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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맑스코뮤날레 혁신을 위한 비대위 2번째 모임 발제(2021년 2월 17일)

by 정강산 2021. 2. 17.

정강산

 

우선 당장 특정한 실정적인 조직혁신안의 단상을 짜내는 것도 어색하고, 스스로 그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내게 맑스코뮤날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반추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며, 이 점이 선행되어야 보다 허심탄회하게 비대위에 모인 다른 분들과 수월하게 얘기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각 잡힌 발제문보다는 맑스코뮤날레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를 두서없이 푸는 것으로 발제를 갈음할까 한다.

처음 맑스코뮤날레를 접한 것은 20136회 대회 때였다. 학출로서 계속 운동을 이어온 부모의 영향과 서동진 선생님의 영향으로 이제 막 의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배워가던 내게 그것은 당장에는 어떤 감흥을 자아내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한국의 진보적인 학술장의 생리와 인적 구성을 섭렵해가며, 쟁쟁한 좌파연구자들의 대형 격년 포럼이 있으며, 그것이 맑스코뮤날레라는 사실을 실감해갔고, 그런 조직 자체에 선망과 존경을 품게 되었다. 20178회 대회 때 직접 총무팀 아래에서 행사 준비를 자원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실로 맑스주의적 지향이 있는지 의뭉스러운 이들, 21세기라는 새로운 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지나간 혁명적텍스트들을 섬기는 이들, 고전적인 텍스트와 현실 사이에서 적당히 줄타기를 하며 연구하는 이들, 다소 힘 빠진 늙은이들, 치기 넘치는 젊은이들 등등 여러 군상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꺼이 맑스라는 기표 아래에서 모여든 많은 연구자들 및 단체들이었고, 나는 그런 양태가 비록 중구난방처럼 보이고 일관된 흐름으로 전개되기에 부족함이 있을지라도 현재의 조건에서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좌파의 공동 의제, 공동 목표, 공동 조직이 전무한, 그야말로 포스트모던한 세계에서, 당장 나 자신 역시 그들 언저리에서 갈팡질팡 하고 있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2018년 가을 한국사회경제학회에서 발표한 텍스트가 하태규 선생님의 눈에 들어, 곧이어 맑스코뮤날레 월례포럼에서 발제를 하게 되었고, 당시 맺은 인연으로 2019년부터 집행위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오창룡 선생님의 부탁으로 당시 집행위원장이었던 이광일 선생님을 도와 총무팀으로서 실질적으로 9회 행사를 꾸리는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고, 여기서 보다 코뮤날레의 생리를 깊게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리고 2020년부터는, 이진경 선생님이 집행위원장에서 사퇴하여 코뮤날레가 마비되기 전까지 집행위 회의와 더불어 일부 집행위원들로 구성된 적녹보라 특위에 함께 참여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와 같은 맑스코뮤날레의 중단은 구성원들 사이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에 가깝지 맑스코뮤날레 조직 자체의 병폐로 인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부 원로들이 제기하는 대대적인 혁신안에 대해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념 및 인적 구성과 조직 체계에 관해서 현재 코뮤날레가 처한 난관을 돌파할 묘수를 제안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 아니다.

다만 주로 젊은 세대를 향해, 그들을 암묵적이고도 결정적인 독자로 간주한 채 작성된 것처럼 보이는 혁신안의 스케치들을 보면서, 또한 그 동안의 집행위 회의에 참석해 오면서 가진 소감이 있긴 하다. 그것은 개인 집행위원들이 영코뮤날레에 대한 다소간의 미덥지 못한 감정과, 동시에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8회 대회 때 맑스코뮤날레 행사준비 팀으로 자원봉사를 하며 언뜻 느낀 바에 의하면 이는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는데, 그 때에도 이미 영코뮤날레와 일반코뮤날레를 가로지르는 경계가 명확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 경계는 영코뮤날레가 뒷풀이 때에 따로 자리를 만드는 것에서만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또래들과 무리를 짓는 것이야 워낙에 편한 일이니까 그야 그렇다 쳐도, 영코뮤날레의 구성원들은 기성연구자들의 언행 하나하나를 꼰대질이라고 생각하거나, 늙은 남성연구자의 경거망동 정도로 생각하는 한편, 일반 코뮤날레의 구성원들은 영코뮤날레의 구성원들을 아랫사람이라고 여기거나, 그도 아니라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영코뮤날레와 일반 코뮤날레를 가로지르는 선은 코뮤날레 일반에 대해 상대화된 이름이긴 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상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원로 개인집행위원들이 가진 못미더움과 부채감이라는 모순된 감정은 그들이 이런 조건에서도 후속 학문세대를 재생산해야한다는 대의를 어렴풋하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영코뮤날레를 비롯하여 젊은 신진연구자들의 세대 재생산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나아가 이는 다만 맑스코뮤날레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니며, 민주노총, 전교조를 비롯하여 노동운동 및 대안적 교육운동, 공동체 운동 제 영역에서 화두가 된다. 문제는 다만 기성의 연구자들이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며, 고착되어있다는 데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문제 해결의 단초가 결국 주체의 실천에 달려있다 할지라도, 전 사회적 문제를 주체의 편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주체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IMF의 세례를 받고 자란 80-90년 세대의 연구자들은 애초에 원로 연구자들이 맑스코뮤날레를 조직할 수 있었던 바의 집단적인 사회적 경험이 전무하며, 그것이 좋든 나쁘든 하나부터 열까지 그들과 전혀 다른 에토스를 지니고 있다. 아마 젊은 연구자들은 맑스코뮤날레의 현실적 의의를 가늠하지도 못할 만큼 다른 세계에 있을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들은 (경향적으로) 각자도생하는 데에 익숙할뿐더러, 조직을 귀찮게 여기기 십상이고, 맑스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을 생리적인 수준에서 미처 느껴보지 못했을 가능성 또한 크다. 이런 상황에서 영코뮤날레라는 파티션을 만들어 보았자, 다만 임시방편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그들을 한꺼번에 조직하기에는 그들이 처해있는 물적 조건의 관성이 훨씬 크다. 이 문제를 해결할 결정적인 단초는 결국 사회 자체에 있다. 사회의 적대 속에서 주어지는 어떤 종류의 사건으로 인해 그들 스스로가 각이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교류하고 네트워크를 만들며 정기적으로 모일 필요를 느낀다면, 그들은 코뮤날레에 들어 올 것이며, 기성의 조직이 불충분하다고 여긴다면 그들 자신이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할 것이다. 혹은 가시적인 플랫폼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들은 천천히 미처 발견되지 않은 독자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해, 패러다임의 전환은 주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거의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과정이며, 따라서 당장 영코뮤날레가 사실상 해체를 맞이했다는 사실에 동요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코뮤날레 차원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각성하기를 혁명적으로 대기하는 데에 만족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코뮤날레는 젊은 연구자들의 게토를 만들어주는 데에 급급할 거 없이, 젊은 연구자들을 물색하여 그들에게 월례포럼 혹은 별도 세션의 자리에서 발제할 기회를 제공하고, 영코뮤날레의 구성원이 아니라 연구자 일반으로서 그들을 조직하면 된다. 젊은 연구자들의 결과물을 살펴보고, 그들과 마찬가지의 평등한 지평에서 동지적 논평을 해주고, 그들과 친해짐으로써 조직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성공한(?) 조직화의 경우 거의 십중 팔구는 위와 같은 절차를 밟는다. 당장 나의 경우를 보아도 그러한데, 나는 일반 연구자의 자격으로 초청을 받았고, 그로서 원로들 앞에서 발제를 하고 생산적인 논평을 들었으며, 여기서 생긴 네트워크를 소중히 생각했기에 그들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나갔다. 때로 그들과 내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벽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것들은 먼저 산 동지에 대한 존중의 측면에서 기꺼이 감수할만한 것이었다. 이는 내가 애초에 일반연구자의 자격으로 이곳-맑스코뮤날레-에 왔기 때문이다. 지순협의 학생들 또한 맑스코뮤날레의 핵심 원로인 심광현 선생님, 강내희 선생님 등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삼색불광파라는 그들 자신의 독자적인 세션을 만들어 자연스럽게 9회 대회의 주체로 참가한 바 있다. 만약 그들에게 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들의 위상을 모종의 특수로서 정초되도록 독려했다면, 그들은 9회 대회를 그처럼 성황리에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애초에 주관 단체로서, 코뮤날레라는 전체 체계 내부의 일부로서 정립되었으며, 따라서 (앞으로의 행보가 어찌되든 간에) 성공적으로 코뮤날레의 구성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좌파와 구좌파의 경계를 허물고,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를 위해 노력하는 학술운동의 느슨한 조직체로서의 초기 코뮤날레의 명목적인 기치는 이미 시대 자체에 의해 실현되었다. 비록 과거의 인적 구성이 때로 발목을 잡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예컨대 수유너머에 대한 올드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반감, 노동자연대를 비롯하여 조직 노동운동을 강조하는 단체 및 인사들에 대한 신좌파들의 반감 등등), 한국이 소비 자본주의로 이행하며 자본주의 세계시장과 깊게 통합되고,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실질적으로 신좌파와 구좌파의 대립을 만들어낸 역사적 추동력은 객관적으로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는 2008년 공황 이후라기보다는, 방금 기술한 과정 속에서 다만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저런 이론들 중 선택 가능한 하나의 실정적인 선택지가 됨으로써, 더 이상 위험하지 않은 이념이 됨으로써 일찍이 열화된 형태로 달성되었다. 따라서 새삼스레 혁신안을 통해 그 기치를 다시금 확인하거나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외려 현재에 이르러 맑스코뮤날레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측면은, 그것이 좌파들이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어 갈 수 있는, 범좌파의 플랫폼이라는 것이다.

맑스코뮤날레는 일견 느슨해 보이기에, 그게 무슨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모임이냐고 비웃음을 살 때도 많다. 하지만 그만큼 완고한이들조차 스스로 유의미한 정치적, 담론적 세력으로 등장한 적은 없다(딱히 이들을 적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자 연대의 맑시즘이 그러한가, 변혁당의 사회주의정치캠프가 그러한가, 사회진보연대 내지 과천연구실의 공감 세미나가 그러한가). 만약 상이한 지적, 실천적 흐름들이 당나라 군대처럼 우후죽순 얽혀있다 해도, 그것은 현재의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이며, 역사의 형세 속에서 충분히 구체적으로 지양되고 벼려질 수 있기에, 그것이 맑스코뮤날레를 버려야할 이유가 되진 못한다. 외려 이 정도로 폭넓은 인적 구성 하에 유지되어온 진보적인 학술장은 없다. 혁신안을 내야하는 입장에서 이런 소감을 밝히는 것이 우습지만, 맑스코뮤날레는 전반적으로 혁신되어야 할 부분보다 유지되어야 할 부분이 훨씬 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