사회운동, 문화운동, 또 더군다나 가족과, 가족의 또 이제 남편되시는 분의 그런 활동까지 하나하나가 보면 굉장히 많은 역사적을 가지고 있는거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렁을 결의하고 창립하고 한 한 맴버로서, 또 두렁의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두렁의, 질경이의 지금 이 생활문화 영역을 두렁의 확장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이경희?라고 하는 한 사람에게 두렁은 뭔가요.

 

A. 두렁은, 항상 고정관념을 깨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시대정신이 무언가 고민하는 게 난 두렁이라고 생각해요.

 

Q. 두렁의 후배들과, 그 후에는 자주 만나진 못하셨잖아요. 그러고 또 두렁의 정신을 새롭게 보려고 하는 후배들이 꽤 있어요 뭐 많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쪽을 연구하는 후배들에게 두렁은, 일종의 미궁이긴 하지만, 그 어쨌든 이야기를 통해서 전승되는 걸 통해서라도 두렁을 알려고 하는 작가들이 또 있어요. 그래서 두렁과 함께 했던 후배들, 그리고 또 두렁의 정신을 새롭게 보려고 하는 더 젊은 후배들에게 이야기 하나 해주시죠.

 

A. 저는 두렁이 모여서 어떤 형식을 만들어내고 주장을 하고 그렇게 해서 미술계에서 또는 문화계에서 사회적으로 어떤 무엇이라고, 어떤 청년 문화라고 인식 되는거, 그 가치를 인정받는거, 그것보다 훨씬 더 지금 제 기억과 제 삶에 기여했던 부분, 늘 관여하고 있는. 내 삶에, 관여하고 있는 부분은 뭐냐면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어떻게 해야 될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막막하게 헤맸던 20대 초기에 몇 년간, 두렁을 만들기 전까지. 두렁이 싹이 난 것이라면, 그 전과정은 흙속에서 막, 썩을 것이냐, 죽을 것이냐 살것이냐, 내가 썩어 문드러질거냐 살아날거냐를 헤맸던 그 시간이거든요. 항상 그것이 나한테는 근원적인 동력이에요. 나는 두렁은 나한테는 그것으로 남아있어요. 그러고, ... 내가 새로운 것을 도전을 하다가 무엇이 되는거는 남의 영역인거 같아요. 무엇이라고 인정하는건 남의 영역이고, 나의 영역은, 내가 이것을 과연 어디까지 밀고 가서 해볼 것이냐 하는 선택과 집중만 난 있을 뿐인거 같아요. 나머지를 이것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쪼잔해져(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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