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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혐오의 문제설정을 돌파하고 싶다

by 정강산 2017. 4. 1.

2016, 12, 10/25에 작성된 글

El Lissitzky, New Man(1923)


1.여성은 남성과 달리 인간으로서 자신을 재현할 수 있는 자격으로부터 역사적으로 배제되고 탈락되어 왔다. 따라서 그들이 가장 쉽게 기대는 것이, 어쩌면 그 자신들의 계쟁을 조직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경유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정체성일 것이다.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생물학적이고 형태론적인 문제설정에 기댈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정체성은 '내용/의식'에 조응하는 기의가 아닌, '형식/육체'에 조응하는 기표의 문제다. 그런 맥락에서 논란이 되었던 DJ DOC의 '미스박'이라는 표현은, 기표 그 자체로서 충분히- 역사적으로 배제되어온 '여성'이라는 육체의 지위를 희화화 시키는 시도로 여겨질 수 있다.


공산주의자를 속되게 이르는 빨갱이라는 기표가 나의 의지,선택과 관계없이 내게 가해지는 육체와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면, 나 역시 그 기표를 사용한 이들의 저의를 캐물으며 집요하게 추궁했을 것이다.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이뤄진 집행부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런 점에서 정당했고, 이에 대한 운동권 내부의 동조 또한 십분 이해함직 하다. 담론투쟁이란 근본적으로 단어와 개념에 관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한편, 적어도 운동권 내부에서는 대다수의 동조를 얻지 못함으로써 사장되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다른 방식의 독해도 존재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것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투명한 대응 관계가 아니라, 발화의 맥락과 상황, 경과에 따라 (임의적으로) 규정된다"는 요지의, 구조주의의 언어학적 전제를 통한 접근이다. 이를 육체-기표, 의식-기의의 개념쌍에 대입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광의의 트랜스 젠더- 남자 몸 여성, 여자 몸 남성의 존재가 증명하듯, '형식/육체'(기표)는 '내용/의식'(기의)에 언제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자신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DJ DOC의 '미스박'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지 않았다는, 종종 들려오는 소회도 이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이는 문제의 곡- '수취인 불명'을 들은 해당 여성들에게 단순히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기표-육체-정체성은 '여성'이지만, 그 기의-의식은 이미 '인간일반'으로서 사고하는 데 익숙해진 까닭일 수도 있고(이런 존재들은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흩뜨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여성주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준거한다. 한편 이들은 드물고 진귀하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바로 이러한 사례를 증명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그를 '여성'혁명가가 아닌, '혁명가'로 기억하고 싶다.), '미스박'이라는 기표가 '박근혜'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지시할 때, 이미 그 기의는 일반적으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가정하는 '여성혐오적'인 용례를 벗어날 수 밖에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여성주의적 문제설정과 대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이 단순히 여성의 신체를 타고난 이들만이 전용할 수 있는 도덕률에 그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치란, 적어도 그 개입의 여지가 만인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언제나 대자적인, 의식적이고 주체적인 자기호명을 통해 개시되는 것이자, 이러한 조건 속에서 권력을 잡음으로써 다수자가 되어 생산을 조직하고 율법을 공표하는 행위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는 생물학적 남성들을 향해 그들의 여성주의적이지 못함을 비판하는 만큼, 생물학적 여성들을 향해서도 여성주의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생물학적 성별은 남성이지만 문화적 성별은 여성에 가까운 내가 취할 수 있는 여성주의적 개입은, '진골' 여성주의자들을 향해 "내가 춤출 수 없다면 나는 당신의 혁명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엠마 골드만의 경구를 되풀이 하는 것으로서, 어떤 의미에서 페미니즘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라는 점이 이해되었으면 좋겠다).


혹은 차라리 성별의 차이를 과거의 급진 페미니즘처럼 확실한 적대의 기제로 상정함으로써 남성이 배제된 정치적-국가론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헌데 요즈막의 페미니즘을 둘러싼 소요들은 페미니즘에 관한 이견에 대해서는 '맨스플레인'이니, '내면화된 남근주의'니 하는 식의 급진 페미니즘의 용어를 기꺼이 차용하면서도, 정작 실천의 측면에선 스스로를 피해자/약자로 규정하며 '젠더 감수성이 충만한 남성'의 시혜와 동조, 관심을 얻길 바라는- 분열된 모습을 보인다. 이전의 역사적 페미니즘이 보여주었던 성공적인 주체화는 그 과정에서 빈번히 실패한다는 심증을 지닐 수 밖에 없다. 차라리 좋았던 시절의 급진 페미니즘은 개념남 찾기 운동과 페미니즘을 혼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비롯 온라인에서나마,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쉬태그(운동?),(성 노동자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차치한다면)나는 창녀다 해쉬태그(운동?), 메갈리아를 비롯한 웹 공간들(에서의 운동?)을 거쳐 최근 '미스박'논쟁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이 그나마 어떤 종류의 소요라도 일으키며 논쟁적인 텍스트를 제공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된 여성 비율의 상승,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사회전체적인 윤리적 감수성의 질적향상 등으로부터 과잉결정된, 여성주의의 확산을 위한 좋은 계기로 현상하는 만큼, 남성 가장이 주요한 착취의 대상이었던 자본주의적 임노동의 한 축이 맞벌이 부부의 증가 추세와 여성을 노동인구로 적극 포섭함으로써 확장되고 적응되는 추세로서, 윤리의 중요성을 잘 알지만 특정한 시점엔 기꺼이 윤리를 져버림으로써 가능했던 급진정치(비단 사회주의혁명뿐만 아니라, 70년대의 일부 급진페미니즘이 보여주었던- 남성을 처단함으로써 여성주의적 정부를 수립한다는 식의- 명증한, 유물론적이고도 초윤리적인 국가론에 대한 단상까지도 포함하여)가 실종된 결과로서 현상하기도 한다는-'부정성'-을 변증법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모습으로 재련되고 보완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차별과 가부장제를 현재 가장 높은 심급에서 조직하고 있는 원인을, 특정한 생물군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찾는, 유물론적인 페미니즘의 기획이야말로, 전체를 겨냥하는, 정체성(기표)에서 시작하여 도덕이 아닌, (상기한 바와 같은) 정치(기의)로 귀결 될 수 있는 페미니즘의 노선이 아닌가? 그러한 부정성에 대한 인식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으로 하여금 경제를 참조하게하는 과정일테고, 그런 점에서 지금은 깊숙히 사장되어 잊혀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다시 복권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2. 윤리주의를 너머서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수많은 운동들의 원동력이 되는 동시에 수많은 패착을 기록해 온 무의식적 이념으로서 윤리주의를 제외하기는 힘들 것이다. 윤리주의란 인간학적 전제들을 토대로 하여 구축되는 관념이며, 으레 다음과 같은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한 모습이어야 한다, ~한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한 행위를 해야만 한다’.


지금으로서는 상당히 과해보이나, 알튀세르가 <독일 이데올로기>와 <자본> 이전까지의 시기에 수행된 마르크스의 작업들을 “소외”를 중심적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이유로 비판했던 까닭은, 사실 문제의 ‘소외’라는 개념마저도 ‘인간의 삶에 있어 본래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탈(으로서의 소외)’ 로서 일종의 윤리주의로 빠져들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고 그가 내다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심히 경직된 프랑스 공산당의 사고와 여러모로 아쉬웠던 소련의 교조화 된 마르크스주의 담론을 지탱했던 스탈린주의로부터 마르크스를 떼어내는 작업은, 알튀세르에겐 인간학적 전제들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윤리주의를 비판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한 인간학적 전제들로부터 결별하고, 관측대상으로서의 객관적인 자본주의 내부의 모순과 그 순수한 운동을 탐구하고 해명하기 시작한 <자본>에서부터(내지는 독자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한 <독일이데올로기>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는 윤리가 아닌, 과학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알튀세르의 주된 주장 중 하나로 셈하여진다. 과장을 보태자면 계급정치와 마르크스주의가 빠져왔던, 과잉된 윤리주의로부터의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자생적인 회복능력은 알튀세르를 경유하여 증명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윤리주의는 메시지의 파급을 위해 선전과 선동이 쉽사리 효과적으로 전유해내는 대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진 중공업 투쟁에서부터 판화가 이윤엽의 걸개그림에 함께 새겨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인용되기 시작한 “해고는 살인”이라는 슬로건은 ‘인간이라면 동족을 살해해서는 안 된다- 해고된 실직자들에게 제공될 수 있는 적절한 사회보장제도가 부재한다면 해고는 살인에 버금가는 수준의 최악의 환경을 조성한다- 그런데 한진을 비롯한 대기업들은 경영난이란 명목으로 인사구조조정을 강행함으로써 그러한 의미에서의 해고를 시행한다’는 식의 논리 구조를 지닌다.


혹자는 이를 윤리주의에 기댈 수밖에 없게 된 노동운동의 패착을 증거하는 사례로 조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윤리주의는 언제나 모든 운동이 암묵적으로 전유하고 조절하며 적절히 가용해 온 대상이다(대표적으로 제정러시아 하의 나로드니키의 계몽주의, 볼셰비즘적 전위당의 선도의식, 60년대 후반 일본의 전(학)공투(회의)의 자기희생적 에토스, 80년대 한국의 학출의 부채감, NL들의 품성론 등을 들 수 있다).


운동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윤리의 생산을 그 목적으로 삼으며, 순수한 과학적 정합성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그것을 통해 주어진 대상에 대한 ‘관리’를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주어진 세계를 부정하는 ‘운동’을 추동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운동, 혹은 정치가 출발하는 지점은 명백히 윤리이지만, 결국 그 모든 기획들이 도모하는 세계가 관철되는 것은 그들이 윤리를 넘어설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이유인즉 윤리라는 윤리, 혹은 이데올로기라는 이데올로기는 없기 때문이다. 항상 특정한 물질적 현실들의 인과에 매개되어 있는 한에서 윤리와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 독립적인 것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이들이 물질적인 기관들과 장치들로부터 자율적인 것으로 출현하는 것으로 전제할 때, 우리는 관념론에 가담하며 개인의 도덕성을 문제시하는 윤리주의 이상의 단계들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운동과 정치를 진지하게 여기는 이들은, 그것이 ‘조직’과 ‘집권’이라는 개념들과 직결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직과 집권- 이들은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물질화시켜내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윤리를 자동화시키는 데 필수적으로 경유해야 하는 단계들이다. 유물론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독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윤리와 이데올로기로부터 물질적 인과를, 예컨대 빗방울로부터 대서양을 유추해내는 식의 사고를 일컫는 것이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이유가 아닌 전체적이고 추상적인 원인을 발견하는 일이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페미니즘적 사건들에서 내가 발견하는 것은 상기한 의미에서의 유물론이 배제된 윤리주의적 경향이다. 과거의 페미니즘운동들에 견주어 요즈막의 페미니즘이 호출되는 양상이 지니는 가장 큰 특징은 "가부장제"라는 개념을 대체한 "여성혐오"라는 개념이다. 여성혐오는 본래 가부장제라는 특정한 물질적인 양태에 조응하는 증상학적인 개념으로 논의되어온 것이지만, 한국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경유하며 가부장제와는 무관하게 뭇 남성들에게 내면화된 이데올로기 내지 에토스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추세이다.


많은 남성들이 여성혐오라 할 법한 무의식적이고도 의식적이며 심리적인 경향을 지니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러한 경향은 뭇 여성들의 자기비하적 언행과 욕망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며, 그런 한에서 성차를 너머 존재한다. 여성혐오가 특정한 성이 다른 성에 대해 자연발생적으로 지니는 도덕률이 아닌 이상, 그것은 각 성별 주체들이 공통적으로 처해왔던 물질적 조건(가부장제)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기꺼이 여성혐오는 증상이고, 가부장제는 그 증상의 원인이었음을 얘기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인식이 전제될 때라야만 개인적 품성과 도덕성에 대한 책임을 묻는 운동의 관성으로부터 여성주의의 정치를 분리시켜낼 수 있게 된다.


그런점에서 나는 비록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선 문제가 된다 할지라도, 남녀 임금 격차를 줄이거나 여성들의 경제적 참여를 독려하는 이런저런 기획들에 대해 힘을 보태는 것이 특정 언행에서 여성혐오적 경향을 발견하고 그를 윤리적으로 단죄하며 '내 안의 여성혐오'를 반성하는 최근의 유행보다 훨씬 여성주의적 정치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허나 아쉽게도 대표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페미니즘, 나아가 급진페미니즘과 자유주의페미니즘까지도 일부 담지하고 있었던 유물론적 여성주의의 정치적 기획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경우는 이제 드물며, 여성들의 개인적인 폭로에 조응하는 남성들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아비판이 여성주의의 유일한 실천인 것처럼 여기는 기류는 보다 심심찮게 눈에 밟힌다.


어쩌면 이것이 페미니즘을 비롯한 수많은 저항 이데올로기들이 공통적으로 처한 문제의 핵심이다. 윤리주의는 운동과 정치를 추동하고 그 속에서 적절히 조절되지만, 동시에 주어진 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규정하는 작업으로서의 분석을 수행할 역량이 부족할 때 쉬이 기대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윤리가 과잉발생하는 곳에서 부재하는 것은 그러한 윤리와 조응하는 특정한 물질적 조건들에 대한 인식이다. 거기서부터 변형과 조절, 전유의 대상으로서의 객체는 주체와 독립적인 것으로, 나아가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며, 주체는 어떠한 객체와도 매개되어 있지 않다는 식의 사고가 팽배해진다. 그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내 운동은 사라지고 대상이 없는 공허한 윤리, 주의주의와 자아비판만이 난무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운동들이 그러한 상태에 처해있던 때는 언제나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내가 현명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출현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