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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여성과 현실_윤석남 녹취자료

by 정강산 2019. 10. 28.

Q. 예전에 제가 4-5년 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때,

@8

?소묘? 모임에서 다들 만났고, 그게 촉발이 돼서, 10월 모임을 만들자고 얘길 했을 때, 세 사람만 있었던 건 아니고,

@18

?김종래?씨도 하자 이렇게 했는데 결국 세 사람이 시작을 하게 됐다. 그리고 우리가 작업실마다 돌면서 얘기도 많이 하고, 토론도 하고 했다, 이런 얘길 들었는데, 10월 모임 창립 이전에 그런 흐름들에 대해서 일단 먼저 말씀을 좀 해주세요.

 

A. 저는 79년도에 그림을 시작했잖아요. 그래서 딱 2년 만에 81년돈가, 이제 정확하.. 81년돈가, 2...가을에 개인전을 했거든요. 개인전을 2년만에 했는데, 그게 옛날에 미술관, 저기 인사동에 있는 거 지금..

 

Q. 경인 미술관?

 

A. , 아르코,

 

Q. 아르코, 아아 문예진흥원.

 

A. 문예진흥원! . 문예진흥원 지하에, 지하도 그게 12층이, 아래층이 1층이고 2층이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고 지하에 그 반을 나눠서, 두 사람이 전시를 할 수 있게 됐었는데, 저는 이제 무명이잖아요. 그리고 아무도 화단에 아는 사람이 없는데, 워낙 이 그림을 좋아하니까 홍대 출신 작가들하고 제가 개인적으로 잘, 그림하기 전부터 친했어요. 그 중에 김영자라는 분이 있어요, 여성화가. 나중에 여성, 여성미술화가회 회장도 했나? 아무튼 간에 그런데 그 친구하고 그전, 그림을 하기 전부터 친했는데, 제가 이제 그림을 시작하고 나서, 2년만에 작품이 이렇게 돼 있잖아 그니까 둘이 2인전을, 저기, 둘이같이 동시에 2인전을 하자 이렇게 얘기가 됐어요. 저는 영광이었죠. 걔는 이미 중견화가고. 저는 뭐 아직, 저기 발, 발도 안 딛어 놓은 상태고.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보니까, 그거는 좀 무리다, 주변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여긴 이미 중견화가고, 나는 이제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고. 그래서 그럼 반을 나눠서, 김영자전 윤석남 전을 하자 이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저는 고 때 개인전을 첫 번째 한거에요. 그게 82년도, 작품에 왜 어머니 이렇게 바구니 있고 그러는 작품 있잖아요. 그니까 고게 그때 작품이에요. 고때 서른 다섯 점인가 여덟 점을 가지고 백호짜리가 여덟 개였었어요. 그래 전시를 했는데, 그 전시가 그....일주일 딱했는데, 어떻게 이상하게 많이 알려져 가지고, 많은 화가 분들이 오셨어요. 오셔가지고는, 그룹전, 당신도 포함해서 그룹전하자 이렇게 얘기가 됐어요. 그니까 고건 나중 얘기고, 이제 그렇게 하면서, 이제 그, 제가 그 열, 열세 사람이 여성화가들만 같이 돈을 모아가지고 화실을 하나 어...그니까 지금, 지금으로 말하면 강남에

@311

?우성아파트? 있는데 있지 않습니까? 고기에......이름이 이제 아직도 존재해요. 이름은 잊어버렸는데 고기에 그 1235층까지 있는 상가가 하나 있었어요. 그 상가의 5층에다가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열세명의 여성화가들이 작업을 하자, 이렇게 됐어요. 그때 김종래, 김인순씨가 오신 거에요. 김진숙은 먼저 알았고. 그래서 거기서 같이 그림을 이제,

 

Q. 주로 드로잉, 소묘를 많이 하셨나요?

 

A. 아니 뭐 드로잉도 하고, 뭐 유화도 하고 요거 밖에 안되는데 열세명이 여성작가들이 모여서 주로 얘기를 많이 하는. 어쨌든, 그래서 그때 김인순씨를 제가 쫙 보니까, 아 이 양반이 보통이 아닌 거에요. 그래서, 제가 미국가서 1년동안 공부하고 왔잖아요. 그 이후에. 그래서 갔다온 다음에, 김인순씨한테, 우리 김진숙, 너하고 나하고 셋이서 이제 한번 여성들끼리 모여서 전시 한번 해보자. 저는 개인전 첫 번째 할때도 제목이, 어머니였었어요. 전시 제목이. 그래서 저는 어머니의 얘기를 하지 않으면, 첫 번째 그림 시작할 때부터, 그림 이래는걸 배우기 시작 할 때부터 드로잉을 어머니, 친정어머니를,

@436

시어머니????(웃음) 아파트에다 모셔다 놓고 일주일에 두 번씩 드로잉을 했어요. 그래서 그 드로잉을 가지고 유화를 만들어가지고 이제 1회 개인전을 한 거 아닙니까. 그게 제목이 어머니였어요. 근데 그때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화단이 전부 추상회화 일변이었어요. 완전이 앵포르멜, 여기에 다 작가들이 완전히 거기에, 90퍼센트.

 

Q. 주로 모노크롬, 저기 70년대에.

 

A. 모노크롬...도 하고

 

Q. 단색화.

 

A. 단색화 하기전에 추상회화.

 

Q. 앵포르멜, 앵포르멜, 예예.

 

A. 앵포르멜, 그렇게 했는데, 그때, 저는 구상이지 않습니까. 구상 회화잖아요. 저는 머릿속에, 나는 어머니 얘기를 할려면 이건 추상회화론 안된다, 그러고 추상화라는 거가 우리나라 전통에서 나온건 아니지 않습니까. 완전히 서양화 일변도. 쫒아가는거죠. 서양화라는 말 자체가 이미, 서양, 서양의 그림 세계를 쫒아가는거 아닙니까. 일본에서부터 시작된거, 인상파부터 시작된거 아닙니까. 그걸 우리 고대로 따라가는거에 반감이 있었어요. 내적인 반감이 굉장히 심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 작가들하고 만나기도 싫었어. 그니까 이, 저기(웃음) 추상회화하고 이런 작가들 그 유명한 작가들을 누가 소개해준대도 아 나는 관심 없어. 그래가지고 이제 어머니 얘기니까 이건 구상회화잖아요. 구상회화라는 게 뭡니까 그 당시만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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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옛날 식이잖아요. 옛날 식이기 때문에, 구태의연할 가능성이 있다라는 생각을 안한 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 그렇지만 난 어머니 스토리를 가지고 작업을...내가 작업 시작할 때부터 엄마얘기를 하지 않으면 내 얘기를 할 수가 없어. 그니까 그림이라는 건,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그림이라는 거는 내 자신과 어떤 모르는 타인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하나의 다리 역할을 하는게 그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당시. 그런데 내가 내 어머니 얘기를 하지 않으면 내얘기를 할 수가 없는거에요. 그래서 이제 어머니 얘기를 한거거든요. 그 전시가 끝나자마자, 그 전시 중에, 돌아가신

@653

?장국지? 스님도 오시고 그러셨어요 굉장히 저한테 좋은 말씀 많이 해주셨어요. 예술 그...어쨌든 그래서 한 줌밖에 안되는 그 당시에 구상회화 하시는 분들이 오셨어요. 거기에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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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균 선생님 황웅용 선생님? 다 오셨었어요. 그래가지고 정 선생님이, 우리 그룹을 하나 만들어 보자, , 구상회화, 당신들 포함해서, 저 얼마나 놀랐겠어요 제가. 어쨌든 그때 김인순씨, 그 이후에 김인순씨랑 김종래랑 담, 김진숙이는 그 전부터 알았고, 왜냐하면 한 아파트에, 같은 아파트에 이쪽 편 이쪽 편 살고 있었거든요. 네 그래서 알았고. 근데,

 

Q. 선생님 그리고 소묘전 같은거를 한번 하지 않으셨어요?

 

A. 소묘전을 이제 그, 그러니까 그, 큰 그림 그리기 전에, 제가 이제 개인전 하고나자마자 이 친구들 만나서, 우리 소묘가지고 전시한번 해보자, 그래서 이제 김인순, 김진숙, 윤석남 그때 이제 시작된 거에요, 그 소묘전이. 그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림이다 그러면 여성 누드모델이잖아요. 그게 아주 일반화 돼있었잖아요. , 제 집에서, 제 집에서 그 여성 작가, 여성 모델을 불러다 놓고 그렸어요. 그래서 이제 김인순씨도 같이 그리고. 그래서 그때이제 소묘전을 했죠.

 

Q. 그니까 10월 모임 전에 소묘,

 

A. 전에 소묘전부터 먼저 했죠.

 

Q. 소묘전이 먼저 있었고,

 

A. 그런 다음에 이...3인 전이 관운 미술관에서 123층을 다 빌려가지고,

 

Q. 셋이 그렇게 하자고 의기투합 하면서 얘기들이 좀 많이 있었을거 같애요.

 

A. 아 그르니까 저는요, 어떻게 생각하면, 자기의 위치를 생각하지 않고, 나는 그니까 아마추어에서 이렇게 온건 맞, 맞고, 두분 들은 다 미술대학 나왔잖아요? 근데 그런 게 머릿속에 있질 않아요. 어 뭐 미술대학 나왔냐, 어 그렇구나. 우리 같이 하자. 당당하게 얘기를 했죠. 그래서, 그랬더니 오케이, 셋이다. 의기투합된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여성들의 얘기를 좀 해보자, 이 전시를 통해서. 그래서 그 주제가 전부 여성, 여성이었어요. 그니까 10월 모임 전 첫 회가, 정말 10월 모임 전 첫, 우리가 전부, 나는 이제 그 여성도 들어가지만 남성도 들어가고 하지만 엄마 얘기를 많이 했죠. , 그게

 

Q. 근데 그 첫 전시가 주로 목탄 소묘 이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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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네 소묘전을 하자,.

 

Q. 소묘의 형식으로 하신 거잖아요.

 

A. 제가 이제 그거는 또 좀 건방지지만, 소묘와 드로잉이래는 것도 하나의 장르다라고 생각을 한거에요. 뭐 꼭 유화만 장르가 아니다. 이걸 하나의 장르화 시키는게 어떠냐, 드로잉 자체를, 그냥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어떤 밑그림으로서가 아니라, 완성도 높은 드로잉이래는거 도, 연필가지고 하는 거도 하나의 장르다. 그니까 우리 요것만가지고 해보자. 이렇게 두사람을 설득했죠. 그래서 이제,

 

Q. 전 관을 그렇게 다 채우게 되신거군요.

 

A. 전관을 다 드로잉만 가지고.

 

Q. 그리고 작품의 크기도 다 컸다면서요,

 

A. 굉장이 컸죠, 저는 그냥 뭐 사메타 오메타짜리 일곱 개 가지고 했어요. 그니까 이... 작업실은 열 여덟 평인데, 이 면 자체에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꽉 차게, 이케 말...캔트지에요. 그니까 다 떨어지죠. 그 캔트지, 말아서 파는 거 있잖습니까, 몇 십메타 짜리, 그걸 사가지고 이렇게, 그거를 설치해놓고 거기다 직접 그냥 그렸죠. 그니까 그걸 뭐라 그러나, 무식쟁이가 대담하다고, , 그런(웃음).

 

Q. 그 평론은 또 김윤수 선생님이 하셨잖아요.

 

A. 김윤그래가지고,

 

Q. 김윤수 선생님

 

A. 그래가지고 이제 또 민중미술이 한창 이렇게 대두 될 때였었어요. 고때가. 그때 이제 김윤수 선생님이 등장 하셨어요. 근데 너무 이분의 말씀이 좋은 거에요. 글도 좋고. 그래서 막 우리 셋이 김윤수 선생님한테 글받자, 그래가지고 작업실 다 보여드렸죠.

 

Q. 그니까 김윤수 선생님이 세분의 작업실을 다

 

A. ?파악하고 있었죠.?

 

Q.1122

?투어하시든지/투아웃이든지?, 보시고 그러셨다면서요.

 

A. 보시고 써주셨죠. 그리고 첫 번째 전시는 김윤수 선생이 쓰신 게 아니고, 이효재 선생님이 쓰셨어요. 첫 번째 전시는, 왜냐하면 여성, 우린 여성 작가니까. 여성 평론가를 모시자, 그래가지고 이효재 선생님 찾아갔죠. 그래서 이효재 쓰시고, 그다음에 이제 2회전 , 다음해에 할때는 김윤수 선생님이 쓰시고.

 

Q. 그러면은 10월 모임을 만들때부터 이미 태생적으로 그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

 

A. 그렇죠.

 

Q. 이게 있었던 거네요.

 

A. 저는 뭐 그런 여성미술 이런 말도 없었을 때고, 페미니즘 아트라는 말 자체도 전 생소할...전혀 머릿속에 없을 때였는데도, 이제 그림을 시작한 이유가, 나는 누구일까, 나는 여자잖아. 나는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고, 근데 우리 어머니는 그럼, 내가 얘기하기 겁나는 거에요. 그럼 우리 어머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엄마의 삶은 어떤 거였었을까. 그 엄마의 삶을 내가 생각하고 그리지 않으면 내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없어, 라는 생각을 전 했던거죠. 그래서 이제 전시가 자연히 여성얘기로 들어간거고, 김인순씨 대표작은 남성이 이렇게 노동하는거에 밭에서, 여성이 앉아있죠

 

Q. 네네 맞아요.

 

A. 네 그러고,

 

Q. 그 소묘가 나와요.

 

A. 네 나오죠. 그리고 김진숙씨는 이제 여성의 그, 불교, 저기, 절에 가서 공들이고 하는 거 자체를 그렸고, 저는 이제 우리 엄마 얘기를 한 거죠. 그래서 지금 내가 말씀드리는 그, 작품이 있어요. , 들판에 어머니가 혼자 이러고 앉아있는.

 

Q. 그게 그럼 창립전 때, 10월 모임 첫 번째 1회 때...

 

A. 고걸 잘라서, 그렇죠! 첫 번째, 1회때 작품...

 

Q. 그리고 이제 그 전시가 끝나고 나서 이제 결국 이제 저기..

 

A. 그게 1회땐가 2회땐가, 아 그거 분명하지가 않은데요..

 

Q. 두 번째 전시는 어쨌든 이제...

 

A. 아니 그게요, 죄송합니다. 1회때는 그림마당 민에서 했어요.

 

Q. 아니에요, 선생님. 1회가 관훈갤러리.

 

A. 아 그런가?

 

Q. 네네네. 1회가.

 

A. 그럼 2회가,

 

Q. 2회가 아마

 

A. 그림 마당 민인가?

 

Q. 네 그랬을 겁니다. 그건 제가 보, 1회는 관훈갤러리가 확실해요.

 

A. 아 그래요?

 

Q. 네네.

 

A. 그러면 그거에요.

 

Q. 왜냐하면 소묘로만 했고. 관훈갤러리 전관을 썼고. 그건 정확하게 맞습니다.

 

A. 아 그러면, 그러면 그때 한거가 전 가지고 있는 거에요. 일곱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그 대표작, 들판에 어머니가 이러고 앉아있는거, 고거를 잘라가지고 만약 저기 전시하시게 해드릴 수가 있는..

 

Q. 네네. 그 두 번째가 반에서 하나로였고, 그게 이제 매우 중요한,

 

A. 아 맞아요, 그때 반에서 하나로 할 때 박영숙, 박영숙, , 정정엽이가 들어왔어.

 

Q. 아뇨 아뇨 아뇨,

 

A. 2회전 할 때.

 

Q. 아뇨, 아뇨, 그거는 이제 봇물을 트자 전시고,

 

A. 아 그런가?

 

Q. 예 우리 봇물을 트자 전시가, 박영숙, 정정엽 해서 같이 하신거고, 그 여성시, 해방시와 함께하는 그림 시화전, 그래서 그게 우리 봇물을 트자고요. 10월 모임 두 번째가 반에서 하나로. ,

 

A. , 반에서 하나로 작품이 어떤건지 기억이 잘 안나요.

 

Q. 이제 어머니, 손이 열이라도.

 

A. 아 손이 열이라도, .

 

Q. 그게 이제 반에서 하나로

 

A. 아 저기 있어요(웃음)

 

Q. 그게 이제 민에서 하면서,

 

A. 이렇게 왔다리 갔다리 해요.

 

Q. 예 하면서, 성완경 선생님 특강도 하고

 

A. 네네네.

 

Q. 그게 이제 그 토론회 때 많은 여성들이 와서

 

A. 굉장히 많이 왔죠. 깜짝놀랬어.

 

Q. 많이 와서 그림 마당 민을 가득 채우고, 엄청난 열기가 있었고, 그게, 그 전시가 언론에 어마어마한 또 주목을 받게 되고, 이러면서 공식적으로,

 

A. 그렇죠. 그 저기 월간미술에...

 

Q. , 1회전보다 2회전 반에서 하나로가 이제 여성주의라는 게 뭔가

 

A. 훨씬 훨씬 더 저기

 

Q. 여성미술이 뭔가

 

A. 사람들한테 인식이 됐죠.

 

Q. 네네 확실하게 인식...

 

A. 1회전땐 아무도...

 

Q. 그래서 반에서 하나로 라고 하는 그 전시가 1회전을 크게 그렇게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A. 못했지만.

 

Q. 반에서 하나로가 이제 반향을 일으키게 되잖아요. 세분의 그 전시가.

 

A. 그 반에서 하나로라는 제목 자체는 김인순씨의 아이디어에요. 이거 너무 놀래지 않아요, 반에서 하나로라니...

 

Q. 근데 그 토론을 하면서 그 얘기가 김인순 선생님 말씀들어보니까 그얘길 내가 했다.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근데 보니까 여성학 쪽에, 선생님께서 여성학 쪽 연구도 많이 읽어보시고, 자료도. 그래서 그 기록을, 무슨 책을 선생님이 읽으셨대요. 그래서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까, 그게 중국에 그 모택동. 중국에 거기서 보면 여성이 하늘의 절반이다.

 

A. 그땐 약간 좀 사상이(웃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때는 약간 위험한...김인순씨가 그랬죠.

 

Q. 그래서 여성이 하늘의 절반이고 이런 중국에서 나온 여성운동, 그런 그 문화운동, 문화 대혁명 시기에 나왔던 그런 발언들...

 

A. 제목이 너무 좋았어요.

 

Q. , 근데 그거를 선생님께서 반에서 하나로라는 말로 당시에는 생각했다. 라고 얘기하셨던데. 그 전시가 이제 결국 뭐 첫회전은 소묘였지만, 이때는 채색,

 

A. 채색도 들어가고.

 

Q. , 각각의 중요한 의제들, 여성에 대한 문제를 좀더 본격적으로 나가는 전시였던거 같애요. 그 전시 준비에 대한 이야기도 좀. , 생각이 나시면.

 

A. 그 저, 저는요, 그 전시를,

 

Q. 관훈갤러리 끝나고 아마 또 토론을 하셨을거 같아요.

 

A. 토론을 이제 여기저기 다니면서 했는데, 그 또하나의 문화 사무실도 우리가 가보고, 또 뭐 그렇다고 해서 무슨 저기 그 글쓰시는 분을 모셔다 놓고 우리가 공부하고 그런건 아니고, 우리끼리 책도 서로 읽어보고. 이제 그때 수잔 손탁인가? 그 왜 저...왜 여성 작가는 메트로 폴리탄에 없는가라는 거를 원문을 놓고 김진숙이랑 셋이 단어 찾아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나요. 굉장히 감동스럽고, 아 미국에도 이렇게 있었구나. 우리는 미처 몰랐었죠. 그러니까 아 저기 우리가 여성미술이란 말을 스스로 만들진 않았지만 왜 우리가 우리 얘기를 왜 우리가 우리 얘기를 그림으로 하지 않으면 안됐을까라는 그 가능성 같은 게, 너무 인정 받는 느낌이고, 그 이유를 알게 된거죠. 그러니까 더 적극적으로 우리 여성 얘기를 하자 막 이런 얘기가 더 나왔고, 그거를 확대를 해서 많은 젊은 여성작가들하고 같이 동시에 전시하자 뭐 이런 말도. 그래서 3회전 할 때는 전국에 이름이 비슷한, 여성작가일지도 모른다는 명단 뽑아가지고 우리가 그냥 다 보냈어요. 우리가 이런 전시를 할텐데, 당신 참여 하겠습니까. 이제 스물 몇분이 오케이를 해가지고 또 그 전시 했었던데가 잘 기억이 안나네.

 

Q. 아 그건 이렇게 될겁니다. 2회 전시가,

 

A. 끝나고.

 

Q. 86년 전시가 끝나고, 85년에 10월 모임이 창립을 하고, 그 무렵에 또 민미협이 창립을 하잖아요.

 

A. 하죠.

 

Q. 8511월에,

@1839

?여성 백인?회관에서 창립을 하고 86년에 이제 마당 민에서 10월 모임 2회전 하고 그리고 나서 선생님들께서 이제 그 민미협 여성회 분과를 만드셨잖아요.

 

A. 네네.

 

Q. 여성미술 분과를 만들면서, 87년에 시작이 되는게 제가 기억하기론 여성과 현실전.

 

A. 그렇죠. 여성과 현실전인데, 말을 그렇게 붙였죠. 근데 여성과 현실전의 주축은 우리라기보다는 두렁이 들어와가지고 김, 그니까 정,

 

Q. 아뇨 선생님, 여성미술 분과를 만들 때,

 

A. 저는, 저는 기억이 안나긴 해요.

 

Q. 제가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드리면, 이제 10월 모임에 두렁이 아니라 그 터, 이화여대

 

A. 아 터, 터요, 터 그래 맞어(웃음)

 

Q. , 그래서 정정엽, 최영수 뭐 이런 터 그룹하고 만나서,

 

A. 네 맞아요 터에요 두렁이 아니고 터에요.

 

Q. , 터 그룹, 터 작가들 거기도 이제 이화여대 여성 그룹이죠. 그래서 정정엽 선생이 주축으로 해서 터 그룹하고 10월 모임 만나면서 그 중요한 전시 중에 하나가 우리 봇물을 트자.

 

A. 그래요 우리 봇물을 트자

 

Q. 거기 박영수 정정엽 이런 분들도 들어오고,

 

A. 들어 있지.

 

Q. 그래서 그거는

@1949

?김인순?선생님은, ...나는 운동을 해야지 이건 아닌거 같다 해서 그분만 빠졌더라고 김인순 선생만.

 

A. 김인순씨가 빠진거는, 이 그룹 자체가, 그니까 김인순 씨는 정말 민중의식이 강한 여성이잖아요, 여성작가. 우리는 부르주아지...아니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지만 이거는 제가, 거기에 대한 반발이 좀 있었지 않았나, 저는 혼자 그렇게 생각을 하죠. 그래서 참 아쉬웠지만 그리고 그녀는 이제 운동 쪽으로 가고. 그래서 우리 봇물을 트자는 자기는 못한다, 니들 그룹 이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했었던거 같아요. 절대로 본인한테 물어보지 않았어요.

 

Q. 제가 여쭤보니까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지금 운동을 할 시기에 이렇게 좀 나이브하게 문학을 중심으로 이렇게 하는 거는 본인은 좀 아닌거 같다, 이렇게 표현, 이 생각을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A. 그런 느낌이 확왔어. 근데 본인한테 물어보지는 않았어. 제가요.

 

Q. 그렇지만 우리 봇물을 트자도 시간이 지난 뒤에 보면, 여성 해방과 문학과 예술이 처음만나서, 그런 활동을 했던 전시로서는 매우 중요한거 같고, 그 부분은 김현주 선생께서 글을 잘 쓰셨더라고요. 근데 그런 봇물을 트자, 이 이런 표현들도 굉장히 중요했던거 같아요 그게 또하나의 문화나 다 만나 있는거 같기도 하고.

 

A. 그렇죠.

 

Q. 그것도 한번 말씀을...

 

A. 제가 우리 봇물을 트자라는걸 제가 얘기했는지 누가 얘기했는지 저는 지금 정확하게 기억을 못해요. 근데 그 우리 봇물을 트자라는 말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아마도 그게 그, 또 하나의 문화에서 온 말인지 아닌지 저도 지금 기억을 못합니다. 제가 한건지, 또 누가 한건지, 그것도 기억을 못해요. 근데 우리 봇물을 트자라는 게 너무, 이게 이제 정말 여성문화와 남성문화의 만남이고, 이게 이렇게 갈라져 있으면 안되는 거고. 저는 궁극적으로 여성남성이 그냥 성이 없이 인간으로 이렇게 취급받는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잖아요. 그거에 시초가 되지 않을까? 그니까 봇물이라는 거는, 이 막 우리가 끓어오르는 이 마음 자체를 탁, 터놓으면서 남녀의 어떤 그런 구분을 좀 해소시키자, 라는게 저가 개인적인 생각이었는데 그게 어떻게 보면 일부한테 좀 반발을 받는. 그니까 애매모호한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거죠. 그니까 아주 강력한 여성이 나가야 된다 총칼들고, 그때는 왜 미국애들도 저, 무슨 그룹이죠? 총들고 나간 그룹이 있어요. , 고당시에.

 

Q. 아 그래요?

 

A. , 고거 한 6년전에.

 

Q. 게릴라 걸, 게릴라 걸스.

 

A. 게릴라 그룹이 총들고 나왔어요. 실제로.

 

Q. 네네네, 게릴라 걸스,.

 

A. 그 게릴라 걸스가 우리한테 준 영향이 굉장히 컸습니다. 근데 저는 개인적으로 총까지 들고나가기에는, 결국 싸운다는 얘긴데. 궁극적으로 100년이고 200년 후에는 성이 없어지는 세계가 저는 꿈이었기 때문에, 어 그 굉장히 좋지만 내가 가야될 길은 아니다 라고 저는 생각을 한거죠.,

 

Q. 선생님 10,

 

A. 개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Q. 10월 모임하고 터그룹하고 만나서, 여성미술 연구회 라는걸,

 

A. 연구회라는걸 만들었죠.

 

Q. 만들었죠, 그래 그 왜만드셨어요 여성미술 연구회를?

 

A. 그니까 저 자신도 여성 미술의 어떤 장르에 대한 연구가 전연 안돼있는 상태에요. 아주 본능적으로 내 얘기를 하자. 여성인 나의 얘기를 하자 하다보니까는 여성 얘기를 하게 된거지, 왜 그런지, 역사적으로 좀 증명하면서 자기를 긍정하면서 나갈 수 있는 어떤 이론이, 바탕이 없었던거에요. 없다고 생각을 한거죠 저는. 그래서 그, 그룹을 만들어서 이론 공부도 좀 해가면서. 1년에 한번씩 우리가 모여서 전시를 해서, 전시를 하지 않으면 응집이 안되지 않습니까. ? 그러니까 응집을 할려면 전시를 해야 돼요. 근데 이걸 우린 끝까지 가고 싶었어요 저는. 죽을 때까지. 근데 10년 이상이 못갔죠.

 

Q. 결국 그 여성미술 연구회는 그니까 그, 일종의 여성미술운동을,

 

A. , 여성미술이래는게 뭔가. 라는거부터 시작돼가지고. 과연 반, 반영은 어떻게 되는 건가, 뭐 이런데까지도 공부하자. 뭐 이런거,

 

Q. 그래서 주로 스터디 그룹 형태로 해서 자료를 읽고

 

A. 스터디 그룹했지만 모여서 선생 모셔놓고 공부한적은 없어요. 각자 개인적으로

 

Q. 아 자체 내부.

 

A. .

 

Q. 공부하고 와서 토론하고?

 

A. 아 그런건 없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있었는지도 모르죠(웃음).

 

Q. 그러고 여성과 현실전이 탄생을 하게 되잖아요.

 

A. 그렇죠

 

Q. 그 여성과 현실의 문제, 이 제목 자체도 아주 재밌는, 아주 직접적이면서도 거기 다,

 

A. 매우 직접적이죠.

 

Q. 그리고 문제의식이 딱 드러나잖아요. 여성과 현실전이니까. 첫 번째 여성과 현실전...23회때는 선생님 말씀하신 것처럼

 

A. 그림마당 민에서 했던 걸로 아는데?

 

Q. 네 그 첫 번째 전시가 상징성이 컸고, 두 번째 세 번째 갈때는 전국에 있는 여성작가들 다 모아보자 이렇게 넘어갔던거 같애요. 그래서 여미연 중심으로 여성과 현실전이 탄생을 하게 되는건데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어떤 토론과 의제들을 가지고 여미연이 모여서 그런 전시를 이렇게 해보자라고 제안이 됐지 않았을까 싶어요.

 

A. 아니 그건 그래요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민중미술 협의회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반발심이 좀 있었던거가, 아니 이런얘기는 입밖에 내서 얘기는 못했지만.

 

Q. 아니 솔직해도 괜찮...

 

A. 얘기했어요. 가까운 친구들한테는. 왜 우리가 분과야. 아 너무 그거 싫어 난. 그래서 사실 거기 잘 안나갔어요. 그 회의에. 너무 속상한거에요. , 여태까지 이케 해온 것도 그런데 왜 우리가 그 민중미술의 분과니? 나 그거 싫다. 그래가지고, 거기 거의 안나갔어요. 개인적으로.

 

Q. 그리고 민미협내부에도 진보적 조직이라고 하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 혹은 가부장적인 이런 부분..

 

A. 가부장적인게, 다른데 내가 모르니까 하는 소린지 몰라. 다른 그룹이 어떤지

 

Q. 아니 직접적으로 김인, 김인순선생님께서는,

 

A. 굉장히 가부장적이야. 그래서 그때 김인순 김진숙이는 적극적으로 찬성, 김인순씨 찬성안한다 그래요?

 

Q. 김인순 아니, 김인순 선생님도 문제의식이 뭐냐하면 너무 민미협이 가부장적이었고, 남성주도적이었다. 그게 너무, 불만이었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A. 저도, 사실 솔직히 얘기하면 거기 모임에 안나갔어 거의.

 

Q. 그러셨군요.

 

A. , 너무, 그래서 아는 작가도 별로 없지만. 주재환씨 하나밖에 모르죠(웃음). 너무 싫었어. 그 분위기가.

 

Q. 그래서 민미협하고 일정 부분 거리를 두면서 그래서 주도적으로 여성 미술 연구회도 꾸리고 여성과 현실전을 그래서 만들어낸게 아닐까, 민미협하고 무관하게 여미연중심으로 이 기획틀을 잡았잖아요.

 

A. 그렇지만 어쨌든 소속감은 민중미술 안에, 내부이죠. 그거는 어떻게 해체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해체를 못했죠 끝까지. 그걸 10년 하고서

 

Q. 그렇죠 여성과 현실전을, 10년을 했는데,

 

A. 10년 하고. 지금도 좀 아쉽긴 아쉬워요. 계속 끌고 나갔어야 되지 않을까 싶은데. 또 이 문화적인 분위기, 한국의 분위기도 싹 바뀌고, 아 그래서 그러면 좋아, 난 혼자 독립적으로 나갈거야 맘대로해, 이러고 혼자 막, 작업을...

 

Q. 10월 모임은 어쨌든 지속되지 않고, 여성과 현실, 여미연 이런 쪽으로 넘어온거에 대해선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A. 아니 그때는 사실 우리 10월 모임이라는거가 굉장히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얘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뭐, 10월 모임이 중요해 이런거 보다 여성들끼리 모인다라는거 자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거에요. 그래서 이게 확장됐구나, 그러면서 10월 모임 없어져도 상관없어, 저 개인적으로는. 고렇게 아무도 얘기를 한번도 안했지만. 그래서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한거죠.

 

Q. 결과적으로 그 확장성에서 여성과 현실전을 보신거군요.

그렇죠

 

A. 그렇죠. 그거에 이게 이제 밑거름이 돼가지고 이케 확장이 된거다라고 스스로 생각을 하고 뿌듯했던게 있었기 때문에, 그 꼭 뭐 우리 여성, 저기 3인전 꼭 끌고 나가야 된다라는 역사적인 의식은 없었죠. 그리고 이미 그때 약간의 그 김진숙씨는 나보다 더 상류.

 

Q. (웃음)

 

A. 전 중상층. 김진숙씨는 완전히... 삶자체는 상류에요. 김인순씨 상류. 왜냐하면 아파트(웃음), 굉장히 큰. 그분 남편도 뭐 저기... 사회적으로 굉장히 인기 있고, 그럼에도 의식자체는 굉장히 저항적이고...그니까 노동의식이 굉장히 강한. 그건 저는 굉장히 높이 사고 싶어요. 그래서, 그랬기 땜에 그 이는 그렇게 나갈 수밖에 없었죠. 우리의 그 애매모호한, 애매모호한 여성의식이 아마도 맘에 안들을 수도 있었을 거에요.

 

Q. 그 세분이 10월 모임을 스타트는 했지만, 그 뭐 여미연, 여성과현실전 이렇게 가면서 이제 각각의 성향들이 조금씩 이제 그렇게

 

A. 그렇죠 그렇죠.

 

Q. 그니까 김인순 선생님은 여성과 노동, 뭐 이런 쪽으로 좀더 관심이 이렇게 가게되고,

 

A. 전 가정주부의 삶 자체에 이제 주목한거고

 

Q. 그리고 이제 선생님은 그리 공부를 더 하실려고 그래서 이제

 

A. 미국, .

@2952

Q. ?플랫 인스티튜트?로 가시게 되고, 김진숙 선생님은 그때 당시에는 그냥 한국에서 계속 같이 활동을 하고 있었던건가요?

 

A. ...그 김진숙 씨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 함부로 얘기 할 수는 없는데. ..., 뭐라고 얘기할까, 좀 성향이 달랐어요. 그니까,

 

Q. 세분, 세분, 성향이..

 

A. 셋이 다 달랐어요. 달랐는데 내가 좀 김인순씨 쪽인가 하면, 김진숙이는 좀더...상류...의식이 있고, 여성 의식이라는거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게 뚜렷하게 저희, 저처럼 열이 불불이 나는것도 아니고 그러면 우리 셋이 다 좋으니까 같이 이렇게 가는데, 이분은 결국은 그림 안하게 되더라고. 지금은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미국갔잖아.

 

Q. 훨씬 자유분방하시고 그니까 뭐...

 

A. 자유분방하고, 그림에 그 어떤 재능? 그림에 대한 어떤 그런 그 타고난 재능은 아마 셋중에 가장 높지 않았을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근데 그림이라는게 결국 재능이 아니라 의식이잖아요. 그러면서 조금...다르죠. 제가 다르다고 얘기하지만 아무튼 그 좀 엇각이 이렇게 가는게 있었죠.

 

Q. 네네네. 그래서 80년대 후반에 이제 반에서 하나로 그 전시에서 촉발된 여성미술, 혹은 여성주의 관련한 이런 담론들이 어쨌든 여성과 현실전으로 이어졌고 80년대 후반에 그런 정치적 변화, 876.10항쟁 또 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런, 그런 한국뿐만아니라 세계적 격변기에 드러나는 그런 운동성과 여성, 여성운동, 여성미술운동 이런 것들이 만나서 한국 사회에 큰 변화를 만들어내게 된거 같아요. 어쨌든 그 80년대 후반에 그 여성과 현실전을 기획하던 당시에 한국 미술계 그리고 왜 그걸 지속적으로 기획해야 됐는가에 대한 어떤 문제의식, 이런 것들도 좀 듣고 싶어요.

 

A. 그니까 저는 사실 미술화단에 내부 사정에 대해서는 제가 정확한,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왜냐면 관심이 없었으니까. 한국 미술에 그 어떤 그 당시에, 한국 전체 미술의... 부조리라고 얘길 해야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엔, 이건 부조리해, 그러고 도대체 자아 의식이 너무 없어. 제가 이제 판단하기에는. 화가들이 이렇게 자아 의식이 없는. 그니까 한국인으로서의 자아 의식이 없는 이런 화가들이, 그 사람들 그림을 내가 어떻게 그...받아들일 수 있어, 받아들일수 없어. 이런게 전 철저했어요. 그니까 화단하고 아주 이렇게 금을 딱 긋고 너희는 니들이가, 나는 나대로 갈래. 혼자래도. 그런 생각이, 저는 정말. 지금도 얘기하지만 확실하게 있었어요.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제가 그 화단에, 화단이 아니라 그림의 방향성, 그림의 흐름같은걸 제가 잘못 읽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적인 흐름이라 있다고 해서 우리가 꼭 따라가야 하는건 아니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거에 대한 반발이 굉장히 심했기 때문에 남한테 얘기는 못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뭐...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또 화단에 굉장히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닌 입장에서 뭐라고 막 발표는 못하지만, 나 혼자는 아무튼 간 그건 아니야. 그렇게 그게 한국화, 한국인으로서 화가라고 내놓을 수 있는 어떤 모습은 아니야 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여성미술일에 더 침잠해 들어갈 수 있었고, 그게 큰 배경...나의 힘의 배경이 됐다고 얘기할까요? 나 혼자는 아니구나 역시? 음 그러고 그때만 해도 어.....한국의 미술대학에 입학하는게 거의 90퍼센트 여성이고 남성은 몇퍼센트에 불과, 나중에 55로 바뀌었잖아 서울대학도요. 50퍼센트 50.. 무조건 남...뽑고 이러지 않았습니까. 그런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생기는만큼 여성들이 그림으로 다 나가지 않았어요. 근데 그분들이 , 미술대학을 나와서 하고 있는 것들이 그냥 한국의 회화를 그대로, 회화의 그 스토리를 그대로, 히스토리를 그대로 가져가는거 아닙니까. 그거에 대한 반발이 컸죠 개인적으로.

 

Q. 샘 그럼 유학을 몇 년도...

 

A. 유학은요, 제가 팔.. 첫 번째 개인전이 끝나고 나서.

 

Q. 아니, 선생님 그 80년대 초반에 한번 하셨고, 전시를.

 

A. 아니 80년 그때 81년도에 했나 2년도에,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못하는데, 개인전 하자마자 우스운 얘기지만 아주 굉장히 우스운 얘기지만, 남편이, 당신 끝까지 그림 그리고 싶어? 이렇게 물어보드라고요. 나 당연히 나 죽을 때까지 할거야, 이랬죠.

 

Q. (웃음)

 

A. 이 알고 한 물음인거야 저한테. 근데 당시 우리 남편은 사업을 조그마한 회사를 사업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한국의 어떤 성향을 너무 잘 아는 거에요.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어, 당신은 고등학교 밖에 안나왔어, 미술 대학도 안나왔어. 당신이 한국 화단에서 그래도 일을 열심히 할려면, 뭔가 학력이 필요해, 이렇게 얘길 했어요. 그래가지고서, 나 학력 나 고등학교 나와가지고 지금 대학 못가, 내가 이랬거든요. 받아주지도 않아, 그랬더니, 미국에선 다 돈만 내면 받아줘. 이게 지선이 아빠의 아주 솔직한 얘기였어요. 그래서 자기 친구가 뉴욕서 대학교수하고 있는 아주 절친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한테 연락을 해가지고

@36

???? 우리 마누라 이러이러 한데, 공부할 수 있는 어떤 그 게 있느냐, 그랬더니 정보를 싹 애 아빠한테 준거에요. 그래서 1년동안만 해라, 거기는 시험도 안본다, 니가 하고 싶은, 당신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면 얼마든지 그 입학이 가능하다, 근데 그게, 한국에서는 그거를 또 인정을 해준다 1년이지만. 그래서, 그럼 좋아 나는 뭐 학력 그런건 관심도 없었어요. 1년 동안 자유스럽게 혼자 작업을 할 수 있는.

??? 뉴욕가서. 절보고 유럽을 갈래 뉴욕을 갈래, 당신이 결정해 그렇게 얘길 했거든요. 나는 유럽은 싫어, 나는 뉴욕갈래 이렇게. 영어도 하나 못하면서, 그래서 남편이 자기가 다 수속을 했어요.

?아트스튜델리그?이런데는 다달이 돈만내면 돼. 다달이 50불인가 70. 그러면은 그냥 입학이고 뭐고 없어. 가서, 가져가서 그리면 되는거야. 그리고 ?아트스튜델리그?는 대학은 그건데 당시는 대학이 아니잖아. 근데 거기는 아티스트를 위한 워크샵 이라는게 있어요. 그게 저기 그 뉴욕, 뭐죠 그, 중심, 거기서 거기에 34번가에 있었어. 고거에는 누구나 그냥 작가라는 이름만 있으면 입학이 가능해. 그래서 저는 그때 작가회에 들어갔어요. 일부러 들어 갔어요 이걸 가기 위해서. 그래서 고기 1, 고거는 이제 밤에. 밤에 이제 밤에만 하는데고. 작가들이 이제 낮에는 자기 일하고 밤에는 와서 프린트 메이킹하는거에요. 거기는 다 프린트 메이킹밖에 없어. 거기는 회화를 가르키는데가 아니야. 그래서 전 석판화를 했죠. 그리고 여기는 이제 낮에는 여기가서 그림을 그리고. 그러니까 1년동안, 57번가에 그 아트스튜델리그에 이 34번가에 여기만 왔다갔다하면서 했죠.

 

Q. 그래서 그 1년이 그것만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시간은 아니..

 

A. 그거를 다 온전히, 온전히 했고. 사실 실제로 작업을 한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제가 제일 주목한거는, 노상 보러다니는거죠. 그 뉴욕에,

 

Q. 음 전시 보러 다니는거

 

A. 거기가, 세계에 그,

 

Q. 그렇죠, 중심이니까

 

A. 중심이었었죠. 본거 또 보고 본거 또 보고.. 그냥 보러다녔죠. 근데 그게 굉장히 큰, 저한텐 공부였죠.

 

Q. 네네네 아 그리고 나서 다시, 그 저기 세분을 다시 만나신..

 

A. 그렇죠! 또 우리 하자! 이렇게 된. 갔다 와서.

 

Q. 음 갔다와서였구나 저는 또 후반부로 잘못알고 있었어요

 

A. 아니 갔다와서.

 

Q. 갔다와서, 다시 하자.

 

A. , 갔다 와서 이제 앞, 조그만 그...저기 전시 자기 개인 작업실 18평짜리 하나 얻어가지고 거기서 잡모임을 갖고 그랬죠.

 

Q. 음 그 시기를 한번만 더 회상을 해보면, 어떤 시기였어요 선생님에게?

 

A. 저는 열정적인..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거 같애요.

 

Q. 이미 벌써 나이가 사십...

 

A. , 정말 죄송하지만요, 아 난 나이 생각을 해본적이 없어요(웃음).

 

Q. 아니 죄송합니다(웃음),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80년대에 40대 주부, 여성 이러면 우리 관념이, 이미 많은 것들이 늦어져버린 시간이었잖아요. 그런데 선생님들께서는 그 시기를 새로운 어떤 출발로 시작을 하신거 같아요.

 

A. 아 저는요, 삶자체를 바꾼거죠.

 

Q. 그렇죠. 삶이 완전히 변화하고, 변혁이고

 

A. 그건, 저기 제가 이제 서른 여섯 살때 서예를 시작했지 않습니까. 너무나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니까 제일 돈 안 들어가는, 어 그리고 나 혼자 할 수 있는 서예를 시작하자 그래서 박두진 선생님 그 시인이 서예를 가르켰어요. 거기를 소갤 받아가지고 4년을 다녔어요 거기를. 근데 정말 제 자랑이 아니라 밤 3시까지 그냥 쓰는거에요. 글씨를. 너무 재밌는거에요, 이게. 결정적으로 딱 스톱하게 된 거는 뭐, 남들은 숙제를 한 두장 해가지고 오면 100장씩(웃음). 숙제를. 선생님이 막 기절을(웃음). 나중에는 이렇게 많이 가져올 필요 없어요, 한 두장 가져오세요 그래서 한두장 가져가고. 4년만에 당장 그날 제가 스탑한 이유가 있어요. 선생님한테 선생님 나 지금 전부

@4049

?임서?라그래 이걸, 선생님이 그려주면,

 

Q. 베껴, 베껴쓰는 거

 

A. 베껴쓰는거. 선생님 저는 언제 내 맘대로 글씨를 쓸 수 있어요 그랬더니, 20년 더 하면 돼요. 앞으로 20년을 더 임서를 해야, 당신의 어떤 그거를 할 수 있다. 딱 듣는 순간, 그래? 그러면 난 오늘로 끝이야. 그리고 그날부터 안 갔어요. 안가고 서예를 딱 관두고 혼자 이제 그림 그리기 시작한 거지. 그냥 그림 그린 거에요. 아무 그것도 없이. 어머님, 친정 어머니 모셔다놓고 그때부터 드로잉 하기 시작하고. 한 거죠.

 

Q. 근데

 

A. 그니까 저는 나이는, 나이는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Q. 아무 관계가 없다.

 

A. 지금 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니까. 그전까지는 내가 그런 환경이 도무지가 안됐어요. 뭐 뭐 전연. ...가 집을 스물 몇 평짜리 아파트를 하나 장만할 때까지 어머니 모시고 살았거든 시어머니. 그렇다면 내가 요거가 생활이 안정될 때까진 나의 의무였는데, 결혼했으니까. 결혼 안했으면 상관없는데. 그래서 딱 안정이 되니까 거기서 생활비에서 내가 나를 뭐 300만원을 생활비 준다 그러면 100만원은 내거야. 가정주부로서 월급이야. 그니까 요건 내가 쓸 수 있어. 남편도 그렇게 얘기했어요(웃음).

 

Q. (웃음)알겠습니다. 그 선생님 이제, 어쨌든 작가로 이렇게, 참여하고 뭐 김정래 선생님은 빠졌지만, 김인순, 김진숙 세분과 함께 10월 모임을 창립을 하고 그리고 반에서 하나로 가면서, 일반적인 작가의 삶이 아니라 일종의 여성운동이 되는 상황,

 

A. 그렇죠.

 

 

Q. 으로 변화했잖아요. 그니까 선생님들께서 우리 운동해서 그냥 확 바꾸자라는 게 아니라 우리 여성이 뭔지를 해보자라고해서 전시를 했지만,

 

A. 오다가,

 

Q. , 2회 전 때 완전히 이것이 무브먼트로, 한국사회에서는 새로운 촉발점이 되면서, 단순히 하나의 작가뿐만 아니라,

 

A. 운동적인

 

Q. 운동적인 상황으로 바뀌었고, 모든 관심들을 한몸에 받게 되는 그런 상황들로 갔잖아요.

 

A. 사실 그때 관심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도 저는 잘 몰라요. 그런데, 꼭 해야 될...이건 꼭 해야 될 나의 사명감이다, 아시다시피 저는 무슨 운동의 이렇게 하는 거, 아주 끔찍하게 사람만나는 것도 힘들어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이게 내... 내가 여태까지 그림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어떤 그런 갚음이라고 할까? 근데 이거는 정말 그리고 내가 여성으로 살아온 과거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누구의 탓이라기보다 역사적인 어떤 그런 그......고 과도기, 과도기에서 내가 여러 가지 받아왔던 문제점 이런거를 나는 그림으로 꼭 얘기를 해야된다고 생각 한거에요. 그러고 왜, 어머니, 첫 번째 개인전도 제목이 어머니였어요. ,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 아버지는 한국에서 그 누구다 하면 알아줄만한 유명한 인사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에 대한거 보다 어머니의 삶자체에 주목을 하게 된거죠. 어머니에 개인적으로 제가 존경하는 것도 있지만,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그 묻혀가는 거에 대한 어떤 분노가 속에 있지 않았었을까, 이런 생각은 들어요. 그래서 이걸 좀 얘기를 하자, 이러다보니까 여성단체들하고도 만나게 된거 아닐까 싶어요.

 

Q. 이제 마지막 질문은 저거에요. 한 개인으로부터 이렇게 촉발됐지만, 아까 그 전 질문하고 비슷한 거기도 한데, ...촉발 됐지만 한 개인, 그니까 세분이죠. 각각의 개인이 촉발시킨 그 하나의 그 촉발점이 이제 사회적으로,

 

A. 모티프

 

Q. 모티프화 된거 잖아요. 그 사회의 변화의 어떤 큰...그래서 늘 연구자들도 그런 부분에서 10월 모임을 주목하는거고, 그래서 어...본인도 그걸 지금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그 촉발점으로 다시 들어가보면 여전히 그것이 유효한 것이었고, 한국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이런 것이었는지, 그리고 만약 지금 새로운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말, 메시지가 있다면..

 

A.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굉장히...극도의 개인주의, 말하자면 이기적일 정도의 개인주의적인 작가에요. 첨부터 시작도 그랬고, 아마 죽을때까지 그럴겁니다. 근데 이거가 사실은 저의 장점이면서 단점이죠. 그니까 단점이라는거는 굉장히 이기적이고 자기생각만하는.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말든지 나는 나대로가, 이거에 대한 저항감은 있어요. 그게 운동 차원이 아니라하더라도, 마음 속에서 정치적인 어떤 불합리에 대한 저항이, 어려서부터 있었어요. 그니까 그냥 뭐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 이럴 때도 아버지가 굉장히 그 저항적인 문인이었거든요. 그래서 아주 그런 운동까지도 하셨어요. 그게 아마 저 뿌리로 오지 않았나 싶어서. 저는 자유당 시절에 그 엄혹한 자유당 시절에도 혼자서 뭐 정말 나쁜 놈들 뭐 이런 게 머릿속에 있었고 내가 그 나쁜 놈들 속하면 안 되지, 라는 의식이 있지 않았었을까 싶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면서도 어떤 주류에 속한다라는건 아주 치욕같은 느낌도 들고. 그래서 그 주류라기 보다는 이렇게...비주류인 나의 얘기. 솔직한 나의 얘기를 함으로써 한국의 여성들의 그 위치라던가, 이 상황이 조금이래도 드러났으면 좋겠다라는 의식이 없었던건 아닌거 같아요. 근데 그게 이제 말로 형성이 된거는 전시가 끝나고 나서 여성단체를 만나고 저 후배들을 만나면서 아 이게, 내가 이래서, 내가 나도 모르게, 이 속에 이런 마음이 있어서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아 이게 바로 너희들이 얘기하는 이 말과 이게 부합되는 얘기야. 너무너무 기분좋았죠. 그니까 자기를 성찰하면서 내가, 아 이렇게 해서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라는 거를 자기가 스스로 인식하게 만든 게 후배들이죠.

 

Q. ...일종의 서로만나서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A. 토론하고 대화하면서 제가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된 거죠. 어떤, 이론화라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아 내가 왜 어머니 삶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고 내가 왜 내 얘기를 하고 싶었지? 왜 내가 이걸 외치고 싶었지? 라는게 아주 당위성이 딱, 온 거니까 기분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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