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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진보 정치, 재편합시다.": "네 좋죠, 근데 NL만 빼고요?"

by 정강산 2017. 4. 3.

2014, 11, 2에 작성된 글

Viktor Popkov, Spring in the Depot(1958)

우선 이 글을 본 누군가가 ‘종북’이라며 지레짐작하거나 매도 할 것을 염려하여 거듭 밝히건대- 

1. 필자는 종북이라는 언어가 매우 천박하고 유효하지 못한 개념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어째서 위키백과에 ‘종북주의’라는 정치용어로까지 명시되어있어야 하는지 납득하지 못한다. 2. 여느 현실사회주의 국가가 그래왔듯- 사회주의적 헤게모니를 유지할 만한 수준으로 그 구성원들의 의식을 향상시키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민주적 정치체제를 정착시키지 못한 북한체제는 남한 사회가 따라야만 할 완전한 이상이 아니다(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측면에서 혹은 사회 전반의 복지적 측면에서, 재평가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또한 ‘공산주의’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역사의 불변항이자, 맑스와 앵겔스가 말했듯 ‘현실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을 가리키는 이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덧붙여, 필자는 NL 혹은 PD의 입장에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2000년대 이후로 ‘종북’이라는 마법의 프레임을 소위 진보를 자청하는 인사들이 손수 고안하고 즐겨 사용하여- 보수세력과 우익진영에게 내구력 좋은 강철을 헌납했다는 사실과, 그들에게 헌납된 강철을 아주 정성들여 갈아주는 역할을 역시 진보진영 내부에서 도맡아 수행하는 모습을 불편한 심경으로 방관하고 있다가 진보정치재편의 움직임을 수시로 목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우연찮게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2001년 민노당의 한 주사계열 인사와 사회당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으로부터 출현한 종북이라는 프레임은 우스꽝스럽게도, 의심할 여지없이 그 용어의 주창자들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형식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때 종북이라는 음험한 쇠사슬이 완전히 수면에 떠오르게 되었던 이유는 2012년- 통진당 사건이 대두된 것으로부터 연원하는데, 이 사건의 발단은 이청호가 통진당의 내부 경선을 진행하는 데에 소위 ‘당권파(NL)’의 부정이 있었던 것 같다는 의혹을 당 게시판에 올려, 이것이 한 일간지에 보도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당시 NL을 제외한 모든 운동노선의 ‘진보’세력은 앞 다투어 경기동부연합의 당 장악을 ‘당권파의 횡포’ 라는 해괴한 용어로 수식하고, 성토하여 NL과 그 자신들을 구분 지으려 했다(아마 NL과 구별되는 운동 노선의 정통성을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작용했을 것이다). 2년이 지난 지금- 결국 대법 판결에서 무죄로 판결된 이른바 통진당 부정경선사건은 NL 뿐만 아니라, 중도좌파를 대표하는 사민주의자들, 유시민을 위시한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PD 등의 통진당 내부 구성원의 분열로부터 연원했다는 것이 정론이다(노선 대립으로부터 발생한 이성적 분열이었다면 좋겠지만, 이때의 분열은 사실상 아집과 반동으로 점철된 감정적 분열이었다). 그리고 당시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체제내부의 질서에 기대어 한 운동노선이 가진 급진성과 그들이 쌓아온 사회적 관계를 수장시켜버리는 모습에 나를 포함한 많은 동료들이 아연실색했는데,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끔찍한 기억이다. 어쩌면 꿈에 나올까 두렵다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진보정당이 제 3야당이 되어 국회의 정치적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었던 유일무이한 기회는 공중분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우리가 얻은 것은 실상 ‘김정일 개새끼’해봐 라는 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천박한 매카시즘적 프레임으로서의- ‘종북’이다. 그때의 분열이 야기한 여파와 그것이 야기한 종북이라는 놀라운 개념은 이제 보수진영에서 노무현에게 적용시킬 정도로 발전했으니, 굳이 ‘종북’이 지닌 가공할 유연성에 대한 구체적 사례를 덧붙이지는 않기로 한다.


문제는 헌법에 위배되는 강령을 가지고 있다는 명목으로, 통진당에 가해진 정당해산청구에서 드러나듯- 종북이라는 프레임이 한 진보정당을 해산시키는 것을 합리화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는데, 이 사태를 언제까지 넋 나간 채 방관 할 것이냐는 질문에 수많은 좌파들이 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진보진영내부의 소모적인 대립을 대관절 얼마나 지속시킬 것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답해야만 한다. 올해의 지방선거에서 보여진 결과는, 진보의 집권이 얼마나 요원해졌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의 진보정치운동이 생사의 기로에 서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출로는 명백히 강상구 노동당 전 부대표가 말했듯- ‘노동당, 정의당, 민주노총, 노동·정치·연대, 진보교연(진보대연합을 위한 진보교수연구자모임) 등이 참여하는 진보혁신회의를 통한 진보정치 재편’에 있다. 하지만 현재의 구성적 수준으로 그것은 하나마나라는 생각이다. 이석기 의원의 RO사건과 통진당에 가해진 정당해산청구 심판 이후로 진보정치 재편의 논의로부터 배제된 통진당의 노선을 존중하고, 지젝의 표현처럼- ‘모두가 함께가자’고 함으로써 발현되는 진정한 좌파의 역량을, 비(非)NL 계열 사람들이 깨달아야만 한다(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당파성은 혁명적이지도 못할 뿐더러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이런 맥락에서 때때로 진중권 같은 사람들은 레닌의 당파성을 내화하려 하다 헛발질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진보진영에서 NL을 따돌림으로써 남는 것이 무엇인가? 통진당 사태 이후 부정경선의혹을 첫 번째로 제기하고, 당의 와해를 위해 앞장섰던 ‘양심적인 내부고발자’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 이청호는- 당시 통진당 부산 금정구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결국 이 ‘진보는 죽었다’라는 책을 써재끼며 책장사를 하는 동시에 무소속으로 의원직을 수행하는, 기회주의적 인물로 거듭났고 유시민 또한 그에 맞장구를 치며 당의 분열을 촉진시켰다. 말하자면 통진당의 분열은 급진적인 좌파를 가장한 자유주의자들의 공세로 인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이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NL이 가진 노선 자체를 ‘종북, 주사, 당권파’로 규정하며 그것을 빌미로 진보정치 재편에 관한 논의에서 통진당을 아예 배제해버린다는 것은 진보가 진보이길 포기해버린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더구나 그런 자유주의자들과 야합까지 하다니, 지금 정의당 돌아가는 꼴을 보라). 어느 예대 교수로 재직 중인 사회학자의 말마따나, 경기동부연합이 그렇게 강성하고 똘똘 뭉쳐있다면 그네들이 그만큼 조직을 잘하면 되지- NL이 패권적인 성향을 띠고 항상 운동에 걸림돌이 되어왔다는 것은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NL 노선의 핵심은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의 병행이다(주사파는 ‘주체사상파’를 일컫는 것이지, NL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다). 즉 해방 이래 한국의 정치; 경제적 지형도를 미국에 의한 식민통치의 과정으로 보고, 분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제투쟁과 반자본투쟁을 병행한다는 것인데, 당장 주목하고 있는 지점이야 나와 다르지만, 역사적 고증과 현실의 상황을 통해서 보더라도 중요하고 존중할만한 노선이다. 체게바라를 비롯한 남미의 혁명가들이 쿠바 혁명을 완수한 이후로 얼마나 미국의 정치공작에 시달렸는지를 떠올릴 것도 없이- 해방이후 지금껏 미국이 한반도의 수많은 저항운동을 탄압하고, 수많은 좌파들을 몰살시키는 데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했는지, 역사를 조금만 알더라도 한국에서 여전히 반제투쟁이 유효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덧붙여 2014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70년 간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21세기의 강화도조약이라 할 법한 SOFA법에 의해 한국에서의 미군범죄 또한 한국의 법으로 처벌이 불가능 하다.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군이 쥐고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로, 한 국가로서의 자주권 행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어 국내 시장 또한 51퍼센트 이상을 해외자본(대부분 미국과 관련된)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을 식민지로 바라보는 것은 도통 이해못할 시선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맹목적인 민족주의의 발로에서 나온 반미감정이 아니라, 좌파운동이 해결해야할 현실의 문제이자 조건이다(우스겟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맑스도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분명히 이에 대한 이론을 정비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위의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분단체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북한과의 물리적 마찰들- 간첩사건, 서해안에서의 신경전, 금강산 피격사건, 연평도폭격 등-이 여론을 타면 언제나 북한과 사회주의에 관련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조성되고, 이는 곧바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근로조건 향상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의 의제를 실종시키는데 더 없이 큰 역할을 해왔으며, 결과적으로 노동의 힘 강화라는 목표는 빛 좋은 개살구가 되기 일쑤였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 굳이 국가보안법의 위상이 반 자본투쟁을 효과적으로 제단하고 특히 90년대 이후 노동 운동을 탄압하는 데에 중요한 수단이 되어왔다는 사실을 새삼 복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니, 분단문제 또한 체제의 유효한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라 여길 수 있는 것이다. 많은 PD들이 NL은 노동해방에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오만한 착각이다. 일례로 NL계열의 운동조직들은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김대중- 노무현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그와 동시에 두 민주당출신 대통령이 추구했던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김대중 정권 당시 두드러졌던 구조조정과 고용유연화, 노무현의 FTA 등)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비판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결국 NL은 여태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반제투쟁과, 분단문제 해결과, 노동운동을 병행하는 것인데- 왜 이 단순한 가닥이 문제가 되어서 진보정치 재편에 관한 문제를 통진당과 함께 논의하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만약 그 이유가, NL이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을 선도해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꺼이 NL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나는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고 자처하지만, 여느 자칭 진보와는 달리 북한체제에 관한 비판은 언제나 신중을 기해야한다는 입장이다. 그것은 진보진영에서 나서지 않아도 도처에서 떠들어대고 있는(심지어 초등학생들도 한다) 것이며, 한국내부의 광범위한 사회적 개혁과 복지체계 구축에 언제나 제동을 걸어왔다. 또한 그것은 대중들로 하여금 껍데기에 불과한 남한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우월성에 도취되어 자위하게끔 하며, 앞서 언급했듯- 각종 법적절차와 결합하여 사회전반의 저항운동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또한 북한에 관한 비판이랍시고 나와 있는 단골메뉴는 ‘선군정치와 3대 세습’으로 소급되는데- 이는 너무나 손쉽고도 천박한 비판인지라(독재라는 말을 누가 못하나, 앞서 말했듯 이 정도 수준은 초등학생들도 한다) 들어줄 가치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북한의 선군정치와 3대 세습은- UN을 앞세운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제국주의열강이 한강이북에 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래로 끊임없이 경제적, 정치적 무력을 행사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스탈린주의의 악명이 상당부분 직간접적으로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견제와 린치로부터 비롯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북 체제에 대한 비판은- 석유 수출로 내수시장을 지탱할 수 있는 베네수엘라와 달리 북한은 내수를 유지할 만한 물질자원이 충분치 않아 그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삶의 질을 보장하는 동시에 안정되고 민주적인 사회질서를 조직하기 힘들다거나 앞서 말했듯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적 헤게모니의 민주적 정착에 실패했다는 수준에서, 북한을 구성하는 역사적 궤적과 구조를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지, 세습과 핵무장, 선군정치, 집단주의 등등의 키워드를 자유주의적인 프레임으로 투사하여 세계의 지배구조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북한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의 급진성에 대한 증명서로 이용하는 한국의 많은 좌파들에게 나는 불만이 많다는 것이다(비판은 비판답게 하라).

이러한 맥락에서, NL 인사들이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다고 "헌법을 뒷받침하는 국회의원이 국가를 부정하면 공인 자격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며 린치를 한다거나,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죄로 기소된 것을 보고 “시대착오적인 위험한 발상이고,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으니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 한다”라며 비판 같잖은 비판을 하거나, 이제는 유시민 등의 자유주의자들과 야합하는 작태를 보이는 것이, 민주당 인사가 아니라 정의당 인사라는 사실은 아직까지도 충격적이다(여러분 모두가 알 만한 사람이다. 그의 노선과 실명은 거론하지 않겠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민주당의 베른슈타인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임시의장이 되었을 때, 도리어 부르주아들과 협상하여 사민당 내 좌파 인사들을 숙청하는데 앞장섰다는 사례가 21세기 한국 진보의 분열사태에서 정확히 랑데부를 하는 듯하다. 진보당 내 인사 혹은 진보당의 구조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비판의 근거가, 그들이 NL이기 때문이라는 것 밖에는 없다면, 나는 그에 절대 동의할 생각이 없다.


아무튼, 비 NL계열- 특히 PD의 맹렬하고 냉철한(?) 당파성 덕분에 이정희 의원은 마녀가 되었고, 이석기 의원은 좌익소아병, 빨치산의 향수에 젖어있는 퇴물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 저항운동의 거대한 축이었던 NL은 종북, 주사파, 매국노가 되었다. 제 3야당이 되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진보의 힘을 키울 맹아로 거듭날 것으로 기대되던 통합진보당은 공중분해 되고, 그 후폭풍은 잘 알다시피 올해 지방선거에서 아주 잘 드러났다. 그리고 통진당은 이제 해산심판을 받고 있다. 이 사태에 침묵하고 있는 이들에게, 당신들은 정녕 이것을 원했던 것이냐고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다.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식의 당 강령이 사회주의적이고 이적표현에 가깝다는 근거로 얼토당토하지도 않게 시도한 정당해산 요구가 관철된다면 그 다음은 정의당이고, 노동당이다. 어째서 진보진영에서는 이에 대한 어떤 강경한 태도도 보이지 않은 채 묵묵부답으로 보수; 우익세력의 눈치만 보며 손가락 빨고 있었는지, 각 조직 지도부를 붙잡고 문책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이제는 그러기도 귀찮다. 중요한 것은 지배적 힘에 맞서 평등한 세계를 도래시키겠다는 가치이지(실제로 NL이나 PD나 이 지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구구절절한 팩트 따위가 아니다. 지역과 세대를 뛰어넘는 연대가 절실한 마당에, 내로라하는 진보나으리들도 이쯤 되면 좀 배울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그나마 노동당의 김종철 활동가를 중심으로 ‘어게인 민주노동당’이라는 모토를 통해 통진당을 포함하는 진보대통합 운동이라도 준비하고 있어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으면 한국 진보정당은 더 이상 진보랄 것도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부디 세월호 투쟁이 중요하네, 남북공동응원단 지원 역시 중요하네 하는 식의 쓸데없는 정파대립은 삼가길 간곡히 요청한다. 어느 이탈리아 학자의 표현- ‘구성적 권력의 파열적 순간이 이미 재정된 권력에 의해 폐기처분되는 광범위한 패턴에 속한다’라는 말이 한국 진보운동에 적용될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실상 적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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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4일


RO사건 당시, 심상정 의원을 비롯한 일군의 PD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헌법을’ 강조 하는 동시에 보여줬던 체제순응적인 태도부터 (중략) 정의당이 최근 민주당과 통합 고려중이라는 소식까지. 내 머리로는 그 저의를 파악하지 못할 만큼 의아한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는데, 이번에 정의당 당원들에게 들은 몇 마디 코멘트는 그 의문을 눈 녹이듯 해소해주었다. 각론은 굉장히 많지만 대강 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민주 공화국에서 후방교란(RO를 언급하는 듯함) 하는 놈들 편들어주는 놈’, ‘정의당은 대중정당이니, 운동권스러운 문체 좀 자제하시고, 혁명 같은 소리 좀 하지 말라’, ‘녹색당과는 손잡아도, 종북 주사파, 민족해방파와는 절대 손 못잡는다’, 운운.. 굳이 그들이 사민주의를 정치노선으로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한국을 형성하고 있는 법; 제도 등에 대한 환상 내지 절대적 믿음을 그들이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코멘트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음은- 밝히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이 말하는 ‘민주 공화국’에 대한 답변으로서 내 답변을 간략히 정리한다.


선거는 한 사회의 유일무이한 합법적 권력(행정,입법,사법 등)을 행사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을 유지; 재생산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따라서 그 힘에 진입하기 위한 실질적 경로는 최대한 모든 구성원들에게, 평등하게 ‘민주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허나 이때의 민주주의는 가치와 지향의 면에서(실질적 면에서도) 논의되고 규정 되어야 하는 것이지, 제도의 측면에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개인의 물적, 심리적 조건을 애초부터 균질하지 않게 설정하는 것이 또한 자본주의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한 사회의 생산관계와 결코 무관하게 작동하지 않으며, 홀로 고고하게 세워진 성배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계몽주의 등의 온갖 정치적 태도들이 근대 국가의 출현과 변증법적으로 관계하며 전개되어 왔듯, 자유민주주의 또한 자본주의와 떼어내어 사고 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는 사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도 좋을 성 싶다. 이는 그것의 유용함- 특정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우리가 으레 경유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한, 나름의 ‘합리성’을 보증하는-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민주주의라는 이름이 모든 이들의 평등한 상태(물적,심리적 조건들로)를 지향하는 이름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절차적 제도로 자리매김하여- 본래의 급진성을 오래전에 상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민주주의는 제도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우리가 숱하게 목도해온 사실이지만 새삼 복기하건대, ‘민주헌법’에 의거한 민주적 법적 제도가 수많은 인민의 급진적 저항을 억압하는 데에 동원 된다면, 그것이 민주주의라면, 차라리 민주주의는 쓰레기 통에 처박혀야 할 관념이 되어야 마땅하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의 민주주의는 온갖 지배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내는 도구일 뿐이며, 폭력적인 자본주의적 헤게모니를 ‘합의에 의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어 주는 인습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체제 즉 현실의 생산관계와 그 조건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이야기 되는 ‘민주주의’는 빈깡통 내지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