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27 “탈정치의 정치화 속에서 주체화된 이들과 이념을 나눌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2022년 6월 1일 맑스코뮤날레 콜로키움 "한국 맑스주의는 어디에서 왔는가: 맑스코뮤날레의 계보와 유산 그리고 미래" 토론을 위해 작성한 글) “탈정치의 정치화 속에서 주체화된 이들과 이념을 나눌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강산 무엇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이냐는 질문을 차치하고,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흔적 일반을 더듬어보자면- 한국 마르크스주의의 기원 자체는 1920년대 일제강점기 하 러시아, 일본 등 해외 유학생들에서 연원했으며, 이것이 조선공산당- 북조선노동당/ 남조선노동당 - 조선노동당 등으로 이어져온 시원이 된다. 한국전쟁에 이은 분단 이후의 극도의 반공주의 하에서 그와 같이 세력화된 좌파의 명맥은 사실상 전멸에 가깝게 끊겼으나, 70-80년대의 학생운동과 더불어 서서히 다시 모습.. 2022. 6. 7. 김세은 작가론: 제 1자연의 부재를 감내하기, 제 2자연에 머무르기 (에 선게재된 원고입니다.) 정강산 무언가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그려지는 대상이 주목되고 있다는 것이고, 무언가 주목된다는 것은 그것이 알려져야 할 것, 말해져야 할 것으로 성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 지점에서 ‘그려진 것’은 지표로서의 역사와 필연적으로 관계한다. 달리말해, 그린다는 것은 언제나 실재를 간취하는 실천이었고, 특정한 시대를 표지해내는 흔적이었으며, 해석을 요구하는 알레고리적 행위였다. 무언가를 가시적으로 벼려내는 작업은 그와 같은 실천을 가능케 한 실재의 지평에서 적절히 맥락화 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지진계, 혹은 세계의 무의식적 자동기술장치로서의 회화(예술)의 존재론이 그 근거를 얻는 지평은 바로 이곳이다. 그렇다면 김세은의 작업은 오늘날의 세계를 어떻게 보존하고 있을까?.. 2020. 12. 20. 시간 혹은 회화: 종합(불)가능한 양극에 대하여(<뽈뽈뽈>2020.8.14-9.10, 아트스페이스휴, 전시 서문) 은 회화와 시간-운동의 관계설정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주제를 동시대의 지형 내에서 고민해보는 스케치적인 전시다. 이러한 전시의 기본 방향은 대략적으로나마 회화사를 훑어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회화의 역사에서 시간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 사례는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미래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래파 작가들은 도시와 기계, 산업주의적 문명의 역동성에 열광하며 자연스레 움직이는 대상들에 주목했으며, 대상의 잔상을 겹쳐 그리는 방식으로 운동성(시간성)을 표현하는 법을 탐구했다. 이 시기에 제작된 뒤샹의 (1912)는 미래파의 영향 하에서 이뤄졌던 회화의 확장시도를 잘 체현하고 있다. 한편 시간성을 말소하여 평면 자체로 환원된 공간에 대한 탐구야말로 추상표현주의의 요체라 본 그린버그 식의 독해와는 반대로,.. 2020. 10. 8. 행복의 뒷맛은 쓰디쓰다(<행복의 뒷맛> 3.13-4.9 아트스페이스 휴) 행복의 뒷맛은 쓰디쓰다( 3.13-4.9 아트스페이스 휴) 퍼블릭아트, Vol.164. (2020년 5월) p.119 20세기 중후반 이후로 다변화된 예술생산의 체제 내에서 회화 무용론이 제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미지의 과포화상태가 두드러지는 동시대적 조건에서 유독 ‘왜 하필 그림이냐’는 질문이 곧잘 제기되는 것은 더욱 이해함직하다. 요컨대 그림은 어느새 힘을 잃어버렸을까, 이 질문이 부당하다면, 그림은 어떻게 세계를 성공적으로(혹은 불충분하게) 가리키고 있을까. 본 전시 은 이와 같은 질문을 배면에 품은 채 우리 시대의 회화가 처한 시좌를 가늠하려 한다. 사박, 송승은, 정주원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동시대의 실재의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사박은 ‘무기력한’ 존재들을 그리며, 존재를.. 2020. 6. 9. 이전 1 2 3 4 5 ···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