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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빵과 밥에 대한 에세이

by 정강산 2018. 3. 20.

󰡔음식에 대한 에세이󰡕

 


 

1.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족, 벗들과 대화를 하며 함께 음미하며 먹을 때 '음식'을 먹는 것이고, 혼자 살기 위해 먹을 때 '먹이'를 먹는 것이라고.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헤아리자면, 이는 끼니를 대충 라면으로 때우거나 혼밥을 하며 고고한 도시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즐기는 이들을 향한, 혹은 점차 퍼져나가는 개인주의적 문화를 향한 일침으로 기획된 것이라 짐작해 볼 수 있다. 아마 그는 타인이 아무리 귀찮고 불편하더라도 살을 부대끼며 함께 먹는 것이 인간다운 모습임을 강변하며 공동적 행위의 마지막 보루였던 '식사'라는 행위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허나 나는 여기서 서투른 문화비평의 부족함을 본다. 식사가 부재하는 문화는 이미 변화된 생산양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과업에 따라 원자화 되는 과정에서 핵가족마저도 파편화되고, 식사시간은 정확히 1시간에 맞춰야하며, 혼인을 포기하는 독신가구가 늘어나고, 취직을 위해 각종 스펙을 만들기 위해 친구를 만날 여유도 없는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주체를 규정하는 생산양식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인간이 여유롭게 밥을 함께 먹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점이지, 그들이 자본주의의 기치인 개인성을 타고나 공동체를 저해하기 위해 홀로 먹이를 먹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의 구분대로라면, 누구나 '음식'을 먹고 싶을 텐데, 이는 단지 살기 위해 '먹이'를 해치우는 것으로 충분한 이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최대한 구부려 읽을 수 있는 이들이라면 식사조차 못하게 만드는 세계를 향한 분노를 키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분노는 '먹이를 그만 먹고 식사를 하라'는 교훈적 서사로는 도달하기 어렵다. 오늘날 누군가 음식에 주목하며 울림을 주고자 한다면, 그것은 '함께 먹으라'는 호통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들로 하여금 함께 먹지 못하게 하는지를 밝혀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2.

 프랑스 혁명을 둘러싼 온갖 야사들과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이 자리한다. 절대주의에 걸 맞는 신분적 위계가 공고했던 프랑스 제정 치하에서 대혁명에 불을 지핀 것은 중세 내내 귀족이 먹을 수 있는 흰 빵과 농민들이 먹어야 했던 누런 빵이 나뉘어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빵의 의미를 단지 '음식'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18세기 중엽부터 프랑스의 농민들이 '빵을 달라'며 프랑스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켰던 것은, 단지 보리와 호밀로 만든 거무튀튀한 빵이 맛이 없고 식감이 좋지 않으니 밀가루로 만든 흰 빵을 내놓으라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 먹을 빵이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빵의 분할은 세계의 모순이 집약된 불평등의 증거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철없이 '빵이 없으면 브리오슈(Brioche)를 먹으면 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는 루머가 아직도 논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빵을 초과하는 ''의 위상을 희미하게나마 증언한다.

 한편 볼셰비키의 구호 속에서 '평화, 토지'에 버금가는 것으로 설정되었던 것 역시 ''이었다(Peace! Land! Bread!). 191710월 혁명에 앞서 여름에 제출되었던 평화, 토지, 이라는 직관적인 슬로건은 연이은 전쟁과 실정에 굶주려 온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삶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은 당시 무차별적인 징발로 인해 만성적으로 기근에 허덕이던 러시아 민중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 호소와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 빵은 침샘을 자극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전쟁을 멈추라는 추상적인 구호로서 작동했다.

 우리는 아마 좀 더 가까운 곳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서슬퍼런 군사독재시절, 급진적 민주주의자로서 활동했던 김지하의 시에서도 우리는 어떤 보편자로서의 ()’이라는 심상을 확인하게 된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당연하게도, 이때 밥은 인간의 신진대사를 작동시키기 위해 위장에 들어가는 열량 덩어리가 아니라, 민주주의 혹은 어떤 공통성과 평등에 대한 알레고리다. 그래서 좌파적 색체가 짙은 일부 공동육아나 방과 후 시설에선 이 시로 노래를 지어 원생들의 식사 시간에 함께 부르게 함으로써, 유아기에 형성될 수 있는 윤리와 공산주의적 이념(?)의 맹아를 가꾸려하기도 한다. , 밥은 항상 밥으로만 그치지 않는 대상이다. 오늘날에도 빵()에 내재한 긴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중 한 예는 농업보조금을 줄이고 시장 규제를 없애라는 WTO(World Trade Organization)의 지침에 맞서 쌀을 지키라는 농민들의 요구가, 실은 자신들의 삶을 지키라는 절규이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따른 자유무역 체제에 저항하는 구호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허나 생산성이 발전하고 세계무역이 확장됨에 따라 생필품의 가격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 속에서 ()’이 과거와 같이 결정적인 쟁점이 되는 경우는 더 이상 보기 어려운 듯하다. 경제의 제문제와 그 적대가 ()’이라는 구호로 압축되기에 세계는 너무나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인구가 임금노동자가 된 세계에서, 한때 빵과 밥이라는 구호가 누렸던 위상은 일자리에 자리를 내주었으며, 이젠 그마저도 불투명하다. 모두가 태연스럽게 먹방을 찍을 수 있는 조건 속에서 밥을 통해 급진화를 꾀한다는 것은 외려 꿈같은 것이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음식을 첨예하게 상상하는 법을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먹는 존재인 인간이 어떤 예외상태 속에서 다시금 빵/밥에 새겨진 모순을 경험적으로 감각하게 될 것임은 필연적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러한 필연성을 보다 선명하게 하며, 그 필연의 도래를 사려 깊게 앞당기는 것이다.

 

3.

 오늘날, 적어도 한국에서 생산되는 문화산업 상품의 상당수는 음식과 관련된 컨텐츠들이다. 요리로 경연을 하거나, 셀럽들의 냉장고 속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거나, 임의로 시민들의 가정에 방문해 식사를 청하거나, 맛집을 돌아다니거나 하는 등의 일들은 이제 어떤 어색함도 없이 중계의 대상이 되곤 한다. 더불어 개인방송의 가장 대표적인 소재 또한 먹방이다. 먹방은 클립형태로 인터넷을 떠돌며, 실시간으로 스트리밍 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이란 소리를 내어 음식을 먹으며 시청자들의 요구와 피드백에 리액션을 취하는 것이 전부이다. 음식 포르노(food porn)라 불리는 이 독특한 문화가 2010년대 이후로 점차 편재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흔히들 말하듯, 집단적인 사회적 장의 파편화에 따라 음식을 먹는다는 생리적인 과정 또한 원자적 수준에서 수행되는 상황에서, 밥을 먹는 행위에 부여되어 있던 결속감, 유대감 등을 대리만족시키고자 하는 증상일까? 사회학적 진술로서 이는 참일 수 있지만, 몇 가지 다른 층위들을 함께 고려하는 것은 어떤 징후로서의 먹방에 대해 보다 입체적인 파악을 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오늘날 개인의 육체적, 신체적 현존을 확인할 방법 자체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된 상황과 음식 포르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과적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1970-80년대 미국의 청년들이 잔인무도한 난타전을 즐김으로써 그 자신들의 육신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은 점차 심화되어가는 자본주의의 추상화된 시공간 속에서 희미해져가는 현존감과 관련이 있었던 것처럼, 혹은 문화산업이 생산하는 전형적인 여성의 신체상에 조응하여 증가한 여성의 자해율이 추상화된 신체성에 맞서 현존을 확인하고자 하는 행위로 독해될 수 있는 것처럼, 먹방은 음식물을 씹어 삼킴으로써 느껴지는, 식도를 타고 내려가 위를 채우는 포만감에서 획득되는 동물적인 감각을 통해 스스로의 현존을 확인하고자 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대상일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심상만이 난무하고, 객관적으로 우리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을 때, 신체는 자신이 놓인 공간을 상실하게 되며, 육체의 현존을 느끼고자 하는 충동은 거세진다. 그렇다면 전지구적 금융세계화의 흐름에 한국이 전적으로 발을 맞추게 된 97IMF 이후, 즉 경험적 수준을 초월한 자본의 이동 가능성이 완성된 이후, 경제가 신체로 감지할 수 있는 경험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지각 불가능한 추상의 수준에서 작동한 것이 된지 대략 10년이 지난 이후 먹방이 출현한 것은 필연적이다.

 다른 한편 정신분석학적 수준에서 먹방은 사회 전체가 구순욕구로 퇴행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힐 수 있는데, 구순기는 항문기, 성기기, 잠복기, 생식기로 이어지는 심리성적 발달이론에서 가장 유아적인 단계의 기간이다. 입을 통해 느끼는 쾌락이 점차 편재하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 매개를 통해, 사회적 역할을 통해, 혹은 사회적 자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헤겔적 의미에선 즉자대자적으로 지양된, 프로이트적 의미에선 성숙한) 쾌락의 요인이 붕괴되고 있는 사정에서 연원할 것이다. 해소되지 않는 욕구는 대리충족을 필요로 한다. 이 지점에서, 이른바 기대감소시대의 한국에서 먹방이 나타나는 것은 또한 필연적이다. 역사에 내재한 모순을 실제적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주체가 취하는 입장이 첫 번째로는 상징적 해결, 두 번째로는 상상적 해결이듯,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지양된 수준의 해결책이 전무할 때 우리는 유아의 발달 단계의 한 지점으로 퇴행한다. 여기서 한국의 낮은 청년 고용률과 높은 실업률, 정규직의 절반가량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및 불안정 노동의 편재라는 조건과 먹방이라는 현상 사이의 인과를 그려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이에 대해 또 한편의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토피아적 욕망이 투사되고 동시에 지연되는 장소가 곧 음식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물질대사를 수행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섭취해야했던 인간이, 적어도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더 이상 갖지 않게 된 고민은 기본적인 먹거리에 대한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음식의 질과 개인의 기호가 문제가 되지, 만성적인 식량난과 같은 양적 공급의 차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발전된 생산성과 비교적 안정된 물가, 해외무역을 통해 싼 값에 들여온 재료들로 인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먹방은 음식이 생존과 무관한 것으로서 완전히 향유의 대상이 되었음을 전제하는 대상이며 일종의 유토피아주의와 관계할 수 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등등으로 요약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표상이 증언하듯, 배고픔과 굶주림이 없는 세계는 인간이 도달하고자 했던 최선의 상태였다. 그러나 문제는, 음식에의 침잠은 이미 없는 장소로서의 유토피아가 이미 도래한 것처럼 전제한다는 점에서, 마치 한때 종교적 구원의 테마가 그러했듯 유사 유토피아적 기능을 수행할 뿐이기에, 오늘날 유토피아는 더 이상 음식의 수준에서 상연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자 현실의 모순을 증언하는 지표로서 간주했던 마르크스의 비판처럼, 음식에 대한 탐닉을 숙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욕망이 당장 충족될 수 있는 직접적인 대상으로만 향하도록 하는 퇴행적인 기만이지만, 어떤 암호와도 같이, 희미하게나마 유토피아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충동으로서 말이다.

 

4.

1. 생태, 건강, 동물권 등을 고려하며 환경과 음식의 유기적 관계를 중시하는 슬로우 푸드.

2. 산업화된 시설을 통한 대량생산, 음식과 건강 및 사회의 관계를 경시하는 메가푸드.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이러한 구분은 음식좌파와 음식우파를 가르는 기준으로 통용된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신좌파적 테제와 하나의 물질적 대상으로부터 전체 사회를 연역해내려는 문화비평적 태도 등이 전제되어있다. 모든 것에서 정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 자체는 그다지 나쁠 것이 없다. 스포츠와 게임에서도 좌우의 구분이 가능한 마당에 오늘날 의미심장하게 대두되고 있는 상상적 대상인 음식에서 좌우를 구분하지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구분 속에서 좌-우의 음식은 주어진 것으로 전제되어 있기에 어떤 배치 속에서는 그러한 구분이 역전될 수 있다는 점이 간과되며, 음식과 관련된 실천은 윤리적인 것과 비윤리적인 것에 맞추어 라이프 스타일로 축소된 채 이해된다. 슬로우 푸드를 지향하는 것은 좌파이고, 메가푸드를 지향하는 것은 우파라는 도식은 음식을 둘러싼 복잡한 관계들을 고려하기에 지나치게 명쾌하다. 어쩌면 현실은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혹은 이러한 표상이 더 이상 실효가 없다면 저소득층이나 프레카리아트로 고쳐 읽어도 좋을 것이다)의 음식은 양질의 원료를 산업적으로 가공하여 저렴한 가격에 생산되어 나온 메가푸드이고, 프티부르주아(혹은 중산층’) 이상의 라이프 스타일을 영위할 수 있는 이들이 향유하는 것이 슬로우 푸드에 가깝기 때문이다. 삶의 재생산비용을 최대한으로 줄여내고 얼마 되지 않는 식사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컵라면과 삼각김밥, 혹은 햄버거를 사먹는 이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과연 우파의 그것에 가까울까? 외려 음식좌파적 실천이라 할 법한 것은 음식과 관련된 기존의 생산체계가 지닌 역동성과 생산력 자체를 더욱 많은 이들에게 개방하는 것이 아닐까. 근대 관료 시설의 첨병으로서의 우체국을 사회주의 이행의 기초로 간주했던 레닌에 기대어, 제임슨이 월마트 사회주의를 통해 전제했듯, 재래시장과 소상공인들의 상점을 이용하는 좌파적 소비와 대형마트를 이용하는 우파적 소비를 구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생산과 분배의 구조 전체의 이행 가능성이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해야 할 것은 더 싸고, 더 질 좋고, 더 위생적이며, 부문 산업 유통체계 속에서 효율성을 지닌 채 개인에게 도달되는 메가푸드일 것이다.

 

5.

쩝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