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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주체 이후의 객체: 헤겔의 균열난 존재론(Objects after Subjects: Hegel's Broken Ontology)

by 정강산 2020. 12. 20.

Todd Mcgowan

주체 이후의 객체: 헤겔의 균열난 존재론

"Objects after Subjects: Hegel's Broken Ontology" in 『 Subject Lessons: Hegel, Lacan, and the Future of Materialism』(2020)

 

정강산

 

피히테와 갈라서기(Finishing with Fichte)

 

토드 맥고완은 피히테가 그의 Wissenschaftslehre[각주:1]의 도입부에서 제시한 철학의 아포리아, 즉 관념론(idealism)과 유물론(materialism) 사이의 필연적이고도 피할 수 없는 긴장에 관해 얘기한다. 비록 피히테는 칸트적 관념론의 편에 서 있었으나, 관념론과 유물론[각주:2] 둘 중 어느 쪽도 최종적으로 다른 한 편을 설득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결국 우리는 모두 경향적으로 유물론의 편에 서거나, 관념론의 편에 서게 된다.

그들은 각각의 확고한 근본 원리에 의해 작동하기에, 그들이 각자 그 대립항을 약화시키려 한다면 이내 팽팽하게 맞서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피히테는 유물론에 대한 관념론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데에 있어 다만 유물론을 깎아 내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예컨대 피히테는 전 지식학의 기초에서, 사치스럽고 방만하며 허영에 찬 이들은 결코 관념론의 심오한 수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즉 피히테는 관념론은 도덕적 올바름을 갖거나 최소한 그것을 지향하지만 유물론은 도덕적 나태함을 표명한다고 본다.

피히테 이후의 사상가들은 유물론에 대한 그의 주장에 완전히 설득될 수 없었고, 특히 마르크스가 독일관념론을 뒤집어 세운 유물론적 혁명 이후로, 그 관념론과 유물론의 선택에 있어서 도덕적 원자가(valence)는 완연한 변형을 겪게 된다. 즉 마르크스 이후, 유물론은 문화적 유물론, 푸코주의적 역사주의, 신 다윈주의 등등에 걸친 여러 측면에서 도덕적으로 고지대를 차지하게 되고, 반면 관념론은 신앙주의(fideism), 유심론(spiritualism), 문화 제국주의 등등의 오명을 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물론의 그러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것은, 유물론과 관념론 각각이 기댄 근본적인 전제와 가정들의 차이로 인해 양자를 교통시키기란 불가능해 보인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논박을 통해 관념론적 입장을 거부하려 하지 않았다. 외려 마르크스는 단언과 조롱을 통해 관념론을 상대했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A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에서 개시된 그의 유명한 선언은 아름답게도 시적이지만, 관념론을 진지한 논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그들의 의식이 아니다. 외려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칸트나 피히테와 같은 관념론적 논적에 대항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만 교차반복법(antimetabole)을 통해 독자를 설득하고자 했다.

이는 관념론과 유물론 각각이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전체를 형성하여 외적 비판이 스며들 수 없는 단위를 구성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피히테가 유물론을 도덕적 타락의 공간으로 격하시킨 것처럼, 마르크스는 관념론을 지배적인 생산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적 환상으로서 격하한다. 둘 중 어느 쪽도 발전된 사유로 나아갈 통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철학이 자연과학과 달리, 문제를 해결하거나 진보하는 일 없이 끊임없이 같은 문제로 되돌아간다는 게 사실이라면, 그 이유는 모든 철학적 문제의 핵심에 바로 이와 같은 다루기 어려운 대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관념론과 유물론에 대한 피히테의 격언을 승인한다면, 우리는 단지 그들 중 하나를 고르기만 할 수 있을 뿐이며, 설상가상으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선택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사실에 가까운데, 이는 선택을 전혀 선택답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조건에서는 무엇이 더욱 객관적으로 합리적인지를 따지는 것보다, 무엇이 수용자 개인의 성격과 도덕적 성향에 적합한지를 결정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철학적으로 불만족스럽지만 관념론과 유물론이 공유하는 지반이 없는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손을 들고 피히테의 판결을 수락하는 것은 너무 빨리 나아가는 것이다. 비록 피히테와 마르크스가 관념론과 유물론 간 선택의 절대적 본질에 있어 이와 같은 판결을 공유한다 해도, 그들 사이의 역사적 격차를 이어주는 인물, 즉 헤겔은 또한 우리에게 이러한 이분법을 빠져나갈 방법을 보여준다. 헤겔은 칸트주의자로서 그의 철학적 궤적을 시작했으며, 비록 관념론이 더욱 우월한 철학적 노선이라는 피히테의 내기를 받아들이지만, 헤겔이 헤겔로 되는 지점에서, 그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불가분성을 알게 된다.

모순의 필연성에 근거한 철학을 전개함으로써, 헤겔은 피히테가 제시한 선택지가 틀린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삶 전반에 걸쳐, 헤겔은 관념론자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으나, 그는 칸트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달리, 객관적 관념론의 철학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이동은 전형적인 헤겔주의적 제스쳐로서, 두 대립되는 입장을 대면했을 때, 헤겔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길 거부하고 그들을 하나로 종합해낸다. 우리가 종합의 철학자로서 헤겔의 이미지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이 분명 헤겔의 판결이 될 것이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피히테가 제시한 대안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실패를 거부하도록 해줄 것이다. 객관적 관념론은 실로 피히테의 절대적 선택의 필연성을 피해가지만, 결정적으로 그것은 헤겔에 대한 판에 박힌 해석이 그러하듯 종합의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침식하는(undermine) 필연적인 모순에 대한 인지(recognition)를 통해 그리한다. 헤겔은 관념론의 노선이 우리를 유물론으로 이끈다는 것을 알았다. 관념은 절대가 됨으로써 자신의 타자가 된다.

 

 

알기 이전의 먹기(Eating before Knowing)

 

헤겔을 칸트적이고 피히테적인 잠으로부터 깨우는 것은 실천적인 존재에 대한 헤겔의 사유로부터 비롯된다. 우리의 지식은 현상계(phenomena)에 자신을 한정하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실천에서 그리 할 수 없다면 말이다. 이 과정을 거쳐, 헤겔은 피히테 및 피히테의 칸트론에 대한 급진화를 수행한다. 피히테가 주체 행위의 철학적 기초를 찾기 위해 이론적인 것에 대한 칸트의 도덕철학의 우선성을 승인했듯이, 헤겔은 어떻게 도덕적 행위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현상계에 제한하고 칸트의 관념론에 머무를 수 없는지를 드러내는지 인지하고 있었다. 행위(acting)는 우리를 우리의 기밀하게 밀봉된 관념론으로부터 들어올린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덕법은 주체와 다른 모든 존재들 사이의 근본적인 분할을 만들어내지만, 또한 헤겔의 유물론적 전환의 기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도덕은 단순히 주체가 행해야하는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즉 그것은 스스로를 현실로 만들어내야 한다. 혹은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하듯, “도덕은... 행위와 대비되는 배치로 남아있지 않으며, 외려 행위로 나아가거나 그 자신을 실현하는 데에로 나아간다.” 이는 칸트주의적 도덕에 대한 발본적인 도전을 표명하는데, 헤겔이 보기에 그러한 도덕은 자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데에 만족할 뿐, 결코 실제로 자신을 실현하지 않는다. 헤겔은 칸트적 도덕을 Sollen(당위) 혹은 의무(ought)”로 간주하는데, 이는 헤겔이 칸트를 도덕적 히스테리라고 고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칸트는 자신이 도덕적 질서 혹은 목적의 왕국[각주:3]을 원한다고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목적의 왕국을 계속하여 추구하길 바랄 뿐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그것을 실현하기보다는 그의 욕망을 욕망한다. 칸트의 도덕이 성취한 엄청난 도약에도 불구하고, 그는 실현되고 있는 도덕을 보지 못했으며, 다만 도덕이 항상 의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했을 뿐이다.

헤겔에게 있어 이러한 입장은 칸트적 도덕의 중핵에 있는 기본적인 부도덕과 이어진다. 즉 칸트는 도덕의 손을 더럽히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의 도덕적 고결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헤겔은 순수한 도덕이란 외려 부도덕한 세계를 승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헤겔은 칸트의 도덕적 주체가 외려 그에 대립적인 부도덕한 세계에 책임이 있다고 믿었는데, 이유인즉 주체의 도덕을 위해서 그와 같은 부도덕이 필연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도덕적인 주체에 맞서 악역을 맡아줄 누군가-즉 그러한 바의 세계-를 필요로 하며, 이것이 바로 히스테리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실천이성의 영역에 있어서 칸트에게 도전하는 것은, 칸트와 피히테의 기밀하게 밀봉된 관념론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제공한다. 헤겔은 도덕을 통해 유물론을 관념론적 체계에 주입하는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덕적 행위는 세계를 변형시켜야만 한다. 도덕적 행위는 그것이 변화시키려 하는 세계에 접촉하고, 그 자신을 그러한 바의 세계에 연루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도덕을 칸트가 하려했던 방식처럼 세계의 얼룩 내지 오점으로부터 분리된 무언가로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도덕의 본질에 있어서의 헤겔적 혁명의 인식론적 함의는 변혁적이다. 즉 우리의 지식은 그것이 아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남아 있을 수 없다. 지식은 그것이 마주하는 어떤 대상을 물자체와 구별되는 현상계로서 취급할 수 없다.

현상계와 물자체 사이의 관념론적 벽을 유지하려는 피히테의 노력을 비판하면서, 헤겔은 칸트가 현상과 물자체를 분리시키는 이와 같은 입장을 옹호할 때, 그가 여느 다른 동물들보다 낮은 지성을 보여준다고 단언한다. 자연철학에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사물(things)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막혀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오늘날 지배적인 형이상학에 관해 말하자면, 심지어 동물들조차 이들 형이상학자들만큼 아둔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들조차 사물들을 쫒아가고, 그들을 붙잡아 섭취하기 때문이다.” 즉 먹는 행위를 통해, 동물들은 그들이 마주치는 사물들이 어떤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사물이 자기 동일적(self-identical)이지 않다는 것을 시연해 보인다. 칸트적 의미의 외부세계(external world)에 자리를 잡은 사물들이 우리에게 접근불가하다면, 우리는 그들을 먹어치울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헤겔에게 있어 우리는 또한 당연히 그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도덕적 행위가 단지 세계를 변화시키기를 갈구하기보다 실제로 세계를 변화시켜야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행위하는 대상에 필연적으로 연루된다. 칸트의, 행위로부터의 도덕의 분리는 그의 물자체로부터의 인식론적 분리와 조응한다. 도덕적 행위의 현실성은 이 두 가지 분리의 환상이 거짓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행위 할 때, 우리는 객체들의 세계에 개입하며, 그러한 외부세계가 칸트와 피히테가 간주했던 것처럼 인식론적 출입금지구역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행위를 통해, 우리가 드러내는 것은 내재적으로 유물론을 수반한다.

 

 

부드러움과 함께 무언가 빠진 것이 있다(With Tenderness There's Something Missing)

 

헤겔의 사유에서 또 다른 주요 계기는 순수이성비판에서 형성된 칸트적 이율배반에 대한 응답에서 나타난다. 칸트가 최종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를 제기했을 때, 그는 우리의 이성이 언제나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 지점에서 이성은 모순적 사실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것을 요구한다. 칸트는 우주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시작을 갖는지, 어떤 단순한 실체가 존재하는지, 주체는 자유로운지 혹은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지, 필연적인 존재(혹은 신)란 존재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했다. 각 질문들은 칸트를 막다른 길로 몰아갔는데, 여기서 칸트는 처음의 두 문제의 가능성을 증명하거나, 후자의 두 문제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적 결과는 칸트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의 감각경험 너머에 있는 대상을 추론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했다.[각주:4] 그에게 있어 이성의 사용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데, 그것은 우리를 가능한 체험에 대한 경험적 사실(empirical reality)에 인식론적으로 한정시키고, 따라서 오성(understanding)의 사용에 우리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성의 모순은 우리가 물자체에 이르는 길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록 헤겔은 칸트가 이율배반에 당도하게 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추론에 딴죽을 걸지만, 그는 이율배반을 그 자체로 거부하지 않는다. 그는 칸트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우리가 물자체를 추론하려 한다면, 우리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논리학에서 그는 칸트적 이율배반은 그에 맞서 이성이 필연적으로 충돌하게 되는 모순이라고 쓴다. 칸트의 주장에 완전한 동의를 표한 후에, 그러나 그는 칸트와 정반대의 결론으로 나아간다. 헤겔에 따르면, 모순은 이성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성공을 표지한다. 이성이 모순에 빠지는 순간은 이성이 그 자신의 모순을 통해 파악하는 존재 자체 내의 모순을 가리킨다.

헤겔은 칸트가 이와 같은 결론을 놓쳤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칸트는 그릇되게도 외부 세계를 실체화하기 위해 이성을 비방했고, 물자체를 우리의 이성처럼 모순에 복속되지 않는 실체적 단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헤겔은 논리학에서 칸트에 맞서 이러한 기소를 공식화한다:

모순을 세계로부터 떨어뜨려 놓고, 대신 세계를 정신(spirit)과 이성에 넘겨주며, 세계를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은, 세계에 대한 과도한 부드러움이다. 사실은, 모순을 견딜 만큼 강한 것은 정신이며, 또한 그 모순을 해소할 방법을 아는 것 또한 정신이다. 그러나 소위 말하는 세계(객관적인 현실 세계이든, 초월적 관념론의 방식대로- 주관적 직관과 오성의 범주에 의해 결정되는 감각내용이든), 그것을 뭐라고 부르든 간에 모순을 피하지 못할뿐더러, 모순을 견디지 못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무언가로 되고, 무언가가 되길 중단하는 것은 포기된다.”

칸트는 외부 실재(external reality)의 결함보다는 이성의 실패를 발견하는 데에로 너무도 빨리 나아갔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사유는 외부 실재가 그러한 모순을 맹목적으로 겪는 것과 달리, 그것을 자각 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하는 데에 실패했다. 즉 모순에 대하여 외부 실재와 사유는 각각 다른 관계를 갖는다.

칸트의 이성 사용에 대한 검증을 통해 물자체 내의 모순을 식별함으로써, 헤겔은 피히테가 제기한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대립을 효과적으로 극복한다. 이것이 헤겔의 주된 철학적 이동인 바, 이는 마르크스가 미래의 사상가들을 위해 그 반대항을 복구시킴으로써 생략한 대목이기도 하다. 헤겔은 명목상 관념론의 편에 서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관념론을 다음과 같은 인식하에서 벼려냈다: 우리의 사유는 그것의 물질적 근원을 초과하며, 동시에 이들 근원들의 흔적을 지닌 채 그 근원들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오직 사유(ideas)만이 유물론의 불가피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관념론자였다.

모순과 이성의 충돌에서, 존재 자체 내의 모순으로의 이러한 이동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상가들이 헤겔로부터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어 왔다. 분석적 전통이 최근까지도 헤겔에 대해 가진 알레르기는 바로 이와 같은 이동의 불합리에서 연원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전통 내에서 헤겔에 대한 가장 공공연한 적수인 칼 포퍼에 따르면, 모순에 대한 헤겔의 관점은 그를 진정한 과학적 세계관의 적으로 만든다. 포퍼는 이렇게 말한다:

“[헤겔에게 있어] 모순은 과학이 진보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는 모순은 허용되며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필시 모든 과학과 모든 진보를 파괴하고 말 헤겔주의적 교리이다. 모순이 피할 수 없고 바람직한 것이라면, 모순을 제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모든 진보는 종언을 맞게 될 것이다.”

일견 그의 주장이 가진 힘은 부인할 수 없다. 이성에 대한 주장에서 존재에 대한 주장으로의 이동은, 우리의 사유가 외부 실재에서 벌어지는 것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부적절해 보인다. 피히테가 지적한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절대적 분할을 극복하려는 헤겔의 시도는 어떤 불합리의 설립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 실재에 대응하지 않는 존재에 관해 항상 생각한다. 유니콘에서부터, 우리보다 더 매력적인 환상 속의 성적 대상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사유가 외부 실재에 대해 무언가를 드러내기에 충분해지길 실패하는 지점은 무한하다. 그러나 헤겔이 주장하듯, 유니콘과 환상속의 성적 대상의 사례는 실재에 관한 우리 사유의 불충분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외려 그 반대이다. 사유에 대해 충분해지는 데에 실패하는 것이 바로 실재이다. 사유는 존재하지 않는 생물과 낭만적인 정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유니콘보다는 말을, 환상속의 상대가 아니라 현실의 성적 상대를 대할 때조차 그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사유이다. 사유되지 않은 성적 상대란 불가능 하며, 설령 그런 것이 생긴다 해도, 환상 속의 대상은 더욱 무한히 값지게 될 것이다. 사유되지 않은 성적 대상이란 어떤 순수하게 기계적인 역할일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전적으로 무가치하다. 결국 우리는 이성이 모순을 마주할 때, 그것이 외부 실재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이성의 결함이라고 섣불리 전제해선 안 될 것이다.

모순은 존재하는 모든 단위(entity)들의 생성(becoming) 속에서 자신을 표명한다. 단지 그것인 바대로 존재하는 단위란 없다. 대신, 모든 단위는 그 자체이면서도 그것이 아닌 바의 무엇이다. 이것은 어떤 단위를 그 자체로 정의하는 근본적인 모순이다. 만약 어떤 단위가 오직 그 자신이기만 한 채로 그것이 아닌 바의 무엇에 대한 어떤 참조도 갖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단위들과의 대조 속에서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모순은 상호작용을 통해 나타난다. 헤겔에게, 순수한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순수한 존재는 결코 행위하고, 움직이며, 말할 수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표명할 수 없다. 우리는 순수한 존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백히 아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사물이 무엇인 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단지 사물이 무엇인 바의 환상이나 꿈만을 경험한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모순과의 관계에 있어 외부 실재와 사유에 대한 칸트의 평가를 뒤집음으로써, 헤겔은 주체와 존재하는 다른 단위들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벼려냈다. 모순은 외재적으로 모든 단위들을 침식하는 한편, 주체는 모순을 파악하고 그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주체는 다른 모든 단위들이 그러하듯 그들의 파멸에 복종하기보다, 스스로를 침식할 능력을 갖는다. 역설적으로, 정신의 특권은 단순히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는 그 능력에 있다. 헤겔의 주체는 주체를 정의하는 근본적인 마조히즘을 통해 출현한다.

 

철학자의 돌(The Philosopher's Stone)

 

서구 철학의 전통을 돌아볼 때, 객체지향 존재론자들과 같은 관념론에 대한 동시대의 비판가들은 칸트나 헤겔과 같은 철학적 선조보다 마르틴 하이데거에 대해 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칸트와 헤겔과 달리, 하이데거는 물(things)에 상당한 권리를 부여했으며, 사유의 감옥에 그의 시간 전부를 쏟아 붓지 않았다. 물론 그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현존재의 능력을 염두에 두고 계속해서 현존재(Dasein)를 다른 객체들과 분리시켰으나, 관념론자들을 거꾸러뜨린 외부 세계의 실재에 대한 인식론적 문제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의 유명한 주장은, 철학의 추문은 외부 실재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 실패한 데에 있는 게 아니라, 외려 외부 실재가 제1의 문제가 되어왔다는 점 바로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가장 저명한 객체지향 존재론자들 중 한명인 그레이엄 하먼에게 있어, 도구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균열(rift)의 우선성을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여 주는 것이다. 주체성에서 현존재로의 하이데거의 전환은 객체의 방향에 있어 중요한 이동을 표지한다. 하먼에 따르면, “오직 하이데거의 도구 분석을 탈인간화함으로써만, 우리는 칸트주의 비판철학의 차가운 그늘에서 객체를 분리시킬 수 있다. 우리는 세계의 층위(levels)를 끊임없이 증식시키고, 객체와 인간의 인지(perception) 사이의 균열을 우주에서 유일한 틈(chasm)으로 간주하길 중단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하이데거를 그의 출발점 중 하나로 삼으면서, 하먼은 서구철학을 떠돌아다니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절대적인 분할을 해체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이데거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 사이의 차이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았다. 비록 그는 이 관계를 주체와 객체의 관점으로 이해하진 않았으나, 그는 유물론과 헤겔 양자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인간의 특권적인 지위를 승인했다. 헤겔과 하이데거 사이의 대조는, 관념론적 문제계 내에 남아있을 것을 고집한 헤겔의 입장이, 하이데거와 객체 지향 존재론자들이 시도하듯 관념론을 무시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어떻게 물질성에 대한 더욱 철저한 이해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갖는지를 드러낸다. 하이데거에게, 돌과 인간의 대조는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인간의 지위에 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의 강의 연작은 하이데거의 유명한 공식화를 보여주는데,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돌은 세계를 갖지 않는다; [2.] 동물은 세계에 있어 빈곤하다; [3.] 인간은 세계를 형성한다.” 비록 하이데거가 각 단위들이 갖는 세계에 대한 수준(scale)을 만들어냈다 해도, 그는 각 단위가 필연적으로 그러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간파했다. 심지어 세계를 갖지 않는(worldless) 돌까지도 그것이 갖지 않은 것으로서의 세계와 관계한다는 것이다.

돌과 인간 사이의 차이에 대한 하이데거의 이론화는, 거의 상식의 상태에 가깝다. 비록 동물의 세계가 얼마나 빈곤한지, 혹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이 썩 명확하지 않다 해도, 돌의 세계 없음과 인간의 세계 형성 사이의 대조는 이 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관점과 일치한다. 돌은 세계를 갖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에는 스스로를 자신의 배경의 관점에서 고려하는 능력이 결여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이 그것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며, 따라서 세계도 없다. 반면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이는 인간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관계하는 영역으로서 봉사한다. 우리는 세계에 자리 잡는 이러한 상호작용이 없이는 인간과 다른 인간들 혹은 인간과 객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상상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데거가 옳았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하이데거의 사유에 있어서 그가 현존재를 목적으로 주체성을 포기해버린데 대해 상당한 이론적 대가를 치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을 세계를 만들어내며 세계와 분리불가하게 엮여있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는 이것을 존재와 시간을 비롯한 다른 작업들에서 세계 내 존재로 공식화 한다- 주체성의 문제를 사유하길 거부하는 한에서 그렇게 한다. 주체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은 인간과 객체의 세계 사이의 격차를 줄이는 데에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그것은 하이데거가 주체성이 어떻게 우리에게 물(things)에 대해서 알려줄 수 있는지를 고려할 수 없게 한다.

 

 

돌이 깨지다(The Stone Breaks)

 

칸트에게, 돌이 세계를 갖지 않는다는 하이데거의 주장은 이미 너무 멀리 나아간 것일 것이다. 우리가 현상으로서의 돌에 관해 얘기할 수 있다 해도, 돌 그 자체의 상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돌과 세계 없음을 동일시함으로써, 하이데거는 지성을 다스리는 한계를 넘어 갔으며, 세계의 일관성에 질문을 던졌다. 칸트의 사유에서, 우리의 세계성(worldliness)은 돌의 세계 없음에 대한 주장을 하지 않는 것에 달려있다. 우리는 오직 돌에 관해 그들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현상의 세계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다. 우리가 이 한계를 넘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칸트가 순수이성의 첫 번째 이율배반에서 보여주었듯이 세계의 일관성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칸트의 철학보다 하이데거의 철학에 호의적인 이유를 설명해준다. 비록 하이데거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발본적인 차이를 유지한다 해도, 그는 칸트가 했던 방식으로 인식론의 문제에 갇히지 않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돌에 대한 존재론적 진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존재론에 대한 인식론의 우위를 승인하길 거부하기 때문이다. 돌에 대한 우리의 앎은 돌을 포함하는 우리의 근본적인 세계 내 존재에 기초하여 가능하다.

하이데거는 현상계와 물자체로 나뉘는 사물의 분할을 거부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현상학의 현상계 뒤편에는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어떤 현상이 되는 것은 은폐될 수 있다. 현상계가 그 대부분에 있어 주어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현상학에 대한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획은 현상계를 변형시키고 그것을 알려진(혹은 알려지지 않은) 대상이 되게 하는, 사유의 혼란을 정리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그가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을 피해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하이데거는 주체와 다른 단위들 사이의 차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를 포용하는 객체 지향 존재론자들처럼, 하이데거는 모순에 대한 주체의 관계가 주체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객관적 실재를 규명하는 데에도 또한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 데에 실패한다.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의 하이데거와 비슷하게, 헤겔은 비유기적 물질과 유기적 물질, 그리고 주체성 사이를 구분한다. 그러나 헤겔에게 있어 그 차이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이데거의 돌처럼, 헤겔의 주체는 세계를 갖지 않는다. 우리는 주체성을 오직, 세계로부터의 주체의 소격(alienation)을 통해서만 정의할 수 있다. 주체는 그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에 속하지 않으며, 외려 이 소격이 주체의 자유의 근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주체성의 세계 없음은 주체로 하여금 세계가 비유기적 물질에 대해 촉발시키는 바의 외부의 파괴를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비록 헤겔은 돌을 세계 형성으로서 이론화하지 않지만, 그는 돌을 주체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완전히 세계 속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유기적 생명은 비유기적인 것의 세계성을 공유하지만, 그것은 비유기적인 것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세계의 파괴성(destructiveness)을 저지 할 수 있다. 자연철학에서 헤겔은 하이데거의 avant la lettre[각주:5]에 대한 응수처럼 읽히는 구절을 표명한다. 유기적인 생명은 그 자신의 파괴 과정에서의 영구적인 자기 복구로 특징지어진다. 이러한 투쟁을 견딜 수 없는 비유기적 물질은 쇠퇴하게 된다. 물론 더 단단한 사물들은 그들 스스로를 보전한다는 것이 사실이나, 그들 또한 공기에 의해 끊임없이 산화된다.” 헤겔은 유기적인 것을, 단순히 세계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 능력을 가진 것으로서 정의한다. 비유기적인 것과 달리, 유기적인 것은 자기복구를 통해 세계가 그에게 한껏 부과하는 파괴에 반응한다. 대조적으로, 돌은 단순히 부식되고 깨질 뿐인데, 이유인즉 그것은 충분히 세계를 없애는 데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세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려 전적으로 세계의 편인 것이다.

돌은 너무나도 세계의 편에 있기에, 그것은 그것의 세계 이외에 다른 것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세계가 그에 가하는 손상에 저항할 수 없다. 이는 돌을 단지 유기적 생명과 대비시킬 뿐만 아니라, 주체성과 대비시키며, 헤겔이 Geist 혹은 spirit이라 불렀던 것과 대비시킨다. 정신은 세계로부터의 주체의 소격이며, 모순을 견딜 뿐만 아니라 모순을 규정(enact)해내는 주체의 능력이다. 자연철학의 한 시적인 구절에서, 헤겔은 돌과 정신의 관계를 어떤 갈망에 대한 것으로 묘사한다: “돌은 정신을 향해 목 놓아 외치며, 그들 스스로를 정신으로 들어올린다.” 돌은 부셔져 조각나며 목 놓아 외친다. 모순에 압도되는 그들의 소리는 주체의 출현을 가리키며, 이는 모순을 주체 자신의 원리로 만든다.

돌은 단지 모순을 견딜 뿐이며 결국 모순에 의해 파괴된다. 자기 동일적으로 되는 데에 대한 돌의 무능력은 최종적으로 부식 혹은 다른 어떤 폭력적인 세계의 목적을 통한 돌의 파괴라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돌이 자기 동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며, 그것이 어떤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왜냐하면 돌은 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은 주체, 즉 그 자신의 설립원리를 와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그것이 외부 세계로부터의 폭력을 견딜 수 있다 해도, 돌에게는 그 자신을 향한 어떤 폭력을 수행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것은 그 자신에 맞서 나뉘어져 있지만, 모순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그리 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는 스스로를 부순다(The Subject Breaks Itself)

 

헤겔은 칸트가 했던 만큼이나 과감하게 물자체와 주체를 분리시킨다. 그러나 칸트와 헤겔 사이의 차이는, 헤겔의 경우 그 분리에 대한 탐사를 통해 주체를 다시 물 자체로 되돌린다는 점이다. 돌과 주체는 모순적인 존재를 공유한다. 양자 모두 내재적으로 분할되어 있거나, 그들 자신과 불화한다. 이것이 바로 양자가 모두 깨지기 쉬운 이유이다. 그러나 돌과 주체가 그러한 깨짐에 대해 갖는 관계는 그들의 차이를 구성한다.

헤겔은 주체성을 그 자신과 불화하는 존재에 대해 주체가 갖는 능력으로, 그리고 이러한 모순에 대한 인식으로 규정한다. 돌이 그러하듯 외부적 힘으로서의 모순을 견디기보다, 주체는 이러한 모순을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주체는 주체 그 자신에 맞서 행위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법철학에서 헤겔이 말하듯, “나는 이 수족과 내 삶을 오직 내가 그러한 의지를 갖는 한에서 갖고 있다; 동물은 그 자신을 불구로 만들거나 파괴할 수 없지만, 인간 존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비록 자기 파괴를 다른 존재들로부터의 주체의 구별과 동일시하는 것은 특권이라기보다는 어떤 책임이지만, 그것은 관념론이 또한 유물론이어야만 한다는 헤겔의 파악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자기 파괴에 대한 주체의 행위는 단지 자살(헤겔은 이것을 다른 존재들에 대한 주체의 특권적 지위를 나타내는 지표로 간주했다)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표명하는 게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유 자체를 통해서 나타난다. 사유는 존재에 맞선 심원한 폭력의 행위다. 생각하는 행위를 통해, 주체는 자신을 파괴하는 외부적 힘으로서의 모순을 견디길 거부한다. 사유는 주체가 스스로에 대해 폭력을 행하는 주요한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주체가 사유로부터 후퇴하여 돌을 모방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주체성은 언제나 복수를 한다. 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정확히 주체성을 규정하는 자기 파괴를 요구한다. 주체성의 회피는 바로 주체성을 향해 되돌아가는 길이다.

주체는 그 자신의 파괴에 대한 엔진이 됨으로써 그 자신을 돌과 구분한다. 모순은 헤겔에게 어느 한쪽을 속이는 일 없이 관념론과 유물론 사이의 고집스런 대립을 극복할 방법을 제공하였다. 모순은 물질적인 세계를 그 자체로부터 나누지만, 우리가 이 분할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유를 통해서이다. 관념론과 유물론 중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우리는 진정한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 관념론으로 돌아가 그것이 이끄는 바를 절대적으로 따라가야 할 것이다

  1. 여기서 맥고완은 “지식학” 혹은 “학문론” 또는 “인식론”으로 소개된 『전 지식학의 기초(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1794)를 염두에 두고 있다. 한편 Wissenschaftslehre의 개념은 『지식학의 원리에 의한 자연권의 기초(Grundlage des Naturrechts nach den Principien der Wissenschaftslehre)』(1796) “지식학 서술(Darstellung der Wissenschaftslehre)”(1801) 등 이어지는 피히테의 작업에서 보이듯 그의 주된 관심이었다. [본문으로]
  2. 이때 관념론과 대비되고 있는 유물론은 ‘존재론’이거나 ‘독단론’의 뉘앙스에 가깝다. [본문으로]
  3.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1785) 및 『실천이성 비판(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 등 칸트의 윤리학 전반에서 “목적의 왕국/목적의 나라”라는 개념은 일종의 도덕적 유토피아로 설정된다. 목적의 왕국에서 각 개인은 이성적 존재자로서 정언 명령; 보편적 준칙을 준수하며, 목적으로서의 선; 인간을 축으로 연결된 전체 체계를 이룬다. 헤겔의 인륜성 개념에 가장 근접해 있는 칸트적 등가물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문으로]
  4. 칸트는 이미 『순수이성비판』에서부터 이와 같은 아포리아를 체화하고 있는 바, 그는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신, 영혼, 자유의 개념을 감성적 직관과 관계하는 현상계 너머에 있는 범주로 명백히 정립하면서도, 곧바로 이들을 실천이성의 영역에서 모순 없이 사고가능 한 것으로서 구제한다. 이는 칸트에게 있어 도덕적 행위의 공간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무언가에 부과된 것이 아닌 행위자 고유의)‘자유’였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칸트의 딜레마이다. 즉 ‘자유’로의 대책 없는 회귀는 칸트의 방법론 자체에 이미 이율배반이 내재해 있다는 것, 따라서 그의 작업은 이율배반에 대한 규명이 아니라 이율배반의 철저한 형식화라는 것을 보여준다. 도무지 순수이성의 체계 내에서는 윤리와 당위의 세계를 발견할 수 없었기에, 그가 기껏 청산한 신, 자유, 영혼 등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다시 끌어들여 온 것이 칸트의 한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는 윤리와 당위 자체의 물질성과 객관성을 보지 못했다. 여기서 헤겔이 도입하는 것이 바로 윤리의 물질성으로서의 인륜성이며, 이러한 바의 정신의 담지자로서 국가 체계인 것이다. 헤겔은 이성 그 자체가 바로 현존하는 사물들과 매개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으며, 따라서 현상계에 귀속되어야 하는 순수이성과 현상계 너머의 문제를 다루는 실천이성을 어설프게 분리할 필요가 없었다. 자유를 구제하는 칸트의 시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임마누엘 칸트, 『순수이성비판 1』 백종현 역, 아카넷, 2006, 190-191. [본문으로]
  5. before the letter; word; concept 정도의 의미를 지닌 불어로서, “이름으로 불리기 이전”의 존재론적 지평을 암시하는 구절이라 간주할 수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