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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으로부터 현대물리학을 떼어낼 수 있을까?

by 정강산 2017. 4. 3.

2016, 2, 16에 작성된 글

 Viktor Popkov, Builders of the Bratsk Hydroelectric Power station(1960)


흔히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의 발견들은 으레 포스트모더니즘과 불가지론을 지탱하는 철학적 담론들, 국소성, 개별성, 차이, 다양성 등의 개념들에 친화적인 것으로 독해 되어왔다.

이런 현대물리학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대략 다음과 같다: 본질주의적이고 구축적인 뉴턴식 물리학이 가정했던- 천체의 등속운동과 질량 보존의 법칙들에서 발견되는- 전제들은 보편적인 세계, 우주의 법칙 일반을 설명해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빛의 입자들이 지니는 질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는 순수한 관측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 해명되어 온 현실과 무관하게, 단일한 힘이 작용하는 순수한 공간을 가정함으로써 다양한 힘들이 상호작용하는 효과로서의 개별 현상들에 충실하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었으며, 특히 미시적인 입자들의 세계에선 그 기본 전제들이 완전히 무력화 된다. 말하자면 뉴턴 식의 거시적인 모델은 애초에 세계를 정확히 설명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것이 침범할 수 없는 미시적 인과들의 역학과 영역이 분명하게 존재해왔고, 이러한 발견들은 점차 그 중요성을 인정받으며 뉴턴 물리학의 모델들로부터 독립적인 것으로 정립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인간의 육안으로 식별불가능하고 불가해 한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등의 연역적 발견, 슈뢰딩거의 고양이 모델, 빛보다 빠른 입자들의 상호연동 등등의 현대물리학의 대표적인 키워드들은 이성의 가능성을 낙관했던 과학적 모더니티에 기반 해온 우리의 인식론이 그 토대에서부터 허물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과, 그에 따라 누구도 세계에 대한 특권적인 인식론을 자처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을 방증하는 알리바이로 소급되곤 한다. 물론 그 최종적인 도착점은 인식론적 다원주의일 것이다.

여기서 “단일한 힘이 작용하는 순수한 공간을 가정함으로써 다양한 힘들이 상호작용하는 효과로서의 개별 현상들에 충실하지 못한 한계”를 뉴턴 물리학의 은유로서의 근대성에 가하는 비판으로 확장시킨다면, 이는 공교롭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로 분류되는 들뢰즈의 “리좀”을 상기시키며, 포스트구조주의의 선봉인 데리다의 “차연”과 그 효과로서의 ‘상호텍스트성’이 지향하는 해체주의와 겹쳐지고, 이성이 매개된 과학과 예술을 통한 역사의 진보, 생산관계의 전복을 통한 인류의 해방 등의 “거대서사”를 주창해 온 모더니즘과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신사회운동의 비판적 알레고리 혹은 리오타르의 대안-“소서사”와 공명하는 동시에, 무페와 라클라우의 ‘모순적 적합을 통한 평등한 연대’와도 포개어진다.

물론 역사적으로 이들 쟁쟁한 신철학자들과 현대물리학의 직접적인 영향의 인과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을지는 문헌학적 연구를 통해 따져볼 문제이겠으나, 이들이 논리적으로 친화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이미 구좌파들과 파시즘을 동일시하며 포스트모더니티를 무의식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수많은 예술가들과, 일부 철학도들, 뉴에이지적인 영성주의자들이 양자역학을 참조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현대물리학의 발견들을, 다원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은 채 급진적으로 독해하는 시도는 사실상 전무하다. 형식논리적으로 양자는 결국 불가지론과 유사한 지점에서 멈추기 때문이다. 허나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뒷받침된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적극적으로 전유하는 현대물리학의 담론들을 충분히 정치적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어쩌면 그 첫 시도는 현대물리학에 대한 현상학적 독해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다시피 후설은 대상을 향한 주체의 투명한 인식 불가능성의 아포리아가 가정하는- 관념론과 유물론 혹은 주체와 객체의 극단적인 대립을 “현상학적 환원”과 “의식의 지향성”이란 개념을 통해 우회하여 대상이 주체에게 드러나는 방식, 즉 현상하는 방식 자체를 문제시하는 학문으로서의 현상학을 제창한 인물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사회를 바꾸려면>에서 위와 같은 맥락에서 후설을 소개하며, 이를 객체에 대한 주체의 대립과 배제를 전제하는 개체론적 사고가 아니라 대상이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현상함으로써 주체의 인식에 맺히는- 관계론적 사고의 원형이라 평한다.

허나 이런 측면에서 사실 그보다 앞서 관계론적 사유의 모티프가 되는 헤겔은 일찍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이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핵심은 각 항들이 그들을 매개하는 관계의 범주 속에 존재하는 한, 항들은 독립적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관계 자체로부터 규정된다는 점이다. 헤겔은 이것을 망각하는 것은 노예의 의식 상태에 다름없다고 말한다. 이는 마르크스가 즐겨 사용하는 “사회적 관계”라는 개념으로 전유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상의 논의를 경유한다면, 우리는 ‘관측과 동시에 관찰자의 개입이 전제되어 대상에 대한 주체의 투명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불가지론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정체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은 항상 관찰자의 시점을 매개한다’라는 우회로를 얻는 방식으로 현대물리학의 발견들을 구출할 수 있으며, 따라서 관계 자체의 산물을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대상들로 간주하는- 객체의 순수한 양태가 존재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물신’들에 관한 비판으로 전유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뉴턴물리학/ 현대물리학’ 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알레고리를 깨고, 예컨대 다음과 같은 논리로 그 자리에 ‘뉴턴물리학/ 현대물리학’ 대 ‘물신주의/ 물신주의 비판’의 관계를 기입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현대물리학이 이미 관찰자 시점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롭고 순수한 관측이 불가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데, 당신은 여전히 자본주의적 황금률과 가치실현의 방식들이 우리의 시선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작동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체의 시선 외부에 존재하는 객체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턴 식으로 양자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작동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착각되는 것- 그것이 정확히 마르크스가 말했던(아도르노가 강하게 반복했던) 의미에서의 물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