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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

게오르그 루카치,“정통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역, 거름, 1986.

by 정강산 2021. 2. 22.

게오르그 루카치,“정통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역사와 계급의식>, 박정호, 조만영 역, 거름, 1986.

 

정강산

 

 

 우선 제목의 단순함과 명확함에 비해, 이 텍스트에는 상당히 높은 문턱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이 작업을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 전통을 알아야 하고, 마르크스를 알아야 한다. 예컨대 비판적 방법이라는 말로 루카치가 의미하는 것은 칸트주의적 경향의 독일 관념론을 염두에 둔 것이며, ‘개념신화학이라는 말로 염두에 둔 것은 개념을 신비화하는 헤겔의 관념론적 체계이다. 또한 변증법총체성’, ‘구체성’, ‘현실성등의 개념은 직접적으로 헤겔 내지 마르크스의 체계 언저리에 있는 어떤 지평을 겨냥하고 있기에, 이들에 관련된 논의에 선행된 이해가 없이는 이 책은 그저 암호처럼 읽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잊혀져버린 변증법적 인식론의 정수를 보고자 한다면, 혹은 헤겔과 마르크스를 독특하게 버무려낸 고도로 정련된 철학적 표현을 보고자 한다면 본 저작은 기꺼이 방문할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역사와 계급의식>은 마르크스주의 혹은 레닌주의에 대한 철학화를 시도했다는 이유로 정작 여러 공산주의자들에 게 비판을 받은 저주받은 비운의 작업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다. 볼셰비즘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 사회의 대상이자 주체인 바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철학적 정초 등 이 작업을 규정하는 여러 특징들이 있으나, 이 작업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의 제1원칙으로서 소여의 총체성[에의 인식]과 도달되어야 할 총체성의 회복을 제시하며, 이를 철학적 방법론으로 체계화 한다는 데에 그 핵심이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도 총체성이란 원인이자 결과, 이미 주어진 것이자 도달되어야 할 것으로서 정립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극히 헤겔적인 제스쳐이다. 반면 마르크스에게는 이미 총체성이라는 범주 자체가 자본주의의 개념으로 함축된 채 형태전환되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예컨대 공산주의에 대한 낭만적인 묘사-아침에는 낚시를 하고, 저녁에는 비평을 하는 식의-에서조차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분할의 폐지를 염두에 둔 것에 가깝지, 총체성의 범주를 전면에 드러내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그가 훗날 1930년대에 발굴된 마르크스의 초기 작업들을 접하고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헤겔의 소외와 마르크스의 소외를 혼동했다며 자기비판을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각주:1]

 실로 마르크스는 1840년대에 이미 <유대인 문제에 대하여>를 시작으로 하여 <신성가족 비판>, <독일 이데올로기>를 통해 철학적으로는 청년 헤겔파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와 결별하고, 이어 동시기 정치적으로는 모제스 헤스(Moses Hess)와 선을 그으며 낭만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사회주의 경향과 결별했다. 그리고 그 각각의 결별 과정들이 마르크스가 방법론적으로 마르크스자체로서 벼려지는 과정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각주:2] 달리 말해, 이 과정은 <자본>에서 집대성되는 바의 마르크스 특유의 체계로 도약하는 모종의 계기였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루카치의 이 작업은 헤겔과의 방법론적 연관을 한편으로는 상당히 부인했음에도 불구, 결과적으로 강조하게 됨으로써 마르크스의 논의를 전위에서 후퇴시켰다는(예컨대 철학 비판에서 철학으로의) 혐의를 받을 법도 하다(이런 측면에서 그러한 바의 철학화를 가능케 한 작인으로 베버와 짐멜의 영향은 자주 거론되어왔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이후로 보다 강성해진 이론(Theory)[각주:3]일색의 지적 경향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과학에서 이론으로 대대적으로 전환해왔던 사정을 감안할 때, 루카치의 작업은 그나마 오늘날 좌파적 인식론이 유지 재생산 되는 데에 있어 더 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좌파들이 으레 이런 저런 포스트-주의를 비롯하여, ‘이론으로 거부감 없이 넘어온 이후, 이들과 거리를 벌리기 위한 시도로서 방문하게 되는 것은 비판이론, 혹은 최소한 그 전통에 있는 작업들이다(지젝은 그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이론내부에서, 그러나 이론의 타자로서 역할 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의 경향들은 그 자체 점증하는 자본주의의 인식론적 분화와 고립에 맞서는 경향이기도 하다. 세계가 극단적으로 분리되고, 그 작인들이 서로 어떤 관련도 없이 자족하는 것처럼 보일 때, 무엇보다 좌파들에게 어떤 공동의 목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이들을 전일적인 관점에서, 개념만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필연적이기 때문이다(알다시피 이론의 특징은, 시대착오적이게도- 개념 이외에 어떤 도구도 세계인식의 수단으로 채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때로 서구마르크스주의로서 폄하되기도 하는 바의 이러한 좌파적 이론의 시발점이다. 이 작업은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의 방법론을 추상해냄으로써, 마르크스주의가 경제, 사회 영역을 넘어 전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게끔 한 전환을 가리키는 이정표였던 것이다.[각주:4] 우리가 이론이 요청되어왔던 객관적인 역사적 계기들까지도 헤아릴 수 있다면, 루카치의 작업은 결국 좌파적 실천들이 만개할 세계를 향한 도약대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 변증법적 방법의 의미]

 본 텍스트에서 루카치는 마르크스주의에서의 정통성을 규정하려한다. 그에게 정통성이란 방법론과 관련된 것으로, 텍스트를 섬기는 훈고학 혹은 특정한 주장들에 대한 동의와는 무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방법론이란 특정한 변증법으로서, 유물론적 변증법을 가리킨다. 그는 유물론적 변증법이 혁명적 변증법이라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이론과 실천의 통일에 관한 문제를 사고할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이는 참된 유물론적 변증법에 있어, 이론과 이론의 대상이 갖는 관계는 유기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조인데, 이러한 유기성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론은 다만 한갓 대상에 외부적인 것으로 머물기 때문이다. 이론의 혁명적 기능의 전제인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때는 (...)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어떤 계급에게는 투쟁에서의 자기확보를 위한 직접적 조건으로 되는 역사적 상황이 주어져 있을 때, 이 계급에게는 자기 인식이 동시에 전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의미할 때, (...) 이 계급이 인식의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로 되고 이리하여 이론이 사회의 변혁과정에 직접적이고 적절하게 관여해 들어갈 때이다.”(57)

 루카치는 이렇게 이론과 실천이 통일될 수 있는 조건이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으로 인해 가능해졌다고 본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자기의식과 세계 자체의 본질적 구조가 일치함으로써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되며, 이것이 바로 유물론적 변증법의 요체라는 것이다. 루카치에게 변증법의 핵심은 바로 이와 같은 역사과정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관계”(58)에 있는 바, 그에 따르면 엥겔스조차 이 점을 간과함으로써 변증법에 대한 오해를 야기했다. 엥겔스에게 변증법은 다만 형이상학과 대비되는 방법으로서, 형이상학이 개념과 대상들을 고정된 것으로서 설정한다면 변증법은 그것들을 유동적인 것으로 풀어놓는 바의 인식인데, 루카치는 변증법이 이렇게 기술적으로(technically) 실정화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증법이 실정화된다면, “현실의 변혁”(58)이라는 변증법의 핵심은 뒷전이 되고, 개념과 대상의 유동성은 단지 “‘학문상의일로 되어버린다.”(59) 루카치에 따르면, 과학적 법칙을 감각 너머의 실재 보다는 감각을 기술하는 것으로서 규정함으로써 실재로부터 후퇴해버린 마흐주의(Machism)[각주:5](따라서 부르주아적인 관조적 유물론”(59), 즉 칸트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관념론), 의지주의(voluntarism)는 이와 같은 변증법에 다다르지 못한 양 극단인 동시에, 부르주아 사회의 적대를 반영하는 필연적인 모순의 이데올로기적 외화이다.

 따라서 변증법의 이와 같은 요체, 그리고 변증법 자체에서 후퇴하여 그것을 특정한 인식론으로 가공하려는 비판적인시도는 결국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이 의미하는 바대로, “방법과 현실, 사유와 존재의 분리”(59)로 귀착된다. 이러한 분리/분할이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적 물화를 그대로 답습하는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 연장에서 루카치는 변증법을 폐기하고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사실을 강조하는 경향이 이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각주:6]의 기회주의에서 그 민낯을 드러냈음을 논한다.

 

[사실과 총체성: 자연과학과 변증법]

 그렇다면 으레 변증법과 대비되는 실정적인 사실이란 무엇인가? 루카치는 편협한 경험주의가 섬기는 사실로서의 사실들(“모든 소여, 모든 통계학적 숫자, 경제생활의 모든 원사실”(61))이란 이미 특정한 지평, 특정한 조건, 특정한 세력에 의해 파악된 바의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반면 그에 따르면 세련된 기회주의자들은 사실들의 역사성에의 매개를 부정하진 않으나 자연과학의 관측적이고 실험적인 엄밀함을 찬양하며 변증법의 가치를 격하시킨다. 사유의 대상을 인식 주체 및 다른 대상들과 분절하고 고립시켜 대상들 간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기계적 영향관계만을 파악하는 바의 실증적인 자연과학의 방법론은, 그러나 루카치에 따르면 이미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매개되어 있다. 즉 자본주의의 물화, 전체와의 관련 없이 피상적으로 현상하는 표상의 체계는 마치 사실들이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것처럼 전제하는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함양할 수 있고, 편재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순수한 사실의 성립]과정은 생활현상이 숫자 및 숫자관계로 표현되는 순전히 양적인 본질로 환원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61) 루카치는 이와 같은 직접성을 헤겔적 맥락에서 오히려 추상적인 것으로서 규정한다. 즉 이러한 직접성은 물신숭배 속에서 사물화되어 전도된 표상 및 사물들간의 자동적인 관계의 단면이라는 점에서 추상적이며, 이 속에서 “(...)‘고립된사실, 고립된 사실복합, 고유의 법칙을 가진 부분영역들(경제, 법 등)이 발생하는데, 이것들은 그 직접적 현상형태에서 이미 그러한 [자연]과학적 탐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62)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실들로서의 사실이라는 동어반복적인 소여만이 존재할 뿐, 사실의 실체, 사실의 원인, 즉 사실의 역사성은 사고될 공간이 없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이러한 관점에서는 역사의 동학과 경향, 방향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이론이 항상 이미 지나간 사실들을 통해 뒷북을 울리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여의 사실이라는 직접성의 표상은, 자신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자본주의적 물화와 대상성이라는 한계 너머로 나아가기 위해, 그 자체 변증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는 현상들을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형태로부터 떼어 내는 것, 그것들을 그 핵심 내지는 본질과 연관시켜 주고 핵심 내지 본질을 파악하도록 해주는 매개를 찾아내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의 이러한 현상적 성격, 즉 그것들의 가상을 필연적인 현상형태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이 형태는 현상들의 역사적 본질 때문에, 즉 그것들이 자본주의사회의 지반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직접적 존재를 이처럼 이중적으로 규정하는 것, 즉 그것을 인정하는 동시에 지양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적 관계이다.”(64-65)

 매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직접성이 이미 거하고 있었던 지평을 규명해냄으로써 그것을 전체로서의 역사 내에 정초시키는 것, 특수가 보편 속에서 매개되는 방식을 규명함으로써 그들을 개별적인 것이자 구체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것- 이는 총체성의 지평이며, 이 속에서 낱낱의 사실에 대한 인식은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transformation)한다. 즉 이로서 한갓된 사실 이상으로 구체화된 현실은 사고 속에서 재생산될 수 있게 된다. 루카치는 그러나 이러한 사고 내의 현실의 재생산은 다만 출발점에 불과할 뿐, 이 자체가 도달되고 변형되어야 할 실재 자체는 아님을 강조하며, 관념론은 이 점을 이해하는 데에 실패한다고 말한다. 반면 속류 유물론은 더 이상의 분석이나 구체적 총체성으로의 종합이 전혀 없이 이 규정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일 때, 그것들을 추상적인 고립상태에 그대로 두고 구체적 총체성과는 무관한 추상적 법칙성을 통해서만 설명할 때, 특히 정밀하다고 믿는다.”[각주:7](65) 그에 따르면 속류 유물론을 비롯한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이와 같이 총체성 내의 변증법을 알지 못하며, 단순히 주체와 객체가 서로에 대해 외적인 관계 속에서 반성연관될 뿐인 바의 피상성에 머물 뿐이다. 이 속에서 부분은 실체화되어 그 자체 유의미함을 가장하는 단위가 되고, 전체는 형이상학으로 치부되어 “‘이념내지는 총합으로”(66) 전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하나의 전체인 바, 부분적 계기들(계급, 재화, 노역, , 화폐 등)이 전체와 맺는 관계의 변화 속에서 역사화 될 수 있다.

 

[변증법적 방법과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방법]

 이어 루카치는 총체성의 변증법이야말로 현실을 사고상으로 재생산하고 파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67)이라 단언한다. 이와 같은 구체적 총체성에서야말로 현실성이 간취되는 바, 현실성이란 필연적으로 모순에 대한 입장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왜냐하면 부분과 전체의 매개를 통해, 즉 특수와 보편의 매개를 통해 나타나는 개별성/구체성의 계기는 결국 통일 내 구별, 모순 속 통일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연과학, 반성과학, 수정주의는 대상 및 개념들의 모순을 인정하지 않으며, 으레 그들을 이론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 간주하는 한편, 변증법은 그러한 모순 자체가 현실의 편(적대적인 사회적 관계)에 내재해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 따라서 그러한 모순의 지양은 현실 자체의 편에서 벌어져야하며, 벌어지게 된다.

 이런 지평에서는 변증법적 방법과 비판적(실정적) 방법 간의 대립 역시 사회에 내재한 적대의 문제이다. 후자는 전자에 맞서 부르주아적 인식론을 대표하며, 개념과 대상들을 무시간적으로 고착시키는 것, 모순을 단지 인식의 한계에서 연원한 것으로 정립하는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루카치는 고전파 경제학 또한 이와 같은 자장 내에서 이뤄진 작업임을 지적하며, 리카도가 자본주의에서의 시장확대의 필연성을 부정한 것이 결국 자본주의에 종별적인 생산과 소비의 간극의 귀결-공황-을 덮어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그는 결국 변증법을 포기하게 되면 역사는 통일적 과정으로 파악되지 못한 채, 리케르트(Heinrich Rickert)처럼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동요하거나, 역사철학 식의 사변으로 전락한다고 본다. 역사과정의 통일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렇지 않을 경우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성격이 망각되어 역사의 대상들이 분절되어 파악되고, 결과적으로 시스몽디(Jean Charles Léonard de Sismondi)와 같이 공황의 원인을 과소소비론과 같은 데에서 찾게 됨으로써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구조를 꿰뚫어 볼 수 없게 된다는 데에 있다. 루카치는 시스몽디가 생산과 분배를 서로 독립적인 두 개의 운동군으로 파악”(70)하여 분절함으로써 대중의 소비를 진작하는 방향으로 분배의 문제를 해결하면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문제-공황-을 해결 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것을 비판하며, 이 경우 분배는 결국 생산의 단면이라는 점이 무시된다는 점을 지적한다.[각주:8] 그가 시스몽디를 프루동과 비교하여 언급하는 것 또한 이 연장에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듯 프루동은 상품의 내적 변증법이 화폐로 전개된다는 점을 보지 못한 채 화폐를 제거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철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루카치는 이와 같은 총체성이 그 내부의 특수자들을 구별 없는, 무차별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예컨대 화폐는 곧 상품이고, 분배의 관계규정은 곧 생산의 관계규정이라 할 때, 그것은 이들을 구별 없이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각각이 유기적 연관 하에 있다는 것, 이 연관의 체계 속에서 전체 생산양식 내의 특수한 기능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즉 총체성은 통일 내의 구별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연관, 상호 작용 자체라기보다는 각 계기들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조직되는 방식이다.[각주:9] 달리 말해, “(...)대상에 대한 인식 가능성은 대상이 속한 특정한 총체성 내에서의 그것의 기능을 파악할 때 발생한다. 바로 이 때문에 변증법적으로 총체성을 고찰하는 것은-그리고 이것만이-현실을 사회적 사건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만 자본주의적 생산이 필연적으로 산출하는 물신적 대상성형태가 해체되어 가상-비록 필연적인 것으로서 인식되는 가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인-으로 되기 때문이다.”(72)

 여기서 전면화 되는 것은 소여의 자율적인 표상들 간의 자동적 연관들이 모종의 껍질”(72), “현실은폐적 기능”(73)을 구성하며, 역사의 통일적 파악, 총체성에 대한 인식, 유물론적 변증법은 이 소여를 필연적인 가상으로 정립할 수 있는 것이라는 구도이다.[각주:10]

 

[현실의 문제: 헤겔과 맑스]

 현실이란 바로 이와 같은 총체성의 변증법 내에서 드러나는 것인바, 루카치에 따르면 이 점에서 헤겔과 맑스는 서로 수렴하는 동시에 분기한다. 현실성의 필연성을 논한 헤겔은 자본주의적 가상의 필연성을 논한 마르크스와 수렴한다. 그러나 헤겔이 한갓되이 사유와 존재, 관념과 물질(혹은 특수와 보편)을 종합하는 데에서 현실성을 구하도록 머물렀다면, 마르크스는 물질적인 사회적 관계의 내적 모순에 대한 인식에서 현실성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서로 분기한다. 루카치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르크스를 따라, 헤겔이 칸트의 이원론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간주한다. 즉 헤겔에게 있어 주체는 결국 절대정신의 소급작용에 의해서만 주어지며, 따라서 역사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언제나 늦게 나타나기에, 관념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분할은 다만 관념적으로 청산되었을 뿐 실질적으로 지양될 길이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역사는 이미 그 인간(주체)들의 물질적 사회관계를 통해 구성되고 있으며, 관념과 물질, 주체와 객체의 추상적 분할은 극복되어 전혀 다른 문제계가 등장한다. 마르크스가 인간들은 기존의 사회적 질서 위에서 사고하고 행위하며, 소여의 규정을 강하게 받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것을 지양시켜내며 대상을 변형시키고 나아가 자기 자신마저도 변화시킨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점을 확실히 인식하게 된다.

 루카치는 헤겔이 반성철학에 맞서 동원했던 변증법, 총체성, 역사와 같은 방법이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결실을 맺게 되는 계기가 헤겔에 맞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드러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헤겔이 온전히 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던 것은 바로 변증법 자체의 실체이자 기체인 현실적인 역사의 운동이 아직 마르크스의 시기만큼 전개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헤겔 자신이 사변적 이원론을 해소하는 데에 있어 이미 그들의 전제에 깊이 침잠해 있었기 때문이다. 헤겔이 민족정신을 역사 발전의 담지자로 실체화시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개념을 신비화하는 헤겔의 개념 신화학은 결국 “(...)인간 현존재의 근본사실이 인간에게 파악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사상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77) 즉 그것은 대상 자체 속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현실, 대상들 간의 관계, 대상들과 우리의 관계, 역사과정에서의 대상들의 변화 등을 신화적으로 구성하고 형성하는 초월적인 원동력들이라는 형태로 사상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루카치는 이러한 변증법의 신비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러 비로소 청산되었으며, 이는 인간들의 현실적인 삶의 관계 자체가 역사의 결정적 요인이라는 점을 적시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의식과 존재: 사적 유물론과 프롤레타리아트]

 여기서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기초는 실천의 문제와 직결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결국 인간의 현실적인 활동의 산물이며, 이러한 실질적인 활동-실천-이 문제로 되기 때문이다. 반면 앞서 루카치가 계속해서 비판해 온 자연과학적인 방법, 비판적 방법, 실증적 방법 등은 사회적 형태를 소여의 자연으로 굳게 하며, 여기서 대상은 다만 인식의 표적일 뿐 개입하거나 변혁할 수는 없는 것으로 된다. 이렇게 존재가 비변증법적으로 고착될 때, 실천은 다만 개개인의 의식의 문제가 된다. 실천은 개별화된 개인의 활동형식, 즉 윤리학으로 되어 버린다.”(79) 포이어바흐의 헤겔 비판은 물질을 한갓된 오성작용의 대상으로 제한하고 그렇게 실체화함으로써 정확히 이러한 함정에 빠졌다. 그러나 맑스는 감성’, 대상, 현실 등을 인간의 감성적 활동으로 이해하기를 요구했다. 이는 인간이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인간을 사회, 역사적 사건의 주체이자-동시에- 객체인 것으로 의식해야 함을 의미한다.”(79)

 인간을 규제하는 동시에 인간에 의해 구성되는 바의 사회적인 것은 자본주의에 이르러 비로소 가시화되었으며, 부르주아지는 이러한 사회의 등장에 일조하나 다만 즉자적, 직접적 형태로 그리한다. 즉 부르주아에게 사회에 대한 자각은 피상적이며, 그것들은 소여의 자연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부상은 비로소 사회를 한갓된 소여가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역동적인 운동 속에 있는 것으로, 그 내적 적대 속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파악하게 한다. 이것은 3계급의식”, 4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 의식을 비롯하여 <역사와 계급의식>의 전반에서 변주되고 보충되는 골간으로서, 세간의 오해와 달리 루카치가 순진하게 노동자 계급을 실체화하여 올바른 의식과 관점을 선험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보다 루카치의 작업은, 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철학화라는 혐의를 벗을 수 없다 해도, 역사발전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운동에 대한 유물론적 세련화에 가깝다.[각주:11] 여기서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학적 범주로서의 노동자 계급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운동 속에서 위상학적인 지위를 점하는 어떤 배치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애초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로마 시민계층의 가장 낮은 부분을 가리키는 prōlētārius에서 전유된 개념이라는 점을 상기해보라).[각주:12] 이런 견지에서, 루카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그들의 온전한 자기의식 자체가 모순에 기초한 역사의 도정과 일치한다. 즉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전체가 온전히 그 구체성 속에서 파악되는 것은 생산양식 내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주관적, 객관적으로 정초됨으로써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맑스가 <신성가족>(1844)에서 주장했듯,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을 해방할 수 있고 또 해방해야만 하는 까닭은, (...)모든 인간성의 가상의 사상이, 완성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있어서 실제로 완료되기 때문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조건 속에 오늘날의 사회의 모든 생활조건이 극단적으로 비인간적인 형태로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자신의 생활조건을 폐기하지 않고서는 자기를 해방할 수 없다.”(80에서 재인용)

 이렇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적 운동은 애초에 자본주의 사회에 객관적으로 내재하는 경향이자 변증법적 운동인 바, 유물론적 변증법의 요체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실천에 있다는 루카치의 일관된 강조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에 따르면 역사의 운동을 현실적인 것으로서 벼려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이 없이, 한갓된 외면적 이치추론을 통한 정교한 인식론의 과학에 갇히는 것은 신칸트주의의 영향권 내에 있었던 아들러, 그리고 힐퍼딩을 비롯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여주었듯 그릇된 문제계로 귀착된다. 반면 사적 유물론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모두 역사의 전개 속에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동일성의 서로 다른 표현들이며, 그러한 현실적인 투쟁 자체의 자기 인식이다.

 루카치는 방법으로서의 총체성이 역사의 산물임을 분명히 한다. “첫째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산출한 경제적 발전에 의해서,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발생에 의해서(...)인식으로서의 사적 유물론의 형식적인 객관적 가능성이 일반적으로 발생했다. 둘째로,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발전과정 속에서 비로소 이 형식적 가능성이 실재적 가능성으로 되었다.”(82) 이것은 또한 초월적인 역사의 신비화를 역사과정 자체 내로 내속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코 어떤 이상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새로운 사회의 요소들을 해방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인식에 이르는 길이다.”(82)

 그렇다면 운동의 궁극목표란 무엇인가? 루카치는 그것이 당위나 이념 따위가 아닌, “전체(과정으로 본 사회 전체)에 대한 관계이며, 이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투쟁의 모든 개별적 계기가 혁명적 의미를 획득”(82)한다고 본다. 이러한 고찰이 부재한 이치추론하는 바의 칸트적, 혹은 자연과학적 인식은 주체를 사실들(세계)과 기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주어진 객관적인 세계 자체가 운동하는 필연적인 방향을 보지 못하게 하며, 역사의 운동과 그에 대한 주체의 변증법적 관계설정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러한 인식론에서 주체는 다만 불가지론적 지평에서 어둠 속을 더듬으며 주관적인 결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주체와 객체의 유기적이고 상호적인 관계운동을 이해하게 해주는 “(...)변증법적 방법의 현실고찰이야말로 다름 아닌 행동의 문제에서 행동에 대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고찰임이 드러난다.”(83) 여기서 변증법적 방법에 의해 파악되는 실재의 궁극목표로의 운동이란 그러나 결국 주어진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도달된 단계의 구체적인 의미로서 구체적 계기에”(83), 즉 그러한 과정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과제는 특정한 상황을 단발적으로 해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파악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사고에 그릇된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항해서 항상 새롭게 투쟁하는 것이다.”(83) 그리하여 마르크스주의의 정통성을 지키는 것이란, “(...)전통의 수호자가 아니라, 현재의 순간 및 이 순간의 과제가 역사과정의 총체성과 맺는 관계를 항상 깨어 있는 채 알려주는”(83)역할을 하는 데에 있다.

 

 

  1. <역사와 계급의식> 출간 당시 그의 작업에 제기된 여러 비판들에 대한 수긍 및 응답을 반영하여 <레닌>(1924)을 내긴 했으나, 훗날 1925년에서 1926년 사이에 집필된 미출간 원고가 드러나며, 그가 <역사와 계급의식>에 제기된 비판들- 특히 경제주의적인 비판들 -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자 했던 점 또한 밝혀졌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버소에서 출판되었다. <A Defenc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Tailism and the Dialectic>(2000). [본문으로]
  2. 이런 측면에서 대략 <독일 이데올로기>(1845-1846)를 기점으로 성숙기의 마르크스를 채취하고 인식론적 단절테제를 도입한 알튀세르의 작업은 일견 합당한 면이 있다. [본문으로]
  3. 추상화 및 추론을 통해 형성된 체계를 가리키는 일반론적인 의미가 아니라, 고도의 반실증주의적인 지적 경향으로서, 거의 순수히 논증적 방법에 의거함으로써 세계 일반을 설명해내는 류의 대륙철학 등을 가리킨다. 주로 미국에서 60년대 이후로 프랑스 철학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개념이다. [본문으로]
  4. 메타-코드로서 마르크스주의를 정의하는 제임슨의 작업 또한 정확히 이러한 시조에 기대고 있다고 할 것이다. [본문으로]
  5. 레닌은 1909년에 출간한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통해 실증주의를 표방하는 마흐주의가 결국 유아론과 주관적 관념론으로 후퇴하게 된다는 점을 논증함으로써 마흐의 영향 속에 놓인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비판한 바 있다. 참고문헌에는 빠져있으나, 루카치 또한 레닌의 이 작업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6. 독일사민당 우파 내지 수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직접적인 친분이 있었기에 사민당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엥겔스 사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비판하며 기존 대의제의 전적인 수용과 민주주의의 확장을 주창했으며, 2인터네셔널에 기계적 유물론이 편재하게 되는 데에 큰 역할을 한 바 있다. 그의 수정주의적 경향은 <진화론적/점진적 사회주의(Evolutionary Socialism: A Criticism and Affirmation)>(1899)에서 단적으로 표명되었다. [본문으로]
  7.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속류 유물론을 비판하는 루카치의 표현들이 마치 오늘날 다기한 흐름으로 뻗어 나오고 있는 신(new) 유물론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속류 유물론에 대한 루카치의 선명한 대비는 비록 현대의 조건에서 재맥락화 되어야 할 테지만, 새로움을 자처하는 유물론적 경향들을 역사화하는 데에 유용한 준거가 될 것이다. [본문으로]
  8. 레닌은 <경제적 낭만주의의 특성에 관하여>(1897)에서 시스몽디의 이론을 비판한 바 있는데, 아마 본 대목을 집필할 때 루카치는 이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본문으로]
  9. 여기서(71) 루카치는 당구공의 상호 작용을 대상들 간의 피상적인 연관으로 비유하며, 이것과 총체성을 대비시키는데, 이는 알튀세르가 훗날 60년대에 표현적 인과성을 예시하며 이것을 구조적 인과성과 대비시킨 것과 거의 비슷한 구도이다. 여기서 상론할 수는 없으나, 알튀세르는 루카치의 숨은 독자였으며, 나아가 본인도 모르는 채 헤겔의 자장 속에서 작업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목적론헤겔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규탄은 결국 스탈린에 대한 약호였다고 주장하는 제임슨의 논의 역시 참고할 만하다. [본문으로]
  10. 적잖은 이들이 지적하듯, 이러한 구도는 루카치의 작업 <역사와 계급의식>(1923)에 이어 나온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서도 보이는바, 소여의 표상의 체계에서 진리는 은폐되어 있다는 식의 하이데거의 모더니티 비판에 대한 루카치의 선취 혹은 그 영향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본문으로]
  11. 루카치가 프롤레타리아트와 그 의식(, 주체) 자체를 실체화하지 않았다는 점은 <역사와 계급의식>8조직문제의 방법론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여기서 소여의 총체성을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것(아마 이것을 대항 총체성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은 주체의 측면에서도, 객체의 측면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오로지 주체이자 객체인 바의 조직-공산당-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12. 혹은 본문 (81)을 참고하라. 여기서 루카치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이러한 [현실의 총체적] 인식 또는 이것을 위한 방법적 태도가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개별적인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더욱이나) 직접적이고 자연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 그들은 칸트적 방법의 의미에서의 인식주체는 아니다. (...)이 계급 자체는 직접적인 절망적 방어의 자연발생적, 무의식적 행위에서 시작해서(이를테면 기계파괴가 초기의 극히 두드러진 예가 되겠다), 끊임없는 사회적 투쟁 속에서 점차 계급으로 형성되어갔다.” 이는 한편으로 실정화 되지 않는 실체에서 주체로의 이행이기도 하며, 계급투쟁이 계급을 만든다는 알튀세르의 언급의 선취이기도 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