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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SNS의 부정성(나뉘어진 글들을 모아 재구성한 단상)

by 정강산 2018. 3. 23.

"언젠가 놀라운 발명에 의해서 모든 개인들이 집을 나서지 않고도 끊임없이 정치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어떤 장치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게 되고 이렇게 표현된 의견들이 자동으로 중앙에 등록되고, 사람들은 그 의견들을 단지 읽어보기만 하면 되는 미래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는 결코 특별히 집약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국가와 공론장이 남김없이 사유화되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공론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인데, 수백만명의 사적 개인의 의견이 여전히 그와 같이 일치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단지 사적인 의견의 총합이기 때문에 공론으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집단의 의지도, 일반 의지(volonté générale)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모든 개별적 의지의 총합, 즉 전체 의지(volonté de tous)만 발생할 것이다."

카를 슈미트, 헌법론, (1928).

 

*SNS와 혁명

 

아랍의 봄을 이끈 이집트 혁명의 주역-와엘 고님(Wael Ghonim)은 얼마 전 TED강연에서 놀랍게도,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틀렸다", 구심 없는 수평적 네트워크에 대한 찬양을 거둬들인다. 헌데 고님의 반성은 현재 한국의 정세에도 시의적인 반성이지 않을까. SNS는 호기심과 문제의식, 부과된 억압 등을 개인적으로 해소시키는 일을 방조하는 동시에 세계의 사건들에 관한 인식의 가능성을 무한히 열어 놓는다. 어쩌면 이는 양날의 검, 현재의 조건이자 한계일 것이다.

 

예컨대 이집트의 정치적 조건- 권위주의적 독재정치, 정보의 흐름에 대한 통제 등- 에서는 정보에 대한 접근가능성을 확장시키는 SNS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진실된 정보와 기만적 정보를 명증하게 분리되어 보이게 한 기제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카이로의 봄을 가능케 한 것은 SNS였다고, 따라서 SNS의 혁명적 역할에 관해 낙관할 수 있을 테지만, 와엘 고님이 뉘우치듯, 물질적 결집의 순간 이후의 현실을 조직해야하는 공간에서- 혹은 정보의 흐름이 가시적으로 차단되는 발전도상국의 지위를 넘어선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서 SNS는 외려 정치적 결집을 약화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11미디어 시대가 의미하는 것은 어쩌면 다음과 같다: 오프라인의 정치적 조직을 통해 부여된, 구체적인 현장에의 참여를 통해 획득가능 한 것이었던, 따라서 자연스럽게 조직과 매개된 생생한 정치적 삶을 구현해주는 것이었던 당파성과 이념은 이제 아고라에서의 키보드 배틀, SNS상의 공유’, ‘좋아요’, ‘리트윗’, ‘멘션등을 통해 가상적으로 해소되며, 유의미한 물리적인 결집은 이러한 가상적 소통을 통해 사전에 차단된다. 이 곳에서 SNS, 정보의 과잉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보가 그 뿌리를 내려 조직됨으로써 온전한 지식으로 전화될 가능성을 차단하며, 너무나 많은 사안들과 사건들, 개개의 사실들을 고려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고려하지 못하게 되는 휘발성의 공간을 마련한다.

 

정보의 과잉은 지식의 과소를 유발한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모든 개개의 사실들을 따라잡기 위해 가해지는 초단위의 짤막한 정치적 평론들은 역설적으로 정치적 의식의 발생 가능성을 차단하는 가능성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탈주술화 된 세계의 주술화에 가장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초 단위의 시간성을 편집증적으로 따라가도록 만드는, 일단 의심하며 어떠한 믿음도 없이 자신의 '고유한'(것으로 여겨지는) 생각을 타임라인에 게시함으로써, 그래도 나는 이런저런 조직들의 의사결정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 즉 특별하고 독창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필함으로써- 좋아요 개수와 리트윗 개수, 혹은 조회수가 척도가 되는 인정투쟁을 하나의 실천으로 합리화 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는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정견을 드러내기 위해 물리적 조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왜냐고? 블로그에 내 정견을 드러낼 수 있는 기사를 스크랩하거나, 반정부적인 콘텐츠를 리트윗하거나, 그것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그런 게시물들을 공유하면 내 고유한(?) 정견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을 테니까.'

 

허나 그것은 이론가를 양성할 수도 없고, 활동가를 양성할 수도 없는 조건이다. 모든 현상에 대한 일별을 유도하는 SNS는 원인을 사유한 이후의 행위를 유예시키는 공간을 형성한다. 모든 인간들은 상이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할 경우, 사라지는 것은 전체와 매개될 수밖에 없는 주체의 조건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현상을 본질으로부터 떼어내어 현상을 본질로서 보이도록 호도하는- 비폭력에 대한 요구, 권력을 잡길 꺼리는 아름다운 시민들을 기꺼이 존중하며 그들을 선도할 수 없는 대상으로 위치시키고, 실제로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선도될 수 없는 대상으로 정체화시키는 작금의 상황 또한 이러한 사정과 그리 무관하지는 않다.

 

문제는 SNS에 대한 비평마저 SNS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는 역설, 즉 오늘날의 SNS는 또한 어떤 종류의 정치적 기획이라도 거쳐 가야만 하는 창구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그래서 인간들의 소통을 효과적으로, 촘촘히 매개하기도 한다는, 그 이중적 지위에 있다. 한편으로 인터넷과 SNS가 열어젖힌 가상의 공간은 엄밀한 의미에서 '토대'가 아니라 '상부구조'이기에, 단순히 그것을 지양하는 것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는 SNS에 대한 거리두기와 적절한 운용이 요구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여전히 지속되는 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에토스에 대한 끈질긴 비판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할 것 같다.

 

*SNS형 주체와 비평의 자리에 관하여

 

실시간으로, 어떤 주제에 접속해서, 짧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어떤 말을 하겠는가? 가십과 인물 위주의 주제로, 시니컬하고 분노한척하는, 그러나 현실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는, 별 생각 없이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지껄이는 주체가 된다. 세계의 구조와 다양한 사건들의 인과는 몇 마디 말로 정리되지 않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 정리되어야만 하는 이들의 비판은 인물의 됨됨이 품평회로 전락하고, 고통스러운 사유는 귀찮은 것 혹은 불가능한 것이 되며, 그렇게 구조를 눈앞에 들고 와보라는 조야한 실증주의가 득세한다. 이들의 지껄임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데, 심지어 폭력을 비난 할 때조차 폭력적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헌데 비슷한 지껄임들이 모이면, 마치 그것이 하나의 거대한 공론장을 형성한 듯, 실제로는 결코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격차를 좁힐 수 없는 평행선으로 지속되는 것임에도, 어떤 착각이 발생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게 되고 서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SNS는 그 구조적 조건으로 인해 태생적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지껄이게 하는 장치이며, 그러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주체를 양산한다. 적대가 명확하여 사회적 금지가 명백한 순간에 그것은 제 역할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지만, 적대가 불투명하여 사회적 금지가 흐릿한 시기에 그것은 지껄임 속에서 신기루 같은 유사 적대를 만들고, 스스로 금지를 형성시킨다.

 

이는 부분적으로 저장된 글이라는 형식이 담지하는 물질성과 항상적인 노출 가능성으로 인해 유사 공론이 과대 표상되는 데에서 연원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SNS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영향을 미치더라도 극단적인 마녀사냥의 양상을 띤다. 어떤 사유의 위계도 허용하지 않으며,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포장된 세련된 인신공격이 정당화 되는 비-공간을 개방시킨 것은 SNS의 배면이다.

 

무한히 확장되어 보이지만 특정한 알고리즘으로 구축된 폐쇄적인 관계망 속에서의 반향효과 속에서 대화를 통한 설득이나 생각을 나누며 깊게 교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념의 증폭이 사유가 교류하는 자리를 대체한다. 어떤 조건 속에서 민주주의의 장자로서 높이 치켜세워진 그 위상과 무관하게, 다른 조건 속에서 SNS는 민주주의의 타락한 모습을 체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페이스북의 거짓뉴스 양산을 규탄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거나 외려 쟁점을 호도하는데, 이는 그러한 기만적 속성이 SNS 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비평은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가. 비평적 인식론은 일정수준에서의 소여의 텍스트로의 진입, 해당 텍스트의 개념에 대한 적당한 동기화 이전에는 취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비평'이란 의미의 가장 순수한 층위에서 훌륭히 현현하는 비평은, 텍스트의 온전한 승인과 합일을 거부한 채 그 의미망의 한 가운데에서 행해지는 판단중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텍스트 내부에서 자신의 욕망을 융기시키는 것, 소여의 텍스트를 대상화된 형식으로, 하나의 객체로서 다루기 위함이다. 담론에 참여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배제하고 이뤄질 수 없는 것으로서, 발화 행위자에 한해 말하자면, 이렇게 텍스트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취하는 과정을, 그 속에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을 우리는 비평이라 한다.

 

허나 과잉 연결된 SNS상의 인정투쟁 속에서 발본적인 비평이 요구하는 충분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새로이 갱신되는 정보에 동기화된 지각적 환경에서 주체적인 판단중지의 시점은 언제나 유예된다. 강한 밀도를 가진 글들은 대체로 읽히지 않는다. 간혹 등장하는 고밀도의 글들은 충분한 숙고 속에서 돌이켜 반성되는 것이 아니라 좋아요공유라는 축소된 과정을 통해 타 계정의 데이터 자아를 구축하는 데에 일조할 따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SNS상 거의 대부분의 텍스트들은 순수한 인정투쟁의 도구로 소비된다. 빈정거리는, 발랄한, 쉬운 글과 품성품평 위주의, 소박한 경험주의적 진술이 유통되는 텍스트의 8할을 차지하며, 주장의 깊이가 주목되기보단 당장 식별 가능한 좋아요리트윗의 개수가 대신 주장의 경중과 합리성을 측정한다(이는 주체를 상호 소외시키는 동시에 상호과잉몰입 상태로 몰고 간다). 비평의 모든 효과와 과정이 순전한 주목도로 소급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비평은 갈 곳을 잃는다. SNS는 텍스트를 구경거리로 만든다. 그에 대한 능동적인 개입마저 결국 구경거리로서 제공되며, 공고한 스펙터클에 복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