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2일에 작성된 글
El Lissitzky, Proun 99(1924)
논의를 전개하기에 앞서 밝히건대,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까닭은- ‘예술’과 ‘정치’라는 도저히 묶이지 않을 것처럼만 보이는 두 개의 항으로부터 공통분모를 찾고자 했던 시도와 관련된 것이었다. 말하자면, 오늘날 예술가로서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가들은 그 자신이 수행해야할 작업에 대한 당위를 대관절 어디서부터 정립하고 있는가, 혹은 해야만 하는가, 라는- 고리타분한 질문이 필자로 하여금 본 글을 구성하게끔 추동한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우선 예술가가 가져야할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뒤로 넘겨둔 채로 반추하건대-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구성원들로 하여금 잉여가치를 영속적으로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 ‘주기적인 공황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위험천만한 체제’, ‘노동에 대한 착취와 노동생산물에 대한 수탈로 지탱되는 경제’, ‘사물 속에 일정한 양의 가치가 내재되어있다는 믿음을 통해 유지되는 형이상학적인 세계’ 등등의 여러 가지 수식들을 통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설명들은 하나의 지점으로 소급되는데, 그것은- 자본주의란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의 조합으로 인해 인위적이고 우발적으로 조성된 체제라는 점이다.
다소 투박하나마 이에 대해 잠시 개괄 하자면, 15세기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국제적 교역은 교역 당국의 막대한 부의 축적을 가능케 했고 이것은 훗날 대량생산에 투하될 ‘자본’의 원형을 이룬다.*1 한편 중세말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지속된 인클로저 운동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스스로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를 양산해내는데, 이는 18세기 후반 영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산업혁명과 맞물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가속화시키는데 일조한다.*2 덧붙여 직업 천수설을 통해 사적소유에 기반한 부의 축적을 정당화 시켰던 16세기 중반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또한 자본의 심리적 기반의 맹아를 다지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3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산업혁명 이후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낸 초기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산업자본을 필두로 한 상품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였고 무산계급으로 하여금 임노동의 굴레에 스스로 목줄을 채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세계 전체의 생산을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노동시간 연장; 주요 생필품의 가격인하; 품질 혁신과 새로운 수요창출을 통해 노골적으로 잉여가치를 추구하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착취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복잡한 층들을 이루어, 주어져있던 봉건적 사회의 정치; 경제적 기류를 변용시키고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여- 우리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자본주의의 원형을 주조한 것이다.
심화되는 착취는 거센 저항과 투명한 대안에 대한 요구를 불러일으켰고 이 저항과 지배세력(체제)이 지닌 각각의 파열음은 뒤이은 20세기 초반의 역사적 물적 조건들- 사회주의 국가의 등장, 거대 노동자정당의 건재, 대공황, 세계대전 등-을 형성했다. 한편 이러한 물적 조건들의 중첩과 결합은, 자본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재생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허용케 했고 이는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빚어내는 계기가 된다. 허나 1970년대에 이르러 세계 곳곳에서 관측되는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와, 당시 사회전반의 수요와 공급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던 케인스주의의 핵심이었던 테일러주의적 생산방식은 보편적 복지에 대한 보수세력과 자유주의자들의 가차 없는 공세를 야기하여,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 발생한 봉건적 반동적 흐름(프랑스 혁명을 가능케 했던)에 필적하는 자본주의적 반동을 발생시키기에 이른다. 봉건적 사회관계와 낡은 관습들을 타파하는데 일조했던, 미래에 대한 진취적인 비전을 지녔던 자유주의가 아닌- 정치적 자유는 터부시하고 경제적 자유만을 최우선의 덕목으로 삼는 타락한 자유주의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4 이른바 ‘신자유주의’라는 흐름이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파급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시장만능주의를 등에 업은 자본의 탈영토화, 고용 유연화, 금융규제의 철폐, 노조에 대한 강경탄압 등으로 점철된다. 이 속에서 소수의 자본가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노동자들에게 매 순간마다 더 세련되고 높은 강도의 착취가 가해지고 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과 20,30년 전까지 실업률로 측정되었던 경제지표가 오늘날 추상적이고 수학적인 코스피, 코스닥, 나스닥 등의 지표로 대체된 현상과, 자본의 순수한 운동을 가속화시키고 유지 재생산 하는 것이야말로 지상최대의 미덕이자 지켜야할 성역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현상 또한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일일테다. 또한 현재의 생산은 국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기에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감각이 인지 할 수 있는 영역 너머에서 생산이 지속되고 있을 것이라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며, 생산된 가치를 두고 돈 놀음을 하는 동시에 지금의 경제를 작동시키는 지배적 방식이 된-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은 숫자에 불과한 ‘신용’과 ‘금융’이라는 기묘한 생물은 도무지 그 시작과 끝을 파악 할 수 없어,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무지의 늪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한참을 에둘러 겨우 언급하게 되었지만, 이 지점에서 우리가 예술가로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예술가는 위와 같은 자본의 전 지구적 흐름에 가장 적응된 인물 군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경제적 개방이 곧 문화적 개방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기라도 하는 듯 국경을 넘나드는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에 따른 세계화의 수혜자는, 전 세계의 각종 비엔날레, 아트 페어, 각종 공연 및 전시 등을 기획; 조직하는 예술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붙여 심심찮게 파란을 불러오는 미술품경매 현장에서도 확인 할 수 있듯, 캔버스에 덕지덕지 칠해진, 덩어리진 화공약품이 ‘미술작품’으로서 수 백, 수 천 억대를 호가하는 가격을 부여 받는 현상은- 형이상학적인 시간과, 관념이 그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믿음을 통해 ‘사물’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의 물신화 과정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띤다. 뿐만 아니라 세금이 붙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대 자본이 그 자신의 로비자금 혹은 비자금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고가의 미술품을 이용한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이미 닳고 닳은 것이니- 예술과 예술가가 자본주의의 아성을 굳건히 하는 데에 명실상부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2005년의 구본주 투쟁과 2010년 초의 두리반 투쟁, 2011년의 최고은 사태 등이 보여주듯 예술가는 고정된 수입이 없어 끊임없이 궁핍과 가난에 시달리는 사회적 약자이자, 세계의 문제와 그 기류에 어떤 계층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회변혁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예술가라는 군상이 세계 속에서 지닌 이중적인 위상은- ‘이상 혹은 대의와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시도를 실천이라 일컬을 수 있다면, 예술의 실천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우리가 선뜻 대답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렇다면 보다 근본적인 문제- 즉 예술 혹은 창작행위 일반에 대한 정의를 고찰함으로써 우리는 예술과 자본사이에 놓인 예술가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정의를 가늠하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술을 향유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자 절대항이기에, 다소 성급할지라도 이 지면을 빌어 극도의 추상화를 통한 예술의 의미를 더듬거리고자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체가 주목한 세계의 문제적 지점들을 조형적 언어로 응축, 정제하고 번역하는 일이다. 달리말해 예술이란, 세계 도처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 현상들에 반응하여,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재배열하고 이미지화 혹은 감각화하는 작업을 일컫는다. 따라서 예술의 생산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예술의 해석은 추상의 영역에서 구체의 영역으로 귀결되는 양상을 띠며, 양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예술과 예술작품이 각각 그 밖의 다양한 학문적 사조, 사물들과 구별되는 지점은 그것이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온전히 담지하고 있고, 또 그럴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떤 구조와 개체들 혹은 개체와 개체 사이의 힘의 균형에 대해서도 침묵하며, 세계에 대한 일말의 관점도 제시하지 않는, 정치적이지 않은 조형물 내지 작품은- 예술이라기보다는 외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질’에 가깝다. 이유인즉 이 때의 예술이란 여느 공산품 소비; 수집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취향의 범주로 소급되어, ‘의미’가 아닌 ‘기호(嗜好)’를 그 자신의 근거로 삼게 되기 때문이다.*5 그것은 ‘나’ 이외의 어떤 주체도 허용하지 않는 개인만이 범람하는 세계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고, 서로가 서로를 병적으로 존중하여,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공허한 세계를 발생시킨다. 어느 맑스주의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의 정의를 의미에서 취향으로 귀결시켜, 끝내 ‘세계 없는 세계’가 도래할 때 우리는 세계와 동시에 예술을 잃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이미 ‘순수한 학문적 객관성을 추구 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학문분야들이 탈정치화 되고, 그 위상이 지배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형태로 변화해왔음을 감안 할 때 예술은 공동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는 거의 마지막 보루라 해도 좋을 상황에서, 최근 많은 예술가들이 스스로의 작업을 그저 관람자들의 취향에 귀속되는 비정치적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일 수밖에 없다.
예술이 가진 고유의 정체성과 파급, 영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더더욱, 부단히 예술의 정치성에 대한 염두를 우리의 작업에 투사하려 분투해야만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거칠게나마 예술의 정의를 경유하여 예술가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것은 ‘예술가는 세계를 얘기하고, 주어진 세계 너머의 세계에 대한 실마리를 조직하는 주체’라는 점이다.
맑스의 사유가 사회학자, 철학자, 정치학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예술가들에게 또한 유용한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덧붙여 필자가 이 글을 읽고 있을 예술학도들에게 ‘자본’을 토대로 한 맑스의 사상을 탐구할 것을 권유하는 이유 또한 앞서 언급한 ‘예술가’라는 주체에 대한 정의로부터 연원한다. 알다시피 맑스 사유의 핵심은 우리 논의의 초반에서 적시했듯- 자본주의란 인간의 본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구성된 체제가 아니라, 우연한 역사적 사건들의 중첩과 결합에 의해 조성된 일시적 체제이자 인간의 죽은 노동을 토대로 작동하는, 착취에 의존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위와 같은 맑스의 결론은, 상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상품에 내재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가치의 대립에 관한 분석으로, 그 대립적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구체적 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 또 다시 그것을 토대로 하여 잉여가치와 착취에 관해- 나아가 주기적인 공황에 대해 언급하는 변증법적 방식으로 도출되는데, 이때 맑스의 논리적 기반은 그 구성원들이 상품 속에 내재되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가치를 중심으로, 즉 구성원들의 믿음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즉 많은 이들이 가진 맑스에 대한 인식과는 달리, 그는 성급하게 자본주의를 ‘악’으로 규정하는데 거리를 두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분법적 규정을 지양하고 그 착취관계가 판매자와 구매자의 관계처럼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논의를 전개하였으며, 순수한 자본의 운동만을 분석하여 그 운동이 가진 구조적 모순을 밝혀내려 분투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맑스의 ‘자본주의’는 비단 생산의 구조를 지칭하는 경제적 개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을 조직하고 관념을 만들어내며, 일상의 법칙을 주조하는 총체 즉 세계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자본주의가 현재의 세계 그 자체라면, 그것이 인간의 감각을 만들어내는 총체로서 기능하는 것이라면, 감각과 세계에 대한 인식의 지형도를 조형적 언어로 그려내는 책무를 떠맡은 예술가들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자본주의라는 세계’라는 것이- 세계 도처의 예술가들이 맑스의 분석틀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의 근거이며, 이 (뜬금없이) 장황한 글의 쟁점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이미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상황과 체제에 굴하지 않고 그를 향해 딴죽을 걸며, 그 근원을 탐구하고 끊임없이 주어진 것 너머의 세계를 보려하는- ‘세계를 얘기하고, 주어진 세계 너머의 세계에 대한 실마리를 조직하는’ 주체가 바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1)강신준, <그들의 경제, 우리들의 경제학>, 길, 2010, 29~51p 참고.
*2)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장상환 역, 책벌레, 2000, 40~79p 참고.
*3)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김상희 역, 풀빛. 2006, 76~83p 참고.
*4)김세균/ 2014년 하절기 지식순환협동조합, ‘현대정치사상사’ 참고.
*5) 서동진,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돌베개, 2009.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으로부터 현대물리학을 떼어낼 수 있을까? (0) | 2017.04.03 |
---|---|
혐오의 문제설정을 돌파하고 싶다 (0) | 2017.04.01 |
11월 12일 이후: 이유가 아닌 원인을 사유한다는 것 (0) | 2017.04.01 |
사실, 진실-이데올로기, 진리: 진리의 텅빈 공백을 진실로 메운다는 것 (0) | 2017.04.01 |
예술혁명당 선언 전문 (0) | 2017.04.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