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전체로서의 자본주의를 설명하는 체계이론으로 간주하자. 모순의 복수성을 인정하는 일이 설명력의 층위를 포기하는 일로 퇴행하지 않기 위해서.
1.우리는 마르크스에 이르러 헤겔의 철학체계가 극복되었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 관념론적 변증법과 유물론적 변증법은 상이한 위상과 심급을 지니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대상이 손쓸 수 없을만큼 형해화 되었을때, 영감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다. 소비에트블록의 해체 이후 억압된 트라우마로서의 대문자 역사는 결코 소멸하지 않은채 언제든지 재귀할 틈을 노리고 있으며, 헤겔은 포스트모더니티의 억압, 부정성의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유희, 오락, 가상이 된 오늘날(최근 미학 수준에서 제안 되는 담론들을 보더라도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유미주의와 아방가르드 양자가 진자운동을 했던 미추의 변증법은 이제 '큐트'로, 그 배면에 아무런 부정성도 갖지 않는 앙증맞은 대상으로 대체되었다. 누군가의 말대로 실천적 수준에서 그가 갖는 함의로 인해 '재활용이 불가능했던' 레닌이 타임라인 상에서 얼마든지 혼성모방될 수 있는 '이미지'로서 나타날 때, 우리는 모든 위협이 제거된 채 모든 기의를 박탈당하고 철저히 기표로 환원된, 표백된 레닌과 마주한다. 이때 레닌은 '귀엽다cute'.) 좌파가 헤겔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역사, 이성, 이행의 가능성을 긍정하는데로 다시금 자신을 정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닌이 1차 세계대전 직후에 헤겔의 대논리학을 독파하고, 그것을 읽기 전까지 자신은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반성한 뒤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지젝은 이 점을 설득력있게 논증한다.). 수잔 벅모스가 옳게도 지적했듯, 유럽의 반대편에서 블랙자코뱅들이 마르세예즈를 불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지구반대편의 흑인 노예들이 프랑스혁명과 동시에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선언했다는 점은 이성적인 세계사, 보편사의 측면에서 보지 않으면 독해가 불가능한 대목이다. 실제로 헤겔은 그 구성원들이 프랑스혁명이 이성의 승리를 체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가 헤겔에게서 보는 것은 전체주의와 도구적이성의 화신일 따름이지만, 이는 결코 헤겔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일 수 없다). 마르크스가 헤겔을 상대하며 자신의 독특한 체계이론을 발전시켰다는 점도 우연이 아니다. 역사가 두번 반복됨으로써 자신을 실현한다면, 미시사, 문화사, 일상사 등 도처에 너무나 많은 역사가 편재하나 객관적인 역사는 부재하는, 역사가 기억으로 대체되어버린(서동진)- 역사가 무덤에 들어간듯한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부활을 논할 때이며, 헤겔은 어쩌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2.이러한 맥락에서 위악적으로 제안하건대, 오늘날 헤겔의 길잡이는 마르크스가 되어야하며, 마르크스의 길잡이는 헤겔이 되어야한다(이러한 입장을 가장 효과적으로 가시화 했던 이는 코르쉬와 루카치일텐데, 그 중에서도 루카치가 마르크스의 형식과 헤겔변증법 간의 친화성을 지적하며 고안해낸 '총체성'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알튀세르의 주장을 뒤집어보자면, 한편으로 <자본>은 헤겔과의 단절이 아니라 헤겔에 관한 완벽한 이해를 보여주는, 헤겔을 온전히 소화해낸 마르크스를 보여준다.
헌법 안의 진보를 논하는 좌파 실증주의자들, 담론 외부의 실재를 거부하는 여러 좌파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에게 대적하기 위해, 차이, 다양성, 개별성, 자율성이 독립적인 개념이자 가치로서 실체화 되었을때, 마르크스는 때로 헤겔에 충실하게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이미 한국에선 9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의 상륙 당시 좌파들이 상대했던 주제들이다. 그러나 여전히 포스트모더니티는 건재하기에, 우리는 당시의 태도를 반복하여 유지할 필요가 있다.
물론 헤겔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또한 마르크스의 가장 헤겔적인 개념인 '물신주의'의 한계 또한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백승욱 식의 표현을 빌자면, 요컨대 물신주의란 자본주의의 전 시퀀스에 걸쳐 현상들을 규제하는 시간대이기에, 공장 단위에서의 현장 투쟁에서 어떤 싸움은 차라리 실증주의의 어휘를 필요로 한다. 허나 그것은 언제나 전체로서의 체계인 자본주의에 관한 인식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요컨대 헤겔로 돌아간 마르크스는 당장의 가능한 개량에 천착하는 빈곤한 상상력을 가진 좌파들에게 '실증주의적 단위들은 추상적 보편으로서 명목론과 공모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논증하며, 문화의 영역을 고립된 연구의 장소로 간주함으로써 실재의 위상/층위를 구분하지 못하거나('낮은 단계'의 의식으로서의 직관 형식) 역사의 모순이라는 객관적 본질을 담론의 효과로 파악함으로써 진리의 인식가능성을 차단하는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을 향해 객관의 실재와 우위를 알려준다(이성의 간지. 아도르노는 이 헤겔적 모티프를 "객체의 우위"라는 개념으로 번안하여 마르크스가 전제했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혹은 사회의 선차성을 방어한 바 있다).
자본주의의 피해자로서 생생한 고통을 증언하도록 종용하고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담론과 실천들에 대항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로부터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마르크스 수용의 인간주의적 경향과 추상적 경향을 일소하고자 했지만, 동일한 목표로 다가가기 위해서 외려 헤겔과 마르크스를 더욱 밀접하게 연관 짓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쩌면 양측 모두 조야한 경험주의와 추상적/피상적 파악으로부터 마르크스를 구출하기 위한 대답이 될 수 있다.
3.헤겔에게 인식론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이원론적으로 구별된 것이 동일한 대상의 양 측면이라는 점을 논증하는 것(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차이의 통일)과, 단일한 대상이 실은 모순, 대립되는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논증하는 것(주객동일성;통일 내부의 차이)은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의 구별되는 계기들은 마르크스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전자는 좌파와 우파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각기 다른 형식의 답변이지만 자본주의와의 매개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헤겔적 의미에서)동일한 내용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젊은 우파로서의 일베의 출현, 혹은 파시즘이 보여줬던 목가적인 삶에 대한 향수를 전치된 저항으로 독해하는 식의 논의가 한 용례가 될 수 있다. 혹은, 마르크스가 제안한 노동의 이중성 또한 동일한 신체적 소요의 두측면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헤겔의 형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인 노동, 상품- 이는 소외와 물신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테마이다.), 후자는 계급투쟁의 객관성과 이행의 논리적 가능성을 논증하게 해준다('모순'개념을 포기한다면 자본주의에서의 항상적인 계급투쟁을 설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차단된다. 알튀세르가 헤겔의 열렬한 독자이기도 했다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하나의 대상으로부터 모순의 계기를 찾는 헤겔의 면모는 마르크스에게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과잉 생산의 명령과 가치 실현의 예측불가능성/무보증성간의 모순, 노동력 구매를 통한 이윤확보와 항상적 해고에 따른 자동화의 효과로서 이윤율의 경향적저하 간의 모순 등을 지님으로 인해 자기자신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그 타당성과 유효성은 차치하고)는 테마를 제공하며, 칸트의 이율배반에 맞서 상이한 계기들과 모순이 실은 동일한 대상의 양측면이라는 점을 역설하는 헤겔의 면모는 상품과 화폐는 자본의 주요한 두 가지 현상형태라는 마르크스의 결론에 조응한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형식이 공명하는 대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부분을 매개하고 부분을 통해 실현되는 전체의 이념을 찾기 위해서는 부분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부분에서 머물러선 안되며, 부분들을 총체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해야함을 역설한 헤겔의 논의는 완결된 체계의 모티브를 제공했다. 이는 탐구의 대상, 범주를 전체와의 관계속에서 파악할 것을 주장하는 루카치에 이르러 보다 뚜렷하게 가시화된다. 헤겔의 작업에선 기독교와 플라톤이 그러했듯 전체가 그 자체로 세계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라고 가정하거나 부분들의 내적인 관계와 무관하게 존재론적으로 선행할 것이라 가정해서도 안되며, 전체와 부분이 실은 긴밀한 유기적 관계에 있음(자본주의 속의 개별적인 사건들이 실은 전체와 결코 독립된 것이 아님을)을, 나아가 전체는 부분을 통해서만 실현된다는 점에서 곧 부분이고, 부분은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내용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곧 전체라는 사실- 즉 부분과 전체는 일치한다는 사실(자본주의는 상품, 화폐, 노동, 시장, 개인을 통해 작동하는 사회적 관계이다)을 파악하는데까지 나아가야한다.
a.전체는 부분의 총체/총합이 아니라는 헤겔의 주장은 마르크스에 이르러 어떤 내용을 갖는가? 마르크스는 헤겔 체계의 이러한 측면을 다음과 같은 결론에서 반복한다:
' '상품+화폐+시장...=자본주의'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폐를 없애고 노동증표를 통해 자본주의를 극복하자는 프루동식 대안, 노동자 투쟁 이외의 모든 실천은 부차적이고 부질없다는 믿음, 시장에 윤리적으로 개입하는 사회적 기업들, 의회 투쟁만으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유의미한 개입을 할 수 있다는 숙의주의 등등은 생산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사회적 관계와의 고찰 속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오히려 추상적인 것, 국소적인 것이 된다. 구체성은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사실의 나열을 통해선 결코 얻을 수 없다. 오히려 구체성은 특수한 것이 보편적인 것과 관계하여 개별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수준에서 획득된다.'
헤겔을 통해 마르크스를 읽는다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지만, 마르크스 스스로도 당대의 여러 추상적 비판과 분투했듯, 자본주의에서의 본질이란 부분의 내부에서 부분과 일치하며 그것을 초과하는 원리로 나타난다는 점을 이해해야한다. 예컨대 알튀세르의 의도와 무관하게 '구조적 인과성'에서 말하는 바의 구조화된 전체가 의미하는 바는 사실 정확히 이런 함의가 짙다. 자본은 마치 헤겔의 '이성'이 자아와 타자, 주체와 객체, 개인-가족-시민사회-국가 속에서 운동하듯 매 순간 자본주의 생산양식 속에서의 사회적 실천을 통해 운동하기에, 전체의 이념은 결코 부분들로 환원될 수 없다. 마르크스가 옳게도 1. 사회적 관계의 앙상블로서 인간을 파악하고 2. 한 명의 구체적인 자본가를 자본의 인격화로서 파악할 때, 이는 헤겔이 1. 상호주관적인 인륜성의 영역에 주목하며 이성이 구체적으로 체현되어 나타나는 일상적 실천의 영역을 강조하고 2. 이성 속에 있는 개별 주체들이 어떤 일탈을 시도하더라도 그는 이미 이성의 실행자이자 대리인으로서 그렇게 한다고 주장한 바와 정확히 조응한다.
따라서 헤겔이 이성의 선차성을 무시한 채 부분을 고립적으로 실체화 하여 논하는 시도들에 맞섰듯, '자본의 선차성'을 논증한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자본가의 도덕적 책임을 추궁하는 논의들이 자본주의 비판이 아니라고 간주했으리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요컨대 서동진식 표현을 빌리자면 갑질 비판에서 사라지는 것은 자본주의 비판이다. 외려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는 사회적 관계, '본질이 현상하는 방식'에 개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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