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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미술 동인 새벽 녹취자료

by 정강산 201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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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공식 명칭이 미술 동인 새벽인가요?

 

A. .

 

Q. 미술 동인 새벽이 창립된 과정이나 또 미술 동인 새벽이라는 어떤 이름을 갖게 된 배경, 그 부분을 먼저 얘기를 해주시죠.

 

A. 당시 수원이라는 지역 환경이 상당히 보수적인 도시라고 볼 수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미술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체적으로, 수원화성이 만들어질 때는, 개혁적인 군주 정조가 만들었지만, 이렇게 그 시간이 쭉 지나면서, 아주 보수적인 도시로 이렇게 되고 있어서, 80년대 중반이 되면서 시민운동이 조금씩 활성화 되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미술 쪽에서 보면 그, 당시 이제 대학들 갓 들어간 젊은 그 청년들이, , 그동안의 미술에 대한 반성 속에서 새로운 생각들을 갖게 되죠. 그래서 중반이 되면, 80년대 중반이 되면서 이제 그 수원 미술 문화 아 미술이 아니지만, 문화운동 연합, 수원문화운동 연합에 그 미술 위원회, 시각 위원회 이런 형태로 들어가게되고,

 

Q. 분과 개념처럼 들어가는 거군요?

 

A. 그렇죠. 그러면서 또 미술 쪽으론 별개로 뭐 판모임이라 그래서, 판화를 공부하는 그런 모임들이,

 

Q. 그 목판화 모임.

 

A. . 그런 모임들이 생겨나고, 그러면서 이제 그 당시에 이제 그 청년 학생들 중심으로 작은 미술 운동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죠. 그래서 이제 그들이 졸업을 할 무렵이 되고, 그러면서부터 전문 미술인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서, 미술 동인 새벽으로 이제 창립하게 되는데. 미술 동인 새벽의 그 이름 같은 경우는, 그 새벽 그대로, 아침 미명에 그 깨어있는 정신을 항상 가지고, 시대를 바라보자, 뭐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죠.

 

Q. 처음에 그러면 창립에, 선생님께선 창립전엔 참여하지 않으셨잖아요.

 

A. .

 

Q. 그 창립에 그 관여한 맴버들은 몇 명이 출발을 한건가요?

 

A. 그때 한 열 여덟명 정도가 됐죠. 꽤 많았어요. 그러니까 당시에 물론 학생도 포함 되어있긴 해요. 그러니까 지금도 수원 지역에서, , 수원 미술인, 그러니까 지금은 민미협 수원지부죠. 지금 그렇게 활동하고 있는 친구들 중에도 차진환이라던지, 박준모, 또 이주영, 이호연 이 친구들이 다 그 당시에 함께한 친구들인데, 당시에 하여튼 수원에서 창립전을 할때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죠. 이제 그... 수원 지역에 전체 미술 경향들을 보면 대부분 뭐 자연주의적인 구상화,

@550

그러니까 ?노부에?스타일의 구상화가 한 부류를 또 있었고, 또 뭐 추상이라고 해도, 그야말로 단색화의 흐름으로까지도 미처 가지 못한, 그런 발전 단계에 있을 때에, 새벽의 출현은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고 봐요. 그리고 이제 그 무렵에 그... 새벽만이 아니라 수원 시가 전체적으로 뭐 컴아트 그룹이라는 그 행위미술 중심의 그룹도 생겨나고, 또 물론 뭐 ?슈릅?, 슈릅이 그때 또 같이,

 

Q. 비슷한 시기에.

 

A. , 같은 시기에 활동을 하고 있어서 나름대로 수원지역으로 보면 백가쟁명의 시대로, 그게 올라온, 이제. 네네.

 

Q. 어쨌든 이 시대정신을 가지고 80년대 후반에 수원에서 출발한 그룹으로는 아마... 아마 본격적인 그룹으로는, 좀 늦었지만, 새벽이라는 그룹이 최초인거죠?

 

A. 네 그렇죠. 그러니까, ... 이미 뭐 그 임술년이나, 또 뭐 현발이나 이게 이제 80년대 초반부터 활동을 시작을 해오면서, 어느 정도 정보는 충분히 다 입수하고 있던 그런 상태였고, 어 그런 속에서 수원은 수원 나름대로의 어떤 어려운 환경도 있었고, 그거를 그래도 뚫고 나가려고 했던 삶의 정신을 반영한, 기존 미술에 대한 반성을, 반성을 통해서 새로운 흐름으로 가고 있었던 거죠.

 

Q. 그 서울에서 진행되는 그런 흐름을 이제 알고 있었고,

 

A. .

 

Q. 그리고 그 어쨌든 지역에서 새롭게 태동하는 움직임이었다고 봐야 되겠네요.

 

A. 네 그렇죠. 그러니까 그... 특히 이제 중심에 있었던 그 최춘일 같은 경우는, 이미???대학 1학년때부터 그런 개혁적인 사고를 가지고 계속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이제 뭐 주변에 이제 뭐,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이억배?라던지, 이런 친구들이 같이 이제 하면서, 학생들과 그런 소모임들을 통해서, 아까 말했던 시각 위원회라던지, 뭐 목판 모임이라던지, 연구를 많이하고 서로 토론도 하고, 그런 준비과정이 상당기간 지속된 거죠. 그러니까 이게 89년에 창립전을 하지만, 이미 그 태동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제 그렇게 보죠.

 

Q. 그럼 이제 선생님께서는 어쨌든 최춘희, 이억배, 이주영, 이 세대보다는 선배세대였고, 다른 활동들을 하고 있었잖아요. 그러다가 합류하게 되는 과정이 또 흥미로운데, 선생님께서는 여기 참여하는 과정에서 또 기자 간담회도 하시고,

 

A. .

 

Q. 이런 일련의 참여 과정에 대해서 좀 말씀해주시죠.

 

95

A. 개인적으로는 저의 미술 흐름이, 그 이미 이제 79년도부터 그런 그 소재주의이긴 하였지만, 그런 분단 문제에 대한 고민은, 89년까지 계속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제 레일을 저는 이제 어떤 단절의 의미, 그렇게 해석을 하고 그 레일이 거치는 그런 상황들을 통해서 통일로 가는. 그런 이제 그, 공부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관심이 계속 그림 속에 녹아 오던 그런 상태였는데, 그 새벽을 준비하던 준비 모임에서, 그 수원 시내 전지역의 작가들에게 엽서를 보냅니다. 무슨 내용이었냐면, 지금 시대가 이렇게 엄혹하고, 또 그런 정말 그런 88올림픽을 이제 지나면서, 우리의 삶과는 유리된, 그런 정치형태라던지, 또는 미술의 그런 형태들에 대해서 반성을 요구하는 그런 엽서를 보내게 되는데, 저도 그 엽서를 받고, 이게 누가하는 일인가를 보고, 그 친구들을 만났죠. 왜 이런 생각을,

 

Q. 그 친구들이라고 하면...

 

A. , 이주영이나 또 뭐 김영기, 최춘일, 이 친구들한테, 물론 이제 그런 준비나 그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는 알고 있었던 상태지만, 구체적으로 그렇게 엽서를 받았으니, 어떤 의미로 이걸 나에게 보낸거며, 작가들에게 이렇게 다...이제, 물론 뭐 아주 어른들한테는 안갔지만, 어느 정도 소통이 될 그 세대에게 다 보냈던거 같아요. 그래서 만나서 이제 토론을 하게되고, 이야기를 듣고....이미 이제 그 작업에서 어떤 한계 같은 거를 막 느끼고 답답해하던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니까 뭐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 뭐 이런 것이 표현 형식으로만 자꾸 바뀌어가고, 이런 것에 대한 한계를 느끼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후배들의 주장에 대해서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이제 뭐 여담이지만, 최춘일이한테, 관련된 서적을 좀 구해달라, 내가 좀 상식이 없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잡지를 본 것 밖에는 없으니. 그래서 이제 한...꼭 필요하게 읽어야 할 예술과 사회라던지 등등해서, 책들을 한 20여권 추천을 해줘서, 이제 계속 88년 말에, 이제 공부를 하게 되는 거에요. 예 좀 하고, 이제 차진환이 같은 경우에는 또 제자였기 때문에, 차진환이도 만나고, 이제 그래서 계속 토론 하는 겁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토론이, 난 자유와 평등은 아무리 봐도 양립 되는 거 같지 않다, 뭐 그런 거 가지고도 하룻밤을 새고, 뭐 그런 과정들을 겪죠. 겪으면서 88년도에도 이미 작업을 다 바꿔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88년도에 신세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끝내고 나서, 그때가 이제 뭐 8월정도였으니까, 그 후반기에 이제 그 지금 새벽의 인자들이 고민하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나도 이제 그림으로 바꿔나가기 시작을 하고. 그래서 외곽에서 도움을 주는 동반 작가로서, 그렇게 활동을 한 거죠. 그래서 이제 창립전도 상당히 문제가 많아서, 그 창립전도 보호하는 역할도 해야되는. 그니까 예를 들면 창립전을 딱 보고 전시 기간 중에, 그 교육청에 투서들이 들어가요. 뭐냐면, 여기 있는 그 회원들이, 그 화실을 하고 있거나, 과외 교습소 같은 것도 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하고 있는데. 그러면 이게 교육청에서 소관 되는 업무니까 교육청에서 이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제재해달라는 내용의 이제 투서가 들어가고 하는데. 당시에 그래도 그런 저의 위치가, 뭐 교육청정도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거여서, 교직 활동도 했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교육청에가서, 그동안에 신문자료나, 월간지에 나온 자료들을, 뭐 그 당시에 이제 뭐 가나아트나 월간미술에 수없이 많은 자료들이, 도판 자료들도 있고, 또 평론가들이 쓴 글도 있고. 그걸 다 보여주면서, 상황을 봐라, 이건 시대 상황이다. 그리고 이건 표현의 자유고, 그러기 때문에 이거는 그렇게, 그러한 내용을 가지고 뭐 감사를 한다던지 그렇게 해서 뭐 규제를 한다 그러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거다, 라고 해서 그 문제가 일단 다 회원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이제 그런 역할을 해주곤 했는데. 그것이 이제 또 기존 미술협회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기성 작가들 입장에서 보면, 또 상당히 껄끄러운 거에요. 그러니까, 뭐 작품은 이미 변해갔고, 그러고 또 미협에 있으니, 기존 화단에서 같이 하기가 껄끄러웠던 부분도 있었을 것이고. 그런 이제 뭐 노골적인 문제제기를 하는거죠. 그럴려면 색을 분명히 하고, 뭐뭐 하나를 결정을 하라는. 그러니까 참 지금 생각하면 저급한 방식이긴 한데, 그거를 듣고 또 참아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거는 이제... 나도 그, 결정을 해야 되겠다, 그래서 이제 그, 새벽 동인들한테 내 말, 결심을 밝히고 이렇게 내가 위치를 결정을 해야 되겠다, 소속을. 소위 말하면. 그래서 그, 후배들하고 같이 이제 의논해서 결정을 한 거에요. 혼자 결정한건 아니고. 단지 이제 그 형식을, 기자회견 형식을 빌어서, 그걸 했던 거죠. 그니까 참... 당시 이제 지역 신문 기자들이, 자기들이 봐도 좀 생소한 방식이기도 하고, 그래서 이제 그렇게, , 그날로 그 기존에 내가 활동하고 있던 기성 단체들에 대한 모든 사표를 내죠(웃음). 당시 ?모구회? 회원이었어요. 그니까 모구회부터 시작해서, 한국 수채화 협회 활동도 하고 있었는데, 한국 수채화 협회. 그 다음에 뭐 수원 문화원에 이사를 하고 있었는데, 수원 문화원 이사. 전부 그, 내용증명으로 사표를 보낸 거에요. 사직서를. 나는 탈퇴하겠다. 그렇게 하고, 미협도 그냥 수원 미협에만 한게 아니라, 한국 미협에도, 사무국으로도 역시 보내고. 그래서 깔끔하게 처리하고, ...이제 새벽 회원으로서 이제, 평회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때 그 새벽, 89년도에 창립전 할 때, 회장님이 작품만 한번 발표만하고

@1718

?결여/결유?가 됐어요. 그니까, 소식이 없는거에요. ?이달원?회원이. 회장이. 그래서 회장 없는 공석 단체에요. 그래서 89년 말에, 이제 그 회장을 뽑아야 되잖아요. 그때 자연스럽게 새벽의 대표로서 활동을 하게 된거죠.

 

Q. 어쨌든 들어가자마자 대표가 되셨네요(웃음).

 

A. , 들어가자마자.

 

Q. 근데 어쨌든 새벽이 출발하자마자 어쨌든 시대 자체가 워낙 격변기였기 때문에, 새벽에 대한 요구가 단순히 어떤 정기 회원전만이 아니라, 새벽에 대한 요구가 사회적으로 있었던 거 같고, 그 사회적 요구를 수행하려는 새벽의 어떤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던거 같아요.

 

A. 그런 일이 많이 있었죠. 그래서 89년 말부터 그, 기본적으로는 교류전 비슷하게 안양 우리들의 땅하고도 교류를 하게 돼서, 그 같이 안양에서도 전시를 하고, 또 뭐 민족미술인 대회 하면 뭐 그때도 이제

@1838

?맺보?에서 또 가고, 그런데 이제 같이 참여해서 전국적인 교류의 폭을 넓히고, 그 다음에 현장에서도 요구가 많이 있었어요. 그니까, 노동운동같은 일들에서 쓰여질 그림들도 요구받아서, 이제 그 거기 필요한 그림들도 그리고, 또 뭐 우리 이제 회원들 중에 그, 노동미술 위원회의 형태도 만들어져서, 노동미술위원회에서는 이제 조합, 노동조합에서 요구하는 그런 만화라던지, 뭐 필요한 그림들을 이제 하게 되죠. 그리고 이제...

@1917

Q. 이때 ?노미위에 그런? 구본주 작가가 잠시 수원에 내려와있었는데 이때 새벽하고 교류가 됐었다고...

 

A. 네 그때 있었죠. 우리가...구본...

 

Q. 이 노미위쪽 활동이었던거 같기도 하고

 

A. 네 맞아요. 그니까, 그 새벽에서 이제 그 불과 새벽이라는 이름으로 2년을 하고. 2년을 하고 이제 이 그, 대중조직의 그, 미술대중조직으로 바뀌어가는, 이름을 좀 바꾸게 되는 상황이 나와요. 이제 그 동인, 우리들만을 위한 미술인 전문, 요 형태에서 좀 폭을 더 대중화시켜서 시민들과 함께 호흡을 할려고 하다 보니까, 아 이름을... 이렇게 동인 형태만 가지고는 좀 어려운 부분들이 있더라,

 

Q. 그럼 90년까지 새벽이었던 거죠?

 

A. 그렇죠 90년까지 새벽이고, 91년부터 수미협으로 바뀌었던 것이죠. 그니까 89, 90년은 새벽이었고. 91년에 그렇게 되는데, 90년에 그 저기 구본주가 우리 노미위에서 활동을 해요. 손문상, 그다음에 신경숙, 구본주, ... 누가 있죠? 저기...

 

Q. 황호경?

 

A. 황호경, 네 맞습니다. 이 황호경까지 네사람이 주로 이제 그 일을 했고, 그래서 이제 네 사람들은 당연히 새벽과 그 다음에 변해가는 수미협에서 같이 활동을, 똑같이 해나가죠. 그리고 이제, 하여튼, 1년마다 달라져요 상황들이. 그 당시에는.

 

Q. 그랬죠. 89년에 어쨌든 베를린 장벽이 붕괴하고 서구 동구권,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과정이 있던 때에 어쨌든 창립을 하신 거고, 90년부터 또 빠르게 이들과 국경 수립하는 과정이 벌어졌고, 국가적으로도 보면은, 임수경 방북이 있었고. 9091년 넘어가면서 정치적 격변이 되면서 노태우 정권에 대한 문제가 있었던거 같고.

 

A. 이제 그래서, 수미협으로 이름을 이제 수원 미술인 협의회로 바꾸면서, 이제 그 정식으로 민미협하고도 관계를 이제 갖게 되고, 그래서 이제 당시 이용준 선생이 와서 대중 강연도 좀하고 이렇게 해서 이제 지역의 미술인들과 어떤 폭넓은 교류를 해나가게 되는데, 우리의 한계라는 걸 많이 느끼고 있었어요. 우리끼리만 해가지고는, 그 수원미술인 협의회도, 한계가 또 있다.

 

Q. 그 한계라고 하는 거는 아까 이제 그런 지역, 지역에 대한 어떤...

 

A. 요구하는 것들을,

 

Q. 요구가 있었을텐데,

 

A. , 요구가 이렇게 형태들이, 처음에는 우리가 이제 현장 중심의 노동 미술 쪽의 경향들을 많이 우리가 이제, 거기에 필요한 작품들을 만들고 했는데, 그것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하다보니까. , 그 이제 사회......이제 수원 지역사회 내에 각 시민 단체들하고의 연계 문제가 또 나오고, 예를 들면 환경문제에서부터 뭐 다양한 시민들의 욕구가 있는데, 그것들을 미술로 다 대응을 하려고 하다 보니까 그 인원의 한계, 또 각자들의 자기 조건에 맞는, 그 자기 중심에 맞는 것으로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제 그런 부분에서, 특히 또 동반 작가들이 수원 지역 내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뜻에, 뜻을 같이 하는데, 그림은 같이 못하는. 그런 분들까지도 더 폭넓게 합류를 시키기 위해서 뭐, 모임을 바꾼다는 건 아니지만, 우리 정기전이나 뭐 기획전 형태를 환경 미술전이라는 이름으로 좀 관심을 좀 느슨하게 두는 전시도 하고, 또 정기전을 통해서, 또 강한 정치적 입장을 보이기도 하고, 이렇게 대응을 여러 방면으로 이제 하게 되었어요.

 

Q. 그러니까 인천 같은 경우에는 공단이 있기 때문에, 공장 노동자와 관련된, 그쪽도 노동예술이, 그 다음에 부천도 공단이 있었고, 안양도 공단이 있었고. 이렇게 중요한 그 지역의 의제가 있었던 부분은 지역 미술운동이 많이 번졌는데, 수원의 경우에는 어떤 지역적 의제들이 가장 컸던가요? 그때 당시에.

 

A. , 수원 지역은 아주 그 공단이나 이런게 삼성전자 외에는 딱히 큰 게 없고, 다 작은 단위의, 작은 단위들이라서. , 수원문화운동 연합에 풍물을 하고 있던 삶터라던지, 이런 데서 이제 그 풍물과 연계된 그 모임에, 그 조합에 같이 이제 미술이 참여해주는 그런 형태들이 있었고. 음 그렇게 이제 정말 부천이나 인천에 비해서는, 그런 부분 보다는, 그 시민 대중 단체들과의 연합된 일들이 정말 많이 있었다, 그러니까.

 

Q. 그러면 수원 지역사회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맥락에서 사회정치적인 의제들. 이런 것들에 관심이 더 있었던 거죠?

 

A. 그렇다고 봐야죠. .

 

Q. 그 다음에 이제 선생님께서도 본 분단의제라던지 이런 것들을 보면 꼭 수원이라고 하는 지역사회에 한정해서만 새벽의 움직임이 있었던 건 아닌 거잖아요.

 

A. 그건 아니고요. 예를 들면은

@2535

?박정수?열사가 돌아가셨을 때, 그 안양 우리들의 땅과 연계해서, 같이 이제 그 장례식 준비를 미술 시각 파트로, 시각 전체 책임은 이제 이억배가 졌었고, 책임자였고. 그다음에 주로 작업한거는 새벽, 수미협 회원들이 가서 영정부터, 그 다음에 좀 특이한 방식이지만 가두 차량에 설치한 설치물로 우리가 미술작품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아마...87, 87때 방식의 것과, 그 이한열 열사도 방식과는 조금 결이 다른 그런 방식으로 더 조형적으로 좀 발전한 그런 형태의 작품들도 만들게 되고. 근데 이제 그,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니까, 노동 문제가 수원 지역사회에서는 많지 않았던 반면에, 이제 뭐 우루과이 라운드라던지 뭐 이런 이제 농업문제. 수원이 또 의외로 농업도시의 중심이에요. 그래서 그런 부분. 뭐 각각의 시기에 필요로 한, 지역 사회가, 대중 조직들이 원하는, 그 필요로 하는 부분에 미술로서 참여를 했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Q.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새벽이라고 하는 작가주의 중심의 미술운동 그룹이, 어떤 시대의 한계랄까, 그 시대의 어떤 격변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을 대응하는 형태로 출범을 했고, 91년에는 어쨌든 대중조직의 형태로 갔지만, 저는 그때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이런 계열의 어쨌든 그 반대편에 있었던 모더니즘 계열에서는 예술이 도구화되는 문제에 대한 강력한 비판 같은 게 있었잖아요. 그래서 작가주의 집단으로 대중조직으로 가는 것 또한 큰 변화인데, 예술이 정치적 문제에서 지나치게 도구화되는 문제에 대한 어떤 그룹 내의 이견이나 혹은 어떤 문제의식이나, 이런 부분에 대한 것들은 혹시 없었는지.

 

A. 그때는 없었고요. 이제 시간이 좀 흐르면서 94-5년으로 이제 넘어가면서부터 그게 있었지, 그동안에는 정말 철두철미하게 서로 뜻을 같이해서, , 이탈하는 회원도 없었고, 함께 정말 그..., 잘 운영되었다고 그렇게 보여지고요. 예를 들면은 이제 그 수원 미술인 협의회로 이름을 바꿀 때, 이제 좀 그 안에 아까 말씀드렸던 노동 미술 위원회도 있었지만, 사진...뭐 사진 분과,

 

Q. 분과 별로 이렇게?

 

A. , 분과별로 이제 활동을 해서, 또 더 전문화 시키려고 그..

@29

Q. 지금 위원회 또 보면은 소위원회 ?운영?....

 

A. 그렇죠, 소위원회 형식으로 전문성을 갖게, 공예는 또 공예대로 하고, 또 그렇게 진행을 했던거 같고. 나중에 이제 그, 시간이 가면서건, 서울도 겪고, 전국이 다 겪는거 하고 똑같은 이제 주제에 대한 부담들, 그게 이제 3-4년은 잘... 그런 거에 대한 부담이 없어 했는데, 이제 나이들이 생활인으로서의 책임, 가장으로 책임이든 생활인에 대한 책임, 경제적 책임 이런 것들이 이제 회원들 각자에게 부담으로 오는 때가 오잖아요. 나이가 이제 먹어갈수록. 그렇게 되면서 투여할 시간들을 예전처럼 많이 못 내면서, 개인들로는 자기 작업에 대한 어, , 예술가로서의 본능, 미술인으로서의 본능들이 또 그렇게 살아나게 되죠. 이제 그러니까, ...나의 어떤 표현 양식이, 이 주제에 맞지 않는다라는거지. 주제 전에 대한. 그 뭐 그런거에 대해서 반기도 생기게 될 수 있는 거고요. 그래서 그 점점 이제 좀 느슨해지는 그런 과정들을 겪죠.

 

Q. 아까 그 사진을 보면 망월동 답사를 가고, 그래서 새벽이 단순히 정기전을 위한 모임이나, 또 수미협으로 가더라도, 그룹으로서의 그 어떤, 지향점, 그런 부분에서 답사, 토론 이런 것들이 좀 있었을 거 같고. 제가 기억하기로는 뭐 이제 이렇게 야유회도 같이 가기도 하고, 이러면서, 기본적으로 동인이 갖는 여러 형태들이 있죠. 와서 서로 토론하고, 밤새서 뭐 의제들을 나누고 또 현장을 답사하기도 하고. 이런 활동들에 대해서도 좀 말씀을 해주세요.

 

A. 8990년 이때는 이제 그 저... 1년에 네 번, 분기별로 MT를 가서, 그 뭐든 발제를 우리 회원이 하고, 그리고 토론 하고, 그니까 기본적으로 미술 자체에 대한, 미술에 대한 얘기하고, 시대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복무할 것인가, 이런 이야기. 그 두 가지 이야기를 주로 이제 나눴던 거 같고요. 그리고 이제 그런 일들을 위해서... 현장 어떤 체험을 위해서, 당시에는 아마 그때 처음 갔을 때는 망월동이라는 데가 그, 성역화 되기 전이죠. 그니까 정말 막, 막무덤이 있을 때. 거기도 우리 회원들이 12일로 이제 뭐 밤새고 가서, 거기도 다녀오고, 그리고 돌아오면서 회원의 친목도 도모하지만, 그때 느꼈던 점들을 같이 토로하고, 그런 것들이 확실히 작품을 하는데 있어서는 훨씬 이제 강한 동력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런, 그런 걸 통해서 전시를 하게 되니까, 그 다음 정기전에 훨씬 더 알찬 작품들이 나오고. 그런 부분들을 받았던 거 같습니다.

 

Q. 새벽이, 새벽이 지향했던, 그러니까 새벽과 수미협으로 전화해가면서 어쨌든 새벽이 지향했던 인식은 뭐였나요?

 

A. 그니깐, 기존 미술에 대한 반성하고, 그다음에 이제 새로운 미술 형태라고 굳이 말할 순 없지만, 지금까지는 그 우리 세대에 해보지 않았던 그런 새로운 미술을 하는데에, 기원적으로 삶이 배제된 미술에 대해서 반성했던 거고, 그래서 그...... 삶이 녹아들고, 삶을 변화시켜내고 해야 되는데, 그러한 미술을 해야 되겠다, 그것이 아마 가장 컸던 거 같습니다.

 

Q. ...아까 박창수 열사 얘기를 조금 더 듣고 싶은데요, 새벽이, 새벽과

@3343

?우리 그림?, 두 그룹이 연합해서, 두 그룹만 연합한거 같진 않고 아마...

 

A. , 그 당시에, 서울 민미협에서도 내려왔을 거에요. 그래서 그쪽에서

@3356

?장우호?라는 친구, 지금은 저기, 이미 작고했는데, 장우호라는 친구가 왔었고, 그리고는, 새벽이 그리는 일은 실제로 다 했던거 같습니다.

 

Q. 이제 그런 활동에 대한 좀 구체적인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A. ...물론 이제 당시에 그 장례위에 시각분야 책임자가 이제 이억배였기 때문에, 장소는 이제 성균관대였어요. 성균관대에서 이제,

 

Q. 수원에 있는데요?

 

A. , 수원. 수원 성대에서, 장소는 그게 무슨 교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칸 하나를 이제 배정 받아서, 거기 한 3일 정도? 이틀, 이틀 걸렸구나, 이틀. 3일은 이제 장례절차 같은 거가 안 되니까, 이틀 동안 뭐 12일로 작업을 같이 했어요. 그니깐

@3458

?이주영, 김영기, , 또 신경숙?, 뭐 이런 친구들이 같이 가서, 그렇게 이제... 제일 중점으로 뒀던 건 영정이었고, , 아까 얘기를 했지만...그 장례식 대열에 쓸 차량용 작업 그것도 아이디어는 이주영이가 낸 아이디어에요. 그리고 물론 다 그거는 협의는 항상 이억배하고. 마지막 최종 결정은, 같이 의논해서 하고.

 

Q. 각각의 회원들의 작품의 경향성은 좀 어땠나요?

 

A. , , 서로 많이 달랐어요. 개성들이 잘 살아있는 방식으로 활동을 했고, 당시 예를 들면 서동주나, 몇몇 친구들은 어떤...두렁이나 이런데서 영향을 받은 그런 전형적인 그런 당시의 모습 같은 그런 그림도 있었고, 또 이호연 같은 경우는 좀 현대미술의 그 경향성을 좀 많이 띈 그런 상태의 그림이었고, 그 회원들마다 자기 개성들이 굉장히 좀 뚜렷하게. 이게 함께 다 같은 그런 건 아니다, 그래서 걸개를 그릴 때 그 성향이 나타나는데, 걸개를 통해서, 또 하나가 되는 거에요. 그니까 그 주제에 대한 계획을 같이 토론해서 하는 거고, 뭐 걸개 공동창작의 의미가 바로 그런 거잖아요? 그래 거기에 인물이, 다양한 인물들이 군상이 들어가는데, 뭐 직업별로 있다던지 할 때도, 결과적으로는 그게 한 그림으로 딱 그 나타나더라고요. 자기가 책임 맡아서 했던 부분이 따로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 , 그래서 우리는 하나다, 그런 느낌을 갖게 되더라고요.

 

Q. .. 이제는 역할에 대한 걸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이제 역할론이죠. 그니까 아마도 목판모임 판에서부터 주도해서, 새벽까지 오는데 아마 주도적 역할은 최춘일 하고 관계 있을거 같아요. 그니까 최춘일이라고 하는 한 인물, 또 이 새벽을 주도해서 창립 시킨 최춘일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어떤 작가였나요? 어떤 청년이었나요?

 

A. .. 뭐 최춘일하고 나하고의 인연은 최춘일이 고등학생 때에, 입시를 준비하면서, 그때 이제 자기가 그린 입시에 필요한 목탄 뎃생이나 뭐 이런 뎃생을 가지고 한번 찾아와서, 이걸 이제 한번 좀 보아달라, 평가겸, 조언을 구하러 몇 번, 이주영이란 같이. 고등학생 때 이제 이렇게 찾아와서, 그 당시는 이제 내가 교직에 있을 땐데, 아이들은 가르치지 않았지만 뭐 화실은 굴러가고 있어서. 그림 평가도 해주고 그렇게 인연으로 만났는데, 뭐 그때도, 이런 기초소묘를 가지고 왔는데도 개성이 아주 강하더라고요. 그니까 당시에 큰 흐름은 전체적으로 목탄하면, 이렇게 문지르거나 하는 방식인데, 그 일본의 미술수첩의 영향을 받았는지, 독학을 하다보니까. , 문지르지 않은 데생, 아주 독특한 작업들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대학을 가고 나서 먹그림으로 가는데, ... 당시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화의 기법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완전 수묵.. 그 몰골법 방식인데 그냥 주욱 번져나가면서 거대한 바위나, 뭐 이런 형태들이 나타나는데, . 그림을 상당히 개성있게 봤어요. 근데 이제 이 친구가 어느날 이제 시점도, 시점, 시점이라는 그룹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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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강, 장영국 뭐 억배? 그렇게 해서 전시장에서 이제 전시하는 걸 봤어요. 근데 이제, 장영국이나 백종강한테서는 못 느끼는, ?아직 업이 없구나? 이 두 사람은 그림이 좀, 그 아마 그때무터 그런 고민을 시작했나봐. 그니까, 학생이었는데 당시에. 이미 선생님들에 대한 그림에 대해서 거부하는, 반성하는 이러한 흐름 같은거를,

 

Q. 반골기질이 있었나 보네요.

 

A. 어 반골기질이 있었는지, 그런 걸 좀 느끼겠더라고요. 그리고 또 뭐 한참 후에 목판모임한다고 할 때 이제 한번 보고 하는데, 그때 이제 지금 우리 수미협 활동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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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현?이라던지 하는 그런 또 젊은 친구들이 이제 역시 또 학생이었는데 거기서 이제 같이 판화모임을 하면서, 그니까 아 이 친구가 조직을 잘하고, 또 설득력이 강하고. 그 허스키한 목소리로. 후배들을 그룹화 시키면서 이런 일들을 잘 해내고 있었고, 그리고 뭐 수원 문화운동 연합 이제 시작을 하면서 사무국장 일을 맡고 있을 때, 고 전에 이제 뭐 스프레이 건으로 뭐 벽낙서,

 

Q. 네네네. 경찰서에도 가셨다면서요(웃음).

 

A. . , 구호, 구호 그런 것을 음.

 

Q. 그 차량에다 썼다고 도청 버스인가에 썼다고 제가 들었습니다.

 

A. 그 아니 이제 그 당시엔 손문상이는 아파트 벽에다가 막 하고 이래서...춘일이는, 최춘일이는 이제 잡혀갔고. 문상, 손문상은 당시 그 신혼여행,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아마 해야되는 상황이고 막 그런 무렵인데. 그때 손문상을 피했어요(웃음). 그래서 현장 체포가 안돼서, ...그냥 받진 않았어요. 형은 안 살았는데. 근데 춘일이 같은 경우는 형무소를 살게되는거죠. 그리고 그 이후에 활동들을 보면, 끊임없이 새로운 걸 추구해요. 그니까, 조직형태도, 무엇도 계속, 그냥 두질 않아요. 계속 바꾸죠. 그니깐 이미 기존에 그 있는 것에 대한, 고인, 고인 것에 대한 반발? 뭐 이런 걸까? 끊임없이 하여튼 새로운 형태들을,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사실은 창작, 창작쪽으로 있었으면, 정말 대단한 작품들이 어마어마하게 나왔을거 같은데. 계속 이후에 행정일을 보게 되고.

 

Q. 그 역할을 바로 이어 받으셨어요 선생님께서. 어쨌든 들어가셔서 바로 새벽의 대표를 하시면서 또 단순히 대표역할만이 아니라 저는, 이제 한 개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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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의 뭐 자기 선언을 한 거니까. 자기 삶에 대한 완전히 반전을. 개시 하신 거고. 그리고 또 새벽의 대표로서도 있지만, 또 바로 ?그림마당 민?에서 개인전을 하시면서 또... 이미 민중미술, 씬이 완전히 형성된 그 씬에서, 큰 주목을 받으시면서 등장을 하시면서, 큰 틀에서보면 민미협 활동들을 직접적으로 또 연계가 되면서 활동 범주가 수원 사회, 수원뿐만 아니라 또 민미협, 전국단위의 이런 활동들로 역량이 커지는 부분이 생기는 거 같아요. 그래서, 새벽을 이끌면서, 또 개인의 창작 이것도 병행하면서 운동을 하셨는데, 그 부분들을 말씀을 해주시죠.

 

A. ...기본적으로는 화가이기 때문에 미술이 제일 앞서 있는 거. 그니까 내가 미술인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한 것이지, 어떤 사회운동가로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술이 먼저였고. 근데 미술이 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또 사회 운동도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그다음에 수원이 수원으로서 끝나는게 아니라, ..이거는 전국과의 교류는 반드시 해야된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민미협도 바로 새벽의 대표 일을 보면서, 바로 개인적으로 민미협의 회원으로 가입을 하는 건데, 그니까 당시에는 뭐, 민미협이 전국조직이 어디 지부를 두거나 하는 형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민미협 활동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이제 뭐 수원과 서울을 계속 오가면서 작업은 저녁에 하고 뭐 그렇게 진행을 해왔고. ... 제일 이후의 숙제들은 그 지역의...새벽이 하고자 했던 일이 이만큼인데, 더 많은 요구가 옴으로서 수미협이란 이름으로 또 바뀌어가고, 또 미술 혼자로선 안 되니까, 수원 문화운동 연합이 했다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 이름 없이 사라져버렸어요. 그래서, 수원 민예총을 만들어야 되겠다, 그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제 수원 민예총이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진행을 해오고 있는 것이죠.

 

Q. 새벽의 대표로서 후배들을 품어야 되는, 그런 역할도 해야 됐을 거 같아요. 뭐 물론 생활 부분까지 다 책임지진 못한다 하더라도 새벽의 정신에 이어서 수미협으로 이어지는 그 모든 활동들의 중심에 어쨌든 서야 했기 때문에. , 선배와, 리더와 이거는 또 다 가줘야 한다는 거는 사실 힘든 일이잖아요. 물론 후배들이 추대를 했었다 하더라도, 단순히 자기 위치만 잡는다고 될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특히나 운동의 시대에, 후배들을 봤을 때도, 선배의 역할에 대한 그런게 있었을 텐데.

 

A. ... 당시에는 수미협이, 새벽 때도 임기가 1년이에요. 대표의 임기가. 수미협으로 바뀌어서 나중에 2년이 되지만. 새벽 대표도 1년 한 거고, 또 수미협 대표도 아마 2년 정도만 하고, ... 뭐 대표 일을 맡은 건 아니야 항상, 우리 전회원이 다 대표일을 맡아서, 다 누구나 지도자가 되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런 경험을 쌓아야만 되는데, 된다라고 하는 그 당시에 배운 그 원칙이 지금 내가 살.. 이 나이에 살면서도 똑같은 원칙으로 적용되고 있어요.

 

Q. 굉장히 민주적이네요.

 

A. , 내가 지금 동네에 가서 이장을 하는데, 임기 두 번만 하고 딱 끝난다던지, 또 수원 민예총을 만들었을 때도, 임기 두 번하고 끝내. 당시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 누구든지 할 수 있잖아. 그렇지만,

 

Q.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워낙 선배세대였기 때문에, 그걸 보는 후배들의 눈이라는 게 분명 있는 거고 그래서, 어떤 태도, 작품을 대하는 태도라던지, 또 현장에서 여러 지금 그 강원도 가시기 전에, 수원에 계시는 동안에는 어쨌든 선배라고 하는 이 위치가 갖는 여러 가지 무게들이 있지 않겠어요?

 

A. 그 시민단체들과 대중 속에서 살아가면서, 단체 대표로서 또는 아니면 단체의 선배로서 항상 모범적이어야한다라고 하는 강박관념같은 거는 있었는데, 그게 크게 작동하진 않았다, 그래서, 작업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거 항상 이제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을 하는 거고. 그 다음에 밖의 단체들과 연대활동에도 늘 게을리 하지 않아서, 지역에 다른 시민단체들에도 또 연대활동을, 단체로 연대도 하지만 또 개인적으로도 그 단체 회원이 돼서 그 일들을 많이 했죠. 환경운동 센터라던지, 뭐 가정 법률 상담소라던지, 그 관련된 단체들에서 회비내고 회원 활동을 하는 거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그 단체들이 미술을 바라보는 눈이, 나로 인해서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더 많은 우리... 그 뭐랄까, 외곽. 우리의 지원 세력이 될 수 있는. 우리의 미술을 그로 인해서 더 많이 보게 되고 이해하게 되고 그런 일들을 했던거 같고요.

 

Q. 선생님 작품을 그때 잠깐 들여다보면, 그런 사회적 의제도 있지만 지역적 의제 중에 이제 수원비행장 문제라던지, 재개발 문제라던지,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더라고요. 그게 수원에서는 매우 큰 의제들인데.

 

A. 나는 지금, 그때도 컸고, 뭐 지금 이제 비행장소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되는데, 좀 거기에 오랜 기간 동안 그 소재를 계속 다뤘어요. 그리고 그 지역의 문제 때문에, 고색동에. 고색동의 청년회하고도 많은 협업관계를 가져보고, 고색동에 코잡이 놀이라는 줄다리기가 있는데, 그런 줄다리기 모임에까지도 참여를 해서,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뭐며, 그 소음이 원인이 뭐라고 생각을 하는지. 이게 그 해방 공간에도 그 당시 거기 비행장이 있었던 거에요. 작은 군용 비행장이 있었던 거기 때문에. 글로 아마 우리 광복군 OSA인가요, 거기가 거 절로도 오지만 거기 어디야,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고 하는데, 이쪽으로도 내렸다는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당시에.

 

Q. 임시정부에서 넘어오면서.

 

A. . 들은 얘기 중에 하난데.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하면서 그 소음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들어보게 된 거에요. 나도 물론 피해를, 당시에 근처 수원역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 소음에 대한 거는 있었던 거여서, 그 문제를 여론화 시키고, 정식으로 이제 손해배상 청구까지 하게 되는. 당시에 거기 같이 참여하고. 그래서 나중에 그걸 받아내죠. 배상에 이제 현격한 이유가 있다. 난청을, 그렇게 되는데 해서. 당시에 주민들이 다 뭐 보상을 가구당 얼마씩, 아주 미미한 액수지만. 보상을 받아내고 뭐 그런 일들이 있었고요. 그 다음에 재개발은 모든 도시가 겪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 그 당시에 이제 아파트가 붐이 어마어마하게 일 때여서. 재개발 문제에 대한 그, 결국은 재개발의 문제가 거기에 땅, 살던 땅, 집주인의 문제는 아니었잖아요. 대부분이 세입자에 대한 문제가, 그 갈데가 없는거에요 세입자가. 그리고 세입자에 대해서까지는 보상을 대부분이 안 해주고, 어쩔 수 없이 그, 투쟁을 하게 되는 거에요, 세입자들이. 그래서 조금이라도 이사비용이라도 뭐, 서부터 시작해서, 뭐 입주권이라도 얻어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도 못한 경우도 많았고.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한 거를 현장에서... 물론 이제 신문기사가 먼저 떠요 언제 뭐 그 철거 시작된다라던지, 그런 상황에서 멀지 않은 곳이어서, 현장을 가보게 되고, 뭐 촬영도 하고, 그거에 대해서 작품화하고. 그때가 뭐 바로 89, 90년이죠. 그때 연무동 이야기를 많이들 쓰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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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70년대에 서울대 농대는 또 데모도 많이 했다고 제가 들었어요. 그리고 ?70년인가 4년인가? 긴급조치 반대하는 김OO 열사 데모도 하고, 80년대에도 농대가 그런 역할들을 했나요?

 

A. , 그렇지는 않았던거 같애요. 그니까 80년대 들어가서, 당시에 오히려 미술로는, 전혀 지금에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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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회? 비슷한 그런 모임이 있을 정도로. 서울 농대의 역할이..

 

Q. 70년대하고 80년대하고,

 

A. 예 확 달라져요.

 

Q. 달라졌군요. 그렇구나. 그때 당시 불과 뭐 2년여 남짓이지만 어쨌든 수미협으로 이어졌으니까, 새벽이 갖는 어떤 시대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A. 시대적 의미...새벽은...한 마디로 얘기하면 뭐라.... 미술이 미술로 끝나지 않고, 지역과 시민과 함께 가고자 했던 게 이제 가장 큰 그 의미가 아닐까, 그니까 개인 창작은 분명히 화가로서 내가 이러한 미술이 필요로, 필요로 하고, 당시에 시대 흐름도 그렇게 갔고, 그래서 거기에, 나도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 회원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가졌는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시민들에게 어떻게 작동될 것인가는 많은 숙제 속에 있었어요. 그 당시 토론 했던 기억 중에 지금 기억나는 게 하나가 있다면, ...이게 노동자를 대상화 시키는 거 아니냐, 당시 노동미술을 할 때의 얘기에요. 그런...대상화를...이제 그거에 대한 오류를 걱정하는 거에요. 그니까 나는, 이 시대에 선도적인 거는 정말 노동운동이다, 그래서 뭐 노동의, 이제 노동자의 형상을 이제 미술로 형상화 했을 때에 막상 현장에서 부딪힌, 걸개그림이 됐든 뭐 현장미술이라 그래서 우리가 이제 두루마리 형태로 이렇게 그냥 캔버스만 말아서 가서 걸기도 하고 하는데, 거기서 만난 노동자는, 자기가 주인공이라고 했을 때에, 그렇게 반가워하지 않더라고. 예를 들어보면 내가 이렇게 뭐 거친 사람이냐, 라든지. 그니까 정작 노동자와 대화하려고 노동자를 위해서 그림을 했는데, 그것이 소통이 안 되더라, 막 그런 거에 대한 반성도 좀 있었던 거 같은. 그러니까 너무 도식화 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말자. 그런, 그니까 이미 선배, 미술판의 선배들이 다 겪었던 일들은, 우리도 똑같이 그 짧은 시간 안에, 다 겪는 거죠.

 

Q. 그룹이, 그룹의 어떤 정신이 그랬다면, 그룹은 좀 재껴놓고, 선생님에게 새벽은 뭐였어요?

 

A. 어 사람, 내가 미술인으로서 해왔던 이만큼의 역할이, 시간적으로 보면 무려 한 15년 동안 해왔던 일들이 정말, 참 너무나 약간 부끄럽게 느껴진달까. 왜냐면, 좀 허송세월 보낸 거 같은. 그림은 그렸으되, 정말, 담긴... 그 안에 담긴 미술 정신이나 또 이런 것들이 정말 허무하다고 느낄 정도의 상황...지금도 그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보관 하고 있는데. 아참 너무, 너무하지 않았나 뭐 이런 생각이 들 정도. 근데, 새벽을 만나고, 새벽의 정신을 받아들이고, 작품을 했을 때에, 두 가지를 느껴요. 이제 하나는 고 전에 10년 동안에 있었던 거를 나는 고 짧은 시간에 다 해본 거에요. 6개월 안에 섭렵하듯이, 자료집들을 보고 다 확인해보고 이러한 형식들에 대한 고민들까지. . 짧은 시간에 해보면서, 아 역시 그런 그림은 지금 봐도 좀 쑥스럽더구나. 그리고 이후에 후반기에 이제 들어가면서 나온 작품들은, 정말 나를 좀 담아내고 있구나. 그니까 내가 없이 미술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 운동만 존재하진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요.

 

Q. 그때 이제 많은 후배들이 새벽에 참여했어요. 지금은 각자의 삶을 살고, 작가로 사는 후배들도 있고, 또 전혀 다른 길을 가는 후배들도 있어요. 그 함께 했던 후배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좀...

 

A. 지금, 지금하고 있는 상태들이 오히려 뭐 괜찮아 보인다. 그러니까, 작업만 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고, 다른 생활전선으로 모습을 바꿨는데,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만나보면, 미술에 대한 돌아봄, 그리움 막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건 그거대로... 그러니까 서동수라는 친구를 만나면, 같은 미술을 하는데, 그 정신을 다 이어가고 있더라고요. 그니까 미술디자인을 하는데, 그 새벽 때의 정신이, 채 변치 않았어요. 그대로 가면서, 지금 생활미술화 되어있는 그런 형태들을 해나가고 있고, 또 신경숙이를 보면 또 신경숙이대로 또 만화 영역에서 자기 일을 하고 있고, 호경이는 또 호경이대로 지금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고. 손문상이는 손문상이대로 만화, 사진, 여러 분야에서 그 열심히 자기 몫을 잘 하고 있어요. 단 이제 우리가 뭐 회화 쪽으로 뭐 미술, 지금 현재 수원미술인 협의회, 지금은 민미협으로, 이제 수원지부로 바뀌었지만, 거기 남아있는 친구들이 이제 좀 많은 고민들을 필요로하는 시기에요. 이제 또 그림만이 전부다라고해서, 자칫 이것이 또 새벽이 태어났을 때의 상황 이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지. 그니까, 새로운 미술...그때는 그 새벽이 했던 그림들이 새로운게 아니고 다 구닥다리니까. 이제 또 새로운 걸해야 된다고 생각을 해서, 돌아간 길이, 다시 그 이전 옛길이에요. 이렇게 되어서는 상당히 이제 잘못 갈 수 도 있는 그런 방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지금은 물론 뭐 미술의 어떤, 창작에 대한 새로움, 개성, 개성을 찾고자 하는 방식이 이상한 과거에 있었던 사조로 또 돌아가는 듯한 그런 방식은 좀 옳지 않지 않느냐, 그니까, 정말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길로 가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우리가 해왔던 방식의 것이 끊임없이 필요에 의해서 발전하고 발전하고 해서 미학의 큰 흐름은 도도하게 흘러가게끔 가야된다고 생각을 하고. 그 문제에 대한, 그 후배들이, 좀 더 고민을 더 많이 해야 되지 않나. 물론 나도 마찬가지고. 그거는 계속 고민해야 될 문제라고 봐요.

 

Q. 마지막으로, 미술운동의 시대는 어쨌든 저물어 갔잖아요. 뭐 서서히 저물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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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6월에 ~를 끝으로? 저물었든, 80년대 미술운동의 시대는 끝난거 같아요. 그렇지만 그게 예술의 도구화 문제가 됐던, 뭐 어떤 문제가 됐던 간에, 예술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에 상당부분 기여했고, 저는 또 새벽이나 수미협이 지역 사회와 사회운동이나 다른 문화운동과 결합에서도 상당부분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봐요. 그런 미술의 사회적 기능, 사회적 역할 이런 부분에 대한 사실 운동의 시대는 끝났으나 여전히 저는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이때 이제 새로운 시대에 맡길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A. 지금 많은 작가들이 그걸 실천하고 있다고 봐요. 얼마 전에 이제 저도 그 작품을 했지만은 노아베, 노아베 그러니까 우리가 일본을 반대하는게 아니라,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하는거다. 나는 그 우리랑 이제 무역단절 하게 될 때, 그때 바로 순발력 있게 걸개그림을 그리는게 아니라 짧은 시간이지만 바로 창작을 해내고, 그리고 비상전시 기획을 해서 일주일간 전시를 하는데 많은 반응을 일으켜낸다던지, 어떻게 보면 여전히 살아있는 게릴라식 방식이지만 그것이 이제 전시장 영역 내에서 하는데, 옛날 보다는 홍보 수단이 많아서, SNS 방식으로도 하고, 또 뭐 방송으로 하든 뭐로 하든 그 파급 효과는 옛날에 우리가 운동으로 했던 것 만큼의 효과를 거둬내고 있는데, 지역 곳곳에서 많은 작가들이 그 역할들을 해내고 있다, 해내고 있는데, 이제 문제는 그 역할들을 자연스럽게 받아줄 후배들은 없다, 없는 것이고,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거다. 이것이 뭐 계속 이어져야할 이유도 아니고, 그러한 시대의 요구에 의해서 생겨났고, 그런 의미로서의 우리 미술운동의 역할이 있었던 거고. 또 지금은 지금 시기에 맞는 미술의 운동방식이 달라져있다, 그렇게 봐요.

 

Q. 새벽과 관련해서 뭐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거나, 소회가 있으시거나 하신다면...

 

A. ...딱히 뭐 이렇게 말로 표현할 방법은 없네. , ...밤새...밤새 토론 해본다는 거 그거 술도 못먹는 사람이 쉽지 않아. 쉽지 않은데, 참 나는 그거를 잘 견뎠고, 또 못먹는 술인데 먹으려고 애를 썼고. 그거는 그러한 노력들이 후배들하고 나이차 떠나서... 나이가 많은 차이는 안나요. 세대 차이지. 그 세대 차이를 뛰어넘게 됐던 거, 그런 그 추억들이, 아주 새록새록한데, 지금 참 아직도 어렵게 활동하고 있는 후배들이 있어서, 그거는 이제 어느 세계든 다 겪게되는 일들이어서, 그 친구들에게 좀 힘내라, , 후배님들 힘내라,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