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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인류세를 둘러싼 쟁점들

by 정강산 2019. 11. 18.

1. 어쩌면 인류세는 생명정치의 효과가 아닐까? ‘인구를 정치의 대상으로 삼은 근대국가가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방식으로 생명을 관리하고 통제해온 이후, 생명정치는 한편으론 사회 보장 제도로, 다른 한편으로는 면역학적 병리학으로 지양되어왔다. 여기서 후자의 경우, 대문자 자연을 일종의 침입 가능성이자 삶의 안녕을 위협하는 요소로 셈하게 하는 효과를 산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건강 이데올로기, 미세먼지에 대한 공포야말로 오늘날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시민들이 인류세 담론을 수용하고, 그것을 대중화시키는 기제가 아닐까? 요컨대 충분한 산업화를 통해 안정적으로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계에 편입한 국가들에서, 쾌적함과 건강한 삶에 대한 요구가 나타날 수 있는 조건에서만 인류세가 울림을 갖게 될 수 있는 것 아닐까? 과연 그러한 요구가 미처 무르익지 않았을 남반구의 개발도상국들에선 얼마나 인류세 담론을 수용할 수 있을까?

 

2.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광학적 재현장치들과 계측 장치들이 인류세 담론을 재생산하는데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는 것은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는 담론(discourse)과 으레 중립적인 것으로 셈해지는 기술(technology)의 관계를 해부하여 드러내는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그 작업은 재현기술이 어떻게 인류세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성사진을 통해 드러나는 도시의 연대기적 풍경, 혹은 개발 전후의 풍경, 또는 쓰레기 매립지의 풍경 등은 해당 풍경 내부에 있는 구체적인 자연의 흔적들을 소거시키고 추상화하여, 일종의 생태 스펙터클을 연출해낸다. 이러한 시각적 충격은 어떤 위기감을 느끼게 해주는 미덕이 있지만, 자연의 진실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으며, ‘인류세를 둘러싼 논의들에 버블을 만들어낼 뿐이다. 무엇보다 생태 스펙터클은, 자연에는 파괴란 없고, 변화만이 있다는 기본적인 진실을 놓치게 한다. 언제나 자연은 당장 몇몇 생물종이 사라지거나 특정한 면적의 벌판이 벌목되는 것을 압도하면서, 다시금 제2의 자연으로 침투한다. 요컨대 그러한 생태 스펙터클에는 제 2자연의 틈들 곳곳에서 이미 인간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고양이들, 비둘기와 까치와 참새들, 바퀴벌레와 개미들, 모기와 돈벌레들, 거미들, 녹조와 플랑크톤들의 모습이 부재한다. 무엇이 자연의 범주인가, 희귀종의 풀과 나무인가,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인가, 어째서 어떤 생물은 자연이 될 수 있지만, 이미 제2의 자연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물은 그렇지 못한가 등에 대한 답변을 생략한 채, 생태 스펙터클은 보존된 자연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며, 구체적 자연에 맞서 추상적인 자연을 전면화한다.

 

3. 자연화된 경제, 자연화된 문명- 즉 제 2의자연이 외부의 자연에 투사될 수 있을 만큼 어떤 실제적 위상을 지니게 된 곳에서야 인류세는 헤게모니적 담론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국민국가의 구속력과 행정능력, 기업과 상품이 만들어내는 회로가 더 없이 촘촘할 때야말로 외부의 자연이 그러한 제2의 자연에 의해 변형되고 있다는 심상이 기꺼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나타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제2자연의 역사를 선도해 온 북반구의 헤게모니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자나 빈자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공동파멸의 급박한 상황을 가리키는 인류세의 전제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국민국가 간의 분업이 특정한 방향으로 형성된 역사적 맥락(예컨대 세계의 공장이 된 중국 혹은 아시아라는 맥락)과 세계체계 하에서의 국가 간 경쟁의 기제(이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적정수준으로 조절할 것을 결의한 유엔기후변화협약 등과 같은 조약을 무용하게 한다)를 볼 수 없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공동의 운명에 처해있다는 인류세의 잠언은, 북반구의 자본주의 국가들의 식민지개척과 산업 개발 등을 통해 도모된 충분한 발전을 그 자신의 조건으로 갖는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제1세계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지구시스템, 지구행성주의는 한편으로 역사학 내의 ‘big history’라는 흐름과도 겹쳐 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빅뱅과 별들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총체화 하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는데, 이는 사회적 실재의 시간성이라는 역사를 추상화시키거나 아예 다루지 않으며, 인류 보편의 역사를 가정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역사를 갖는 것은 자본주의적 체계이며, 그러한 역사는 빅뱅 혹은 선사시대까지 총체화 될 필요가 없다. 인류세와 big history, 이들은 현실적 갈등과 적대를 봉합한다는 점에서 수렴한다. 양자 모두 기존의 역사는 인간중심적이었으나 본 담론은 역사의 분석대상을 확대하여 우주와 생명, 인류의 역사를 통합한다는 식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징후적이며, 이러한 심증을 굳혀준다. 이 지점에서, 클라이브 해밀턴이 말하는 게슈탈트 전환지구 시스템 전체에 대한 메타적 사유의 필요는 어딘가 의문스럽다. 그것은 전환되어야할 시스템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떤 설명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환에의 요구가 명확한 대상을 갖지 않을 때, 생산되는 것은 공허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이러한 허구적 전체성에 맞서 자본주의적 총체성에 초점을 두는 것은 정당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예컨대 우리는 유해폐기물의 국가 간 이동을 규제하고 개도국의 폐기물처리를 지원하는 조례를 포함하고 있는 바젤협약에서 더 나아가, 북반구 국가들에 탄소세를 도입하고 국제 생태보전 기금 등의 명목으로 거두어 남반구의 저개발 국가들에 생태적 기술들을 바탕으로 한 산업을 원조하게 하며, 남반구엔 탄소세를 점진적으로 적용하는 조약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기술과 사물의 종속적 지위를 주체이자 행위자로 격상시키려하는 라투르의 주장은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인류세담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종종 활용된다. 이는 주체와 객체의 분할을 덮고자 하는 기획인데, 왜냐하면 그에게 모든 것은 행위소(actant)’로서, 전통적인 철학적 어법 속에서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섣부른 제안으로 읽히는데, 왜냐하면 주체와 객체의 분할은 사회적 실재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화두로 나타났던 주체와 객체의 대립은 인간자연에서부터 인간사회’, ‘인간공동체’, ‘인간인간의 대립에 이르는 세계의 실재를 개념을 통해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맥락화시킨 것으로서, 관념적으로 종합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을 주체로 호명하는 그의 논의는 양자의 화해 불가능한 간극을 관념적으로 통합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한 유물론은 인간-자연의 객체화된 분리를 거부한다는 테제의 주창자들이 알아야 할 것은, 마르크스 또한 그러한 분리를 거부한다는 점이다. 다만 마르크스는 주-객의 분할 자체가 객관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지양하는 것은 실재의 실천이라는 점을 알았다(이는 헤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헤겔은 보편자를 실체화하는 셸링이나 주체를 실체화하는 피히테에 맞서 주체와 객체의 분할 자체를 타협할 수 없는 객관성으로 정립하고, 이로부터 변증법을 출발시켰다. 그의 변증법은 이미 종합이 아닌 분할에 근거하고 있다).

 

5. 맑스 에콜로지; 마르크스주의 생태론에서 착취와 자연수탈은 동의어이다. 즉 자본주의적 착취는 필연적으로 자연에 대한 수탈로 이어지는데, 이는 이윤율을 끌어 올리기 위해 생산주기를 빠르게 순환시킬수록 자연환경과 자원에 대한 마모/남용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자본주의적 착취는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기형적이고 비대칭적으로 만들어내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윤율에 근거한 생산력이 아닌, 자연 조건적 생산력을 실제 생산의 장에서 구체화하는 것이다. 흔히 생명윤리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공장제 축산의 문제 또한 맑스 에콜로지를 경유하여 비판될 수 있다. 다만 이 경우엔 애니미즘적이고 생명윤리적인 차원을 넘어, 그런 방식이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교란하고 자연의 재생산능력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제기되는 비판일 것이다. 한편, 플라스틱과 공장 폐수, 핵연료 등의 파괴적인 힘에서 볼 수 있듯, 기술이라는 변수는 이미 자본주의적 착취와 무관하게 작용하는 작인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들이 사회적으로 관계하는 방식을 객관적인 체계이자 실재로서 논의하며 그 가능한 변형을 생태문제와 연결 지어 사고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가능한 최선의 출발점이 마르크스주의의 생태학적 틀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6. 1세계 내부에서도 외부의 자연은 차등적용 된다. 예컨대 95년 시카고에서 기온이 섭씨 41도까지 올라가는 폭염이 일주일간 지속돼 700여명이 사망했으며, 구급차는 모자랐고 병원은 자리가 없어 환자를 거부했다. 사망자 대부분은 노인, 빈곤층, 1인가구 등이었다. 그런 점에서 인류세는, 집안에서 부채질을 하며 에어컨 사용을 남발하는 것이 지구에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역설하는 깨어있는 중산층의 담론이기도 하지 않을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자연은 평등하지 않으나, 인류세 담론은 이러한 맥락들을 놓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