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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사실, 진실-이데올로기, 진리: 진리의 텅빈 공백을 진실로 메운다는 것

by 정강산 2017. 4. 1.

2016, 11, 11에 작성된 글

El LissitzkyIllustration For Jewish Folk Tale 'The Goat'(1919)

최순실 게이트가 야기한 시국에 부치는 에세이

사실이라는 사실은 없다. 이는 순수한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정보- 특정한 인식의 대상을 이루는 개개의 단자들은, 그것을 습득하는 자에 의한 승인을 기다리며, 그러한 승인의 이전까지 아무런 것도 되지 못한다. 정보에 대한 승인이 이루어지는 순간, 아무런 것이 아니었던 것은 이미 존재하는 주체의 특정한 욕구와 경험, 물질적이고도 심리적인 조건 등을 경유하여, 정치적으로, 즉 무엇에 대한 승인과 동시에 어떤 것은 승인하지 않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정보는 사실이 된다. 사실은 언제나 어떤 특수한 주체에 의해 매개된 특정한 사실이다. 이때 사실이란 어쩌면 푸코가 지식이라고 부른 것의 맹아적 단계로서, 그것은 그러므로 그 사실을 승인하는 특정한 관점을 전제로 한다. 이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주의를 설파하는 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사실이 실은 관점이라 함은 그 관점들 사이의 위계와 층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의 역사적 전개의 결들을 따라 우연적이지만 필연적으로 형성되어온 관점들은 각각의 체계적 모델을 이룬다. 이 모델들을 지탱하는 것은 그 모델 내부의 내적 연관들과 인과, 세계에 대한 설명력, 타 모델에 대한 설명력, 타 모델들의 설명력에 대한 전유가능성 등으로, 이 요소들은 해석학적 우세종을 판가름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각 모델들은 일정한 시공간에서 서로 대립하고, 경쟁하고, 통합하며, 논파되고, 논파한다. 그리하여 해석학적 우세종으로 된, 모델들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모델이 차지하는 위상을 우리는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관점을 통해 종합된 정보들은 사실이 되고, 사실은 경합 속에서 진실이 된다. 이렇게 진실이 되어버린 관념형태들은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으로서, 이데올로기는 그 대상이 선험이 아니라, 어떤 관점에 의해 특정한 시기에 생산된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을 포함한다. 이데올로기는 하나의 역설으로, 진실이지만 동시에 역사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과는 다른 형태를 억압하는 가상으로서, 선험이지만 구성된 것으로서 기능하는 성질을 갖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이데올로기를 가지며, 나름의 공정으로 이데올로기를 산출한다. 사실 모든 이들은 이데올로그인 것이다.

현실은 그것이 이데올로기에 매개된 한에서만 인식 가능한 것으로 현상한다. 그것은 사회의 재생산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산출되어야만 하는 무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언가를 이데올로기적이라 규정하는 것은, 사실 많은 경우 자아비판이 되기 십상이라, 보다 특정한 규준을 세우는 일이 요구되므로, 나는 일반성이 되어버린 진실이 행하는- 가능성들에 대한 억압을 비판하는 한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역사적으로 진보와 발전을 거듭하며 더욱 복잡하고 체계적으로 진화해 온 진실의 체계는 역사성이라는 그것의 발생적 조건을 무시한 채 스스로 초월성을 자임한다. 초월적 법칙을 가장하는 진실은 그 외부의 가능성을 진실이 아닌 것, 비이성적인 것, 허구적인 것으로 보이게끔 하며, 그 사실의 모델이 다른 모델과의 관계 속에서 우연히 차지하게 된 진실의 지위를 망각하게 한다. 실은 그것이 상이한 여러 모델들 간의 합리적이지만 때로는 비합리적인 경쟁 속에서 사후적으로 산출된 한에서의 우세종이라는 점은, 마치 그것이 가장 옳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처음부터 세계에 유일한 전체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이것은 니체가 형이상학과 종교로부터, 마르크스가 자본주의로부터, 아도르노가 동일화사고와 교환원리로부터 발견했던 종류의 일반성이자, 오로지 조작가능한 선험이 아니라 초월적인 선험임을 가정하는 전체인 것이다.

비판의 용어로서의 이데올로기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적이지만 초역사적인 것을 자처하는 지배에 관해 부쳐져야 할 개념이다. 그렇다면 전체의 틀을 새로 짜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새로운 진실을 현실 속으로 기입하는 일이다. 새로운 모델을 고안하고, 그것을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비판적으로 옹호하며, 정합성을 갖추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은 경합 속으로 투입시켜야 한다. 그러한 경합은 본질적으로 폭력과 비폭력, 이성과 감성, 논리와 비논리를 오가는 종류의 경합으로서, 양 항들의 변증법적 교차를 필요로 한다. 모델을 투입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은 전체에 대한 총체적인 규정으로서, 소여의 일반성, 지배하는 일반성을 산출하는 기제에 대한 인식이 전제된다. 그렇게 할 때만이, 그러한 전체의 제문제를 상대하는 특정한 모델을 산출할 수 있으며, 어떤 정치적 기획도 지배의 일반성을 향해 소급되게끔 할 수 있다. 현실은 하나의 이론으로 해명할 수 없는, 다층적인 것이라는 판단은 절반만 말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유인즉 그것은 모든 모델들이 동등하고 평등하게 상이한 대상과 상이한 설명력을 갖는다는 순진한 가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상이하고, 다르다. 모델의 자율적 공간을 침범하려는 다른 모델의 개입을 환원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차이를 내버려 두겠다는 몸짓을 취하는 한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는 뜻과 동일하며, 엄연히 존재하는 모델들 사이의 위상을 고려하지 않는 다원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외려 중요한 것은 모델들의 자율적 공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델들 사이의 위계와 역학을 규명하는 일이며, 그들 중 무엇이 하위범주이고 무엇이 상위범주인지를 규명함으로써 진정으로 일반적으로 되어버린, 정보에서 출발하여 사실을 거쳐 이내 일반성으로 전화된- 지배하는 진실의 존재를 상대하는 모델을 출전시키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이 연루되며, 역사 전체를 관류하고, 그 속에서 어느 한 명도 자유롭지 못한, 인류의 경험세계 일반을 형성시키고 규정해온 총체적인 계기는 여전히 경제적인 것이라고 기꺼이 말할 수 있다. 오늘날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비롯한 일체의 정치적 기획이 인간일반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것은 결국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어떤 방식으로든 경유해야 한다. 언어 자체가 대상들을 단일한 기표로 소급시킨다는 점은,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은 사실 비판이 아니라 단순한 기술에 가깝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모든 모델은 마치 언어가 그러하듯, 각자의 체계 내부로의 환원을 실행하며, 그러한 환원을 멈춘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 매개되는 사고 자체를 중지시키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특정한 모델이 가진 환원주의적 경향이 아니라, 그러한 환원주의가 문제적인 것으로서 드러나도록 하는 조건이 되는 모델의 난파를 야기한 역사적 국면이다. 모델이 곤경에 처하는 일은 1차적으로 모델 자체의 결함에서 연원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것의 설명가능성과 정합성의 범주와는 관계없이- 외부적 힘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허나 모델로서 설명할 수 없는, 보다 정확히는 모든 모델의 총체를 통해서도 지시할 수 없는 대상, 모델의 범주를 초과하여 발생하는 인식의 형식의 현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 부른다. 진실- 이데올로기가 미처 가닿지 않는 미증유의 공간들은 진리의 계기를 담지한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경험적으로 확인 불가능하며, 찰나의 순간에 인식되었다 이내 사라지고, 초월적이지 않은, 진실- 이데올로기의 조밀한 그물망이 찢어진 부분에서 출현하는 일시적인 균열 사이로 드러나는 틈에서 보이는 섬광, 그러나 이내 빠르게 상징화되고 봉합되어 그 빛을 잃고 마는 종류의 것이다. 진리는 그때그때의 변화된 조건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생산되지만 소여의 총체가 형성하는 체계로 소급되지 않는 유일한 것- 새로운 가능성을 드러내 보이는 한에서 진리가 된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1848년의 노동자 혁명, 1871년의 파리코뮌, 1917년의 러시아 혁명, 1987년의 6월 항쟁에 이은 789노동자 대투쟁,  2008년의 월가점령시위, 어쩌면 지금- 최순실 게이트가 열어젖힌 2016년 4분기의 정국이 지시하는 바가 바로 진리일 것이다. 이는 아도르노의 예술적 부정성, 바디우의 사건, 지젝의 보편성의 텅 빈 자리 등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실체화될 수 없어 항상적인 가능성으로 머무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역사의 상수로서 자리매김 되어온, 비실체적인 실체인 것이다. 진리는 소여의 일반성과 관계하지 않으며, 모델들의 정합성을 통해 인지 가능한 것도 아니다. 외려 진리는 진실과 일반성이 실은 그것이 아닌 다른 형상일 수 있었음을 증언하며, 정합적인 예측 가능성의 테두리를 완벽히 벗어나버리는 성질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소여의 진실, 소여의 일반성은 일시적으로 틈을 내비치며 진리, 모종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거리에 나선 수만의 군중들을 추동한 것은 소여의 일반성, 특히 이미 존재하는 체계가 전제해왔던 경제적인 것에 대한 환멸이며, 이는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과 같은 방식은 아니어야 함을 증언하는 가능성으로서의 진리의 순간이다.

문제는 그것을 결국 진실- 이데올로기로 덮어 가리는 작업이 실행되어야 하며, 그 과정은 최대한 의식적으로, 새로운 일반성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지 않고는 의미 없이 소여의 일반성을 답습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 있다. 89년과 91년 이후 오랜 기간 난파되어왔던 좌파적 모델들이 개입할 지점이 바로 이곳이나, 현재까지의 전개 속에서는 여전히 유효한 견인을 이뤄낼, 일반성을 상대하는 전위의 모델이, 아마도 87년 이후로 항상 그래왔듯, 부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금의 사태에서 좌파들이 대중의 정치적 각성 이상의 성과를 이끌어낼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진리의 순간은 급속히 소여가 지배하는 일반성의 모델에 의해- 철저히 자유주의적이고도 자본주의적으로 소급되고 말 것이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지리멸렬한 진지전의 폐쇄적인 순환고리를 폐기하고 기동전을 생각해볼 때가 아닐까. 원탁에서의 기만적인 협상이 아닌 완강한 점령이 요구되는 시점이 아닌가. 하야라는 구호를 추동한 원인, 하야라는 기표가 지시하는 기의는 무엇인가? 혹은 이것이 명백하게 진지전의 맥락을 벗어날 수 없는 사안이라면, 대관절 어떤 요구를 내걺으로써 최대한의 몫들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얻어낼 것인가. 새로운 일반성을 성취하며, 좌파적 진실을 만드는 계기는 무엇인가. 진리가 열어젖힌 텅 빈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장악하며, 진실을, 우리의 모델을 관철시킬 것인가. 경험주의적인 사실들, 수많은 관점들을 존중하며 기꺼이 진실과 이데올로기가 되기를 자처하지 않은 채 새로운 일반성을 구축하기를 긍정하지 않는 일은 비겁한 행동이지 않을까. 정치가 상대하는 것은 진실이지, 사실이 아니다. 시위를 혁명으로 전화시키는 계기는 무엇인가.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키겠다는 레닌의 구호가 떠오르는 것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크리틱칼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