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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11월 12일 이후: 이유가 아닌 원인을 사유한다는 것

by 정강산 2017. 4. 1.

2016, 11, 13일에 작성된 글



El Lissitzky, Beat All The Scattered(1920)

최순실 게이트의 가장 큰 공모자는 결국 모녀에게 돈을 쥐어준 재벌들일 것이다. 그리고 어제 저녁, 100만의 군중을 추동한 ‘이유’는 국정농단과 현행 정치제도의 오작동일 수 있지만, ‘원인’은 경제적인 것 일반에 대한 환멸이다. 정유라가 누린 특혜와 최순실이 받아낸 천문학적인 액수의 상납 앞에서 사람들이 느꼈을 박탈감과 분노가 어쩌면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이다. 헌데 지금까지 나온 ‘합리적이고 허용가능한’, 그래서 언론에서도 주로 회자되는 수습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여당 친박계에선 탄핵발의(를 통한 시간끌기), 여당 비박계에선 거국내각(을 통한 체면 확보), 제1야당은 2선후퇴(를 통한 정권위임), 진보정당들에선 하야(를 통한 영향력 확대). 허나 새삼스럽게도 이들은 여전히 상부구조적 개혁에 머물러 있다. 이 세력들이 공통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은 책임자 처벌 정도의 수준에서 그칠 것이다.

시민적 윤리를 지키며 온건하고 평화적으로 집회가 진행되고,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국회에 이 사안에 대한 해결을 대리시킬 경우 위에서 열거된 어떤 선택지도 사실 가능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으로 일단락되는 것은 100만이 모인 것을 초라하게 하는 결과가 아닐까. 아직 그조차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국회 내의 세력들이 테이블에서의 협상을 통해 얻어낸 결과를 승복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란 것이 현행제도의 실작동이자 능력 있는 대통령이었다고 착각하고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축적된 자금으로 정계에 로비를 걸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친기업적이고 우파적인 정책을 펼치도록 유도한 자본주의적 축적체계와 생산관계 자체에 있지 않나.

이것을 바라보고 정확히 타격하지 않는 한, 비선실세니 정경유착이니 하는 모습들은 얼마든지 음성화된 양태로 재생산된다. 앞서 열거한 ‘합리적인’ 선택지들을 뛰어넘는 ‘비합리적’ 결단이 필요하고, 합리적인 것의 비합리성을 공론화할, 진실로 합리적인 주체가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지젝이 말한 시차적 관점을 실행할 주체 말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동기를 가지고 서로의 참여동기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행진하고 국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간접적인 압력만을 가한 뒤, 요구의 관철 여부와는 상관없이 각자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식의 양상은 지금껏 너무나도 지루하게 많이 봐왔던 것이고, 대놓고 말들은 못하지만 이것이 사실 87년을 거쳐 2000년대 이후로 고착화된 촛불의 한계 같은 것이 아닌가. 의사를 표명하되, 선은 넘지 않는, 반대를 표명하되, 관철시키지 않는 비폭력에 대한 요구의 한계도 어쩌면 여기 있을 것이다. 폭력으로 정치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권력을 구성할 수는 없다는 주장은 폭력으로 파괴된 정치의 위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을 사유하지 못하는 한에서 절반만 옳은 말이다. 이는 폭력 일반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폭력인지, 더 나아가 무엇이 법인지를 재고할 필요를 언급하는 것이다.

허나 작금의 시국을 야기한 근본적인 원인을 직시하기에 사람들은 너무 들떠있고, 참여 자체에 의의를 두는 듯하기도 할뿐더러, 그 원인을 사유하도록 유도할 – 시차적 관점을 담지한 전위도 부재한다. 결국 우리는 최순실 게이트의 정국을, 이유를 통해 인식하느냐, 원인을 통해 사유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그래서 사실 이건 푸념에 가까운 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 글에 예상되는 반응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현재의 조건과 진지전이… 좌익소아병이, 모험주의가… 구체적인 대안이…  경제 환원주의가… 폭력이…라는 식의 서두로 운을 떼는 주장들을 늘어놓을 것을 너무나도 잘 안다. 헌데 우리는 어느샌가 마르크스주의의 환원주의를 반성하면서 어쩌면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잃은, 집회 시위의 폭력성을 성토하면서 집에서 평화롭게 UFC를 관람하고 세계각국의 전쟁소식을 접하는, 불법적인 폭력을 경멸하며 합법적인 폭력을 허용하고, 지금도 답이 없으면서 전체생산과 제도를 조직할 당장 구체적인 대안을 요구하는 기묘한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하야 따윈 아무래도 좋으니 생산수단을 사회화시킬 것을 주문하는 주체를 보고 싶은 것은 마냥 욕심인가. 어제 집회가 보여준 질서는 이미 우리의 시민의식을 충분히 증명했을 것이다. 이제 시민의식의 증명 이상의 단계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틀 전, 11월 11일자 중앙일보에서 한 논설위원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난 주말 광화문 광장의 시위도 내게 잊을수 없는 명장면이다. “청와대로 몰려가자”는 선동은 먹히지 않았다. 조국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자조나 비난은 없었다. “퇴진하라”고 했지만 증오와 분노, 핏발선 투쟁심은 아니었다. 어리석은 권력자를 풍자하는 시민의 여유가 흘렀다. 그들은 권력을 빼앗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손에 이미 권력이 들어와 있었다.(…) 2016년 가을, 대한민국의 광장 민주주의는 가장 진화된 주권자의 명예혁명이 될 것이다.(…)광화문의 시민결집은 한국역사에 명예혁명으로 남겨야 한다.”

여기서, 깔끔한 협상을 유도한 뒤 권력의 양보를 얻어낸다는 닫히고 닫힌 시나리오를 통해 이 사건을 명예혁명으로 남기고자 하는 저의는 간단하다. 최순실 게이트를 야기한 경험적인 사실- 이유는 책임자들의 실정 때문이니 그들을 처벌하면 사태는 끝난다는 것이다. 허나 경험적인 사실과 이유를 돌파함으로써만 사유할 수 있는- 최순실 게이트를 유발한 원인은 경제적인 것을 재고하길 요청하며, 결코 이유를 통해 이 사건을 해소시켜선 안 됨을 증언한다. 이 논설위의 주장대로,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착각대로, 우리들의 “손에 이미 권력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증오와 분노, 핏발선 투쟁심”이 아닌, “어리석은 권력자를 풍자하는 시민의 여유”를 뽐내며 결과적으로 “권력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 한, 그것이야말로 권력이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이며, 우리는 아마 3000만이 모여도 계속 “시민의 여유”를 뽐내며 권력을 쟁취하지는 못한 채 그것을 냉소하면서 언젠가 아름답게 기억될 “명장면”이나 만들고 있을 것이다. 주권을 가진 국민들로 구성된 공화주의의 이상은, 근본적으로 봉기할 권리에 있음을 떠올릴 때는 어쩌면 지금이 아닌가. 혁명을 빼놓고 민주주의를 민주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큰 환상이 아닐까. 이 시점에서 과연 누가 이상주의자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최순실 게이트 자체도 초현실적이지만 하야와 책임자 처벌과 같은 수세적인 요구가 진정으로 공세적인 요구로 전화되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초현실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이후 26일의 시위가 비극으로 끝날지, 희극으로 시작될지는 어쩌면 시민적 주체성을 전적으로 재고하고 재고안해내는 일- 여기에 달려있다.

(크리틱칼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