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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50

마르크스주의 자체의 어떤 긴장 2017년 3월 24일 사회학적 범주와 계층의 맥락에서(높은 추상수준에서, 이데올로기의 외부에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보다 낮은 층위의 위상적 단서로서 '사회학적 카테고리'를 적시한다) 학자와 이데올로그의 차이는 진영논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특정 사안, 현상, 이론이 가진 문제의식을 쉽사리 기각하지 않는 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마르크스주의가 이데올로기로 관철되었던 지난 세기의 1,2,3분기에 지배적일 수 있었던, 혹은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그가 여전히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 '부르주아/ 프티부르주아/기회주의자/대중추수주의/모험주의'등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된다.알다시피 20세기의 마르크스주의는 대체로 일상적 실천들, 경험세계의 실천들과 합일됨으로써 이런 식의 대중적이고.. 2017. 4. 1.
알튀세르와 제임슨 2017년 3월 26일.아카데믹 마르크스주의에서 (그나마)각광받는 알튀세르의 위상을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구절인데, 나로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과연 중층결정적 사고라 할 법한, 인식론적 다원주의가 부과된 조건으로서 제시되고 있는 오늘날 알튀세르의 중층결정을 신화할 필요가 있을까? 알다시피 모든 부문들이 경제로부터의 자율성을 주장하는 시기가 바로 포스트모던의 토양일진대, 이 속에서 각 이데올로기 부문들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아래에 인용된 구절에서 60년대 말을 기점으로 알튀세르의 문제의식이 소진되었음을 지적하는 대목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간다.당연히 모순은 중층적이고, 다수성을 띤다.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전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2017. 4. 1.